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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묻어둔 밤, 다시 열린 이유 (1)

“그날 내가 왜 아무 말도 못 했는지.”철컥.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나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출근해야 했다.사람들은 로비를 지나가고 있었고,어딘가에선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밖은 아직 덜 마른 비 냄새가 났다.근데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3년 전 그날.비가 오던 밤.내가 끝내고 싶다고 말했던 밤.아니.정확히는,끝내고 싶지 않아서 끝내자고 말했던 밤.그 밤을 강태준 입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나는 손끝에 힘을 줬다.괜찮은 척하려고 했는데,손이 먼저 들키고 있었다.떨렸다.아주 조금.근데 내 눈엔 너무 잘 보일 만큼.“아, 진짜…”작게 중얼거리고 나서야겨우 몸이 움직였다.출근길 내내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다.근데 그게 더 안 됐다.생각하지 말자고 하면 할수록,기억은 더 선명하게 들러붙었다.비 오는 현관.젖은 구두 앞코.숨을 삼키던 나.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하던 강태준.그때 나는 정말 많이 기다렸다.한 번만.딱 한 번만.“가지 마.”그 말 하나면 됐다.그 말이면 나는 아마못 간 척,화를 내는 척,끝내는 척하면서도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거다.근데 강태준은 끝까지 조용했다.그래서 나는 갔다.내가 먼저 버린 사람처럼.내가 먼저 끝낸 사람처럼.그런데 이제 와서,그가 그날을 꺼내겠다고 했다.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왜 이제 와서.왜 하필 지금.왜 내가 겨우 다 덮었다고 생각한 뒤에.⸻회사에 도착했을 때,정우진은 이미 자리에 있었다.나는 그를 보는 순간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췄다.우진은 모니터를 보다가내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좋은 아침입니다.”평소랑 같은 말투였다.조심스럽고,정중하고,선을 넘지 않는.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게 더 불편했다.나는 괜히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네. 좋은 아침이에요.”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켰다.메일함을 열고,자료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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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묻어둔 밤, 다시 열린 이유 (2)

지하주차장은 조용했다.자동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먼저 밀려왔다.콘크리트 냄새.젖은 타이어 냄새.희미한 형광등 소리.나는 천천히 걸었다.멀리 검은 차 한 대가 보였다.그리고 그 옆.강태준이 서 있었다.검은 셔츠 위에 코트를 걸친 채였다.아침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아니.그냥 숨을 덜 쉬는 사람처럼 보였다.태준은 나를 보고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나도 멈춰 섰다.몇 걸음 거리.멀지도,가깝지도 않은 거리.그게 이상하게 우리 같았다.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왔네.”나는 작게 웃었다.웃기지도 않아서.“오라며.”“안 올 줄 알았어.”“그럼 왜 불렀어.”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안 오면 기다리려고.”그 말에 목 안이 막혔다.기다리려고.그 한마디가 너무 늦게 들렸다.3년 전에 들었으면 좋았을 말이었다.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얘기해.”목소리가 딱딱하게 나갔다.태준은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그러다 차 문을 열었다.“타.”“여기서 해.”“여긴 춥잖아.”“상관없어.”“나는 상관있어.”나는 그를 올려다봤다.태준은 고집을 부리는 얼굴이 아니었다.그냥,이미 나보다 더 지쳐 보였다.결국 나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차 안은 어두웠다.시동은 켜져 있었지만히터 소리만 아주 낮게 들렸다.문이 닫히자바깥 소리가 한꺼번에 멀어졌다.이상했다.지하주차장 한복판인데,여기만 따로 잘라낸 방 같았다.나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다.어차피 갈 생각이 없었다.태준도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그냥 핸들 위에 손을 올린 채한참 앞만 보고 있었다.나는 결국 먼저 말했다.“그날 왜 아무 말도 안 했는데.”말이 나가자마자속이 비었다.너무 오래 묻어둔 말을 꺼내서 그런지내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옆얼굴만 봤다.굳은 턱.마른 입술.손등 위로 드러난 힘줄.그도 쉬운 말은 아닌 것 같았다.그게 조금 화가 났다.이제 와서 어려우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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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묻어둔 밤, 다시 열린 이유 (3)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 말이 너무 태준답지 않아서.아니.너무 태준 같아서.태준은 감정을 예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돌려 말하는 사람도 아니었다.그는 늘 가장 못된 방식으로,가장 아픈 진심을 꺼냈다.죽을 것 같아서.그 말 하나로3년의 시간이 잠깐 무너졌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그때라도 말하지 그랬어.”“네가 웃고 있었어.”“…뭐?”“집 앞 편의점에서.”태준이 말했다.“누구랑 통화하면서 웃고 있었어.”나는 기억을 더듬었다.그 시절.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살려고 일부러 친구들 전화를 받았고,억지로 웃었고,괜찮은 척했다.그래야 진짜 괜찮아질 줄 알았다.태준은 그걸 봤던 거다.내가 괜찮은 척하는 걸.그리고 또 혼자 판단했겠지.괜찮아 보인다고.나 없이도 산다고.“너 진짜…”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화가 나야 했다.근데 이상하게 화만 나지는 않았다.너무 늦게 알게 된 사실들이가슴 안에서 엉망으로 부딪혔다.그때 태준이 나를 보았다.“그날 네가 웃는 걸 보고.”그가 낮게 말했다.“내가 다시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근데 지금 생각하면.”태준은 잠깐 말을 멈췄다.그리고 아주 천천히,처음 보는 얼굴로 말했다.“그것도 핑계였어.”숨이 멎었다.“그냥 겁났어.”태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네가 나 없이도 괜찮아 보이는 게.”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확인하는 게 무서웠어.”그는 나를 똑바로 봤다.“그래서 또 도망쳤어.”차 안이 조용해졌다.나는 그를 보다가결국 고개를 숙였다.손이 떨렸다.분명 사과를 듣고 싶었다.이유를 듣고 싶었다.왜 아무 말도 안 했는지,왜 붙잡지 않았는지,왜 그렇게 나를 혼자 두었는지.근데 막상 듣고 나니마음이 더 엉망이 됐다.그때 우리는 둘 다 버려졌다고 생각한 거다.서로를 너무 몰라서.너무 사랑했는데,정작 제일 아픈 말은 못 알아들어서.나는 겨우 말했다.“너는 항상 네 마음대로 끝냈어.”태준은 대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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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지워진 곳, 지워지지 않은 마음 (1)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손끝이 차가웠다.지하 2층.회색 콘크리트 벽.멀리서 물 떨어지는 소리.그 안에 태준의 차가 그대로 서 있었다.뒤돌아보지 말아야 했다.이미 한 번 봤고,이미 한 번 말했다.나도.소리도 안 나는 말을 해놓고왜 이렇게 들킨 사람처럼 서 있는지 모르겠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나는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기 직전,검은 차 앞유리에 비친 태준의 얼굴이 아주 잠깐 보였다.그는 아직도 나를 보고 있었다.움직이지 않고.다가오지도 않고.그냥.그 자리에 있었다.띵.문이 닫혔다.나는 그제야 벽에 등을 기대었다.다리에 힘이 풀렸다.웃기게도,울고 싶은 건 아니었다.근데 어딘가가 비어 있었다.오래 닫아둔 방을 열었는데,그 안에 먼지만 있는 게 아니라아직 사람 냄새가 남아 있는 걸 본 기분이었다.나는 거울처럼 비치는 엘리베이터 문을 봤다.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방금 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거기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나도.그게 무슨 뜻인지나도 아직 몰랐다.나도 아팠다는 건지.나도 못 잊었다는 건지.나도 아직 거기에 서 있었다는 건지.아니면,나도 이제 더는아무렇지 않은 척 못 하겠다는 건지.층수가 올라갔다.B2에서 B1로.B1에서 1층으로.숫자가 하나씩 바뀌는데도나는 이상하게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1층 문이 열렸다.로비는 밝았다.퇴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갔다.그게 이상하게 낯설었다.누군가는 웃고 있었고,누군가는 전화를 받고 있었고,누군가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세상은 너무 멀쩡했다.나만 방금3년 전으로 다시 끌려갔다 온 사람 같았다.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공기만 젖어 있었다.차가운 바람이 셔츠 안쪽으로 들어왔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나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봤다.[ 정우진 ]* 혹시 아직 회사 근처이시면,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비가 다시 올 수도 있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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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지워진 곳, 지워지지 않은 마음 (2)

휴대폰이 울린 건밤이 꽤 깊어진 뒤였다.나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무릎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봤다.[ 강태준 ]* 집에 도착했어?나는 화면을 한참 내려다봤다.이번에도 짧았다.어쩜 저렇게 늘 필요한 말만 할까.아니.필요한 말조차 늦게 하는 사람인데.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그런데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잠금화면 위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강태준.너무 오래 부르지 않으려고 했던 이름.그런데 요즘은하루에 몇 번씩 그 이름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잠깐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강태준 ]* 답 안 해도 돼.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 한 줄 때문에오히려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늘 이랬다.그는 물러나는 척하면서내가 움직일 자리를 만들었다.예전엔 몰랐다.그게 배려인지,겁인지,도망인지.지금도 잘 모르겠다.나는 결국 답장창을 눌렀다.[ 왔어. ]보내고 나서 화면을 내려놓으려는데바로 답이 왔다.[ 강태준 ]* 문 잠갔어?나는 짧게 웃었다.어이가 없어서.그리고 조금은,웃음이 나올 만큼 익숙해서.[ 응. ]이번엔 답이 오지 않았다.나는 그게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더 보낼 말이 없으면거기서 끝내면 되는데.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기다리지 않는 척하면서기다리고 있었다.몇 분이 지났다.그러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강태준 ]* 잘했네.나는 그 세 글자를 보고정말 바보처럼 멈췄다.잘했네.어린애한테 하는 말 같아서짜증이 나야 했다.근데 이상하게그 말이 너무 조용히 들어왔다.나 오늘 하루 종일잘한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너를 미워하는 것도 제대로 못 했고,정우진에게 답장도 못 했고,커피 하나 버리지도 못했고,차 안에서 화를 내다가 결국 흔들렸고.근데 문 하나 잠갔다고잘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나는 그게 싫었다.싫은데,손끝이 조금 풀렸다.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두고소파에 기대었다.그때 또 메시지가 왔다.[ 강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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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감춘 마음, 드러난 이름 (1)

문고리는 차가웠다.아주 차가웠다.그리고 그제야 알았다.내가 오늘 문을 잠근 건태준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다시 나가고 싶어지는 나를막기 위해서였다.나는 한참 동안 현관 앞에 서 있었다.도어락 불빛이 작게 깜박였다.잠겼다는 표시.분명 잠긴 건 문인데,이상하게 내가 안쪽에 갇힌 것 같았다.휴대폰은 조용했다.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예전 집 앞.없어졌더라.근데 나는 아직 거기 있더라.그 문장들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화면은 꺼졌는데,나는 계속 그 문장을 보고 있는 사람 같았다.거긴 이제 없다고 보낸 건 나였다.그런데 정말 없어진 게 뭔지는나도 잘 모르겠다.건물인지.그날인지.아니면우리가 끝났다고 믿었던 마음인지.나는 결국 현관에서 물러났다.거실로 들어와 식탁 앞에 섰다.싱크대 옆에는 아직도 빈 컵커피가 있었다.버리려고 했던 것.못 버린 것.나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작게 웃었다.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났다.정말 별것도 아닌 플라스틱 컵 하나가사람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버리면 끝날 것 같은데.버리지 못하면 아직 남은 것 같고.그래서 더 못 버리겠고.나는 컵을 집어 들었다.가벼웠다.안에 남은 커피 향이아주 희미하게 올라왔다.달고,쓰고,조금 질리는 냄새.나는 결국 컵을 씻었다.차가운 물이 컵 안쪽을 타고 돌았다.커피 자국이 금방 사라졌다.너무 쉽게.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어떤 건 이렇게 쉽게 지워지는데,어떤 건 3년이 지나도손톱 밑에 낀 것처럼 빠지지 않는다.나는 물기를 털고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이번엔 넣었다.툭.플라스틱이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그런데 이상하게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나는 한참 동안 쓰레기통을 내려다봤다.그리고 결국,식탁 위에 남아 있던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 마시고 자. ]그건 버리지 못했다.나는 그 종이를 한 번 접었다.두 번 접었다.아주 작게.그리고 거실 서랍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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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감춘 마음, 드러난 이름 (2)

점심시간이 지나고,팀장님이 회의실로 우리를 불렀다.새 프로젝트였다.도심형 복합문화공간 리브랜딩.브랜드 콘셉트와 내부 동선,입점 매장 톤앤매너를 함께 잡는 일.나는 자료를 넘기며 듣고 있었다.업무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오히려 잘 맞는 일이었다.공간의 감정을 잡고,브랜드의 문장을 만들고,사람이 머무는 이유를 설계하는 것.그런 걸 나는 좋아했다.문제는 다음 문장에서 생겼다.“이번 프로젝트는 외부 건축사무소랑 같이 움직일 거예요.”팀장님이 말했다.“공간 설계 쪽 디렉터가 꽤 까다롭다고 하니까, 커뮤니케이션 잘해야 합니다.”나는 대수롭지 않게 메모장을 열었다.그리고 다음 자료 화면이 넘어가는 순간,펜 끝이 멈췄다.협업사 정보.건축 디렉터.강태준.이름 세 글자가회의실 화면에 떠 있었다.너무 선명하게.마치 누가 일부러 내 앞에 크게 박아놓은 것처럼.나는 숨을 잠깐 잊었다.정우진이 내 쪽을 본 것 같았다.느껴졌다.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팀장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말했다.“다음 주 킥오프 미팅 전에 오늘 저녁에 간단히 사전 미팅 잡혔어요. 한서윤 씨가 브랜드 쪽 메인으로 들어가고, 우진 씨가 서포트하면 될 것 같아요.”저녁.사전 미팅.강태준.나는 손끝으로 펜을 꾹 눌렀다.종이에 까만 점이 번졌다.팀장님이 나를 봤다.“한서윤 씨, 가능하죠?”대답해야 했다.일이었다.사적인 감정 같은 건회의실 화면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나는 목을 가다듬었다.“네. 가능합니다.”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정말 싫게도.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나는 자료를 챙기는 척자리에서 늦게 일어났다.정우진도 바로 나가지 않았다.회의실 문이 닫히자잠깐 정적이 생겼다.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시는 분입니까.”나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짧은 질문이었다.근데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나는 잠깐 고민했다.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었다.그렇다고 전부 말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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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감춘 마음, 드러난 이름 (3)

미팅이 끝났을 때는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라운지 밖 공기는 차가웠다.정우진은 먼저 회사 쪽으로 전화를 받으러 갔다.나는 출입구 앞에 서서가방 안에 자료를 넣었다.그때 태준이 옆에 섰다.가깝지는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가까웠다.“화났어?”나는 웃음이 나왔다.“업무 자리에서 그게 할 말이야?”“업무 자리 아니면 대답해?”나는 그를 봤다.태준은 피하지 않았다.그 눈이 싫었다.어젯밤처럼 무너진 눈도 아니고,예전처럼 무심한 눈도 아니었다.뭔가를 다 알고도기다리고 있는 눈.나는 낮게 말했다.“오늘 같은 식이면 같이 일 못 해.”“알아.”“알면 하지 마.”“노력할게.”노력.그 말이 이상하게 낯설었다.강태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나는 시선을 피했다.“그리고 정우진 씨한테 그러지 마.”태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침묵 때문에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정우진을 감싼 것처럼 들렸을까.아니.그냥 업무 얘기였다.정말 그랬다.태준이 낮게 물었다.“그 사람은 왜?”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그 사람이 뭘.그 사람이 왜.정우진은 아무 잘못도 없었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태준이 먼저 말했다.“너한테 잘해주니까?”숨이 막혔다.나는 그를 노려봤다.“그렇게 말하지 마.”“틀렸어?”“강태준.”“알아.”그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나 또 못되게 말하는 거.”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그는 정말 알고 있었다.알면서도 튀어나오는 사람.그래서 더 사람을 지치게 하는 사람.태준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근데 서윤아.”심장이 작게 흔들렸다.그는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항상 늦게 아프게 했다.“나 그 사람한테 못되게 구는 거 아니야.”나는 그를 봤다.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그 사람 앞에서 너를 보는 내가 싫은 거야.”말문이 막혔다.차가운 공기가 목 안으로 들어왔다.태준은 더 말하지 않았다.그냥 그 한마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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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낯선 이름, 남겨진 시간 (1)

서린.없어진 집보다,닫힌 문보다,오늘 밤엔 그 이름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나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꺼내는 순간내가 그 이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들킬 것 같았다.웃기지.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면서,질투할 자격 같은 건 더 없으면서.그래도 사람 마음은늘 자격부터 따지고 움직이지 않았다.먼저 아팠다.그다음에야내가 왜 아픈지 생각했다.우진이 택시를 잡는 동안태준은 한 발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가까이 오지도 않았고,멀어지지도 않았다.그 애매한 거리가 더 신경 쓰였다.서린이라는 이름이 뜬 뒤로그는 이상하게 조용해졌다.아까까지는 공간이니 동선이니그 말들 사이에 나를 끼워 넣던 사람이었는데,지금은 꼭입안에 뭔가를 물고 있는 사람 같았다.뱉지도 못하고,삼키지도 못하는 표정.나는 그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그런데 자꾸 시선이 갔다.그게 제일 싫었다.우진이 말했다.“택시 3분 뒤에 옵니다.”“감사합니다.”내 목소리는 얇았다.우진은 나를 한 번 봤다.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하지만 묻지 않았다.그 대신 아주 낮게 말했다.“괜찮으십니까.”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괜찮냐는 말을 들으면사람은 꼭 괜찮지 않은 이유부터 떠올리게 된다.서린.태준의 휴대폰.꺼진 화면.받지 않은 전화.그 짧은 순간에 내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게 무너졌는지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괜찮아요.”거짓말이었다.근데 너무 익숙한 거짓말이라입에 걸리지도 않았다.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믿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믿지 않으면서도더 묻지 않는다는 것도.그런 사람 앞에서는오히려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태준은 아직도 말이 없었다.나는 그 침묵을 모른 척했다.곧 택시가 왔다.우진이 먼저 문을 열었다.나는 타기 전,아주 잠깐 태준 쪽을 봤다.정말 잠깐.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아니.정확히는내가 묻지 못한 질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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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낯선 이름, 남겨진 시간 (2)

집에 도착했을 때비는 오지 않았다.대신 공기가 차갑게 젖어 있었다.우진은 택시에서 함께 내렸다.“여기서부터 혼자 가도 돼요.”내가 말하자그는 아주 잠깐 나를 봤다.“문 앞까지는 안 갑니다.”“…”“그냥 들어가는 것만 보고 가겠습니다.”거절하려다가 말았다.오늘은 이상하게거절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우리는 오피스텔 입구까지 함께 걸었다.발소리가 나란히 났다.태준과 걸을 때와는 달랐다.태준 옆에서는 늘내가 몇 걸음 앞서가거나,그가 몇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둘 사이엔 자꾸붙잡거나 놓치는 간격이 생겼다.우진은 그렇지 않았다.그는 딱 옆에 있었다.너무 가깝지도 않고,멀지도 않게.그게 편해야 했다.그런데 나는 편한 사람 옆에서도자꾸 불편한 사람을 떠올렸다.정말 못됐다.입구 앞에서 우진이 멈췄다.“들어가세요.”“네.”나는 자동문 앞에 섰다가문득 뒤돌아봤다.우진은 그 자리에 있었다.조용히.“오늘 고마웠어요.”“무사히 들어가시면 됩니다.”그는 그렇게만 말했다.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자동문이 닫히면서유리 너머 우진의 얼굴이 흐려졌다.그 순간 이상하게태준이 떠올랐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나를 보고 있던 얼굴.사람은 왜 이렇게문 하나만 닫혀도 자꾸 누군가를 잃는 기분이 드는 걸까.나는 엘리베이터에 탔다.층수 버튼을 눌렀다.문이 닫혔다.그제야 휴대폰이 울렸다.나는 화면을 봤다.[ 강태준 ]* 들어갔어?한 줄.정말 한 줄.나는 그 문장을 보고속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고마움도 아니고,반가움도 아니고,화도 아니었다.전부 조금씩 섞인 것.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엘리베이터 숫자가 올라갔다.1에서 2로.2에서 3으로.그 숫자가 바뀔 때마다메시지는 그대로 화면 위에 남아 있었다.들어갔어?그가 묻는 건 늘 늦었다.다 끝난 뒤에.내가 집 앞에 도착한 뒤에.내가 혼자 흔들린 뒤에.내가 이미 서린이라는 이름을속에서 몇 번이나 굴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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