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21화

부모가 늘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민윤서 역시 부모를 마음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그렇기에 더욱 일에 집중해야 했다. 적어도 부모님만은 편안한 노후를 보내실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었다....한편, 신태현은 병원을 나온 뒤 곧바로 신혼집으로 돌아왔다.저택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상주 도우미들은 저마다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신태현은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넨 뒤 익숙한 걸음으로 거실에 들어섰다.평소처럼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소파에 앉은 신태현은 가져온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시선을 들어 곁에 서 있던 도우미 안미숙을 바라봤다.“흠... 윤서한테 할 얘기가 있으니, 서재로 올라오라고 전해주세요.”안미숙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잠시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도련님... 작은 사모님께서 집을 나가신 뒤로 아직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신태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직도 안 들어왔어요?”안미숙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며칠째 안 들어오셨습니다.”신태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고집이 보통이 아니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신태현은 다시 외투를 집어 들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검은 세단은 신가 저택을 빠져나와 민윤서의 친정으로 향했다.차는 오래된 주택가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신태현은 낡은 다세대주택을 말없이 바라봤다.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차에서 내린 신태현은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고급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신태현은 낡은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지나가던 이웃들은 그런 신태현이 신기한 듯 하나같이 뒤를 돌아봤다.잠시 뒤 신태현이 초인종을 누르자 이선희가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신태현을 본 이선희는 반가움과 긴장이 뒤섞인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몸을 비켰다.“신 서방 왔어? 어서 들어와.”이선희가 신태현을 반갑게 맞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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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신태현은 한동안 민윤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귀국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말라 보였다.안색도 좋지 않았다. 원래도 가녀린 체구였지만, 지금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쓰러질 것처럼 야위어 보였다.신태현은 말없이 시선을 거둔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민윤서의 손목을 잡았다. 마치 늘 그래 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무심히 잡은 민윤서의 손목은 놀랄 만큼 가늘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처럼 연약하게 느껴졌다.부모님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기에 민윤서는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신태현에게 이끌려 옆자리에 앉았다.가까워진 순간 신태현에게서 풍기는 익숙한 향이 다시 코끝을 스쳤다.민윤서는 끝내 표정을 풀지 않았다.신태현은 민윤서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누가 학대라도 했어? 또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었지?”민윤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곧이어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당신이 정말 모를 리 없잖아. 다 알고도 방관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런 가식적인 걱정이 무슨 의미가 있어.’민윤서는 대답 대신 차갑게 웃으며 신태현을 바라봤다.“대단하신 신 국장님이 여기까지 직접 뭐 하러 왔는지나 말해봐.”괜히 찾아왔을 리 없었다. 신태현이 움직였다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민윤서의 태도는 차갑기만 했다.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선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이선희는 슬며시 주한범의 팔을 잡아당기며 눈짓했다.“둘이 천천히 이야기해. 아빠랑 나는 잠깐 산책도 하고 장도 좀 보고 올게.”말을 마친 이선희는 두 사람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주한범과 함께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나가며 문까지 조용히 닫아 두 사람만 남겨 두었다.거실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신태현은 민윤서를 똑바로 바라보며 본론을 꺼냈다.“같이 집으로 가.”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이유도 설명하지 않았고 민윤서의 의사도 묻지 않았다.늘 그랬듯 당연하다는 듯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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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늘 귀한 대접만 받으며 살아온 신태현이 이런 곳에서 지낼 리가 없잖아. 잠깐 객기 부리는 거겠지.’민윤서는 더 이상 신태현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침대에 몸을 눕히자, 그동안 억눌러 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몸도 마음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밖에서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민윤서는 신태현도 돌아간 줄 알았다.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직접 찾아와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 이유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오히려 내가 돌아가지 않기만 바랄 줄 알았는데...’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깊은 잠에 빠져들려던 그때였다.침대가 살짝 내려앉는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민윤서는 눈을 번쩍 뜨며 그대로 굳어버렸다.설마 정말 방으로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민윤서의 방은 비좁고 소박했다. 신태현이 쓰던 넓고 고급스러운 침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하지만 신태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친 뒤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누웠다.민윤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신태현은 옆으로 돌아누웠다.그리고 긴 팔을 뻗어 뒤에서 민윤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따뜻한 체온이 얇은 옷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등에 닿은 단단한 가슴과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순식간에 민윤서를 감쌌다.민윤서는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온몸을 움찔 떨었다.정신을 차린 뒤, 민윤서는 있는 힘껏 신태현을 밀어내려 했다.“신태현, 이거 놔.”등 뒤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만해, 민윤서.”신태현의 목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낮고 안정적인 음색에 차분한 말투까지 더해져, 한마디 한마디가 이상하리만치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한때는 그 목소리만 듣고 있어도 좋았다.신태현이라는 사람 자체를 본능적으로 좋아했던 시간도 분명히 있었다.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능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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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그 팔찌 때문이야?”민윤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지금 와서 따질 자격도, 이유도 없었다.그런데도 신태현은 마치 해명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말을 꺼냈다.순간, 결혼 첫해처럼 아직도 두 사람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이라는 착각이 스쳤다.문제가 생기면 신태현이 나서서 해결해 주던 그때가 떠올랐다.하지만 이제는 신태현이 한때 자신에게 잘해 준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민윤아를 향한 감정을 자신에게 투영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그의 타고난 품성과 교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지금도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직 이혼하지 않은 이상, 아내의 감정을 완전히 외면할 만큼 무정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신태현은 민윤서를 산속에 홀로 버려둘 수도 있었고, 민윤아를 위해서라면 민윤서의 모든 것을 빼앗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조금 전까지 흔들렸던 마음은 허망하게 가라앉았다.민윤서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차갑게 말했다.“당신이 누구에게 뭘 주려 했든 내 알 바 아니야.”민윤서는 신태현이 자신에게 그 팔찌를 선물한 이유 역시 민윤아 앞에서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 거로 생각했다.“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화가 난 건데?”민윤서는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오늘 신태현이 먼저 찾아와 쉽게 돌아가지 않으려 했을 때, 민윤서는 아주 잠깐이나마 아직 자신에게 조금은 마음이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지금 보니 부부로서의 정조차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신태현은 처음에는 손을 놓지 않았지만 잔뜩 굳어 있는 민윤서에게서 자신을 향한 거부감을 분명히 느낀 듯, 이내 손을 놓고 먼저 침묵을 깼다.“신약 개발이든 바이오 업계 전체를 보든 결국 혼자 잘해서는 오래갈 수 없어. 여러 사람이 함께 성장해야 결국 모두에게 도움이 돼.”민윤서는 목이 바짝 말랐다.신태현 정도 되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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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민윤아는 지금 신태현이 공개적으로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런 민윤아가 굳이 청림바이오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은 누구나 봐도 민윤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도발이었고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받아들이면 민윤서는 회사 안에서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다.하지만 거절하면 국가 핵심 연구 과제는 다른 기업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그렇게 되면 청림바이오가 수년 동안 공들여 준비해 온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될 수 있었고 회사 전체가 큰 타격을 입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서승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가까이에 서 있는 민윤서를 바라봤다.민윤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조금 전 이태섭 박사가 꺼낸 제안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것처럼 담담한 모습이었다.서승재는 그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프로젝트가 무산되더라도 민윤서에게 이런 모욕을 감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민윤서의 잔잔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목까지 올라왔던 말은 끝내 삼켜 버렸다.민윤서는 서승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회사는 혼자만의 것만은 아니었다.두 사람이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 민윤서가 먼저 이태섭 박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박사님, 저희는 늘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회사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민윤아 씨께서 청림바이오에 합류하시겠다면 저희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서승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 말하려 했다.그러나 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그 모습을 본 서승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이태섭 박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시선을 민윤서에게 옮기더니 천천히 물었다.“서 대표 비서인가?”서승재는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민윤서를 소개했다.“박사님, 이쪽은 민윤서 수석연구원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핵심 약물 분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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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민윤서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서승재가 평생을 바쳐 일군 청림바이오를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 하나만 바라보며 오랜 세월 함께 달려온 동료들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서승재는 애써 담담한 척하는 민윤서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윤서야... 미안하다. 괜히 너만 힘든 일을 떠안게 했네.”민윤서는 옅게 미소 지었다.“일은 일이잖아요. 사적인 감정까지 끌고 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결국 비즈니스는 이익으로 움직이는 거고요.”서승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승재가 다시 말했다.“민윤아랑 직접 부딪히기 싫으면 앞으로는 내가 상대할게.”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민윤아가 청림바이오에 들어오는 일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오늘 거절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방법으로 민윤아를 들여보내려 할 테니까.신태현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면 신태현이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하지만 그 대상은 단 한 번도 민윤서였던 적이 없었다. 늘 해외에 머물던 신태현은 민윤서가 집에서 고열로 의식을 잃었을 때조차 연락이 닿지 않았다.대화를 마친 민윤서는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 약물 성분 데이터를 반복해서 분석했다.끝없이 일에 파묻혀 있어야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씁쓸함과 모멸감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사무실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퇴근한 뒤였다.민윤서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상을 정리한 뒤 조용히 회사를 나섰다.‘이혼하면 돼. 모든 게 정리되면... 다 끝날 테니까.’민윤서는 오래된 빌라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려다 걸음을 멈췄다.문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낡은 건물이라 방음이 좋지 않았다. 애써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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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민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사회적 지위 때문에, 최상위 권력층에 있는 신태현에게 결혼은 결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체면이었고 이해관계였으며 세상의 평가를 좌우하는 요소였다.신태현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결혼이었다.이미 부부로서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아내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겉으로만 흠잡을 데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 그만이었다.그리고 민윤서는 그런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 결혼 생활을 떠받치는 가장 순종적인 장식품에 불과했다.민윤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속까지 서늘하게 식어 갔다.더는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의 안전도, 외할머니의 병원비도, 온 가족의 생계도 모두 신태현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민윤서는 자신이 상처받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 때문에 가족들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만은 감당할 수 없었다.민윤서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이를 악물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눌러 통화를 끊은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예상대로 건물 앞 가로등 아래에는 낯익은 검은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운전석 창문을 통해 진현수가 보였다.민윤서를 발견한 진현수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사모님, 국장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민윤서는 그 자리에 선 채 차 문만 바라봤다.마치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동굴을 마주한 것처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민윤서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본 진현수는 속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신씨 가문 같은 명문가에 시집가 최고만 누리며 살면서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사모님 자리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면 될 일을, 괜히 집까지 뛰쳐나와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정말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화를 자초하는군.’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진현수는 끝까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민윤서의 선택을 묵묵히 기다렸다.민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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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민윤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신태현의 눈에는 민윤서의 노력도, 연구를 위해 쏟아부은 시간도, 청림바이오에서 온 힘을 다해 버텨 온 순간들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신태현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민윤서가 아니었다.얌전히 정해진 자리에 머물며 말 잘 듣고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 아내, 그것으로 충분했다.“무슨 권리로 내 자유까지 간섭하는데?”이제는 일까지 그만두라고 했다.민윤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태현은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 번 결정하면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신태현은 더 이상 민윤서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 다시 서류를 훑을 뿐, 민윤서의 감정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애초부터 민윤서의 감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신태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민윤서,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민윤서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당신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먼저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누군데. 애초에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민윤아였잖아. 내가 물러나 둘을 이어 주겠다는데도, 왜 끝까지 이혼은 하지 않으려는 거야?’민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차분히 말했다.“결국 당신은 체면을 지키고 싶은 거잖아. 이혼해서 나한테 자유를 줘. 공식적으로는 이혼한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되잖아. 그러면 당신 커리어에도 아무런 지장 없을 거야.”민윤서가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유 하나뿐이었다.신태현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끝에서 만년필을 한 바퀴 굴리더니 서류에 결재 사인을 남겼다.“신태현,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야?”그래도 신태현은 반응하지 않았다.민윤서는 성큼 다가가 신태현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그대로 옆으로 내던졌다.순간적으로는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서류마다 빼곡하게 적힌 내용이 모두 중요한 기밀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차마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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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이제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쳤던 터라, 민윤서는 눈을 내리깔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신태현, 우리 이혼하자.”신태현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민윤서, 잘 들어. 난 결혼에 기대어 출세할 필요 없어. 지금 넌 너무 감정적이야. 그런 상태에서 하는 말은 아무 의미 없어.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민윤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신태현은 민윤서를 내려다봤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대신 내가 한 말만큼은 똑똑히 기억해 둬.”말을 마친 신태현은 더 이상 민윤서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2층 서재로 향했다.늘 그렇듯 냉정하고 단호했다. 신태현이 한 번 내린 결정은 누구도 바꿀 수 없었다.국제 무대에서 숱한 협상과 이해관계를 조율해 온 신태현에게 이혼쯤은 고민거리조차 되지 않는 듯했다.민윤서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마치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는데도 아무것도 맞추지 못한 듯한 망연자실한 기분이었다.신태현은 끝까지 화를 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그런데 오히려 그런 태도가 더 잔인했다.겉으로는 담담하고 차분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가 숨어 있어 가장 아픈 곳만 정확히 찔렀다.민윤서는 텅 빈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몸을 감싸안았다.수년을 살아온 이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다.그리고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결국 이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민윤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잠시 뒤 안미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 한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작은 사모님, 도련님께서 꼭 드시라고 하셨습니다.”민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이제야 신태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했다.신태현의 말을 거스르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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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카드였다.하지만 외할머니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지금, 민윤서는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민윤서는 원무과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이 카드로 먼저 결제해 주세요.”직원은 카드를 받아 단말기에 여러 차례 결제를 시도하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죄송합니다. 이 카드는 사용 정지된 카드입니다.”“사용 정지됐다고요?”민윤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불과 지난주만 해도 신씨 가문 어르신 생신 선물을 준비하면서 이 카드로 결제했었다.며칠 사이에 카드가 갑자기 정지될 리는 없었다.답은 하나뿐이었다.신태현이 직접 추가카드 사용을 막은 것이었다.민윤서는 허탈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었다.신태현은 이혼만큼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으면서도 아무런 언질도 없이 추가 신용카드부터 끊어 버렸다.‘벌인 걸까. 경고인 걸까. 결국 나더러 다시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건가?’민윤서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갔고 손끝은 덜덜 떨려왔다.돌려받은 블랙카드를 바라보는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창백하게 질린 민윤서의 얼굴을 지켜보던 주민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윤서야,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주민석은 민윤서에게 이런 블랙카드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신태현의 카드일 거로 생각했다.그리고 지금 카드가 정지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윤서와 신태현의 결혼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주민석은 곧장 원무과 직원을 향해 말했다.“죄송합니다, 치료비는 오늘 안으로 반드시 마련하겠습니다.”두 사람은 다시 응급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마침 의료진들이 설명을 마치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민윤서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공허한 눈으로 주민석의 지친 옆모습과 초췌한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칼로 도려내는 듯 아려 왔다.그동안 주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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