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조용한 아내의 반격: Chapter 11 - Chapter 20

28 Chapters

제11화

소율은 쪼그려 앉아 재현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재현이 세차게 뿌리쳤다.소율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빠, 이러지 마. 내 뱃속에 있는 애도 오빠 애잖아.”“네가 뭘 알아!” 재현이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눈이 시뻘겠다. “리신그룹이 회사 지분의 40%를 갖고 있어. 은행 대출도 전부 서린이 자산이 담보였다고!”순간, 소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무, 무슨 소리야?”“서린이 없으면, 경제적으로 난 아무것도 아니야.”그 말을 내지르고, 재현 자신도 멍해졌다.리신그룹의 투자를 처음 따냈던 해가 떠올랐다. 축하연에서 만취했던 그날.서린이 대신 술잔을 받아 주는데, 어느 거래처 사람이 실없이 던졌다. “도 대표는 복도 많으셔. 유씨 집안 따님과 결혼했으니, 남들보다 20년은 덜 고생하고 앞서가시겠어.”서린은 그 자리에서 표정을 굳히더니, 재현이 제 실력으로 투자를 따낸 사람이라고 모두 앞에서 못 박았다.밤늦게 돌아와 속을 다 게워 내던 재현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서린은 따뜻한 수건으로 살살 닦아줬다.“여보, 나 절대 당신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재현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웃다가, 끝내 눈물이 터졌다.처음 서린 집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서린 아버지가 찻잔을 탁자에 탁 내리쳤다. “우리 서린이는 어려서부터 순은으로 만든 식기만 썼네. 자넨 내 딸한테 스테인리스를 쥐여 줄 셈인가?”그때 서린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전 사람한테 시집가는 거지, 식기한테 시집가는 게 아니에요.”돌아오는 차 안에서 재현은 남몰래 다짐했다. 반드시 더 잘되고 말겠다고.하지만... 그는 언제부터 변해 버린 걸까?힘 하나 안 들이고 투자를 따냈던 그때부터였을까? 주변에서 처가 덕에 먹고산다고 비웃는데도,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서린이 좋은 뜻으로 인맥을 넓혀 주려 경매장에 데려갔던 그때부터였을까? 재현은 공주병이냐고, 인맥은 술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쌓을 수 있다고 비아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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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재현이 회사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프런트에서 일하는 직원인 정연이 허둥지둥 상자에 짐을 담고 있었다.“대, 대표님!” 정연의 손이 떨렸고,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재현은 절반 넘게 비어 버린 사무 구역을 둘러봤다. “사람들은?”“민 이사님은 애가 열이 난다고 하셨고, 김 부장님은 본가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정연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회의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재현이 넥타이를 잡아당겨 매듭을 늦췄다. “리신그룹이 왜 투자를 뺐어? 사실대로 말해.”기획팀장이 고개를 떨궜다. “지난주 업계 평가에서... 저희가 경쟁사에 3% 뒤졌습니다.”“왜 아무도 보고 안 했어?”“매번 유서린 이사님이 저희 데이터를 봐주셔서...” 재무팀장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재현은 서류철을 홱 젖혔다. 종이가 눈발처럼 흩어졌다.자사 기획안과 경쟁사 것을 나란히 펼쳤다.같은 제품인데, 저쪽의 원가 관리표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정밀했고, 이쪽은 기초 데이터조차 맞지 않았다.“다들 퇴근해.” 재현의 목이 심하게 쉬어 있었다.마지막 한 사람까지 떠나자, 재현은 복도를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탕비실 전자레인지엔 아직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밥 데울 땐 3분 넘기지 말 것. -서린]작년 겨울, 재현이 위출혈로 입원했을 때였다. 서린은 매일 점심 회사로 와서 직원들 식사를 챙겼다. 다들 제때 밥 먹는지 지켜보겠다는 이유 하나로.회의실 긴 테이블 끝. 첫 투자 유치에 실패하고 재현이 컵을 내동댕이쳤던 자리.그때 서린은 바닥에 쪼그려 깨진 컵의 파편을 줍다가 손가락이 베여 피가 나면서도, 웃으며 다독였다. “다음엔 분명 더 잘될 거야.”재현은 자기 집무실로 들어갔다.서랍 맨 밑바닥에 사진 한 장이 눌려 있었다. 창립하던 날, 흰 셔츠 차림의 서린이 재현과 함께 회사 로고를 붙이던 사진.셔터가 눌려 사진이 찍히던 그 순간, 서린은 발끝을 들어 재현의 옷깃을 매만져 주고 있었다. 눈빛이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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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빗물이 재현의 이마를 타고 눈으로 흘러들었다. 인도에 선 재현의 머릿속에, 그날 어깨를 짓눌려 무릎 꿇던 서린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도재현, 왜 단 한 번도 날 믿어 주지 않아?”그 한마디가 칼처럼 가슴에 박혔다.‘그 어린 남자애는 왜 망설임도 없이 서린이를 지목했지?'‘서린이는 왜 끝까지 자기가 민 게 아니라고 했을까?'서린의 성격이라면, 정말 잘못했을 땐 반드시 인정하는 사람이었다.언제나 그렇게 떳떳하고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재현은 몸을 돌려 병원으로 내달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소율에게 따져 물어야 했다....병원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소율의 병실이 가까워지자 재현은 걸음을 늦췄고, 안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엄마, 걱정 마. 지금은 그냥 충격받아서 그래.” 소율의 목소리엔 우쭐함이 배어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져. 그 사람 지금 나한테 완전히 빠져 있으니까.”문손잡이에 얹힌 재현의 손이 멎었다. 문을 열지 않았다.“엄마가 못 봐서 그래. 그 꼬마 몇 마디에, 유서린이 한 짓이라고 홀랑 믿더라니까.”소율의 웃음소리가 바늘처럼 재현의 귀를 찔렀다. “애한테 사탕 몇 알 쥐여 줬더니 시키는 대로 술술 말하던데 뭐. 도재현 그 바보, 유서린을 내 앞에 무릎 꿇리고 억지로 사과까지 시켰잖아.”재현의 주먹이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조여들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깊게 파고들었다.전부 소율의 거짓말이었다. 재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린을 억울하게 몰아붙인 거였다.수화기 너머에서 소율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이어진 소율의 대답이 재현을 얼음 구덩이로 떨어뜨렸다.“애 문제는 걱정 마. 어차피 기회 봐서 지울 거야. 그때 가서 유서린이 해코지했다고 하면 되지.”재현의 숨이 멎었다.“아이 참, 애초에 증거 남기라고 시킨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이 애는 누구 씨인지도 몰라.” 소율이 투덜거렸다. “임신할 줄 내가 알았어? 엄마가 그 남자들 몇 명을 동시에 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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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도재현은 비틀거리며 집 문을 밀고 들어섰다. 손가락으로 벽을 한참 더듬고서야 스위치를 찾았다.딸깍-불빛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하지만 여느 때처럼 소파에서 일어나 맞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왔어?’ 하던 그 다정한 목소리도.재현은 현관에 선 채 한참 그대로 서 있었다. 무섭도록 고요한 집 안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웅웅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위가 별안간 뒤틀리듯 통증이 찾아왔다. 재현은 허리를 구부린 채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냉장고 문을 열자 찬 공기가 훅 끼쳤다. 안엔 밀폐 용기 몇 개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맨 앞의 갈비찜은 벌써 닷새째였다. 양념이 표면에 허옇게 굳어 있었다.재현의 손이 심하게 떨려, 하마터면 용기를 놓칠 뻔했다.그날 밤이 떠올랐다. 서린은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반찬 위에 한참 동안 들고 있다가, 결국 나물 한 젓가락만 집었다.“입에 안 맞아?” 그때 재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좀 달아.” 서린이 나직이 말했다. “나 단 음식 안 먹는 거 알잖아.”그제야 떠올렸다. 낮에 소율의 밥을 차려 주다가 버릇처럼 설탕을 넣었다는 걸.소율은 평소에 단맛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나물무침에도 설탕을 한 숟갈 넣어야 했다.그런데 실수로 서린에게도... 같은 입맛의 음식을 차려 준 거였다.“다음에 다시 해 줄게.” 재현은 건성으로 받아넘겼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소율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재현은 젓가락을 내던지고 나갔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재현은 차갑게 식은 갈비 한 점을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달착지근한 양념이 목구멍에 들러붙어 잘 넘어가지 않았다.기계처럼 씹었다. 한 점, 또 한 점... 턱이 시큰거릴 때까지.“우욱...” 속이 뒤집혔다. 재현은 개수대에 엎드려 속엣것을 다 게워 냈다.거울 속 남자는 두 눈이 시뻘겋고, 입가엔 양념까지 묻어 있었다. 광대 꼴이 가관이었다.“난 사람도 아니야!” 재현은 별안간 제 뺨을 세게 후려쳤다. 텅 빈 주방에 맑은소리가 울려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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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재현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어둑한 방 안에서 노트북 화면의 푸른빛이 유난히 눈을 찔렀다.메일 한 통이 와 있었다. CCTV 영상이었다.재생 버튼을 누른 재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화면 속에서 소율이 발을 까딱거리며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오빠, 오빠가 발라 줘.”영상 속 자신이 웃으며 매니큐어를 받아 들고, 서툰 손길로 소율의 발톱에 발라 주고 있었다.숨이 막힌 건 그다음 장면이었다.매니큐어를 다 바른 소율의 발등에, 자신이 고개 숙여 입을 맞추고 있었다.탁!재현은 노트북을 거세게 덮었다.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렸다.이 장면을 보는 서린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메일 정보를 확인했다. 발송 시각은 일주일 전이었다.덜덜 떨며 네일숍에 전화를 걸었다. “왜, 왜 유서린이 CCTV를 확인한 겁니까?”[도재현 대표님이시죠?]직원이 목소리를 알아본 듯했다. [그날 유서린 고객님께서 멤버십 카드 잔액이 이상하다고 하셔서, 규정대로 결제 내역을 조회해 드렸는데 460만 원 결제 건이 나왔거든요.]460만 원.재현은 문득 떠올렸다. 그날 소율이 네일을 다 받고 나서, 매니큐어 바르는 법을 가르쳐 준 아티스트에게 팁을 쏘라고 졸랐던 것을.재현은 아무 생각 없이 카드를 긁었다. 그게 서린의 카드 멤버십 계정인 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기억이 갑자기 선명해졌다.그날 밤 집에 돌아왔을 때, 서린이 평소답지 않게 네일 숍 얘기를 꺼냈다.“오늘 네일 받으러 갔었어. 당신이 준 멤버십 카드로.” 그때 서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직원이 그러던데, 지난주 목요일에 당신이 어떤 여자애를 데리고 왔었다며?” 재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이 한 박자 내려앉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옆집 장경순 여사님의 딸이야.” 그때 서린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고개를 든 서린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응, 알았어.”이제 와 돌이켜 보면, 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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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재현이 발로 병실 문을 걷어찼다. “오빠?” 소율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그 얼굴엔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 밤에 웬일이야? 아기가 보고 싶었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현은 소율을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소율은 슬리퍼 신을 새도 없이 병실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뭐 하는 거야! 놔!” 소율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손톱이 재현의 팔뚝에 핏자국을 냈다.재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쇠집게 같은 손으로 소율의 손목을 콱 움켜쥔 채, 채혈실까지 끌고 갔다.당직 의사가 놀라 일어섰다. “도, 도재현 대표님?”“이 여자 피 뽑아요.” 재현이 소율을 의자에 짓눌렀다. “지금. 당장이요.”소율이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떴다. “미쳤어?”“그래, 미쳤어.” 재현이 차갑게 웃었다.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네 헛소리를 믿을 만큼 미쳤고,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서린일 다치게 할 만큼 미쳤지!”간호사가 벌벌 떨며 채혈 바늘을 가져왔다. 소율이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안 돼! 내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단 말이야!”재현이 소율의 어깨를 콱 눌렀다. “서린이 피 뽑힐 땐, 누가 서린 뱃속의 아이를 걱정 한 번이라도 해 줬어?”바늘이 혈관을 파고들었다. 피가 관을 타고 혈액 팩으로 흘러들었다.소율이 아파서 숨을 헐떡였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됐다. “그만해, 제발.”“200cc입니다.” 간호사가 조그맣게 알렸다.“계속해요.” 재현은 혈액 팩을 노려봤다. “그때 서린이한테 뽑아 간 만큼, 지금 전부 돌려받을 거야. 이 여자 몸에 서린이 피를 남겨 둘 순 없어.”소율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오빠, 아기, 아기는 진짜 오빠 애야. 오빠는 자기 애를 또 한 번 오빠 손으로 죽일 거야?”재현이 몸을 숙여 소율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럼 친자 검사부터 하지.”소율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지금. 당장.” 재현이 고개를 돌려 의사에게 소리쳤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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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서린이 화월시의 본가 앞에 서자, 아버지 유정호가 성큼성큼 달려 나와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어쩌다 이렇게 야위었어?” 유정호의 목소리가 메었다. 손바닥으로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어릴 적 달래 주던 그대로였다.익숙한 유정호 냄새에 서린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빠, 제 눈이 삐었나 봐요.”“쓸데없는 소리!” 유정호가 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엄지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놈이 내 딸한테 못 미쳤던 거지. 참, 윤씨네 아들이 내일 귀국한다더라. 어릴 때 맨날 너 쫓아다녔잖아?”서린은 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저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세요.”“옛 친구 얼굴 본다 생각해.” 유정호는 딸의 어깨를 감싸고 안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돌려 가사도우미에게 외쳤다. “주 여사! 고아 놓은 전복죽 좀 내오고, 주방에 일러 둬. 지금부터 한 달 동안 모든 음식에 설탕 넣지 말라고!”방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연보라색 침대 시트, 창가의 화장대, 침대맡의 작은 무드등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서린은 문득 재현과 꾸민 신혼집이 떠올랐다.제 손으로 하나하나 채워 넣은 그 집은... 지금 어떤 꼴이 되었을까?한숨을 내쉬며 아랫배를 쓸었다.재현이 한눈만 팔지 않았다면, 아이가 태어났다면, 분명 행복했을 텐데...아쉽게도, 도재현은 그런 남자가 못 됐다.핸드폰에 뉴스 알림이 떴다. [도원테크 주가 폭락, 창업주 도재현 길거리 만취 목격]기사 사진 속 재현은 수염이 덥수룩한 채 회사 앞에 서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서린은 사진을 삼 초쯤 들여다보다가, 화면을 끄고 핸드폰을 던져 놓았다.“아가씨, 식사하세요.” 주미선이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다이닝 룸엔 능이백숙 냄새가 그윽하게 퍼져 있었다.서린은 상 가득한 요리를 바라봤다. 담백한 농어찜, 새우찜, 데친 나물... 전부 서린이 좋아하는 심심한 맛이었다.유정호는 서툰 손으로 새우를 까 주고 있었다. 손에는 온통 새우 껍질이 가득했다.“아빠, 제가 할게요.”“가만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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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서린은 윤씨네 저택 앞에 서서, 초인종 위에 손가락을 들고 누르려고 하다가 잠시 망설이다 꾹 눌렀다.문은 거의 곧바로 열렸다. 윤구남의 인자한 얼굴이 문가에 나타났다.“서린아!” 윤구남은 덥석 서린의 손을 잡았다. 눈이 실처럼 휘었다. “이제야 왔구나! 우리 집 저 녀석은 어제부터 벌써...”“아버지!” 윤민우가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귓불이 새빨갰다. “쓸데없는 말씀 마세요.”윤구남은 껄껄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끄럽긴. 네 책상 위 사진들, 내가 못 본 줄 알아?”고개를 돌려 서린에게 말했다. “이 미련한 놈이 귀국할 때마다 네 얘기만 하더니, 네가 결혼해서 떠난 뒤론 집에 오려고도 안 하더라.”난처해 어쩔 줄 모르는 민우를 보다 못해, 서린이 대신 수습했다. “아저씨, 저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앞으로 자주 놀러 올게요.”“그래, 그래. 젊은 사람들끼리 얘기 나눠.” 윤구남은 의미심장하게 아들을 한 번 보고는...“난 주방에 다과 좀 보고 오마.”거실이 잠깐 조용해졌다.민우가 헛기침했다. “좀 걸을까? 본가 뒤뜰에 분수를 새로 놨거든.”초여름 햇살이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스며들어, 바닥에 얼룩덜룩한 빛 그림자를 드리웠다.두 사람은 돌길을 나란히 걸었다. 사이엔 적당한 거리가 있었다.어색해진 서린이 뭐라도 말을 꺼내려는데, 민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기억나?” 민우가 불쑥 저편의 정자를 가리켰다. “너 10살 때 저기서 기어이 공주 놀이 하겠다면서, 날 네 호위 기사 시켰잖아.”서린이 풋 웃었다. “그래 놓고 네가 일부러 자빠지면서 날 진흙탕에 끌고 들어갔지!”“그건 네가 옆집 오씨네 아들이랑 결혼할 거라고 해서 그랬지!” 민우가 불쑥 내뱉고는, 멋쩍게 코를 문질렀다. “어릴 땐 참 바보 같았어.”“그러게, 진짜 바보 같았지.” 서린은 눈에 익은 풍경을 바라봤다. 굳어 있던 어깨가 저도 모르게 풀어졌다.“근데 그때 내 가방에 개구리를 대체 몇 마리나 넣은 거야?”“스물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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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서린은 드레스룸에 서서 그 연보라색 원피스를 손끝으로 가만히 쓸었다.숨을 깊이 들이쉬고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봤다.‘다행이네. 허리선이 여전히 꼭 맞아.’“오, 이렇게까지 차려입고?” 유정호가 커피잔을 든 채 문틀에 기대서서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데이트는 한 달 뒤에나 생각해 본다더니?”“동창회거든요!” 서린은 귓불이 달아올라, 가방을 낚아채고 문밖으로 내달렸다. “미선 이모님이 어제 다려 놓은 흰 재킷은 어디 있어요?”문을 밀치고 나가다가, 하마터면 사람 벽에 부딪힐 뻔했다.민우가 계단 아래 서 있었다. 흰 셔츠 위에 연보라색 니트를 걸치고, 손엔 따뜻한 두유까지 들고서.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굳었다.“너...” 서린이 민우의 옷을 가리켰다가, 제 원피스를 내려다봤다.민우의 귀가 눈에 띄게 빨개졌다. “우연이야. 진짜 우연이라니까!”허둥지둥 두유를 내밀었다. “네가 좋아하는 그 집 거. 설탕 한 스푼 더 넣었어.”서린은 컵을 받아 들었다. 온기가 컵을 타고 손바닥으로 스몄다.문득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생리통이 올 때마다 민우는 몰래 담을 넘어 나가 이 집 따뜻한 두유를 사다 줬었다.민우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동창회 장소는 대학 시절 단골이던 그 샤브샤브집이었다.룸 문을 열자, 옛 동창들의 야유가 지붕을 들썩일 듯 터져 나왔다.“대박! 둘이 맞춰 입고 온 거지?” 과대표가 커플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졸업 때 내기 누가 이겼냐? 내가 이 둘은 무조건 된다고 했지!” 총무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웃었다.서린은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민우 옆자리에 앉았다. 두 뺨이 발그레했다.남자 동창들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폭로전을 시작했다.“윤민우, 기억나냐? 2학년 때 서린이 생일 영상 만든다고 밤새웠는데 USB가 바이러스 먹어서 다 날아갔잖아. 남자 기숙사 화장실에 쪼그려서 새벽까지 울었지?”“그때 서린이 열났을 때는 어떻고! 어떤 놈이 중간고사 째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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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집에 돌아온 서린은 문득 내키는 대로 안방 카펫에 앉아, 무릎 위에 대학 시절 앨범을 펼쳤다.노르스름한 스탠드 불빛에 사진마다 아련한 빛이 덧입혔다. 서린은 빛바랜 모서리를 손끝으로 쓸었다.“이건...” 졸업 여행 단체 사진을 뽑아 들던 서린이 우뚝 굳었다.사진 속 자신은 맨 앞줄에서 브이를 그린 채였는데, 맨 뒷줄의 민우는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았다.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시선이 인파를 건너, 다정하게 서린에게 닿아 있었다.서린은 서둘러 다른 사진들로 시선을 넘겼다.체육대회에서 오래달리기를 마치고 뻗어 버린 서린에게 민우가 물을 건네던 장면. 우연히 찍힌 그 사진 속 눈빛엔, 안쓰러움이 인화지 밖으로 넘칠 듯 가득 담겨 있었다.토론 대회 축하연에서 서린이 잔을 들고 크게 웃을 때, 구석의 민우는 카메라를 든 채 입가에 미소를 물고 서린만 바라보고 있었다.“몰랐던 게 아니라... 내가 안 본 거였구나.” 서린의 목이 메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앨범 마지막 장엔 뜯지 않은 편지 한 통이 끼워져 있었다. 봉투엔 ‘서린에게’라고, 민우의 반듯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핸드폰이 울렸다. 용운시 지역번호의 낯선 번호였다.서린은 머뭇거리다가 받았다. “여보세요?”수화기 너머엔 희미한 전자음과, 어렴풋이 짓눌린 숨소리뿐이었다.“여보세요?” 한 번 더 묻던 서린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저도 모르게 잠옷 자락을 움켜쥐었다.3초의 침묵 끝에 전화는 끊겼다.서린은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봤다.용운시. 서린에게 달콤함과 아픔이 공존하는 도시. 재현과 함께 살았던 곳.‘자기가 서명한 게 이혼 서류였다는 걸 이제야 알아챈 걸까?’‘아니면 회사가 무너져서 막다른 길에 몰린 걸까?’탁!생각에 잠겨 있는데, 창밖에서 가벼운 소리가 났다.커튼을 젖히니, 민우가 아래에서 고개를 젖히고 서 있었다.창문이 열리자 민우는 웃으며 손에 든 조약돌을 흔들어 보이고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내일 쇼핑?”밤바람이 달아오른 뺨을 스쳤다.서린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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