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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가까워진 거리, 참아낸 마음 (2)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밥.나는 화면을 보다가피식 웃었다.이제는 문장도 아니다.그냥 밥.점심 먹었어도 아니고,밥 먹어도 아니고.밥.정말 성의 없는 말인데묘하게 강태준다웠다.나는 답장을 썼다.[아직.]읽음 표시는 바로 떴다.[강태준]* 먹어.나는 우산 쪽을 봤다.그리고 이상하게먼저 말을 꺼냈다.[우산 돌려줘야 하는데.]보내고 나서조금 후회했다.이건 거의 만나자는 말이었다.아닌 척해도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는 말.태준의 답은 금방 왔다.[강태준]* 오늘 안 돌려줘도 돼.나는 눈을 깜빡였다.예상과 달랐다.예전의 그라면 당연히어디야.내가 갈게.그렇게 짧게 말하고,이미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나는 답장을 썼다.[계속 가지고 있기도 이상하잖아.][강태준]* 안 이상해.나는 그 문장을 한참 봤다.뭐가 안 이상하다는 걸까.내가 그의 우산을 가지고 있는 게.아니면그의 것이 아직 내 집에 남아 있었다는 게.답을 못 하고 있는데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네가 불편하면 받을게.네가 불편하면.그 말이 또 나를 멈추게 했다.요즘 그는 자꾸나를 앞에 둔다.내가 싫으면.내가 불편하면.내가 원하지 않으면.예전에는자기 마음이 늘 먼저였는데.보고 싶으면 왔고,걱정되면 데려다주려 했고,붙잡고 싶으면 잡았다.그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는그게 때로는 숨 막히는 일이었다는 걸그도 조금씩 배우는 중이었다.나는 천천히 답장했다.[점심 먹고 1층에서 잠깐 봐.]보내자마자심장이 불편하게 뛰었다.그냥 우산 하나 돌려주는 일인데.정말 우산 하나인데.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 알았어.조금 뒤에 하나 더 왔다.[강태준]* 밥 먼저 먹고 와.나는 결국 웃었다.끝까지 밥.그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밥 먹으라는 말만 배운 사람 같았다.⸻점심은 혼자 먹었다.편의점에서 샌드위치랑 커피를 샀다.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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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가까워진 거리, 참아낸 마음 (3)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우산은 사라졌다.책상 옆에 있던 검은 그림자도 사라졌다.그런데 이상하게그 자리가 더 선명했다.빈자리가 이렇게 눈에 띄는 거였나.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수정안을 정리했다.떠난 뒤에도 남는 것들.어제 현장에서 내가 적어둔 문장.태준은 그 문장으로 가자고 했다.나는 그 문장을 자료 상단에 넣었다가한참을 바라봤다.떠난 뒤에도 남는 것들.그러면돌아온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떠났는데도 남았고,남았는데도 다시 돌아온 사람은.나는 커서를 깜빡이는 화면을 보다가문장을 조금 고쳤다.[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들]조금 더 느렸다.조금 더 오래 아팠다.그때 정우진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수정안 정리 끝나셨습니까?”“거의요.”그는 내 화면을 보았다.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들.우진은 문장을 잠깐 읽더니내게 시선을 돌렸다.“좋네요.”나는 조금 웃었다.“다들 오늘 그 말만 하네요.”“누가 또 했습니까?”묻고 나서우진은 바로 알아차린 얼굴을 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도 더 묻지 않았다.잠깐의 침묵 뒤,우진이 말했다.“점심은 드셨습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샌드위치 먹었어요.”“그건 식사라기보다는 간식에 가깝습니다.”나는 멍하니 그를 봤다.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우진이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왜 그러십니까?”“아니요.”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방금 똑같은 말 들었어요.”우진은 잠깐 멈췄다가아주 희미하게 웃었다.“그럼 그분 말이 맞는 겁니다.”그분.이상하게 그 호칭이 조금 웃겼다.우진은 내 책상 옆을 봤다.“우산은 돌려주셨네요.”나는 손을 멈췄다.그는 아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내 책상 옆에 있던 우산이 사라진 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후련하십니까?”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후련한가.아니.후련하지 않았다.조금 허전했다.조금 가벼웠고,조금 아쉬웠고,조금 무서웠다.“잘 모르겠어요.”솔직히 말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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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가까워진 거리, 참아낸 마음 (4)

회사 근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혼자 먹기 괜찮은 곳이었다.나는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따뜻한 국물 메뉴를 시켰다.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태준에게 보고하지 않으려고.먹고 있어.제대로 먹어.잘했어.그런 말들이 오갈까 봐.근데 참 이상하다.받기 싫은 말이라면서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음식이 나왔다.김이 올라왔다.나는 숟가락을 들었다.한 입 먹자속이 조금 풀렸다.아, 배고팠구나.그제야 알았다.하루 종일 긴장하느라몸이 배고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나는 천천히 밥을 먹었다.절반쯤 먹었을 때,휴대폰이 울렸다.태준일 줄 알았다.아니었다.[정우진]저녁은 드셨습니까.나는 화면을 보고 멈췄다.오늘은 왜 다들 밥을 묻는 걸까.나는 답장했다.[먹고 있어요.]조금 뒤 답이 왔다.[정우진]다행입니다.짧은 문장.그리고 끝.그는 더 묻지 않았다.뭐 먹는지,어디인지,누구랑 있는지.정우진의 다정함은늘 거기서 멈췄다.그 멈춤 때문에나는 자꾸 편해졌다.그게 문제였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다시 밥을 먹었다.식당 유리창 너머로거리가 어두워지고 있었다.퇴근한 사람들이 지나갔다.누군가는 통화를 하고,누군가는 우산을 들고,누군가는 혼자 걸었다.나는 식사를 거의 다 마쳤을 때야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밥 먹었어.]보내고 나서심장이 조금 뛰었다.왜 보냈지.그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아니,물어봤다.먹으라고 했으니까.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답은 금방 왔다.[강태준]* 뭐 먹었어.나는 음식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그만뒀다.그건 너무 가까운 사이 같았다.대신 짧게 보냈다.[국밥.][강태준]* 잘했어.나는 화면을 보며작게 웃었다.오늘도 잘했어.이 말이 이렇게 쉽게 나를 풀어놓으면 안 되는데.태준의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혼자야?나는 손을 멈췄다.이 질문은 조금 달랐다.밥 먹었냐와는 달랐다.그 안쪽에아직 지워지지 않은 질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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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가까워진 거리, 참아낸 마음 (5)

태준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오늘 우산 돌려줘서 아쉬웠어.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나는 답장을 못 했다.그가 곧바로 하나 더 보냈다.[강태준]* 근데 네가 돌려주고 싶어 해서 받았어.나는 눈을 감았다.그 말이 자꾸 이상하게 아프다.너무 당연한 말인데.내가 원해서 받았다는 말.내가 불편하지 않게 했다는 말.예전엔 그 당연한 걸 못 해서우리는 여기까지 왔다.나는 오래 망설이다가 답장했다.[잘했어.]보내고 나서가슴이 너무 뛰었다.이 말을 또 해버렸다.그에게.태준의 답은 한참 오지 않았다.나는 화면을 내려놓으려다 말았다.몇 분 뒤,메시지가 왔다.[강태준]* 그 말 좋다.나는 입술을 눌렀다.곧 다음 문장이 왔다.[강태준]* 네가 해주는 거.그 말을 보는 순간방 안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좋다고 하면 안 될 것 같고,싫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 같고,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엔 이미 너무 흔들렸다.결국 나는 짧게 보냈다.[자주 못 해줘.]태준의 답은 금방 왔다.[강태준]* 가끔이어도 돼.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가끔이어도 돼.강태준이가끔이어도 된다고 말한다.매일이어야 했던 사람.늘 확인해야 했던 사람.붙잡아야 안심하던 사람이.가끔이어도 된다고 한다.나는 그게 너무 낯설어서조금 무서웠다.그리고 조금 기뻤다.기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휴대폰을 엎어두었다.⸻씻고 나왔을 때,태준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편의점 도시락 사진이었다.나는 보자마자 웃음이 나왔다.[강태준]* 먹는다.정말 성의 없는 사진이었다.각도도 이상하고,젓가락도 대충 걸쳐져 있고,편의점 테이블 조명이 너무 하얬다.그런데 그 사진이이상하게 좋았다.강태준이 나에게자기 밥 먹는 사진을 보냈다.예전 같으면 안 했을 일.그는 늘 자기가 괜찮은 척했다.아프지 않은 척.힘들지 않은 척.배고프지 않은 척.그런 사람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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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가까워진 거리, 참아낸 마음 (6)

잠들기 전,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오늘 저녁 같이 먹자는 말 참은 거.나는 화면을 봤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잘한 거 맞지.나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강태준은 지금자기 마음을 확인받고 있었다.어린아이처럼.아니,처음으로 사랑을 다시 배우는 사람처럼.내가 싫다고 하면 멈추는 것.내가 불편하면 물러나는 것.내가 웃어도 쉽게 가지려 하지 않는 것.그게 잘한 일인지내게 묻고 있었다.나는 목이 조금 메었다.답장을 썼다.[응.]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한 줄 더 보냈다.[오늘은 진짜 잘했어.]읽음 표시가 떴다.한참 답이 없었다.그 침묵이이상하게 뜨거웠다.몇 분 뒤,그에게서 답이 왔다.[강태준]* 나 지금 진짜 보고 싶어.심장이 크게 뛰었다.나는 화면을 손에 쥐고 굳었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근데 오늘은 안 갈게.나는 눈을 감았다.또.가고 싶어.근데 안 갈게.이 말은 어제보다 더 위험했다.어제는 그가 참는 게 놀라웠고,오늘은 그가 참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그게 더 무서웠다.나는 한참 뒤에 답했다.[응.]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한 줄을 더 보냈다.[오늘은 그러는 게 좋아.]읽음.긴 침묵.그리고 답장.[강태준]* 알았어.나는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오늘도.그리고 이상하게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오지 않아서 멀어진 게 아니라,오지 않음으로써조금 가까워지는 밤도 있다는 걸나는 처음 알았다.⸻잠이 오지 않았다.나는 침대에 누워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을 뜨고 있었다.현관 옆은 비어 있었다.우산이 있던 자리가검게 비어 있었다.그 빈자리를 보며나는 생각했다.우산을 돌려줬는데그 사람이 조금 더 남았다.이상한 일이다.물건은 사라졌는데온도는 남았다.기다림은 남았고,참아낸 마음도 남았다.나는 그 모든 게 아직 무서웠다.하지만 오늘은그 무서움 안에아주 작은 안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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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흔들린 시선, 남겨진 온도 (1)

다음 날 아침,우산이 없어진 현관은 생각보다 허전했다.정확히는비어 있었다.분명 어제까지만 해도거기 검은 우산 하나가 기대 서 있었을 뿐인데,그게 사라졌다고현관이 이렇게 넓어 보일 일인가 싶었다.나는 신발을 신다가괜히 그 자리를 한 번 더 봤다.아무것도 없었다.그게 맞았다.돌려줬으니까.내가 돌려줬고,그는 받아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돌려준 건 우산인데내 쪽에 뭔가가 남았다.물건은 사라졌고,온도만 남았다.제일 골치 아픈 방식이었다.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복도는 조용했고,아침 공기는 조금 차가웠다.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밥.나는 화면을 보고잠깐 눈을 감았다.이 사람은 이제 정말하루를 밥으로 시작할 생각인가.웃음이 나올 뻔했다.그게 싫어서입술을 꾹 눌렀다.[아침부터?]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강태준]* 아침이니까.맞는 말이었다.너무 맞는 말이라 더 어이없었다.나는 답장했다.[먹을게.]곧바로 답이 왔다.[강태준]* 말고.나는 눈썹을 찌푸렸다.[뭐가 말고.][강태준]* 먹고 나서 말해.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조금 웃고 있었다.싫었다.이렇게 쉽게 웃는 내가.나는 괜히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었다.[귀찮아.][강태준]* 그래도.짧은 말.그래도.그 말이 너무 강태준 같아서더 반박하기 어려웠다.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문이 열렸고,나는 안으로 들어갔다.거울 벽에 내 모습이 비쳤다.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고 했는데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않았다.나는 어제부터 계속너무 쉽게 흔들리고 있었다.잘했어.가끔이어도 돼.오늘은 안 갈게.그런 말들이내 안에 너무 오래 남아 있었다.이 정도 말에 흔들리면 안 되는데.아니,이 정도 말이라고 하기엔우리는 너무 오래 그런 말을 못 했다.그래서 더 문제였다.다시 시작하는 건 아니었다.그런데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다.그 애매한 곳에서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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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흔들린 시선, 남겨진 온도 (2)

오후 세 시,우리는 태준의 사무실에 도착했다.건물은 생각보다 조용했다.회색 벽,긴 복도,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작업실.태준의 공간은딱 그 사람 같았다.군더더기 없고,차갑고,조용한데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회의실로 안내받는 동안나는 벽에 걸린 건축 모형 사진들을 봤다.선이 깨끗했다.빛이 조용했다.빈 공간이 많았다.태준은 이런 것들을 만들며지난 3년을 버텼을까.내가 없는 동안.누군가의 공간을 설계하고,자기 안의 무너진 곳은계속 손대지 못한 채로.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얼른 시선을 내렸다.또 거기까지 가고 있었다.그의 없는 시간을 상상하는 버릇.그러면 안 되는데.그 시간 안에는 내가 없었고,그 사실은 아직도 조금 아팠다.회의실 문이 열렸다.태준은 이미 안에 있었다.창가 쪽에 서서도면을 보고 있었다.검은 셔츠,걷어 올린 소매,손목에 얇게 드러난 힘줄.나는 그런 것까지 보고 있는 내가 싫었다.그는 고개를 들었다.우리 눈이 마주쳤다.잠깐.정말 잠깐.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어제 밤의 메시지들이 전부 지나갔다.보고 싶어.근데 오늘은 안 갈게.오늘은 진짜 잘했어.잘 자, 서윤아.나는 먼저 시선을 돌렸다.“안녕하세요.”업무용 목소리.태준도 바로 맞췄다.“오셨습니까.”그의 시선이 내 옆의 우진에게 닿았다.정우진은 평소처럼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네.”짧은 인사.그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는데이상하게 많은 게 지나갔다.나는 자리에 앉았다.우진은 내 오른쪽,태준은 맞은편.이 구도가 요즘 너무 익숙해지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서나는 자꾸 내 마음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어디가 편한지.어디가 아픈지.어디가 아직 위험한지.회의가 시작됐다.태준은 일할 때 더 차가워졌다.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필요한 부분만 정확히 짚었다.“입구 카피는 짧아야 합니다.”“벽면은 조명 간격을 다시 봐야겠어요.”“동선은 오른쪽으로 빼면 체류가 짧아집니다.”그는 일을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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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흔들린 시선, 남겨진 온도 (3)

회의가 끝난 뒤,우진은 다른 담당자와 자료를 맞추러 잠시 나갔다.회의실에는 나와 태준만 남았다.정확히는남겨졌다.누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가끔 운명 같은 건너무 평범한 얼굴로 온다.문이 닫히자공기가 달라졌다.방금 전까지는 회의실이었는데,지금은 그냥그와 나만 있는 방이 됐다.나는 노트북을 닫았다.“저도 나가볼게요.”“서윤아.”그가 불렀다.나는 움직임을 멈췄다.그 이름을 업무 공간에서 듣는 건이상하게 더 위험했다.태준은 바로 다가오지 않았다.자기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이제는 정말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사람처럼.“아침 먹은 거.”“…”“수프랑 빵이라고 했지.”나는 눈을 깜빡였다.이 상황에서 그 얘기를 한다고?어이가 없어서긴장이 조금 풀렸다.“그걸 왜 지금 물어.”“그냥.”“그냥?”태준은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다시 나를 봤다.“좋아서.”가슴이 멈췄다.그는 말을 덧붙였다.“네가 먹었다고 말해주는 게.”나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런 말이 너무 곧장 들어오면사람은 방어할 틈이 없다.나는 노트북을 품에 안았다.“별걸 다 좋아하네.”목소리가 조금 낮았다.태준은 아주 작게 웃었다.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그러게.”그 웃음 때문에나는 괜히 숨이 막혔다.태준이 웃는 걸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언제였더라.무너진 사람처럼 웃는 것도 아니고,비꼬는 것도 아니고,참다 흘러나온 듯한 웃음.나는 눈을 피했다.“나갈게.”이번엔 그가 붙잡지 않았다.그냥 말했다.“저녁 싫다고 했지.”나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응.”“알아.”“그럼 왜 물어.”“안 물어보려고.”나는 돌아봤다.태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그가 낮게 말했다.“말 안 하려고.”나는 그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태준은 천천히 설명했다.“같이 먹자고 하고 싶어서.”“…”“근데 안 하려고.”심장이 또 크게 뛰었다.그는 요즘참는 걸 내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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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흔들린 시선, 남겨진 온도 (4)

회사에 돌아오니퇴근 시간이 가까웠다.나는 자리에 앉자마자오늘 회의 내용을 정리했다.태준의 사무실에서 나눈 말들이자꾸 떠올랐다.그 말 들으면진짜 더 참기 힘들어져.나는 그 문장을 지우려고자료에 집중했다.하지만 자꾸 손이 멈췄다.더 참기 힘들다니.그럼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 걸까.그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손을 잡고 싶은 걸까.집에 데려다주고 싶은 걸까.아니면.나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물컵을 들었다.물이 차가웠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퇴근해?나는 시계를 봤다.거의 퇴근 시간이었다.[곧.]읽음.[강태준]* 데리러 가도 되냐고 묻고 싶어.나는 숨을 멈췄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근데 안 물어볼게.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이 사람은 정말자기 욕심을 문장으로 접는 중이었다.접고,접고,또 접어서내 앞에 작게 내려놓는다.그걸 보면나는 화내기가 어려워진다.그게 또 화가 난다.나는 답장을 썼다.[물어본 거랑 뭐가 달라.]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답이 조금 늦었다.[강태준]* 그러네.나는 피식 웃었다.정말 바보 같았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미안.나는 그 사과가 싫지 않았다.그래서 더 위험했다.[오늘은 혼자 갈게.][강태준]* 알았어.조금 뒤.[강태준]* 조심히 가.나는 그 문장을 보고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오늘도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그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조금 아쉬움이 생겼다.정말 안 좋은 징조였다.⸻퇴근길 지하철은 붐볐다.사람들 사이에 서서손잡이를 잡고 있는데문득 어제의 우산이 생각났다.검은 우산.그 아래에서 들리던 빗소리.태준의 손끝.나는 눈을 감았다.그 장면을 너무 자주 꺼내보면 안 된다.기억은 자주 꺼내볼수록사실보다 더 예뻐진다.그러면 곤란했다.그날의 그는좋은 사람처럼 보였지만,그 전에 나를 오래 아프게 했던 사람도같은 강태준이었다.나는 그걸 잊으면 안 된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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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흔들린 시선, 남겨진 온도 (5)

밥을 다 먹고 나서야맥주를 땄다.캔 따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소파에 등을 기댔다.창밖은 어두웠다.도시의 불빛이 작게 번져 있었다.휴대폰은 옆에 뒤집어두었다.오늘은 먼저 연락하지 않으려고 했다.이미 충분히 했다.밥 먹었다고 했고,맥주 마신다고 했고,먹는다고도 했다.이쯤 되면너무 많이 내어준 것 같았다.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차가웠다.입안이 조금 씁쓸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휴대폰이 울렸다.보지 않으려고 했다.결국 봤다.[강태준]* 마셔?나는 허탈하게 웃었다.[응.][강태준]* 많이 마시지 마.[잔소리.][강태준]* 맞아.나는 또 웃었다.인정이 너무 빨라서화낼 틈이 없었다.잠깐 침묵.그러다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강태준]* 나도 한 캔 샀어.나는 화면을 봤다.[왜.][강태준]* 너 마신다니까.가슴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이건 무슨 감정일까.같이 있는 것도 아닌데,각자 다른 집에서 맥주 한 캔을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묘하게 같은 밤 안에 있는 것 같았다.나는 답장하지 못했다.태준의 메시지가 다시 왔다.[강태준]* 싫으면 안 마실게.나는 바로 답했다.[마셔.]보내고 나서심장이 뛰었다.허락처럼 들렸다.같이 마셔도 된다는 말처럼.몇 초 뒤,답이 왔다.[강태준]* 응.그리고 사진 한 장.캔맥주 하나가 놓인 테이블.옆에는 노트북,작업 도면,검은 펜.어제의 편의점 도시락 사진보다조금 나았다.그래도 여전히 무심한 사진이었다.나는 그 사진을 보다가내 캔맥주를 찍었다.보내려다가 멈췄다.이건 너무 연인 같다.아니,연인이 아니어도 보낼 수 있지 않나.아니.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그런데 대체 무슨 사이인데.나는 한참 망설이다가결국 사진을 보냈다.말 없이.보내고 나서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별것도 아닌 맥주 사진 하나에.태준은 바로 읽었다.답이 오지 않았다.나는 괜히 후회했다.보내지 말걸.너무 가까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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