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미친 집사들 연애에 끼어든 냥이: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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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마당의 경계선에 내려앉은 밤

퇴근 후 피츠로이 저택의 뒷바당은 낮 동안의 소란이 무색할 만큼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멜버른 특유의 서늘한 밤공기가 가라앉을 무렵,나의 집사 캘런은 평소 입던 편안한 트레이닝복 대신 빳빳하게 각이 잡힌 남색 셔츠를 입고 마당을 서설였다.그의 손에는 작은 구급상자와 얼음주머니가 들려 있었다."기네스, 이 형님이 지금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걸까?"캘런이 내 정수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내가 보기에 녀석의 상태는 아주 가관이었다.5분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고,옆집 문이 열리는 기척이 없는지 귀를 쫑긋거리는 꼴이 영락없이첫 데이트를 앞둔 사춘기 소년 같았다.정형외과 의사로서 환자의 예후를 살핀다는 핑계는이미 녀석의 붉어진 귀 끝에서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마침내 옆집 아델의 현관문이 열리고 그녀가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아델은 편안한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지만,평소와 달리 갈색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려 묘하게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치자, 어제 트램 안에서의 숨 막히던 밀착의 기억이떠올랐는지 순간 분위기가 어색하게 얼어붙었다."늦어서 미안해요, 포스터 씨. 단원들 악보를 체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뒤퐁 씨. 저도 방금 전에 나왔습니다."거짓말 마라, 인간아. 집사 너는 30분 전부터 마당 잔디를 밟으며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잖아.나는 한심하다는 듯 꼬리를 살랑이며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담벼락 구석에는 이미 블랑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하얗고 가녀린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오드아이 눈동자를 반짝이는 블랑의 모습에,나는 슬그머니 녀석의 옆으로 다가 가서 몸을 밀착시켰다.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블랑의 몸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나의 검은 털 속으로 스며들었다."기네스 오빠, 우리 집사 손목 진찌 만이 부었다옹. 아까 낮에 피아노 치다가 아프다고 찡찡 거리더라고."블랑이 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나는 블랑의 하얀 앞발을 내 검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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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얼음주머니 너머의 시선

"차갑습니까?"캘런의 목소리는 평소의 호통치던 투와 달리 낮고 부드러웠다.아델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을 받치고 있는 그의 손은유독 크고 단단해 보였다.의사로서 매일 메스를 잡고 환자를 돌보는 정교한 손길이,지금은 오직 아델 한 사람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아니요... 시원하고 좋아요. 포스터 씨 손이 생각보다 따뜻하네요."아델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나지막하게 답했다.얼음주머니를 누르는 캘런의 손가락 끝에 은근한 힘이 들어갔다.가까이서 마주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채 50cm도 되지 않았다.아델의 긴 속눈썹이 밤바람에 가늘게 떨렸고,캘런은 대답 대신 목울대를 크게 출렁이며 시선을 엄한 곳으로 돌렸다."이 정도 타박상은 초기에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지휘를 하려면 손목 스냅을 많이 쓰실 텐데, 당분간은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손은 목숨과도 같아요. 내일 당장 중요한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있는데 걱정이네요."아델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낭패감이 섞여 들었다.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예민함을 잠시 내려놓은 채,눈앞의 의사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었다.캘런은 그녀의 걱정 어린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자신도 모르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필요하다면... 내일 리허설 장소까지 제가 데려다줄 수도 있습니다. 운전할 때 손목을 쓰면 무리가 가니까요."그 말을 던진 캘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아델 역시 예상치 못한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담벽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이 내 어깨를 툭 쳤다."와, 기네스 오빠... 저 덩치 큰 인간이 드디어 용기를 냈어! 근데..... 우리 집사가 과연 승낙할까?""글쎄, 저 파리지앵은 자존심이 세서 쉽게 오케이 하진 않을 걸."나는 블랑의 귀 끝을 살짝 핥아주며 진정시켰다.인간들의 밀당은 고양이들의 직선적인 연애와 달라서템포가 아주 느렸다.하지만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완연히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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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멜버른의 아침을 여는 소나기

다음 날 아침, 멜버른의 하늘은 어김없이 그 악명 높은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새벽녘까지만 해도 은은한 푸른빛을 띠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아침이 밝아오기가 무섭게 무겁고 어두운 먹구름이 대지에 낮게 깔렸다.이윽고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듯,굵고 거센 장대비가 피츠로이 거리에 늘어선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저택들을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창문 유리를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는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연주처럼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나는 그 서늘하고도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거실 한구석에 놓인 부드러운 소파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웅크렸다."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하필 오늘 같은 날에."캘런은 진작에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지만,어째서인지 현관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연신 서성거리고 있었다.깔끔하게 다려진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시선은자꾸만 투명한 창문 너머, 정확히는 옆집 마당 쪽을 향해 있었다.아마도 어제 노을이 질 무렵 마당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슬쩍 건넸던 그 제안이못내 마음에 걸리고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녀석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놓았다가,행동을 취하려다 관두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했다.휴대폰 액정 화면을 켰다 끄는 그의 손끝에는 망설임이 가득 묻어났다.결국 깊은 한숨을 무겁게 내쉰 캘런은현관 거치대에 걸려 있던 커다란 우산을 챙겨 들고는 마침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냐옹... 냐아옹...그때였다.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옆집 마당 구석진 곳으로부터블랑의 가냘프고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내 예민한 귀를 강하게 자극했다.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난청인 블랑에게이 엄청난 폭우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을 것이다.대지를 뒤흔드는 빗소리의 강한 진동과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의 압박은녀석에게 엄청난 공포와 긴장감을 심어주었음이 분명했다.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나는 캘런이 문을 열고 한 발짝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움직였다.번개 같은 속도로 거실을 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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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Car Pool 이라는 썸.

"뒤퐁 씨! 우산 같이 씁시다! 그렇게 가다간 리허설 룸에 도착하기도 전에 생쥐 꼴이 될 겁니다!"마당 한복판에서 캘런의 웅장하고 묵직한 목소리가쏟아지는 장대비의 소음을 뚫고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캘런은 평소 환자들을 대할 때보다 훨씬 더 급한 걸음걸이로,커다란 검은색 장우산을 펼친 채 아델의 현관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가 있었다.달칵.마침 문이 열리며 깁스를 가볍게 한 손목으로커다란 가방을 간신히 든 아델이 나타났다.안 그래도 쏟아지는 소나기 때문에 트램 정류장까지 어떻게 걸어가야 하나,멜버른의 악명 높은 빗길에 넘어져 손목을 더 다치면 어쩌나..그녀의 하얗고 예민한 얼굴엔 난처함과 불안함이 가득 차 있던 참이었다."포스터 씨...?! 정말 괜찮겠어요? 병원 출근길이랑 방향이 다르지 않나요? 저 때문에 지각하시는 거 아니에요?""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빗길에 이 상태로 나갔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제 치료 계획이 꼬이니 제 손해입니다. 환자의 안전을 끝까지 책임지는 건 제 철칙이니까요. 시간 없으니 어서 타십시오."캘런이 짐짓 무뚝뚝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아델의 가녀린 어깨 위로 우산을 넓게 기울였다.그 바람에 캘런의 태평양처럼 넓은 오른쪽 어깨와 셔츠 소매는쏟아지는 장대비에 사정없이 젖어 들어 순식간에 진한 남색으로 변해갔지만,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든든하게 아델의 옆을 지켰다.아델은 빗물에 빠르게 젖어가는 그의 묵직한 어깨와,자신을 완벽하게 비로부터 차단해 준 커다란 우산 그림자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의 차가운 파리지앵 자존심이그의 묵직한 호의 앞에 묘하게 흔들리는 순간이었다.두 인간이 캘런의 묵직한 오프로드용 SUV 차량에 올라타는 모습을,나와 블랑은 처마 밑에 나란히 웅크린 채 지켜보고 있었다."아항, 기네스 오빠. 저거 데이트 맞지? 겉으로는 카풀이니 환자 보호니 핑계를 대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완전 100% 데이트인데?!"블랑이 빗물에 젖어 촉촉해진 오드아이 눈동자를 반짝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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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빗방울이 그리는 멜로디

캘런의 차 안은 조금 전까지 온몸을 두드리던 세찬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차단되어, 기묘할 정도로 무겁고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고급 suv의 견고한 방음 장치는 외부의 요란한 폭우를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지만, 덕분에 차 안의 공기는 두 사람의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오직 유리창 위를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와이퍼만이 하고 규칙적인 마찰음을 내며,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가로놓인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을 겨우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캘런은 커다란 운전대를 잡은 두 손에 잔뜩 힘을 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전방의 흐릿한 도로만을 주시했다. 평소의 당당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굳게 다문 입술과 경직된 어깨선에서 그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반면 조수석에 앉은 아델은 차창 밖으로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투명한 빗방울의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끈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혀 부서지는 모습이 마치 두 사람의 복잡한 속내 같았다. "저... 포스터 씨." 길고 밀도 높은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아델이었다. 조용히 가방끈을 매만지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캘런의 옆모습을 눈길로 좇았다. "네, 말씀하십시오." 캘런은 시선은 정면에 고정한 채, 평소처럼 묵직하면서도 어딘가 평정심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에서 나는 냄새가 참 좋네요. 평소에 집에서 나던 그... 비릿한 냄새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정말 좋네요." 아델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담벼락 너머로 매일같이 풍겨오던 단백질 보충제와 닭가슴살의 냄새를 은근히 꼬집는, 그녀 나름의 귀여운 선공이었다. 정곡을 찔린 캘런은 순간 당황한 듯 하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짧은 헛기침을 뱉었다. 그의 단단한 턱끝이 미세하게 굳어졌다가 풀렸다. "아, 그 냄새는... 아시다시피 집에서는 보충제 향이 좀 과하게 밸 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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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비밀기지

인간들이 커다란 쇳덩이 마차에 몸을 싣고 빗속으로 소리 없이 떠난 뒤,마당에 남겨진 나와 블랑은 세찬 비바람을 피해캘런의 집 차고 구석진 곳에 숨겨진 우리들만의 비밀 기지로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그곳은 평소 캘런이 쓰지 않는 오래된 매트리스와 두툼한 겨울용 담요들이겹겹이 쌓여 있는 장소로,외부의 시선과 차가운 빗줄기를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우리들만의 완벽하고 아늑한 아지트였다.어둡고 캄캄한 차고 내부였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와! 여기 진짜 아늑하고 따뜻하다, 기네스 오빠!"비밀 기지에 발을 들이자마자 블랑은마치 철없는 아기 고양이처럼 신이 나서 꼬리를 바짝 세웠다.그러고는 푹신한 담요 위를 이리저리 뛰어나니며 분주하게 꾹꾹이를 해대기 시작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장대비에 젖어 축축하게 뭉쳐 있던 하얀 털들이,차고 안의 따스하고 건조한 공기 덕분에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언제 비를 맞았냐는 듯다시 눈부시게 하얗고 보송보송한 솜뭉치의 모습으로 기적처럼 돌아와 있었다.나는 커다란 매트리스 한구석에 편안하게 엎드린 채,내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는 블랑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묘생 5회차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정말 수많은 다양한 고양이들을 만나왔지만,이토록 투명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녀석은 내 묘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세상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커다란 신체적 결핍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녀석은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온몸으로 싱그러운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찡해질 만큼 사랑스러웠다."블랑, 장난 그만치고 이리 와. 아직 속 털은 다 안 말랐어."내가 소파 위에서 고개를 들어 나지막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자,귀가 들리지 않는 블랑은 내 입 모양과 따스한 눈빛을 정확하게 읽어내기라도 한 듯그르렁거리며 냐하하 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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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빗속의 리허설 룸

캘런의 묵직한 SUV가 부드럽게 멈춰 선 곳은 멜버른 시내 중심가,유서 깊은 빅토리아풍 가로수길 사이에 위치한오래된 리허설 룸 앞이었다.빗줄기는 아까보다 조금 가늘어졌지만,여전히 유리창을 두드리며 불투명한 수막을 형성하고 있었다.아델이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려고 하자,캘런이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몸짓으로 먼저 차에서 내려 장우산을 펼쳤다.탁.캘런이 아델이 내릴 조수석 문을 열고 우산을 넓게 기울였다.그의 넓은 어깨 절반이 다시 한번 빗물에 젖어 들었지만,그의 시선은 오직 아델의 가녀린 발끝과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고마워요, 포스터 씨. 덕분에 빗길에 고생하지 않고 제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네요."아델이 우산 밑으로 들어서며 캘런을 올려다보았다.지휘를 앞두고 있어서인지그녀의 눈빛에는 평소 집에서 싸울 때와는 다른,예술가 특유의 진지함과 예민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그 모습이 캘런의 가슴을 묘하게 자극했다."끝나는 시간이 언제입니까?"캘런이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네..?! 아.. 그게.. 저 보통 리허설은 대여섯 시간쯤 걸리니까... 오후 4시쯤에는 끝날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마침... 그 시간에 이 근처 대형 병원에서 정형외과 세미나가 있습니다. 의사로서 환자의 손목 경과를 주기적으로 체크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마칠 때쯤 제가 이 앞으로 다시 오겠습니다. 빗길에 깁스를 한 채 돌아가는 건 의학적으로 절대 권장하지 않으니까요."캘런이 짐짓 엄숙하고 전문적인 의사의 대사를 내뱉었다.세미나는 무슨,오늘 그의 스케줄은 본원 진료 외에는 텅 비어 있다는 것을묘생 5회차인 나는 알고 있었지만,아델은 그의 눈물겨운 거짓말과 뻔뻔한 핑계를 눈감아주기로 한 듯입가에 생긋 화사한 미소를 띄웠다."오후 4시요. 그럼 그때 봐요, 미스터 포스터. 늦으시면 번호 저장한 걸로 잔소리 폭탄 문자 보낼 테니까 시간 맞춰 오세요."아델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리허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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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솜방망이와 젤리의 대화

"기네스 오빠, 오빠는 왜 그렇게 맨날 진지해?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꼭 묘생 다 산 할아버지처럼 말이야."어둑한 차고 안,오래된 담요 위에서 내 그루밍을 받던 블랑이갑자기 몸을 돌려 내 턱 끝을 제 분홍색 솜방망이로 툭툭 치며 물었다.귀가 잘 들리지 않는 녀석은 내가 내는 골골송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오드아이 눈동자를 호기심으로 가득 채운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난 실제로 세상을 많이 살았으니까 그렇지. 인간들의 그 부질없는 자존심 싸움이나 밀당을 보고 있으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거든. 그냥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돌아서 가는지 원."나는 짐짓 무게를 잡으며 나지막하게 야옹거렸다.비록 내 목소리가 블랑의 귀에 완벽하게 전달되지는 않겠지만,내 목의 떨림과 눈빛만으로도 내 뜻은 충분히 전해질 터였다."에이, 재미없어! 난 인간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이 제일 재밌는걸! 비가 와서 하늘이 쿵쾅거릴 때는 무서웠지만, 지금은 오빠랑 이렇게 따뜻한 곳에 있는 것도 좋고, 아까 먹은 연어 트릿 맛도 아직 입안에 남아있고! 난 그냥 기네스 옆에 있는 게 제일 좋아!"블랑은 철없는 아기 고양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내 까맣고 두툼한 젤리 발 위에자신의 하얗고 말랑한 솜방망이를 살포시 겹쳐 올렸다.흑과 백의 선명한 대비가 달빛이 새어드는 차고 바닥에 비쳤다.녀석의 발바닥에서 전해지는 미세하고 따뜻한 떨림이내 가슴속 가장 깊은 곳을 간지럽혔다.철이 좀 없으면 어떤가,세상의 소리를 조금 못 들으면 어떤가.묘생 5회차를 사는 동안 수많은 영리하고 도도한 고양이들을 만나봤지만,내 앞에서 이토록 순수하게 온 마음을 열고 웃어주는 존재는블랑이 처음이었다.녀석의 결핍은 오히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가장 투명한 사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블랑, 넌 참 대책 없이 밝아서... 그래서 다행이다."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블랑의 코끝에 내 코를 가볍게 맞대며깊은 '코 인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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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기다림 (오후 4시)

약속된 오후 4시가 되기 무려 30분 전부터,캘런의 거대한 SUV는 이미 시내 리허설 룸 앞 도로변에비상등을 켠 채 주차되어 있었다.평소라면 병원 연구실에서 논문을 보거나홈짐에서 쇳덩이를 들고 있었을 캘런이었다.하지만 지금 녀석은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탁탁 치며,차내 라디오 채널을 굳이 클래식 FM에 고정해 둔 채초조하게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브람스 교향곡 제1번이라... 지루하기 짝이 없군."입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캘런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유심히 들었다.매일 아침 옆집에서 들려오던 불협화음 같던 피아노 소리가,사실은 이 거대한 음악을 완성하기 위한 아델의 치열한 고독이었음을이제야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아델의 세계를 알고 싶고,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는대형견 집사의 무의식적인 변화였다.스르륵.정확히 4시가 되자 리허설 룸의 무거운 목재 문이 열렸다.악기 케이스를 든 단원들이 쏟아져 나왔고,그 중심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여전히 도도한 아델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걸어 나오다,도로변에 서 있는 캘런의 익숙한 차량을 발견하자마자얼굴에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릴 듯한 화사한 미소를 피워냈다."정말 시간 딱 맞춰 오셨네요, 미스터 포스터. 의사들은 다 이렇게 칼 같나요?"아델이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몇 시간 동안 깁스를 한 채 지휘봉을 잡느라손목뿐만 아니라 온몸의 진이 다 빠진 모습이었다.캘런은 조용히 차 뒷좌석에서 미리 준비해 둔 보온병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유기농 카모마일 티입니다. 리허설 후에 긴장된 근육과 신경을 이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설탕은 넣지 않았습니다.""와... 포스터 씨, 의외로... 정말로 세심한 면이 있네요. 험악하게 쇳덩이만 드는 분인 줄 알았더니, 정말 너무 감동이에요."아델이 보온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따뜻한 김을 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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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흑백 냥이들의 밀회

장대비가 완전히 그친 피츠로이의 밤하늘은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하고 맑았다.멜버른의 푸른 별들이 검은 장막 위에 보석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고,우리들의 서식지인 쌍둥이 저택의 붉은 벽돌 담벼락은차가운 달빛을 받아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집사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오늘 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침대 위에서 이불을 차고 뒤척이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겠지만,우리 흑백 고양이들은 이미 그들의 고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나는 캘런이 침실에서 끙끙거리는 사이,거실 창문 틈새로 블랑을 아늑한 소파 위로 이끌었다."기네스 오빠, 오늘 달 진짜 크고 밝다. 꼭 기네스의 황금빛 눈동자 같아."블랑이 넓은 창문 너머로 흘러드는 달빛을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녀석의 하얀 털이 달빛을 받아꼭 스스로 빛을 내는 야광 생명체처럼 신비롭게 빛났다.나는 대답 대신 블랑의 등 뒤로 다가 가,녀석을 감싸 안듯 백허그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자연스럽게 소파 위로 늘어진 내 검은 꼬리와 블랑의 하얀 꼬리가스르륵 얽히며, 완벽하고 선명한 흑백의 하트 모양을 그려냈다."블랑, 피곤할 텐데 이제 졸리면 자도 돼. 내가 밤새 지켜줄 테니까.""웅... 기네스 오빠 품은 냄새도 좋고 엄청 푹신해서 잠이 잘 와. 꼭 거대한 침대에 누운 것 같아."블랑은 내 가슴팍에 그 조그만 고개를 묻고,이내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녀석의 가슴뼈를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온기와 생명의 진동이나의 온몸을 따뜻하게 적셔왔다.묘생 5회차를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은 외롭고 쓸쓸한 밤을 지새웠지만,단 한 번도 이토록 완벽하게 충만하고 평화로운 밤은 없었다.침실에서 짝사랑의 열병으로 밤을 지새우는 불쌍한 집사들의 연애는아직도 제자리걸음 같지만,거실 소파 위의 우리 흑백 고양이들의 로맨스는이미 서로를 완벽하게 소유한 완성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인간들아, 제발 고양이들의 이 과감함과 속도감을 반만이라도 닮아봐라.우리는 이미 서로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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