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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민윤서는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택시를 부르려 했다.고개를 숙여 앱을 켜보니 대기 중인 사람이 무려 67명이었다.그때 검은색 차량이 민윤서의 앞에 멈춰 섰다.진현수가 운전석에서 내려 차 키를 건네며 말했다.“신 국장님께서 운전을 부탁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청운각으로 모셔다드리면 됩니다.”청운각은 경포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민윤서는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저한테는 그럴 의무가 없는데요.”담담한 목소리였다.그때 뒷좌석 창문이 반쯤 내려가며 창문 너머로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까만 눈동자는 온화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빗속에서 신태현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차에 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태섭이 입을 열었다.“태현아, 진현수는 따로 볼일이 있는 거야?”신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류를 좀 준비해야 해서요.”민윤서는 이태섭을 바라봤다.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았다.결국 민윤서는 차에 올라 청운각으로 향했다.차 안 분위기는 조금 무거웠다.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며 창밖의 불빛을 흐릿하게 만들었다.민윤서는 핸들을 잡고서 묵묵히 운전하며 도로 위를 달렸다.그때 이태섭이 먼저 민윤아에게 말을 걸었다.민윤아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적당히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자신의 유학 경력과 전공 분야를 조리 있게 설명했고 이태섭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해외에서 연구한 분야가 이번 연구과제와 상당히 잘 맞물려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박사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은 건 청림바이오지만 실질적인 총괄 책임자는 이태섭이었다.이태섭은 웃으며 승낙했다.“젊은 사람이 뜻을 품고 있는 건 좋은 일이죠. 게다가 차분하기까지 하니 참 좋네요.”핸들을 쥔 민윤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민윤서 역시 학술적인 면에서 이태섭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고 향후 연구과제의 추진 방향에 대해서도 이태섭과 의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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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태섭은 민윤서를 지긋이 바라봤다. 뭔가 가늠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세 사람은 함께 청운각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 중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텅 빈 차 안에 홀로 앉아 있던 민윤서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괴로웠다.오늘 저녁 민윤서는 그저 운전기사일 뿐이었다. 신태현은 정말 민윤서를 운전기사로만 대했다.민윤서는 굳게 닫힌 청운각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어떻게든 신태현과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어쩌면 신태현은 아직도 민윤서가 그저 홧김에 이혼하자고 한 걸로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민윤서는 차 안에 앉아 있다가 신태현에게 문자를 보냈다.[잠시 뒤에 식사 끝나면 나랑 얘기 좀 해.]문자를 보냈고 예상대로 답장은 없었다.민윤서는 떠나지 않고 조용히 차 안에 앉아서 기다렸다.민윤서는 신태현의 일정을 알지 못했기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두 시간 후, 청운각 문이 드디어 열리며 신태현과 민윤아가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안에서 나왔다.민윤서는 좌석에 기대어 있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며칠째 누적된 피로와 몸 상태 때문에 깨어있는 것 자체가 버거웠다.똑똑.창문을 두드리는 가벼운 소리가 울려 퍼지자 민윤서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신태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신태현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자.”돌아가는 길에 차 안에서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민윤서는 먼저 이태섭을 집으로 모셔다드렸고, 이태섭이 차에서 내린 뒤 차 안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차 안을 감돌았다. 민윤아는 말없이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도 모든 다정함을 독차지했다.집에 도착한 후 민윤아는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며 차에서 내렸다.신태현은 민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먼저 올라가.”민윤아는 민윤서를 힐끗 바라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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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민윤서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차 안에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민윤서는 신태현의 검고 그윽한 눈동자를 바라봤다.민윤서는 그 눈동자를 언제나 읽을 수 없었고, 또 이해할 수도 없었다. 특히 민윤서를 바라볼 때면 눈빛이 한없이 차갑고 또 냉담했다.그리고 민윤서는 늘 그런 시선에 상처를 받곤 했다.신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목소리가 조금 작았던 탓에 신태현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민윤서는 시선을 내리깔며 더 이상 신태현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태현 씨...”민윤서가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신태현의 휴대폰이 울렸다.민윤아였다.민윤서는 답답한 심정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제발...”내 말 좀 끝까지 들어달라는 말은 미처 하지 못했다.“여보세요.”신태현은 거리낌없이 전화를 받았다. 민윤서의 말은 한마디도 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렇게 듣기 싫은 걸까?“오빠, 오늘 밤에도 올 거지?”휴대폰 너머에서 민윤아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신태현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몸이 안 좋아서 그래?”민윤아가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참, 박사님이랑 얘기한 일 잊지 마.”“응.”전화를 끊은 뒤 신태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느긋한 표정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국가 핵심 연구과제 말이야. 윤아도 합류할 거야. 네가 윤아를 챙겨.”민윤서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난 동의한 적 없어.”신태현이 말했다.“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평온한 어조였지만 상당히 강압적이고,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말투였다.민윤서는 신태현을 바라봤다.“상의가 아니라 통보라는 거네.”신태현은 언제나 민윤아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움직였다. 신태현은 민윤서의 처지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신태현은 민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윤아는 네 언니야.”민윤서는 헛웃음을 쳤다.“민윤아를 팀에 들이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어.” 민윤서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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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낯설었다.한때는 그곳이 평생 자신의 집일 거라 믿었는데 지금은...민윤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하듯 웃은 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문을 여는 순간, 민윤서를 맞이한 것은 예전처럼 따뜻한 목소리가 아니라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켜 올라간 김현주의 손이었다.짝!김현주가 민윤서의 뺨을 세게 때리자 따귀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힘을 얼마나 많이 준 건지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고, 뺨은 화끈거렸으며 귓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민윤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민윤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김현주를 바라봤다.“이 배은망덕한 것! 왜 이렇게 못돼 먹은 거야?”김현주는 눈이 벌게진 채 소리를 질렀다.“윤아는 원래도 몸이 약한데, 사사건건 윤아를 방해하고 연구과제까지 빼앗으려고 해? 예전에 윤아가 감기에 걸려서 열이 나고 아팠을 때도 일부러 병원에 안 데려가고 시간을 끌었지?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김현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이 묻은 바늘이 되어 온몸을 찔러댔다.민윤서는 설명하고 싶어서, 반박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거실에는 한때 누구보다 자신을 아껴주었던 오빠 민유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민유찬은 민윤아의 곁에 서서 냉담한 눈빛으로 혐오스럽다는 듯 민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민유찬은 안색이 창백하고 연약해 보이는 민윤아를 감싸며 쌀쌀맞게 말했다.“민윤서, 정말 실망이야. 윤아는 원래 몸이 약해. 그런데 왜 항상 윤아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거야? 심지어 연구과제 하나 양보해 주지 않으려고 해? 사람이 왜 그렇게 악독해?”‘내가 악독하다고?’민윤서는 민유찬의 품에 기댄 채 의기양양함을 감추며 속상한 척 연기하는 민윤아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손가락질하는 가족들을 보자 온몸의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연구과제를 따내지 못했는데 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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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민윤서는 순간 멈칫했다.민경진과 김현주는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민유찬은 곧바로 민윤아를 안아 들고는 차가운 얼굴로 민윤서를 노려보았다.“윤아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한편, 신태현은 외교부에서 나오던 중 본가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평소 집에 있는 일이 드물다 보니, 귀국하면 가족들은 늘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오늘 윤서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 먹어.”신태현은 느긋하게 대답했다.“네.”전화를 끊고 나서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뒤 신태현은 차를 타고 신혼집으로 향했다.신혼집은 텅 비어 있었고, 도우미 안미숙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도련님, 작은 사모님이 짐을 전부 옮기신 것 같아요.”신태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세요. 며칠 지나면 돌아올 거예요.”민윤서는 예전에도 가끔 화를 낸 적이 있었다.하지만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끝냈고, 결국 다시 제 발로 집으로 돌아왔다.그러나 안미숙은 많이 걱정스러운 듯했다.“이번에는 진심인 것 같아요.”신태현은 대꾸하지 않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신태현의 서재는 신태현을 제외하면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안미숙은 신태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민윤서는 병원에서 민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김현주는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민윤서를 노려보며 말했다.“네 언니가 죽어야만 만족할 거야?”침대에 누워있던 민윤아는 창백한 얼굴로 민윤서를 바라봤다.“저는 괜찮아요. 윤서를 탓하지 마세요. 제 탓이에요. 저 혼자 넘어진 거예요. 윤서는 저를 세게 밀지 않았어요.”민경진은 민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너는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 아이를 못 낳았지. 그런데 네 언니가 임신하니까 그게 그렇게 질투가 나니?”민윤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자기도 모르게 민유찬을 바라보았다.예전에 민유찬은 민윤서를 굉장히 아껴 주었고 언제나 민윤서의 편을 들어주었다.하지만 지금 민유찬의 눈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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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신태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말투였지만, 몸에 밴 권위적인 태도와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신태현은 애초부터 민윤서의 기분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민윤서는 천천히 차 문을 열었다.차 안에는 신태현에게서만 느껴지는 시트러스와 머스크가 어우러진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한때는 그 향기를 맡는 것마저 설렜던 적이 있었다.결혼에도, 두 사람의 미래에도 기대를 품었던 시간이었지만 더는 아니었다.다시 이 차에 올라탄 민윤서의 마음은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었던 것을 끝까지 붙잡아 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민윤서가 자리에 앉자마자 진현수도 운전석에 타서 시동을 걸었다.신태현은 끝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는 모습은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시혜라고 여기는 듯했다.실제로도 두 사람은 대등한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었다.신태현에게 민윤서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민윤서는 언제나 그렇듯 존재감이 희미한 사람이었다.“어디 가는데?”“본가.”신태현이 짧게 대답했다.“할머니가 같이 저녁 먹자고 부르셨어.”민윤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신태현의 시선이 민윤서의 가느다란 손목으로 향했다.“팔찌는 왜 안 했어? 마음에 안 들어?”민윤서는 신태현을 똑바로 바라봤다.“팔찌를 하든 말든 그건 내 자유 아니야?”신태현은 아무 대답 없이 민윤서의 손을 한동안 바라봤다.반지도 없었다.민윤서는 결혼반지만큼은 늘 손에서 빼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것마저 없었다.신태현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시선을 거둔 뒤 다시 침묵했다.민윤서는 가슴 한쪽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다시 이혼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이미 절차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라. 어차피 마음속엔 민윤아에 대한 애틋함밖에 없을 거야. 하루라도 빨리 이혼하고 싶어 할 테고. 굳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긁어 부스럼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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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민윤서는 조용히 숨을 고른 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언젠가는 할머니께도 말씀드려야 할 일이었기에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민윤서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할머니... 저하고 태현 씨, 이혼하기로 했어요. 서로 충분히 상의해서 내린 결정이에요.”노희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숨이 턱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몇 초 동안 민윤서만 바라봤다.하지만 누구보다 민윤서를 잘 아는 노희숙은 민윤서가 먼저 이혼을 원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노희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태현이가 또 힘들게 했지? 가만 안 둬. 내가 당장 혼내 줄게.”민윤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할머니. 저하고 태현 씨...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나 됐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저희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노희숙은 민윤서를 가만히 바라봤다.민윤서가 진실을 모두 말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내가 직접 알아볼 거다. 정말 태현이가 너를 힘들게 한 거라면 반드시 책임을 묻을 거야.”민윤서는 노희숙이 자신을 아끼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이상 괜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정말 아니에요, 할머니.”하지만 노희숙은 더는 민윤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자리에서 일어난 노희숙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 민윤서의 손등을 다정하게 한 번 토닥여 주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니.”그 한마디에 민윤서의 코끝이 뜨거워졌다.생각해 보면 신씨 가문에서 자기를 진심으로 가족처럼 대해 준 사람은 노희숙뿐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희숙은 사람을 보내 신태현을 본가 서재로 불렀다.서재 문을 열고 들어선 신태현은 곧은 자세로 노희숙 앞에 섰다.어른 앞에선 언제나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었기에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웠다.“무슨 일이세요?”노희숙은 원목 책상 너머에서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신태현의 인사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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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민윤서가 내민 서류 첫 장에는 ‘이혼합의서’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신태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서류를 받지 않았다.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진현수는 백미러로 뒷좌석을 슬쩍 살펴봤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운전대를 쥔 손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신태현은 아무 말 없이 민윤서만 바라봤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았다.“도대체 얼마나 억울하면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뭐가 있어? 원하는 걸 안 해준 적 한 번이라도 있었어?”억지를 부린다는 말에 민윤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침착하게 대답하려던 순간, 신태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민윤서는 화면을 흘낏 바라봤다.예상대로 민윤아였다.신태현은 전화를 받더니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윤서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통화 내용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민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를 골라 민윤아가 신태현에게 하소연했을 게 분명했다.통화를 마친 신태현의 표정은 눈에 띄게 싸늘해져 있었다.“차 세워요.”짧은 한마디에 진현수는 군말 없이 차를 길가에 세웠다.신태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내려.”짧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분명 화가 나 있었다.신씨 가문 본가는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본가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길은 산길뿐이었다.날이 어두워진 시간이라 지나가는 차량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민윤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여기서 내리면 난 어떻게 가?”신태현과 같은 차에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말다툼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곳에 혼자 버려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신태현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졌다.“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그 말에 민윤서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 갔다.민윤서는 차갑게 신태현을 바라봤다.“왜? 민윤아가 그래? 내가 밀었다고? 그래서 민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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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진도현은 길가에 웅크린 채 떨고 있는 민윤서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민윤서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온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진도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아무 말 없이 허리를 숙여 민윤서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품에 단단히 안은 뒤 곧장 구급차로 향했다.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민윤서는 간신히 진도현의 얼굴을 알아봤다.“선생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진도현은 민윤서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조용히 정리해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푹 쉬셔도 됩니다.”구급차 안에서는 응급처치가 바로 시작됐다.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각종 검진과 수액 치료, 영양제 투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모든 처치를 마친 뒤에야 민윤서는 겨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과로에 심한 몸살까지 겹쳤고,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며 버틴 탓에 몸이 결국 한계에 이른 상태였다.병실 침대에 누운 민윤서는 얇은 이불 끝을 손끝으로 움켜쥔 채 곁을 지키고 있는 진도현을 바라봤다.“앞으로는 정말 조심할게요.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진도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민윤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서 씨는 오랫동안 저의 환자였잖아요. 저도 이제는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몸을 이렇게 혹사하지 마세요. 이대로라면 언제까지고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는 겁니다.”민윤서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명심할게요.”진도현은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꼼꼼히 설명한 뒤 병실을 나갔다.병실에는 다시 적막만이 남았다.또 병원이었다.또다시 몸이 버텨주지 못했다.‘병원만 오면 돈 나가는데...’민윤서는 휴대전화를 들어 은행 앱을 실행했다.잔액을 확인하는 순간, 화면에 떠오른 숫자에 흠칫했다.[117,400원]민윤서는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뻐근하게 조여 오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친부모를 다시 만난 뒤부터 민윤서의 지갑 사정은 줄곧 빠듯했다.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월급 대부분이 친부모의 생활비로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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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손목을 짓누르는 옥팔찌의 무게가 민윤서에게는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고 모욕감마저 느껴졌다.신태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민윤서는 손을 들어 팔찌를 풀었다.그리고 복도 옆 선반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동정은 필요 없어.”말을 마친 민윤서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그 순간, 등 뒤에서 신태현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병원에는 왜 온 거야?”민윤서는 걸음을 멈췄다. 순간 등까지 꼿꼿하게 굳어버린 채 목이 멨다.“무슨 일로 왔든 당신이 상관할 일 아니야.”신태현의 말이 진심 어린 걱정이든, 체면을 위한 형식적인 말이든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민윤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갔다.민윤아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신태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윤서는 그냥 저혈당 때문에 잠깐 온 거래. 크게 아픈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민윤서는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짐부터 챙기기 시작했다.검사도 모두 끝났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자칫 신태현과 또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한 일만 생길 게 뻔했다.민윤서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대충 정리한 뒤 진도현에게 인사를 남기고 병원을 나섰다.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경을 바라보는 내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이혼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법적인 절차까지 마무리되어야만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민윤서는 도저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남편이 언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택시는 오래된 주택가 골목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오랫동안 팽팽하게 조여 있던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선희가 반갑게 민윤서를 맞았다.“윤서야, 웬일이야?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왔어?”민윤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일이 좀 많았어요. 며칠은 집에서 지내려고요.”말을 마친 민윤서는 기운이 다 빠진 사람처럼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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