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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Chapters

제1화

서랍 안에 차곡차곡 쌓인 수십 통의 연애편지.옷장 깊숙이 숨겨 둔 몰래 찍은 사진첩 몇 권.책장 한편을 채운 몇 년 치 일기장까지. 모두 짝사랑에 관한 것이었고, 전부... 도경환이라는 남자와 이어져 있었다.원희연은 그것들을 상자에 담아 아래층으로 옮겼다. 망설임 없이 불을 붙이자 상자 속 추억이 한꺼번에 타올랐다.주황빛 불길이 흔들리던 때, 뒤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원희연이 무심코 고개를 들자, 번듯한 조종사 제복을 입은 도경환이 서 있었다.비행을 마치고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래층에 있는 원희연을 발견한 도경환이 옅게 웃었다. “뭘 그렇게 태워?”도경환은 허리를 굽혀 아직 다 타지 않은 분홍색 봉투 하나를 주웠다.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연애편지? 연애편지도 써 봤어? 누구한테 쓴 건데?”원희연은 도경환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도경환은 웃으며 편지를 불길 속에 던지고 원희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됐어. 그냥 놀려 본 거야. 순진하게 굴긴.”“난 여자친구 옛날 일엔 관심 없고, 캐물을 생각도 없으니까, 다 태웠으면 얼른 들어와. 밖은 춥잖아.”말을 마친 도경환은 더 머물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도경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원희연은 시선을 거뒀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신경 쓰지 않는 걸까, 애초에 관심조차 없는 걸까?’편지봉투에는 도경환의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조금만 자세히 봤다면 알아챘을 것이다.그런데도 도경환은 편지를 불 속에 던졌다.원희연은 자신의 남자친구를 꼬박 10년 동안 짝사랑했다. 정작 도경환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15살 때, 원희연은 뛰어난 성적으로 특별 전학 기회를 얻어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그 무렵의 원희연은 외모를 꾸밀 줄도 모르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수수하다 못해 전혀 눈에 띄지 않았고, 존재감도 희미했다.도경환은 같은 반 남학생이었다.그때의 도경환은 손에 닿을 수 없이 멀리 있는 달처럼 빛났다.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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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원희연은 모든 물건을 태운 뒤에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바깥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자리를 지켰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도경환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만 끊임없이 진동했다.원희연은 진동을 끄려고 다가갔다가 실수로 메신저 화면을 열었다.화면을 가득 채운 건 도경환과 서라인이 주고받은 대화였다.[경환아, 정말 대단한 우연이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가 모는 비행기를 탈 줄은 몰랐어. 그렇게 제멋대로 살던 네가 위기 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기장이 됐다니.]도경환은 한참 뒤에야 답장을 보냈다. [내가 왜 기장이 됐는지 정말 몰라?]서라인은 웃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설마 나 때문이야? 내가 제복 입은 남자가 좋다고 한 말 때문에?]도경환이 보낸 답장은 한 글자뿐이었지만 원희연의 전부를 짓밟기에는 충분했다.[응.]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원희연은 급히 눈가를 닦고 대화창에서 빠져나오다가 선명한 상단 고정 표시를 발견했다.그 아래에는 원희연과 나눈 대화창이 있었다. 그곳에도 표시 하나가 붙어 있었다.알림 끄기 표시였다.좋아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의 차이는 고작 몇 글자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었다.그래도 상관없었다. 원희연은 이미 도경환과의 관계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도경환은 기다리던 사람을 다시 만났고, 원희연 역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예정이었다.각자 바라던 것을 얻는 셈이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다음 날 맞춰 둔 알람에 눈을 떴을 때, 도경환은 이미 집을 나간 뒤였다.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지만 원희연은 도경환이 서라인을 만나러 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전날 밤 서라인이 모교 근처에 있는 브런치 카페가 생각난다고 한마디 하자마자 도경환이 곧바로 자리를 예약했기 때문이다.원희연은 더 이상 그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아침을 먹고 화장을 마친 원희연은 가방을 챙겨 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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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차가 멈추자 도경환은 원희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뒤따라 들어간 원희연은 그제야 이곳에서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다만 주인공은 원희연이 아니었다.무대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는 서라인을 본 원희연은 누가 오늘의 주인공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서라인은 화려한 맞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주문 제작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길고 가느다란 목선을 돋보이게 했고,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는 물방울처럼 반짝였다.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원희연은 서라인이 착용한 주얼리를 오래도록 바라봤다.하나같이 너무나 익숙한 물건이었다.서라인이 착용하기 전까지 그 주얼리들은 줄곧 도경환의 유리 진열장 안에 놓여 있었다.진실을 몰랐을 때 원희연은 자신에게 줄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그것들을 받을 날만 기다렸다.해마다 도경환은 새로운 물건을 준비했지만 원희연에게 건넨 적은 없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기대도 차츰 희미해졌다.오늘 다시 마주하고 나서야 원희연은 그 모든 것이 서라인을 위한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시선을 느낀 듯 서라인이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다가왔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경환아, 이분이 네가 6년 동안 만났고 나한테 보여주겠다고 했던 여자친구야? 정말 예쁘다. 남울고 최고 인기남의 마음을 붙잡은 이유가 있었네.”서라인이 원희연을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도경환이 평소답지 않게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도경환의 의도를 뒤늦게 깨달은 원희연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도경환의 친구 몇 명도 다가와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보탰다.“맞아. 벌써 6년이잖아. 경환이가 얼마나 말 잘 듣고 한결같은데. 누군가도 약속은 지키고 이상한 시험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네.”“진심을 주는 사람이 흔한 줄 알아? 그런 사람을 얻었으면 잘 붙잡아야지. 놓치고 나서 후회해 봐야 늦어.”“...”친구들은 원희연이 자기들 말의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한 채 거리낌없이 도경환의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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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말이 끝나자 넓은 홀 안이 숨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서라인뿐이었다.서라인은 도경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느긋하게 이어진 말에는 묘한 속뜻이 담겨 있었다.“경환아, 네 여자친구가 올해 안에 소원을 이루고 싶은가 봐. 서둘러야겠네. 정말 결혼하게 되면 결혼식에 나도 꼭 초대해 줘.”굳어 있던 도경환의 표정이 그 말을 듣는 사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도경환이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챈 원희연이 설명하려 했지만, 도경환이 먼저 말을 끊었다.“서라인! 이런 식으로 굴면 재미있어?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여야 속이 시원해? 너는 내 마음 뻔히 알면서...”분노가 담긴 질책은 원희연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조금 전 도경환을 놀린 서라인에게 쏟아진 말이었다.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도경환의 표정, 끝내 하지 못한 말을 본 사람들은 도경환이 무엇에 화를 내는지 모두 알아차렸다.서라인이 모르는 척하며 또다시 도경환의 진심을 가볍게 짓밟았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었다.파티장은 더는 분위기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싸늘해졌다.도경환은 옆에 있던 의자를 걷어차 넘어뜨린 뒤 차 열쇠를 챙겨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즐거워야 할 생일 파티는 그렇게 엉망으로 끝나버렸다.주변에서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자 원희연도 눈을 내리깔고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밖으로 나왔을 때 손님들은 이미 대부분 떠난 뒤였고, 복도 끝에서는 거센 말다툼이 들려왔다.“서라인, 오늘은 네가 너무했어! 경환이가 이번 네 생일을 위해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지 알잖아. 왜 사람 마음을 그렇게 짓밟고, 다 보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 화나게 만들어?”“내가 틀린 말 했어? 경환이 여자친구가 결혼하고 싶다잖아. 경환이랑 안 하면 다른 사람이랑 하겠다는 뜻이야?”“진짜 말이 안 통하네! 경환이는 줄곧 너만 좋아했어. 예전에 네가 한 번 거절하자 상처받고 되는대로 연애하면서 살았잖아.”“네가 다시 손 내밀었을 때는 한 사람을 오래 만난 경험이 없는 게 싫다며 안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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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도경환은 더 묻지 않았다. 벗은 외투를 소파 위에 내려놓다가 테이블 위의 케이크를 발견하고 시선이 멈췄다.잠시 망설이던 도경환이 결국 입을 열었다.“어제 네가 빌었던 생일 소원 말이야...”탐색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도경환의 눈을 보며 원희연은 농담처럼 답했다.“아무도 내 생일인 줄 몰라서 조금 민망했거든. 그래서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다들 그렇게 내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 미안해.”그 말을 듣고서야 도경환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그럼 진짜 소원은 뭐였어?”“아빠랑 엄마가 건강하고, 두 분이 바라시는 일이 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빌었어.”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소원이었다.도경환은 마음이 움직인 듯 손을 들어 원희연의 코끝을 가볍게 건드리며 웃었다. “넌 부모님 생각 많이 하는 효녀니까 소원이 꼭 이루어질 거야.”원희연도 그렇게 믿었다.맞선을 잘 보고 결혼한 뒤 부모님 곁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그 뒤 며칠 동안 도경환은 집에 머물며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집 안에서 사라진 물건이 많다는 사실도 알아차렸고 몇 번 질문했다.“희연아, 네가 샀던 커플 머그잔 어디 갔어?”“며칠 전에 깨졌어.”“네가 선물한 넥타이는?”“나도 모르겠어. 말리려고 내놨다가 바람에 날아갔나 봐.”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이라 도경환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원희연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원희연은 그때마다 적당한 이유를 대며 넘겼다. 한편으로는 긴 목록을 만들어 이 도시를 떠나기 전 유명한 식당과 간식 가게를 모두 돌아볼 계획을 세웠다.그동안 몸매를 유지하려고 기름진 음식과 탄수화물을 줄이고 채소 위주로 먹었다. 마음껏 먹고 싶은 것을 먹어 본 지도 오래였다.온갖 노력을 들여 지켜 온 외모는 원희연이 바라던 사랑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도경환은 원희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쁘든 평범하든, 살이 찌든 빠지든, 화장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는 일이었다.건강까지 희생해 얻은 아름다운 겉모습도 서라인 앞에서는... 도경환의 눈에는 아무 가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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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당황해 울먹이는 서라인의 목소리를 듣자 도경환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도경환은 황급히 액셀을 깊게 밟고 운전대를 거칠게 꺾어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미처 대비하지 못한 원희연은 차 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튕겨 날아온 장식품이 이마를 스치며 5센티미터가량의 상처를 냈다.피가 흘러내렸다. 원희연은 통증에 이마를 감싸 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도경환을 바라봤다.도경환은 원희연이 다친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서라인과의 통화에만 정신이 팔렸었고 눈에는 분노가 들끓었지만,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서라인을 달랬다.“무서워하지 마. 지금 어디야? 전화 끊지 말고 있어. 5분 안에 갈게.”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원희연의 질문은 그 말에 모두 사라졌다.원희연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계속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눌러 지혈했다.내비게이션은 연달아 과속 경고를 알렸지만 도경환은 무시했다. 가는 동안 교통신호를 일곱 번 넘게 위반했다.계기판의 속도가 끝까지 치솟는 것을 보며 원희연은 안전벨트를 다시 단단히 조였다.5분 뒤 차는 라운지 바 앞에 멈췄다.도경환은 차 안에 원희연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안전벨트를 풀어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눈 깜짝할 사이 멀어지는 도경환의 뒷모습을 보던 원희연은 잠시 망설인 끝에 뒤따라 들어갔다.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의 탁자와 의자가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원희연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다.2층 룸에서 고성이 들렸다. 계단을 올라가자 서로 밀치고 있는 두 무리가 보였다.룸 입구 쪽에는 막 도착한 도경환과 친구 네다섯 명이 서 있었다.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원희연도 아는 인물이었다. 재벌가 모임에서 도경환과 늘 부딪히던 차남혁이었다.도경환은 외모도 성격도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연애사가 난잡하다는 흠은 있었지만 재벌가 자제들 가운데 방탕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기에, 여러 집안에서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후계자라는 평판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차남혁은 도경환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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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도경환은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소식을 들은 도경환의 부모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친구들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목에 걸고 있던 염주를 바닥에 내던졌다.“여자 하나 때문에 10년을 미쳐 살더니 이제는 제 손까지 망가뜨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구나!”친구들은 서둘러 도경환의 부모를 달랬다. 좋은 말과 쓴 말을 번갈아 가며 한참 설득한 끝에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몇 시간 뒤 수술실 위의 불이 꺼졌다.의사가 이동식 침대를 밀고 나오며 안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병원으로 이송이 빨랐고 수술도 잘 끝났습니다. 몇 달 동안 무리하지 않고 회복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긴장을 풀었다.후유증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도경환의 부모는 사고를 친 아들을 더 보고 싶지 않다며 그날 밤 해외에서 진행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떠나기로 했다.출발하기 전 두 사람은 병실을 지켜 준 친구들에게 차례로 고마움을 전하고, 다음에는 집에 들르라고 초대했다.하지만 원희연의 앞에 이르렀을 때는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지나쳤다. 오히려 곁에 있던 의료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멀어지는 뒷모습을 본 원희연은 모든 사정을 알아차렸다.도경환은 부모에게 6년 동안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어차피 정해진 때가 되면 헤어질 사람인데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었겠지.’입원해 있는 동안 원희연은 병실을 지키며 도경환을 돌봤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갈수록 지쳐 가는 원희연을 보며 도경환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난 이제 괜찮아. 가서 좀 쉬어.”도경환은 원희연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의자에 앉힌 뒤 물을 따라 손에 쥐여 주었다.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잠시 말을 고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몇 가지를 물었다.“내가 오래 자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며칠 동안 누가 병문안 왔어? 혹시 못 보고 지나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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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도경환은 웃으며 들어와 동창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원희연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희연아? 네가 왜 여기 있어?”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당연히 있지. 우리 다 고등학교 동창이고 같은 반이었잖아. 설마 남울고 최고 인기남께서 그것도 잊은 거야?”‘고등학교 동창이라고?’‘같은 반이었다고?’짧은 몇 마디가 폭발음처럼 도경환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도경환은 충격을 받은 채 원희연을 바라봤다. 입술이 살짝 움직였고 표정에는 여러 감정이 엇갈렸다.같은 반 학생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인지, 원희연이 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여학생 몇 명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희연’이라고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네? 도경환, 너랑 희연이 둘이 무슨 사이야?”원희연이 평범한 동창이라고 답하기도 전에 도경환이 먼저 관계를 밝혔다.“희연은 내 여자친구야. 6년 동안 만났어.”그 말이 떨어지자 모임이 발칵 뒤집혔다.사람들은 두 사람이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는지 앞다투어 캐물었다.도경환은 원희연과 같은 반이었다는 걸 몰랐고, 원희연 역시 도경환이 사람들 앞에서 둘의 관계를 아무 거리낌없이 밝힐 줄 몰랐다.두 사람은 질문을 쏟아 내는 동창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했다.도경환은 술을 연달아 마시며 화제를 돌렸고 원희연은 기회를 보다가 화장실로 빠져나갔다.술이 약한 반장은 석 잔을 연거푸 마신 뒤 도경환의 손을 붙잡고 오래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너희가 사귄다니 정말 기쁘다. 희연도 드디어 소원을 이룬 셈이네. 희연이 널 오래 좋아한 거 몰랐지?”“체육 시간에 네가 교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내가 물건 가지러 갔다가 희연이 햇빛을 가려 주는 걸 보고 알았어.”“그때 널 좋아한 애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지만 희연만큼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었어. 네가 농구하다가 발목을 다쳤을 때 네 청소 당번도 전부 희연이 대신했고, 불량한 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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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숙취가 남은 다음 날 아침이면 머리가 무겁고 정신이 흐릿하기 마련이다.도경환은 힘겹게 일어나 세수했다. 거실에서 풍겨 오는 음식 냄새를 따라가 보니 원희연이 상을 가득 차려 놓고 있었다.달력을 확인했지만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도경환은 이유가 궁금해졌다.“갑자기 왜 이렇게 잔뜩 상을 차렸어?”“축하하려고.”원희연은 수저와 그릇을 놓으며 나지막이 답했다.‘축하?’‘내 손이 거의 나은 걸 축하하는 건가?’도경환이 떠올릴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그런데 상 위에는 매콤하고 자극적인 음식이 가득했다. 의사가 회복하는 동안 담백하게 먹으라고 한 말을 떠올리자 자신을 위한 상은 아닌 듯했다.도경환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서라인이었다.잠시 망설이던 도경환은 막 집어 든 수저를 내려놓고 전화받았다.몇 분 뒤 통화를 끝낸 도경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심코 원희연을 바라봤다.원희연은 이미 앉아서 새우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도경환이 함께 먹든 말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그래도 원희연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자리라고 생각하니 그냥 나가기가 미안했다. 도경환은 이유를 둘러댔다.“희연아, 잠깐 나가 봐야 할 일이 생겼어. 먼저 먹고 있어. 나중에 돌아오면 내가 다시 축하해 줄게.”“괜찮아. 가서 볼일 봐.”원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도경환을 바라보는 눈은 잔물결 하나 없는 물처럼 고요했다.그 눈을 마주하자 이유도 없이 심장이 빨리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경고하는 듯했다.하지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오래 눈을 맞췄다. 하지만 끝내 도경환이 말 없이 먼저 돌아서 집을 나갔다.문이 닫힌 뒤 맞은편의 빈자리를 보며 원희연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오늘 축하하고 싶었던 건 자유를 되찾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원희연 자신이었다.다른 사람의 축하는 필요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원희연은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고 남은 물건까지 챙겨 아래층에 버렸다.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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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집을 나선 뒤부터 도경환의 마음은 줄곧 불안했다.하루 종일 시끄러운 전원주택 안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엉뚱한 곳을 헤맸다.도경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친구 몇 명이 맥주병을 들고 다가와 도경환의 왼손에 하나를 쥐여 줬다.“경환아, 네가 다 나은 걸 축하하려고 우리가 일부러 준비한 자리야. 주인공이 왜 이렇게 흥이 없어? 서라인이 준비했다는 서프라이즈만 기다리느라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거냐?”친구들이 의미심장하게 눈짓하는 모습을 보자 도경환은 서라인의 전화를 떠올렸다. 그제야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았다.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원희연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어느새 전원이 꺼져 있었다.배터리가 완전히 닳아 전원 버튼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도경환은 옆에 있던 친구에게 핸드폰을 던지며 충전해 달라고 했다.다시 10분가량 억지로 앉아 있었지만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도경환은 바람을 쐬려고 테라스로 나갔다.3층 테라스는 시야가 탁 트여 멀리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시력이 좋은 도경환은 먼 길 끝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스포츠카도 뚜렷하게 알아봤다.푸른 산과 나무, 하얀 건물 사이에서 붉은 차 한 대만 유난히 빠르게 가까워졌다.도경환은 다가오는 차를 바라보며 손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검게 딱지가 앉은 상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살짝 긁었다.간지러운 곳에 제대로 닿지 않아 답답함만 커졌고 가려움은 오히려 더 넓게 번졌다.짜증이 치민 도경환이 붕대를 다시 감으려던 때, 붉은 스포츠카가 아래에 멈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손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봤다.2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쪽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몇 초 뒤 연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서라인이 도경환의 시야에 들어왔다.서라인을 본 도경환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름을 부르려던 입은 다음 광경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서라인이 먼저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도경환은 온몸의 피가 머리로 치솟는 듯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이성마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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