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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낯선 이름, 남겨진 시간 (3)

나는 결국 답장을 썼다.[ 그럼 지금 말해야지. ]보내고 나니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이번엔 태준의 답이 오래 걸렸다.그 긴 침묵 속에서나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했다.차 안에서 앞만 보고 있겠지.휴대폰을 손에 쥐고마른 입술을 한 번 훑겠지.말해야 할지,말하지 말아야 할지 계산하겠지.강태준은 늘 그랬다.늦게 말하고,늦게 후회하고,늦게 다가왔다.그리고 나는 그 늦음에늘 다쳤다.휴대폰이 울렸다.[ 강태준 ]* 내일 만나서 말할게.나는 화면을 보며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일.또 내일.사람은 왜 중요한 말을자꾸 내일로 미룰까.오늘 상처받는 건오늘인데.나는 답장하지 않았다.그때 다시 메시지가 왔다.[ 강태준 ]* 도망가는 거 아니야.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그가 나보다 먼저그 말을 꺼냈다는 게 이상했다.도망.그 단어는 우리 둘 사이에너무 오래 박혀 있었다.그는 도망쳤고,나는 닫았고,우리는 각자 자기 방식으로그날을 끝냈다.나는 아주 천천히 답장을 썼다.[ 나도 이제 도망 안 가. ]보내고 나서야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방 안 공기가 차가웠다.그런데 손끝은 뜨거웠다.태준의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이번엔 나도 기다렸다.피하지 않고.화면을 바라보면서.몇 분 뒤,메시지가 왔다.[ 강태준 ]* 그 말 믿어도 돼?나는 눈을 감았다.그 말이 너무 조심스러워서더 아팠다.나는 답장하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믿어도 되냐고 묻는 사람에게나는 아직 믿으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그래도 하나는 알았다.나는 더 이상그가 묻는 걸 피하고만 싶지는 않았다.⸻다음 날.회사에 도착하자마자공기가 이상했다.사람들이 바쁜 척하면서어딘가를 보고 있었다.회의실 쪽.나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그쪽으로 시선이 갔다.유리벽 너머로누군가 서 있었다.여자였다.긴 머리.차분한 베이지색 코트.손에는 얇은 파일을 들고 있었다.처음 보는 얼굴인데,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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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끝나지 않은, 말하지 못한 이름 (1)

“태준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천천히 들렸다. 태준이. 그 짧은 호칭 하나가 내 귀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강태준도 아니고, 강 디렉터도 아니고, 대표님도 아니고. 태준이. 나는 그 이름이 그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게 싫었다. 더 싫은 건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만 아니었다. 나만 이 회의실 문 앞에서 잠깐 숨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팀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 두 분 인사하셨죠? 이번 프로젝트 관련해서 외부 자문으로 잠깐 들어오셨어요. 윤서린 실장님.” 실장님. 나는 그제야 그녀가 들고 있던 파일을 봤다. 깔끔하게 정리된 제안서. 얇은 손가락. 군더더기 없는 베이지색 코트. 마치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 조용하고 단정했다. 나는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 “한서윤입니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해서 조금 놀랐다. 사람은 이런 순간에도 사회생활을 한다. 속으로는 바닥까지 내려앉으면서도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하고, 이름을 말한다. 서린은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마케팅 쪽 맡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네.” “자료 봤어요. 방향 좋던데요.” 칭찬이었다. 그런데 나는 고맙다는 말이 늦게 나왔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이 예뻤다. 너무 예뻐서 더 싫었다. 못되게 굴 구석이 없었다. 사람이 차라리 뻔뻔하거나, 거칠거나, 불편한 티를 내면 편했을 텐데. 서린은 그렇지 않았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러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웃고 있었다. 그 거리감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강태준이 가끔 쓰는 거리였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서 사람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거리. 나는 손을 빼며 물었다. “제 얘기를… 들으셨어요?” 묻고 나서 후회했다. 너무 티 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린은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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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끝나지 않은, 말하지 못한 이름 (2)

회의가 끝났을 때 손바닥이 축축했다. 나는 노트북을 닫고 자료를 정리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린은 팀장님과 짧게 인사를 나눴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그녀가 나를 불렀다. “한서윤 씨.” 나는 멈췄다. 뒤돌아보지 말걸. 이미 돌아본 뒤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린은 파일을 품에 안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잠깐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말했다. “네.” 회의실 안에 둘만 남았다. 유리벽 밖으로는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누군가 보면 그냥 업무 대화처럼 보일 것이다. 좋았다. 차라리 그렇게 보였으면 했다. 서린은 먼저 웃지 않았다. 방금 전보다 표정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불편하게 했으면 미안해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닙니다.” 또 그 거짓말.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서린은 잠깐 숨을 고르듯 시선을 내렸다. “어제 전화했는데 태준이가 안 받았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봤다는 걸. 아니, 태준이 말했을까. 서윤이 봤다. 서윤이 물었다. 서윤이 오해한다. 그런 식으로? 속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내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웠다. 나도 놀랐다. 서린은 놀라지 않았다. 그게 더 싫었다. “오해할까 봐요.” 나는 웃었다. 아주 작게. “제가 뭘 오해했는데요.” “태준이랑 저요.”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서린은 피하지 않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불편한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피할 곳이 없게 만들었다. “오해할 만한 사이예요?” 내가 물었다. 나답지 않은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나다운 말이었다. 속으로만 썩이던 걸 결국 이런 식으로 뱉어버리는. 서린은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 때문에 숨이 막혔다. 대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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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끝나지 않은, 말하지 못한 이름 (3)

그때 또 다른 알림이 떴다. 이번엔 휴대폰이었다. [강태준] * 점심에 시간 돼? 가슴이 또 멍청하게 반응했다. 어제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 오늘 서린을 보고 그렇게 흔들렸으면서. 그 사람 이름만 떠도 아직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답장을 썼다. [안 돼.] 보내고 나니 조금 숨이 쉬어졌다. 처음으로 내가 늦지 않게 밀어낸 것 같아서. 곧 답이 왔다. [강태준] * 저녁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참 강태준답다. 한 번 거절했다고 물러서지 않는다. 그게 예전엔 설렜고, 지금은 가끔 무서웠고, 오늘은 화가 났다. 나는 답장했다. [나 오늘 너랑 말할 상태 아니야.] 읽음 표시가 떴다. 답은 오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 화면을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몇 초 뒤 다시 울렸다. [강태준] * 그래도 만나. 나는 눈을 감았다. 또. 또 이렇게. 내가 싫다고 말해도 그는 늘 자기 방식으로 다가왔다. 그게 좋았던 적도 있었다. 내가 말하지 못한 마음까지 그가 억지로 끌어내 주는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냥 내가 숨을 곳을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 [싫어.] 이번엔 정말 짧았다. 보내고 나서 손끝이 떨렸다. 거절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그에게만 그랬다. 강태준에게만. 곧 답장이 왔다. [강태준] * 서윤아. 이름 부르지 마.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부르면 또 흔들리니까. 나는 답하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 하지 않았다. ⸻ 점심 시간이 되자 나는 결국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우진은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그는 내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괜히 더 정중하게 굴었으면 내가 더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마셔도 됩니다.” 그가 말했다. “식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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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끝나지 않은, 말하지 못한 이름 (4)

건물 옆 골목은 바람이 찼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있었다.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멈췄다. 태준은 내 앞에 섰다. 가깝지 않았다. 멀지도 않았다. 또 그 거리. 나는 그 거리를 먼저 깨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서린이 누구야.” 이번엔 메시지가 아니었다. 도망칠 화면도 없고, 꺼버릴 휴대폰도 없었다. 내 목소리와 그의 얼굴만 있었다.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또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 마.” “…” “그러면 나 진짜 간다.” 그제야 태준이 입을 열었다. “윤서린.” 그가 이름을 불렀다. 성이 붙은 이름은 어제보다 조금 덜 아팠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가 무너졌을 때 옆에 있던 사람이야.” 말이 끝난 순간 속이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너졌을 때. 그 말이 제일 먼저 걸렸다. 나는 태준이 무너졌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강태준은 늘 나보다 덜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더 차갑고, 더 멀쩡하고, 더 빨리 정리한 사람처럼. 그런데 그도 무너졌다고 한다. 내가 없는 시간에.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그리고 그 옆에 서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아주 천천히 물었다. “어떤 식으로.” 태준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는 대답을 고르는 사람처럼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기다렸다. 도망가는 침묵인지, 정말 말하려고 견디는 침묵인지 구분하고 싶었다. 태준은 마른 입술을 한 번 눌렀다. “3년 전.” 그가 말했다. “너랑 끝나고 나서, 나 한동안 제대로 못 살았어.” 숨이 멎었다.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 나는 그가 아무렇지 않았기를 바란 적도 있고, 아팠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못됐다. 하지만 진짜였다. 나만 아픈 게 아니었다는 확인이 이렇게 늦게 오는 게 원망스러웠다. 태준은 계속 말했다. “일도 망쳤고, 사람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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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끝나지 않은, 말하지 못한 이름 (5)

나는 웃었다. 눈물이 나지 않게 웃었다. “그럼 왜 나한테는 못 잊었다고 안 했어.” 태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잠깐. “너는 나를 잊은 줄 알았으니까.” 그 말에 내 안에서 뭔가 툭 끊겼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가 먼저 놓고 갔잖아.” 태준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오래 참았던 말이 목 안쪽에서 밀려 올라왔다. “나는 네가 나 버린 줄 알았어.” “…” “그래서 살아야 하니까 잊은 척한 거야.”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이건 서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이 말을 하고 싶었다. 3년 동안. 아니, 다시 만난 첫날부터. 너는 내가 널 잊은 줄 알았겠지만, 나는 그냥 버텼다고. 잊은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고. 태준의 눈이 붉어졌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오려다 다시 멈췄다. “미안해.” 그 말이 나왔다. 드디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 하나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너무 늦은 사과는 상처를 지우는 게 아니라 상처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걸 확인시킨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 서린 씨 싫어하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사람 잘못 없는 거 알아.” “…” “근데 싫어져.” 말끝이 떨렸다. “네가 모르는 시간을 그 사람은 알고 있다는 게 싫어.”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없던 너를 그 사람은 봤다는 게 싫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게 너무 싫어.”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람 소리만 났다. 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그 시간에 네가 없었던 건.” “…” “내가 제일 싫어.” 나는 숨을 멈췄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린이 뭘 알든.” “…” “내가 다시 살고 싶어진 건 너 때문이야.”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다정해서가 아니라 너무 무거워서. 누군가의 삶에 그런 식으로 묶이는 건 사랑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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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밀어낸 거리, 기다리는 사람 (1)

기다릴게.그 한 줄은생각보다 오래 남았다.짧은 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하루 종일 내 안에서 자리를 바꿔 앉았다.회의 자료 위에 있다가,커피잔 안에 있다가,퇴근길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있다가,결국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는 순간까지따라 들어왔다.기다릴게.강태준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그 사람은 늘기다리는 쪽보다기다리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대답을 늦게 했고,내가 밀어내면밀어낸 손끝까지 쫓아와 붙잡았고,내가 도망치면도망칠 길목에 먼저 서 있었다.그런 사람이처음으로 기다리겠다고 했다.그래서 더 못 믿겠다.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특히 강태준은자기가 아픈 쪽으로는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현관 불을 켜지 않은 채한참 서 있었다.집 안은 조용했다.이제 이 어둠도 낯설지 않았다.처음엔 불을 켜지 않는 게내 기분을 들키기 싫어서였는데,요즘은 그냥어두운 쪽이 더 솔직한 것 같았다.밝은 곳에서는괜찮은 척을 해야 한다.어두운 곳에서는조금 망가져도 아무도 모른다.나는 가방을 내려놓고소파에 앉았다.휴대폰은 꺼내지 않았다.가방 안쪽에서계속 신경 쓰이게 무게를 만들고 있었지만모른 척했다.읽지 않아도 아는 문장이 있었다.기다릴게.그 말은 이상하게다정한데 불편했다.내가 정말 기다리게 해도 되는 사람인지,그가 정말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인지,아직 모르겠어서.나는 한참 뒤에야 가방을 열었다.휴대폰 화면엔 새 메시지가 없었다.조금 안도했고,조금 서운했다.정말 우습다.기다리라고 해놓고정말 기다리면 또 서운하다.나는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몸이 먼저 굳었다.한 번.짧게.나는 숨을 멈춘 채 현관 쪽을 봤다.또 울리지는 않았다.강태준일까.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그러면 화를 내야 하나.문을 열지 말아야 하나.아니면 또 얼굴을 보고 흔들리게 될까.나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걸어갔다.인터폰 화면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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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밀어낸 거리, 기다리는 사람 (2)

다음 날 아침,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우연히라도 태준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혹시 건물 앞에 있을까 봐로비를 지나갈 때도 괜히 빠르게 걸었다.없었다.그게 또 이상했다.정말 기다리는 건가.나는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기다리라고 한 사람은 나였다.그런데 그가 기다리면나는 또 그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있었다.출근길 지하철은 붐볐다.사람들 사이에 끼어손잡이를 잡고 서 있으니어제의 일들이 조금 멀어지는 것 같았다.아니,멀어지는 척했다.서린의 얼굴.태준의 목소리.내가 없는 시간에 네가 없었던 건,내가 제일 싫어.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나는 고개를 숙이고휴대폰을 봤다.새 메시지는 없었다.그때 메신저가 울렸다.[정우진]출근하셨습니까.나는 잠깐 웃었다.정우진의 메시지는늘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문장도,타이밍도,감정도.마치 조용히 노크하고허락받은 만큼만 들어오는 사람 같았다.[가는 중이에요.]곧 답이 왔다.[정우진]오늘 오전 회의 자료는 제가 먼저 출력해두겠습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고맙다고 하면그는 또 별일 아니라고 할 것이다.별일 아닌 것처럼 해주는 사람들이제일 무섭다.그게 진짜 별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내가 기대게 될까 봐.나는 짧게 보냈다.[고마워요.]이번엔 답이 조금 늦게 왔다.[정우진]점심은 거르지 마세요.나는 그 문장을 보다가어젯밤 식탁 위의 죽을 떠올렸다.먹고 자.다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하나는 문 앞에 두고 가고,하나는 메시지로 확인했다.둘 다 나를 걱정했다.그런데 한쪽은 나를 흔들고,한쪽은 나를 가라앉혔다.그 차이가이상하게 잔인했다.⸻회사에 도착하자회의실 앞이 다시 분주했다.오늘도 서린이 올까.나는 자연스럽게 그쪽을 봤다.없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팀장님이 나를 불렀다.“한서윤 씨, 어제 윤 실장님이 두고 간 수정 코멘트 공유받았죠?”“아, 네. 확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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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밀어낸 거리, 기다리는 사람 (3)

세 시가 가까워질수록몸이 먼저 긴장했다.나는 회의 자료를 챙기고회의실로 향했다.유리문 너머로태준이 보였다.검은 셔츠.접힌 소매.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옆얼굴이 조금 말라 보였다.그걸 보자마자나는 또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밥은 먹었을까.잠은 잤을까.어젯밤 문 앞에 죽을 놓고 간 뒤어디로 갔을까.아니.신경 쓰지 말자.나는 숨을 가다듬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태준이 통화를 끊었다.우리 눈이 마주쳤다.아주 짧게.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을 팀장님이 깨뜨렸다.“자, 다 오셨죠? 시작할게요.”나는 태준의 맞은편에 앉았다.일부러 그랬다.옆자리는 너무 가까웠고,멀리 앉기엔 티가 났다.맞은편.서로를 봐야 하지만손은 닿지 않는 거리.지금 우리에게 딱 맞는 자리였다.회의는 예상보다 차분하게 흘러갔다.태준은 업무 얘기만 했다.내가 말할 때 끼어들지 않았고,눈을 오래 두지도 않았고,필요한 부분에서만 짧게 대답했다.“그 방향 괜찮습니다.”“동선은 그쪽이 맞아요.”“브랜드 문구는 한서윤 씨 안으로 가죠.”한서윤 씨.그 호칭에속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어제 골목에서는 서윤아였는데,회의실에서는 한서윤 씨.맞는 말이었다.맞는 호칭이었다.그런데 왜 조금 아픈지 모르겠다.나는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공간 내부 카피는 길게 가져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방문자가 읽는 문장보다, 지나가다 걸리는 문장이 필요해요.”태준이 나를 봤다.“예를 들면요.”나는 잠깐 멈췄다.자료에 적힌 문장들이 보였다.머물다.남다.다시 돌아오다.전부 이상하게 우리 같았다.나는 펜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예를 들면.”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떠난 뒤에야 선명해지는 것들.”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좋네요. 감정도 있고.”태준은 말이 없었다.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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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밀어낸 거리, 기다리는 사람 (4)

퇴근 시간, 태준은 정말 나타나지 않았다. 로비에도 없었고, 회사 앞에도 없었고, 건물 맞은편 도로에도 없었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사실은 계속 주변을 봤다. 없었다. 정말 없었다. 나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휴대폰을 꺼냈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기다릴게. 그 말 이후로 그는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 마음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를 밀어냈다. 그런데 그가 밀려난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면 왜 내가 더 외로운 걸까. 버스가 왔다. 나는 타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버스가 떠났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한 대를 보냈다. 아무 이유 없이. 아니, 이유는 있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면 어젯밤 그 죽이 생각날 것이고, 문 앞에 놓인 봉투가 생각날 것이고, 그가 누르다 만 초인종 소리가 다시 들릴 것이다. 나는 걷기로 했다. 천천히. 회사에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길은 사람이 적었다. 밤공기가 젖어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오늘도. 나는 하늘을 보다가 휴대폰 진동을 느꼈다. [강태준] * 집에 바로 안 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봤다. 없었다. 그가 근처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답장을 썼다. [감시해?]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이 왔다. [강태준] * 아니. 잠깐 뒤에 또 왔다. [강태준] * 네 퇴근길 버스 시간 알아. 나는 한숨이 나왔다. 이걸 다정하다고 해야 할까, 무섭다고 해야 할까. 둘 다라서 더 문제였다. 나는 답장했다. [그런 거 알지 마.] 이번엔 답이 늦었다. 몇 초 뒤, 짧은 문장이 도착했다. [강태준] * 노력할게. 나는 그 문장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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