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망치듯 들어간 새 집에서 3년 전 헤어진 남자와 다시 마주쳤다. 그는 끝난 줄 알았던 감정을 후회와 집착으로 다시 흔들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한서윤은 깨닫는다. 아직 그 남자의 체온이 자신 안에 남아 있다는 걸.
View More끝난 관계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식어서 끝난 건 아니었다.
너무 오래 뜨거웠고,
너무 오래 서로를 태웠다.
가까워질수록 더 아팠고,
좋아할수록 더 지쳤다.
그래서 끝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기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기로.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 새 집 로비에서 다시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몸이 먼저 그 목소리를 알아봤다.
그래서 더 싫었다.
강태준.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던 남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오늘이 그냥 평범한 이삿날이라고 생각했다.
“한서윤 씨 맞으시죠?”
부동산 중개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입주하시는 오피스텔, 집주인 측 대리인이 곧 도착할 겁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 집은 회사와 가까웠고, 조건도 괜찮았다.
급하게 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 매물은 흔치 않았다.
다만 이상한 건 하나 있었다.
너무 쉽게 구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앞 자동문이 열렸다.
낮은 구두 소리.
검은 코트 자락.
익숙한 향.
나는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췄다.
강태준이 로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셔츠 위에 어두운 코트.
무심한 표정.
그리고 여전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눈.
그 눈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괜히 손에 든 서류를 더 세게 쥐었다.
태준도 나를 알아봤다.
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남자도 놀랐다.
놀랐는데,
금방 숨겼다.
예전에도 그랬다.
놀라도 티 내지 않았고,
상처받아도 조용했고,
붙잡고 싶은 게 있어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사람을 미치게 했다.
“강 실장님, 오셨어요.”
중개인의 말에 나는 태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 실장님.
그 호칭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내가 알던 강태준은,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아니.
그렇게 부르는 게 맞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태준은 중개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봤다.
“한서윤.”
3년 만이었다.
내 이름이 그의 목소리로 다시 불리는 건.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여기서 뭐 해?”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중개인을 봤다.
“입주자 확인하러 왔습니다.”
“아,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중개인이 우리 사이를 번갈아 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맞지 않았다.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헤어진 사이.
다시 보면 안 되는 사이.
그중 어디에도 우리를 딱 넣을 수 없었다.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알던 사이입니다.”
예전에.
알던 사이.
그 말이 가볍게 떨어졌다.
나는 웃고 싶었다.
우리가 그렇게 간단한 말로 정리될 수 있다면,
나는 지난 3년을 조금 덜 피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럼 올라가시죠.”
중개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주하실 호실 확인하시고, 서류만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 안에 중개인과 나,
그리고 강태준이 같이 섰다.
나는 일부러 정면만 봤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바로 옆에 있다는 걸.
검은 셔츠에서 나는 희미한 우디 향.
오래전에 너무 익숙했던 냄새.
익숙해서 더 기분 나쁜 거리.
태준이 낮게 말했다.
“이사, 갑자기 했나 보네.”
나는 앞만 본 채 대답했다.
“네가 알 일 아니야.”
“그런가.”
짧은 대답.
저런 식이다.
한 걸음 들어오고,
아닌 척 물러난다.
상대가 그 한 걸음을 계속 신경 쓰게 만든다.
나는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눌렀다.
종이가 조금 구겨졌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나는 먼저 걸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새로 닦은 바닥 냄새와 낯선 벽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 새 집.
아니, 이제 내 새 집이 되어야 하는 곳.
중개인이 문 앞에서 키패드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집 안이 드러났다.
큰 창.
차갑게 정리된 거실.
아직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공간.
밖으로는 도시 불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
분명 괜찮은 집이었다.
혼자 새로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
그런데 이상하게,
문을 넘는 순간부터 새 집 같지 않았다.
누가 먼저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구조는 보셨죠? 옵션은 그대로고요.”
중개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태준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바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도 저랬다.
낯선 공간에 가면 그는 늘 창부터 봤다.
해가 어디서 들어오는지,
밤에는 어디가 가장 어두워지는지,
바깥 소음은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살폈다.
나는 그게 좋았던 적이 있다.
이제는 그런 걸 기억하는 내가 싫었다.
“계약서 마지막 확인만 부탁드릴게요.”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계약 조건.
관리비.
입주일.
옵션 확인.
차례로 넘기던 손이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소유자 대리인.
강태준.
한동안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집 네 거야?”
태준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내가 관리하는 집이야.”
“그게 그거잖아.”
“정확히는 달라.”
“장난해?”
중개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야?”
태준은 나를 봤다.
“뭘.”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거 알고 있었냐고.”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대답보다 더 정확했다.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알고 있었네.”
“어제 알았어.”
“그럼 말했어야지.”
“말하면 안 들어왔을 거잖아.”
“당연하지.”
“그래서 안 했어.”
너무 태연했다.
너무 강태준답게.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은 게 아니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덜 화가 날지 고르는 중이었다.
결국 아무 말도 덜 화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여전하네.”
“너도.”
“뭐가.”
“도망가는 거.”
목 안쪽에 그 말이 걸렸다.
나는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말 조심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태준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심한 척하면서,
사람 속은 끝까지 들여다보는 눈.
저 눈이 싫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것처럼 구는 눈.
아직도 내가 어디서 무너질지 아는 사람처럼.
“계약 파기하고 싶으면 해.”
그가 낮게 말했다.
“위약금은 내가 처리하지.”
그 말이 더 기분 나빴다.
마치 내가 도망칠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리고 도망쳐도 된다고 말하는 척하면서,
내가 도망치지 못할 것도 아는 사람 같아서.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이 집을 포기할 수 있을까.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했다.
짐은 이미 도착하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 이만한 조건의 집을 다시 구하기도 어려웠다.
태준은 그걸 알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내가 선택한 집이라고 믿었던 곳에,
그가 이미 서 있었다는 게.
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안 나가.”
태준의 눈매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여기서 살 거야.”
“…….”
“그러니까 네가 신경 꺼.”
나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한서윤.
글씨가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웠다.
중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중개인이 돌아간 뒤,
집 안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공간이 이상하게 좁아졌다.
아직 가구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집인데,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방 안이 꽉 찬 것 같았다.
예전엔 같은 공간 안의 침묵이 편했다.
각자 다른 일을 해도,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침묵은 자꾸 피부 가까이에 와 닿았다.
“비밀번호 바꿔.”
태준이 먼저 말했다.
나는 바로 그를 봤다.
“말 안 해도 바꿀 거야.”
“창문 잠금장치도 확인하고.”
“그것도 할 거야.”
“욕실 환풍기는—”
“강태준.”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관리인 역할 하지 마.”
그가 나를 바라봤다.
“필요한 말만 하는 건데.”
“그게 싫다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태준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등이 식탁 모서리에 닿았다.
차가운 감각이 허리에 닿고 나서야 내가 물러났다는 걸 알았다.
태준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딱 그 거리에서.
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너 어디 갈 데 없잖아.”
그가 낮게 말했다.
“짐도 다 오고 있고,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모를 것 같았어?”
내가 뭘 숨기고 있었는지,
그는 너무 쉽게 말했다.
“너 조사했어?”
“부동산 서류 보면 알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 그냥 뒀어.”
“뭘.”
“네가 여기라도 들어오게.”
그 말은 이상했다.
차라리 더 노골적으로 나빴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태준은 늘 그런 식이었다.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다가와서,
마지막에는 다정한 척 빠져나갈 수 있는 말을 남긴다.
나는 그게 더 싫었다.
“착한 척하지 마.”
태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내 입술 근처에 머물렀다.
짧았다.
하지만 나는 봤다.
“착한 적 없어.”
그가 낮게 말했다.
“너한테는 특히.”
몸 안쪽에서 오래 눌러둔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밀치듯 지나쳐 현관 쪽으로 걸었다.
“나가.”
태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밀번호 바꿀 거니까 나가라고.”
“바꾸는 거 보고 갈게.”
“내가 어린애야?”
“그랬으면 더 쉬웠겠지.”
나는 그대로 멈췄다.
“넌 늘 괜찮은 척하다가,
꼭 제일 안 괜찮을 때 혼자 버티니까.”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바로 화가 났다.
정확한 말은 가끔 틀린 말보다 더 잔인하다.
특히 그걸,
강태준이 할 때는.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있어.”
“없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이번엔 정말 뒤돌아봤다.
태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3년 전 마지막 날처럼.
비가 오던 밤.
끝까지 나를 붙잡지 않던 남자.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넌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잖아.
그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그래서 나는 떠났다.
내가 틀렸다는 말도,
맞다는 말도 듣지 못한 채로.
“이제 와서 그런 말 하지 마.”
내 목소리가 내가 원한 것보다 낮게 나왔다.
태준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알았어.”
그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
잠깐 멈춘 그가 낮게 말했다.
“한서윤.”
나는 싫은데도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아직도 너무 익숙해서.
“여기서 사는 동안.”
“…….”
“나 피하려고 애쓰지 마.”
내가 웃었다.
웃음이 예쁘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태준이 나를 보았다.
낮고 조용한 눈빛.
“어차피 자주 보게 될 거니까.”
문이 닫혔다.
철컥.
도어락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 집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빈집이어야 하는 공간 안에서,
자꾸만 그 남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제야 알았다.
이 집은 내가 고른 곳이지만,
내가 완전히 피해서 들어온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났다고 믿었던 감정이
다시 열을 올리는 순간들을 담아보려 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강태준은 입술을 떼어낸 뒤에도쉽게 나를 놓지 않았다.숨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가까운 거리 안에서거칠어진 숨이 자꾸만 섞였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태준아.”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꺼냈지만,태준은 멈추지 않았다.오히려 더 가까워졌다.다시 겹쳐지는 입술.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깊었다.짧게 떨린 숨이 그대로 삼켜졌다.나는 무의식적으로 태준 셔츠를 움켜쥐었다.도망쳐야 한다는 걸 아는데,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태준 손이 천천히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닿는 체온이 너무 뜨거웠다.“……하.”숨이 흐트러졌다.태준 입술이 목선 가까이 천천히 내려왔다.뜨거운 숨이 피부를 스치는 순간,온몸이 그대로 떨렸다.“왜 이렇게 떨어.”갈라진 목소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태준 손끝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허리선을 따라 올라온 손.그리고 결국.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숨이 그대로 멎었다.맨살 위로 닿아오는 뜨거운 손끝.정신이 아찔했다.나는 본능처럼 태준 어깨를 붙잡았다.하지만 밀어내지 못했다.오히려 더 가까워졌다.태준이 아주 낮게 숨을 삼켰다.“…미치겠네.”갈라진 목소리.심장이 세게 흔들렸다.태준 손끝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숨이 자꾸 흐트러졌다.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무서운데.멈춰야 하는데.이상하게 자꾸 더 무너지고 싶었다.그 순간이었다.지잉—짧은 진동 소리.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왼손 안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짧게 울렸다.어두운 화면 아래로,은은한 불빛이 손끝과 옷자락 위로 번졌다.태준 움직임이 아주 잠깐 멈췄다.그리고 천천히 내려가는 시선.숨이 턱 막혔다.나는 급하게 휴대폰을 움켜쥐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짧게 떠오른 이름.정우진.순간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태준 눈빛이 천천히 식어갔다.방금 전까지 숨이 무너질 만큼 뜨거웠던 사람이,순식간에 위험할 정도로 조용해졌다.“…계속 연락 오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나는 급하게 화면을 꺼버렸다.“회사 사
“그 남자 앞에서도 지금처럼 흔들릴 수 있어?”숨이 멎었다.강태준의 손끝은 내 턱을 가볍게 붙잡고 있었다.억지로 힘을 준 것도 아닌데,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그 눈빛 때문이었다.차갑게 가라앉아 있는데,그 안쪽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버린 사람의 눈.“그만해…”겨우 나온 목소리였다.태준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그리고 아주 낮게 웃었다.“왜.”“….”“대답하기 힘들어?”심장이 세게 흔들렸다.나는 손끝을 움켜쥐었다.정우진의 메시지는 아직도 소파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내일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요.그 문장 하나가집 안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태준은 천천히 휴대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다시 나를 바라봤다.“그 남자한테 갈 거야?”“…회사 사람이야.”“내가 그 말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근데 왜 이렇게 짜증 나지.”숨이 턱 막혔다.태준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나는 본능처럼 뒤로 물러났다.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등이 벽에 닿았다.차가운 벽.그리고 바로 앞,뜨거운 숨.태준의 한쪽 손이 내 어깨 옆 벽을 짚었다.완전히 갇힌 건 아니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도망칠 수 없었다.아니.도망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한서윤.”낮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눌러 불렀다.나는 눈을 들지 못했다.태준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조용히 말했다.“나 예전처럼 안 해.”“….”“가만히 서서 너 가는 거 안 본다고.”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3년 전이 떠올랐다.비 오는 밤.현관 앞.끝까지 붙잡지 않던 남자.나는 그 침묵 하나 때문에 떠났고,그 침묵 하나 때문에 오래 아팠다.그런데 지금 강태준은.그때와 너무 다른 얼굴로 내 앞에 서 있었다.“그때는…”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왜 아무 말도 안 했어.”태준의 눈빛이 굳었다.짧은 침묵.그 침묵이,이번엔 예전과 달리 도망치는 침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오래 삼켜온 말을어디
“너 못 보내.”숨이 멎었다.강태준 손끝은 여전히 내 턱을 붙잡고 있었다.세게 힘준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망칠 수 없었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나는 겨우 떨리는 숨을 삼켰다.태준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눈빛이 위험했다.참고,억누르고,버티던 사람이.이제는 정말 무너져버린 얼굴.“태준아…”작게 이름을 불렀다.그러자 태준 눈빛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그리고 다음 순간.그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숨결이 닿았다.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리고 아주 부드럽게.입술이 닿았다.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짧은 입맞춤이었다.정말 잠깐.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인데,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태준도 그대로 멈춰 있었다.마치 자기도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조용했다.빗소리만 아주 작게 들렸다.나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태준 시선이 천천히 내 입술로 내려왔다.그리고 아주 낮게 웃었다.“…미치겠네.”갈라진 목소리.심장이 또 흔들렸다.나는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태준 손끝이 내 턱을 놓아주지 않았다.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붙잡았다.“왜 피해.”“….”“너도 안 밀어냈잖아.”숨이 턱 막혔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맞았다.나는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가슴 안쪽이 천천히 무너졌다.태준은 그런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천천히 이마를 내 쪽으로 기댔다.“나 진짜 많이 참았어.”낮게 갈라진 목소리.“다 끝난 줄 알고 버틴 것도.”“….”“아무렇지 않은 척한 것도.”숨이 막혔다.태준 손끝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이번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손끝이 피부를 스치는 순간,온몸이 떨렸다.“근데 네가 자꾸 흔들잖아.”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려 했다.그러자 태준이 낮게 웃었다.“봐봐.”“….”“또 도망가려고 하지.”나는 결국 작게 입술을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강태준 얼굴이 그대로 가까워졌다.숨이 멎었다.너무 가까웠다.조금만 더 움직이면 닿는다.그걸 알면서도,나는 도망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태준 손끝은 여전히 내 턱 아래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다.닿은 것도 아닌데,그 온도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나는 본능처럼 그의 셔츠 끝을 움켜쥐었다.그러자 태준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하.”짧게 새어나온 숨.참고 있던 사람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태준 시선이 천천히 내 입술로 내려왔다.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숨이 막혔다.“왜 그렇게 봐…”겨우 나온 목소리.태준은 대답 대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숨결이 가까워졌다.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드르륵.짧은 진동 소리.정적이 깨졌다.나는 놀란 듯 눈을 떴다.휴대폰이었다.소파 위에 던져뒀던 내 휴대폰이 짧게 울리고 있었다.화면 위로 떠오른 이름.— 정우진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태준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순간 숨이 멎었다.“…받지 마.”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나는 멍한 얼굴로 태준을 바라봤다.그는 여전히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눈빛이 위험했다.질투,짜증,참고 있는 감정까지.전부 그대로 드러난 얼굴.진동이 다시 울렸다.짧고,끈질기게.하지만 태준은 손을 놓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미세하게 힘을 줬다.“강태준…”“받지 마.”이번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심장이 세게 흔들렸다.나는 괜히 숨을 삼켰다.태준 시선이 천천히 내 입술 쪽으로 내려왔다.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지금 그 남자 생각할 정신 있어?”숨이 턱 막혔다.너무 위험한 말이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진동은 몇 번 더 이어졌다.하지만 결국 멈췄다.조용해진 방 안에,우리 숨소리만 남았다.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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