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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밀어낸 거리, 기다리는 사람 (5)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말이 너무 투박해서, 너무 강태준 같아서, 화가 나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다정한 말을 잘하지 못한다. 늘 틀린 방향으로 먼저 손을 뻗는다. 그런데 오늘은 적어도 자기가 틀린 방향으로 뻗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받지 않았다. 태준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내가 받을 때까지가 아니라, 내가 거절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처럼. 나는 결국 한 걸음 다가갔다. 우산을 잡았다. 태준의 손가락이 내 손에 닿았다. 아주 잠깐. 그 순간, 비보다 차가운 손끝이 거짓말처럼 뜨거워졌다. 나는 바로 손을 뺐다. “고마워.” 작게 말했다.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폈다. 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비 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꽤 많이 젖어 있었다. 태준이 말했다. “집까지 따라가도 돼?” 나는 그를 봤다. 그는 조심스럽게 묻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강태준이. 나는 그게 낯설어서 대답이 늦었다. “차로?” “아니.” 그가 말했다. “뒤에서.” “…” “네가 싫으면 안 갈게.” 나는 우산 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 사람은 오늘 왜 자꾸 나를 무너지게 하는 말을 하는 걸까. 밀어붙이지 않는 강태준은 오히려 더 위험했다. 내가 화낼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지 마.” 태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또. 또 알았다고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돌아버리겠다. 왜 알았다고 하면 더 힘든 건데. 나는 뒤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가 멈췄다. 태준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차 조심해서 가.” 목소리가 비에 섞였다. 들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곧 뒤에서 그의 대답이 들렸다. “응.” 그 한 글자가 비보다 선명하게 남았다. ⸻ 집에 도착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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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밀어낸 거리, 기다리는 사람 (6)

밤이 깊어질 무렵, 서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업무용 메신저가 아니었다. 개인 번호. 누가 알려줬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팀장님 단체 연락망이겠지. 메시지는 짧았다. [오늘 회의 때 고생 많았어요. 그리고 아까 말은 잊어도 돼요.] 나는 한참 보다가 답장을 썼다. [못 잊을 것 같아요.] 보내고 나서 너무 직설적이었나 싶었다. 하지만 곧 답이 왔다. [그럼 다행이네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서린의 다음 메시지가 왔다. [잊히지 않는 말들은 대체로 필요한 말이더라고요.]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서린은 참 아픈 말을 단정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더 보내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오늘 하루에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건드렸다. 태준은 기다리겠다고 했고, 정우진은 내가 상처받아도 된다고 했고, 서린은 태준이 계속 내 쪽에 있었다고 했다. 그 말들이 전부 내 안에서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쉽게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피곤했다. 사람 마음은 왜 이렇게 정리되지 않는 것들만 오래 붙잡는 걸까.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비 냄새가 들어왔다. 우산은 현관 옆에 펼쳐져 있었다. 강태준의 우산. 검은색. 아무 장식도 없는. 꼭 그 사람 같았다. 겉으로는 차갑고 무뚝뚝한데 막상 펼치면 비를 막아주는 것. 나는 그 비유를 떠올리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러면 또 넘어간다. 나는 아직 화가 났다. 아직 아프다. 아직 그를 쉽게 용서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오늘 빗속에서 그가 내민 우산은 조금 오래 기억날 것 같았다. 싫을 만큼. ⸻ 잠들기 전, 태준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강태준] * 잘 자. 나는 그 문장을 보고 한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잘 자. 그 말이 이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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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1)

아침에 눈을 떴을 때,제일 먼저 생각난 건 우산이었다.현관 옆에 펼쳐둔 검은 우산.밤새 마르긴 했을까.나는 침대에 누운 채한참 천장을 보고 있었다.어제의 비 냄새가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아니,그건 비 냄새가 아니라강태준이 남기고 간 것들일지도 몰랐다.먹고 자.우산 말려.잘 자.말들은 전부 짧았고,투박했고,어딘가 명령처럼 생겼다.그런데 그 짧은 말들이이상하게 방 안 곳곳에 붙어 있었다.식탁 위.현관 앞.휴대폰 화면.내 손끝.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현관으로 가자우산은 거의 말라 있었다.검은 천 위에작은 물방울 몇 개만 남아 있었다.나는 손끝으로 그 물방울을 건드렸다.차가웠다.어제 그의 손도 그랬다.빗속으로 우산을 내밀던 손.젖는 것보다 나아.지는 거 아니야.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말이 예쁜 사람은 아니었다.절대 아니었다.그런데 가끔은예쁘게 말하지 않아서 더 아팠다.가공하지 않은 마음이그냥 그대로 던져진 것 같아서.나는 우산을 접었다.현관 한쪽에 세워두고한참 바라봤다.돌려줘야 했다.언젠가는.그런데 이상하게오늘 당장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돌려주면어제의 그 작은 온도까지 같이 없어질 것 같았다.나는 그 생각이 싫어서일부러 씻으러 들어갔다.⸻출근길은 맑았다.어제 그렇게 비가 왔는데아침 하늘은 얄밉게도 깨끗했다.젖은 도로 위로 햇빛이 번졌다.사람들은 늘 그렇듯 바빴고,나는 그 안에서 조금 늦은 사람처럼 걸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팀장님이 나를 불렀다.“한서윤 씨, 오늘 오후에 외부 미팅 하나 추가됐어요.”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어디 쪽이요?”“어제 그 공간 쪽. 강 디렉터 팀이랑 같이 나가야 해요.”손이 멈췄다.강 디렉터 팀.그 말은 언제나강태준이라고 들렸다.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장소는요?”“현장 답사요. 성수 쪽. 오후 네 시.”현장 답사.회사 안 회의실도 아니고,사람들 많은 미팅룸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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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2)

오후 네 시,우리는 현장에서 만났다.성수의 낡은 건물이었다.붉은 벽돌,오래된 철문,비가 마른 자국이 남은 바닥.새로 고칠 예정인 공간이라고 했다.겉으로 보기엔 낡았지만안으로 들어가니 천장이 높고,빛이 좋았다.오래된 것들이전부 버려지는 건 아니었다.어떤 것들은조금 손보면 다시 쓸 수 있었다.나는 그 생각을 하다가괜히 고개를 저었다.요즘은 정말무슨 생각을 해도 강태준에게 닿는다.짜증 날 만큼.태준은 먼저 와 있었다.검은 셔츠 위에 회색 코트를 걸치고건물 안쪽 구조를 살피고 있었다.그는 나를 보자마자아주 짧게 눈을 멈췄다.어제처럼 다가오지 않았다.“오셨습니까.”업무용 목소리였다.나는 고개를 숙였다.“네.”정우진은 내 옆에서 자료를 펼쳤다.“브랜드 동선은 입구에서 바로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태준의 시선이 아주 짧게우진에게 닿았다.그리고 다시 자료로 내려갔다.“입구는 좁습니다. 사람을 오래 세우기엔 부담이 있어요.”“그럼 첫 문장은 안쪽 벽으로 넘기죠.”우진이 말했다.둘의 대화는 차분했다.차분해서 더 팽팽했다.나는 그 사이에 서서공간을 둘러보는 척했다.사실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강태준의 낮고 눌린 말투.정우진의 일정하게 가라앉은 말투.둘 다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서로 물러서지 않는 게 느껴졌다.팀장님이 다른 담당자와 통화하느라 잠깐 밖으로 나갔다.건물 안에는 우리 셋만 남았다.낡은 창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우진이 내게 물었다.“한서윤 씨, 이 벽면 문구는 어떻게 보십니까?”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가갔다.벽은 길고 비어 있었다.손을 대면 먼지가 묻을 것 같은 거친 질감.나는 벽 앞에 섰다.“여긴 너무 직접적인 문장은 안 어울릴 것 같아요.”“왜요?”우진이 물었다.나는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공간이 이미 말을 하고 있어서요.”말하고 나서내가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공간이 말을 한다니.전 같으면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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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3)

현장 답사가 끝난 뒤팀장님은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갔다.우진은 자료 사진을 정리하느라건물 앞에서 잠깐 멈췄다.태준은 차 쪽으로 걸어갔다.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어정쩡하게 서 있었다.어제 같았으면태준은 분명 물었을 것이다.집에 데려다줄까.아니,묻지도 않고 데려다주려 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그는 차 문 앞에서 멈추더니그냥 나를 봤다.말하지 않았다.기다리는 눈이었다.내가 먼저 말하기를.나는 그 시선을 피했다.우진이 다가왔다.“회사로 복귀하십니까?”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바로 퇴근해도 된다고 하셨어요.”“그럼 지하철역까지 같이 가시죠.”아주 자연스러운 말이었다.같이 가자고 했지만붙잡는 느낌은 없었다.나는 대답하려다가태준 쪽을 봤다.그는 여전히 차 옆에 서 있었다.가깝지도,멀지도 않게.나를 보고 있었다.입술이 조금 굳어 있었다.나는 알았다.그가 지금 참고 있다는 걸.그리고 내가 이 순간우진과 같이 간다고 하면그가 또 한 번 참아야 한다는 것도.그걸 알면서도나는 우진에게 말했다.“네. 같이 가요.”말하고 나서가슴이 조금 아팠다.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말 아무 말도.다만 차 문을 열던 손이아주 잠깐 멈췄다.그게 끝이었다.나는 우진과 나란히 걸었다.뒤돌아보지 않았다.하지만 등 뒤에서강태준의 시선이 오래 남아 있었다.⸻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은 조용했다.우진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좋다고 생각하자마자마음이 무거워졌다.나는 지금좋아하면 안 되는 것들을자꾸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침묵을 깬 건 나였다.“아까 고마웠어요.”“별일 아닙니다.”역시 그렇게 말했다.나는 웃음이 나왔다.“정우진 씨는 왜 늘 별일 아니라고 해요?”우진은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별일로 만들면 한서윤 씨가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요.”너무 정확했다.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사람 마음을 너무 조용하게 건드렸다.태준처럼 파고들지는 않는데,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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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4)

집에 도착했을 때,현관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죽도,메모도,그 어떤 흔적도.당연한 일인데나는 잠깐 멈춰 섰다.정말 기다리고 있구나.강태준은 오늘아무것도 놓고 가지 않았다.초인종도 누르지 않았다.집 앞에 서 있지도 않았다.그걸 확인하는 순간이상하게 마음이 텅 비었다.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불을 켰다.어두운 집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오늘은 밝은 쪽이 나았다.어둠 속에 있으면괜히 그가 남기지 않은 흔적만 찾을 것 같았다.가방을 내려놓고우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들어왔어요.]답장은 금방 왔다.[정우진]다행입니다. 쉬세요.짧고 정직한 문장.나는 화면을 보다가답을 더 하지 않았다.그때 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들어갔어?나는 가만히 화면을 봤다.같은 질문.며칠 전에는 이 질문이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났다.오늘은기다리고 있다가 보낸 것 같아서마음이 이상했다.나는 답장을 썼다.[들어왔어.]곧 답이 왔다.[강태준]* 팔은.나는 아까 우진이 잡았던 팔을 내려다봤다.아무렇지도 않았다.아프지도,멍들지도 않았다.근데 태준에게는그 장면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나는 답장했다.[괜찮아.]읽음 표시가 떴다.답이 오지 않았다.나는 이상하게 그 침묵이 신경 쓰였다.그래서 결국 내가 먼저 보냈다.[아까 아무 말 안 하더라.]보내고 나서심장이 뛰기 시작했다.왜 보냈지.그냥 두면 됐는데.몇 초 뒤 답장이 왔다.[강태준]* 하면 안 될 것 같아서.나는 입술을 눌렀다.[뭘.][강태준]* 네 팔 잡은 사람 쳐다보는 거.심장이 내려앉았다.그가 봤구나.아니,당연히 봤다.못 볼 리가 없다.나는 답장을 못 했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붙잡고 싶었어.숨이 멈췄다.짧은 문장.그런데 너무 선명했다.붙잡고 싶었어.나를?우진을?그 순간을?아마 전부일 것이다.나는 화면을 손에 쥔 채움직이지 못했다.태준의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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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5)

밤이 깊었다.나는 침대에 누웠지만잠이 오지 않았다.천장 위로 어제와 오늘이 겹쳤다.우산을 내밀던 태준.팔을 잡아당기던 우진.메시지로 기다리겠다는 사람들.내일 만나자는 서린.내 주변에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그런데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결국 제일 오래 남는 건 강태준이었다.화가 나도,밀어내도,다른 사람의 다정함에 잠깐 기대도,돌아오면 결국그 사람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나는 그게 지겨웠다.정말 지겨운데아직 끝내지는 못하겠다.끝낼 수 있었다면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나는 휴대폰을 들었다.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마지막 문장.[강태준]* 그럼 내일도 잘할게.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답장을 썼다.[무리하지 마.]보내려다가 멈췄다.너무 다정했다.지웠다.다시 썼다.[내일 봐.]이것도 이상했다.약속한 것도 아닌데내일 보자는 말은 너무 앞서갔다.또 지웠다.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그런데 몇 분 뒤,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자?나는 화면을 보고숨을 작게 내쉬었다.답하지 말자.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아직.]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 나도.그 문장 하나가이상하게 옆자리에 누운 사람처럼 느껴졌다.멀리 있는데 가까웠고,가까운 척하는데 닿을 수 없었다.나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왜 안 자.]보내고 나니정말 연인처럼 보여서바로 후회했다.하지만 이미 읽음 표시가 떴다.태준의 답은 조금 늦게 왔다.[강태준]* 네가 오늘 잘했다고 해서.나는 멍하니 화면을 봤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그 말 계속 생각나서.가슴이 조용히 무너졌다.이 사람은내 말 하나로 잠을 못 자고 있었다.그게 기쁘면 안 되는데.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태준은 더 보내지 않았다.그 침묵이오늘따라 답답하지 않았다.그냥 나란히 깨어 있는 느낌이었다.한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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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6)

서린은 나를 보며 말했다.“그래서 저는 한서윤 씨가 싫었어요.”가슴이 조용히 굳었다.그녀는 웃지 않았다.“태준이 앞에 없는데도 계속 있는 사람이니까.”“…”“저는 옆에 있었는데도, 늘 늦게 도착한 사람 같았어요.”그 말에목이 막혔다.나는 서린을 미워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그녀도 나를 미워할 이유가 있었다.그게 이상하게 공평해서더 마음이 복잡했다.서린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근데 막상 만나보니까.”“…”“왜 태준이가 못 잊었는지 알겠더라고요.”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런 말 하지 마세요.”목소리가 낮게 나갔다.서린이 나를 보았다.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런 말 들으면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 사람을 이해해야 할 것 같고, 당신한테 미안해야 할 것 같고, 내 상처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말하고 나서손끝이 떨렸다.하지만 멈추지 않았다.“나는 아직 그럴 만큼 괜찮지 않아요.”서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의외로 순순한 대답이었다.“그 말은 내가 욕심냈네요.”나는 그녀를 바라봤다.서린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나는 그냥 누군가한테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나도 힘들었다고.”그 말이내 안 어딘가를 건드렸다.나는 태준 때문에 힘들었고,서린도 태준 때문에 힘들었다.웃기게도우리 둘 다 같은 사람 때문에 다쳤다.다만 나는 그 사람에게 사랑받았고,서린은 그 사람이 바라보지 않는 자리에서 버텼다.누가 더 아픈지는 따질 수 없었다.그런 계산은 너무 잔인하다.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힘드셨겠네요.”서린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아주 잠깐.그녀는 곧 표정을 정리했다.“네.”그 한 글자가생각보다 오래 남았다.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이상했다.서로 불편한데,이제는 불편함이 전부 적의는 아니었다.서린이 말했다.“저는 곧 이 프로젝트에서 빠질 거예요.”나는 고개를 들었다.“왜요?”“원래 자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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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젖어든 밤, 넘지 못한 선 (7)

그날 밤,태준은 더 연락하지 않았다.나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연락이 없는 시간이 불안하지 않았다.그가 사라진 게 아니라정말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나는 침대에 누워오늘 서린이 한 말을 떠올렸다.태준이 너무 쉽게 용서하지 마요.그 사람은 기다리는 걸 좀 배워야 해요.그리고 나도너무 빨리 돌아가면 안 된다고 했다.맞는 말이었다.나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아직 그가 놓고 간 시간들이 아팠다.서린이라는 이름도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정우진의 다정함도가끔은 위험했다.그 모든 걸 안고나는 아직도 강태준 쪽을 보고 있었다.그게 답답하고,미련하고,나답지 않지만,어쩌면 가장 나다운 일이기도 했다.끝내지 못한 마음을끝난 척하지 않는 것.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건그 정도였다.휴대폰이 울렸다.태준이었다.[강태준]* 오늘 잘했어?나는 한참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밥.나는 웃음이 나왔다.정말 어이가 없어서.나는 답장했다.[먹었어.][강태준]* 잘했어.나는 이불 속에서휴대폰을 손에 쥐고 웃었다.조금 바보처럼.그러다 천천히 답장을 썼다.[너도 먹었어?][강태준]* 먹었어.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보냈다.[잘했어.]이번엔 답장이 꽤 오래 오지 않았다.그 긴 침묵이이상하게 따뜻했다.몇 분 뒤,태준의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서윤아.나는 화면을 봤다.[응.]보내고 나서숨을 멈췄다.응.이 한 글자를 보내기까지우리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 나 지금 너한테 가고 싶어.가슴이 크게 뛰었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근데 안 갈게.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그 문장 앞에서오래 멈춰 있었다.가고 싶어.근데 안 갈게.그 두 문장 사이에그가 오늘 하루 참아낸 모든 게 들어 있었다.질투,걱정,미련,습관,욕심.그리고 조금 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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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가까워진 거리, 참아낸 마음 (1)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현관 쪽을 봤다.검은 우산이 거기 있었다.어제보다 조금 더 말라 있었고,어제보다 조금 더 낯설었다.밤새 내 집에 서 있던 그 우산은이상하게 사람처럼 보였다.아무 말 없이문 옆에 기대 서 있는 사람.나를 보채지도 않고,따지지도 않고,그냥 거기 있는 사람.강태준 같았다.아니,요즘의 강태준 같았다.예전의 그는 저렇게 조용히 서 있지 못했다.문 앞에 왔으면 벨을 눌렀을 거고,벨을 눌렀으면 내가 열 때까지 기다렸을 거고,내가 안 열면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문 열어.그렇게.그런데 요즘 그는점점 짧아지고 있었다.먹어.자.잘 자.알았어.안 갈게.말이 줄어든 게 아니라자기 욕심을 줄이는 중인 것 같았다.그걸 알면서도나는 아직 믿지 못했다.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특히 오래 아프게 했던 방식은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그런데도내 마음 한쪽에서는 자꾸 기대를 했다.오늘도 정말 참을까.오늘도 정말 물러날까.오늘도 내가 싫다고 하면정말 멈출까.확인하고 싶지 않은데확인하고 싶었다.나는 우산을 들었다.손잡이가 차가웠다.어제 빗속에서 그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괜히 손바닥을 한번 문질렀다.이런 것까지 기억하는 내가 싫었다.정말 별것도 아닌 손잡이 하나에어제의 온도까지 붙들고 있는 게.나는 우산을 접어 들고 집을 나섰다.오늘은 돌려줘야 했다.계속 가지고 있으면내가 계속 기다리는 사람 같을 것 같아서.⸻회사에 도착했을 때,정우진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는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짧게 고개를 들었다.“좋은 아침입니다.”“좋은 아침이에요.”평범한 인사였다.그래서 더 고마웠다.어제 우리는 조금 위험한 말을 했다.힘든 날에는 아무한테나 기대면 안 된다고.선을 넘고 싶지 않다고.편해서 미안하다고.그런 말을 한 다음 날에도정우진은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자기 자리에서 자료를 넘기고 있었다.그게 그 사람의 방식이었다.흔들린 말을다시 평범한 하루 안에 넣어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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