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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봄비와 함께 떠나는 나: Chapter 11 - Chapter 20

25 Chapters

제11화

사람들이 물러나자 서라인은 망가진 장미 가지를 내던졌다.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른 남자를 품에 안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강우야, 괜찮아? 대답 좀 해 봐. 너 이러니까 나 무서워.”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서라인의 행동을 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모두 무심코 도경환을 바라봤다.도경환은 여전히 피가 흐르는 손을 세게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억눌린 기운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박지석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욕설을 퍼부었다.“서라인, 너 진짜 사람 맞아? 경환이는 네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오직 너 하나만 바라봤어. 계속 마음을 붙잡아 둔 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까지 만나? 대체 경환이를 뭘로 생각한 거야!”서라인의 품에 안긴 이강우가 몇 번 기침한 뒤 힘없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했다.그제야 서라인은 조금 안도했다.목구멍까지 차오른 울음을 삼킨 서라인은 고개를 들어 박지석을 바라봤다. 서라인의 눈에는 친구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혐오와 원망이 서려 있었다.“내가 도경환을 붙잡았다고? 10년 동안 끈질기게 매달린 건 도경환이야. 계속 떼어 내도 다시 달라붙고, 내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잖아! 내가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아직 모르겠어? 난 도경환을 좋아하지 않아. 누구를 만나든 내 자유인데 너희가 무슨 권리로 간섭해?”서리안의 그 몇 마디만으로 친구들은 모두 격분했다. 도경환이 서라인을 좋아한다는 사실만 아니었다면 당장 손을 댔을지도 몰랐다.“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비싼 선물은 왜 받았어? 왜 경환이한테 그렇게 많은 걸 요구했는데?”“오래 만나는 걸 증명하라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은 왜 한 거야? 넌 정말 끝까지 썩어 빠진 사람이야!”거센 욕을 듣고도 서라인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정신이 흐릿할 만큼 맞은 이강우가 먼저 화를 내며 일어나려 했다.서라인은 서둘러 이강우를 말리고 조심스럽게 부축해 차에 태웠다.그 뒤 10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을 돌아봤다. 입가에는 이 자리의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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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예전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서 도경환은 또 수술실로 옮겨졌다.일을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온 도경환의 부모는 담당 의사에게 오른손이 이번에는 완전히 망가졌다는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외아들이 하루빨리 가정을 꾸리고 자리를 잡아 DH그룹의 무거운 책임을 이어받기만을 바랐다.하지만 도경환은 몇 년째 그룹에 들어가 경영을 배울 생각도 하지 않았고, 진지한 연애도 피했다. 파일럿이 되겠다며 집안과 부딪치면서 서라인 때문에 줄곧 제멋대로 굴었다.이제는 오른손까지 못 쓰게 만들어, 그나마 번듯하게 쌓아 온 커리어마저 스스로 끊어 버렸다.두 사람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수술이 끝난 뒤 도경환은 집중관찰실로 옮겨졌다.마취가 풀리자 도경환은 눈을 떴다.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희연아.”몇 초가 지나고, 10초가 지나고, 1분이 흘러도 대답은 없었다.원희연이 잠시 병실을 비운 줄 알았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도경환은 다시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돌아온 건 낯선 목소리였다.“환자분, 오른손바닥 신경이 끊어져 회복이 어렵습니다. 앞으로 무거운 물건은 들 수 없습니다.”짧은 설명만으로도 도경환의 마음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새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모아 보려고 힘을 줬지만 어느 손가락 마디 하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상처를 더 악화시키려는 듯한 행동을 본 간호사가 황급히 도경환을 제지하고 다시 차근차근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분명 또렷한 말이었지만 도경환에게는 아주 먼 곳에서 떠밀려오는 소리처럼 현실감 없이 들렸다.창백하게 마른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그럼... 비행기는 다시 몰 수 있습니까?”“비행기요? 지금은 핸드폰 쓰는 일도 쉽지 않아요. 다른 일을 알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간호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도경환의 팔에 연결된 수액 줄에 새 약을 연결했다.도경환의 눈에 남아 있던 빛이 서서히 꺼졌다. 눈꺼풀도 힘없이 내려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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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잠기고 거친 목소리가 들리자 친구들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도경환에게 이렇게 큰일이 생긴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왜 원희연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원희연의 성격이라면 곧장 병원으로 달려와 밤낮도 잊고 도경환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박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아직 모르는 거 아닐까?”‘모른다고?’‘모르는 편이 낫겠지.’수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도경환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걸 본 친구들은 도경환이 마음을 정리했다고 여겼다. 다시 침대 가까이 모여 앞다퉈 말을 쏟아 냈다.“경환아, 우리가 알아봤어. 그날 서라인이 데려온 남자는 새로 사귄 애인이래. 운항시 이정도 회장 집안의 셋째 아들인데, 유학할 때부터 알던 사이였대.”“며칠 전에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서라인이 말한 서프라이즈가 그 남자를 데려와 네 앞에서 보여주는 거였어.”‘이정도 회장의 집안?’세계에 몇 대 없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 이유가 있었다.도경환은 생각에 잠긴 채 대답하지 않았다.친구들은 제지하는 사람이 없자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이강우는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으니 서라인부터 이 모든 일에 책임지게 하자. 널 10년이나 가지고 놀다가 더 좋은 상대를 만나니까 은혜도 모르고 뒤통수를 쳤잖아.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모양이야.”“맞아. 너는 말만 해. 우리가 알아서 제대로 망신 줄 테니까. 남자들 마음을 저울질하는 게 좋다니까 지난 몇 년 동안 한 짓을 전부 퍼뜨리자. 그러고도 누가 서라인을 만나겠어?”“...”친구들이 온갖 보복할 방법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도경환은 입을 열지 않았다.떠들던 사람들도 차츰 이상함을 눈치챘다. 웃음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속을 떠봤다.“경환아, 설마 아직도 마음이 약해진 거야? 걔 본모습까지 봤는데 아직도 미련이 남아?”“맞아. 얼굴만 예쁘지 속마음은 썩었잖아. 제발 또 어리석은 짓 하지 마. 서라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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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왜 그랬을까?실은 도경환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충동적으로 결혼이라는 말을 먼저 꺼냈을 뿐이다.하지만 완고한 부모를 설득하려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가 필요했다.도경환은 시선을 내리고 원희연과 함께했던 기억을 하나씩 되짚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이 대학교 근처 술집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보다 앞선 4 년 전부터 두 사람은 같은 학교에서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원희연이 첫눈에 외모만 보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희연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큰 나무처럼 자라 있었다.언젠가는 헤어질 관계라고 여겼다. 그렇게 6년이 흘렀고, 이제 도경환은 원희연이 곁에 있는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폭설 속에서 조심스럽게 내밀어 잡던 손.졸업식 날 발끝을 세우고 품에 안겨 오던 따뜻한 몸.함께 살기 시작한 뒤 하루도 빠짐없이 건넸던 아침과 밤의 인사까지...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고, 마지막에는 원희연이 스물다섯 번째 생일에 소원을 빌던 모습이 남았다.원희연은 올해 안에 무사히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농담이었는지 도경환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진심이었다면 원희연과 결혼하면 됐다.남은 인생을 원희연과 함께한다는 미래를 도경환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후회할 이유도 없었다.농담이었다면 진심으로 만들면 됐다.이미 원희연으로 정했다. 평생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도경환은 더 망설이지 않고 가슴속에 있던 말을 부모에게 모두 털어놓았다.“아버지, 어머니. 제 여자친구는 원희연입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지만 제가 희연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한 건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그전까지는 같은 학교에 그런 학생이 있었다는 것도, 희연이 오랫동안 저를 좋아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제가 먼저 말을 걸었던 날도 진심으로 다가간 게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 게임하다가 져서 벌칙으로 고백했는데, 희연이 받아 줬고 그렇게 사귀게 됐습니다.”“만난 뒤에는 제가 놓친 일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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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원하던 대답을 얻은 도경환은 부모를 더 방해하지 않고 자기 병실로 돌아왔다.며칠째 탁자 위에 둔 채 손도 대지 않았던 핸드폰을 집어 전원을 켰다.단 십여 초에 불과한 부팅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도경환은 이 소식을 원희연에게 빨리 전하고 싶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왼손까지 가늘게 떨렸다.데이터 연결이 끝나기 전, 먼저 전화 화면을 열어 원희연의 번호를 눌렀다.뚜르르... 뚜르르...길게 이어지는 연결음이 팽팽해진 신경을 갉아먹었다. 끝내 차가운 자동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연결할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 주십시오.]‘연결이 안 된다고?’‘엘리베이터 안이라 전파가 약한 건가?’‘그럴 리가 없는데...’도경환의 머릿속에 수많은 가능성이 스쳤다.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메신저를 열어 다른 방법으로 연락하려 했다.앱을 열자 수많은 빨간 알림 표시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도경환의 부상 소식을 듣고 안부를 묻는 메시지만 줄줄이 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십여 개의 대화창을 내려도 원희연이 보이지 않자 연락처 검색창을 열었다.몇 초 뒤 화면 한가운데 원희연의 이름이 나타났다.대화창을 연 도경환은 메시지를 직접 입력할지, 음성 메시지를 보낼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대화창 맨 아래에 남겨진 하얀 말풍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도경환, 우리 헤어지자.]메시지가 전송된 시간은 3월 29일 오후 3시 47분이었다.5일 전이었다.쉴 새 없이 돌아가던 도경환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그는 메시지 내용과 전송 날짜를 몇 번이나 번갈아 확인한 뒤, 천천히 화면 상단에 표시된 이름으로 시선을 옮겼다.‘희연’이라는 저장명 옆에는 알림 끄기 표시가 붙어 있었다.자기가 직접 저장한 이름이 분명했고 원희연의 계정도 틀림없었다.하지만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원희연이 아무 이유도 없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리 없었다.‘화가 난 건가? 장난치는 건가?’불안이 서서히 목을 조여 왔지만, 도경환은 애써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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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도경환은 의사의 권고를 듣지 않고 곧장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따뜻했던 아파트가 텅 빈 공간으로 남은 것을 보자 가슴을 덮고 있던 불안이 온몸으로 번졌다.거실과 침실, 서재 어디에도 원희연의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원희연은 도경환의 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도경환은 밤바다에서 방향을 잃은 배처럼 막막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친구들에게 원희연과 연락해 보라고 했지만, 원희연은 도경환과 관련된 사람을 모조리 차단한 뒤였다.도경환과 확실하게 선을 긋겠다는 뜻이었다.단호한 태도 앞에서 도경환은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이성을 붙잡지 못한 도경환은 낫지도 않은 손을 끌어안고 하린시 곳곳을 돌아다녔다.함께 갔던 공원, 원희연이 예쁘다고 했던 오래된 골목, 자주 다니던 요가원까지...어디에서도 원희연을 찾을 수 없었다.도경환은 하루 밤낮을 꼬박 쉬지 않았다. 다시 아침이 밝자 마지막 희망을 품고 원희연이 다니던 회사로 찾아갔다.그곳에서야 예전 동료에게 원희연의 행방을 들을 수 있었다.“희연 씨는 아마 고향으로 내려갔을 거예요.”‘고향, 청온시?’도경환은 망설이지 않고 청온시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을 예약했다.박지석은 다급한 모습을 보고 옆에서 말렸다.“경환아, 너 아직 상처도 다 안 나았잖아. 지금 당장 쫓아갈 필요는 없지 않아?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몸부터 회복하고 가도 괜찮아.”박지석이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도경환도 알았다. 하지만 더는 한때도 기다릴 수 없었다.마음이 완전히 식어 관계를 놓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실망이 쌓이는지 도경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이미 5일을 흘려보냈다. 더 늦으면 다시 붙잡을 가능성은 거의 사라질 것이다.도경환은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행기에 올랐다.청온시에 도착하자 비서가 알아낸 주소를 보내왔다.도경환은 박지석과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집에 없는 모양이었다.두 사람은 아파트 입구에서 한낮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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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옆에서 듣던 박지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경환이한테 헤어지자고 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맞선을 봐? 어떻게...”원희연은 두 걸음 물러나 도경환과 거리를 둔 뒤 박지석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담담했다.“이미 헤어졌는데 제가 맞선을 보든 말든 두 분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도경환은 허공에 남은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목울대가 몇 번 크게 움직였다.몸을 돌려 원희연을 바라본 눈에 짙은 슬픔이 번졌다.“네가 결혼하고 싶다면 상대는 내가 아닌가?”원희연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말투는 가벼웠다.“미안하지만 난 이미 끝난 관계로 되돌아가지 않아.”짧은 대답 하나에 도경환의 표정이 달라졌다.박지석도 원희연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 곧바로 친구 편을 들며 따졌다.“경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헤어지자고 해? 이제는 쉬지도 않고 맞선까지 보잖아. 너 오랫동안 경환이를 좋아했다며. 왜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거야?”‘아무 이유도 없이, 쉬지도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자기 입장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원희연은 누가 옳고 그른지 두 사람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래 봐야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단지 한마디만 답했다.“이제 좋아하지 않아서 헤어졌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말을 마친 원희연은 두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지도 않고 단지 안으로 걸어갔다.박지석은 너무도 냉정한 태도에 더 참지 못하고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크게 외쳤다.“원희연! 경환이 오른손이 완전히 망가진 거 알아? 조금도 마음이 아프지 않아?”‘도덕적인 책임을 씌워도 안 되니 이제 상처를 내세우는 건가.’하지만 원희연은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뒤돌아보지 않은 채 목소리만 높였다.“본인이 선택한 일이잖아요. 전 여자친구인 저와는 상관없어요.”...봄날의 저녁 햇살이 원희연의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그녀는 가지 끝에 돋아난 연두색 새싹을 바라보다 지난번 타투를 지운 옆구리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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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저녁을 다 먹고 나니 정확히 여섯 시였다. 한수원은 거실에서 차를 마셨고, 원재환과 원희연은 부엌에서 설거지와 뒷정리를 했다.원재환은 조리대의 기름기를 닦다가 딸을 한 번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희연아, 정엽이 아버지가 정엽이에 대한 네 생각이 어떤지 물어봐 달라고 하더구나. 넌 어떠니?”접시를 헹구던 원희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했다.‘임정엽이라...’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굴었다. 최근 며칠 동안은 지난 이야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됐다.이 정도면 꽤 빠르게 가까워진 편일 것이다.원희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에도 확신이 덜 묻어 있었다.“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셔?”“왜겠니? 네가 마음에 들어 며느리로 맞고 싶은 거지. 네가 경복시에 있을 때부터 돌아오기를 기다렸대.”“우리가 맞선 자리를 알아본다는 말을 듣고는 정엽이를 데리고 바로 찾아와 먼저 만나 보라고 하셨다.”“엄마랑 내가 보기에도 그만하면 인물 좋고, 말도 예쁘게 하고, 예의도 바르더구나. 나이도 잘 맞고. 꼭 올해 안에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야.”“우선 서로 알아가면서 대화가 잘 통하는지 보라는 거지. 부담 갖지 마. 인연이 되면 좋고, 아니면 편한 친구로 남아도 괜찮다.”원희연은 부모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이해했다.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솔직한 속마음을 조금 털어놓았다.“알아. 임정엽 교수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고 같이 있으면 편하고 마음도 놓여. 다만 감정은 서두른다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 우리 둘 다 서로 잘 맞는지 알아볼 시간이 필요해.”“두 분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차 마시고 바둑 두면서 지내셔. 엄마랑 주민센터 댄스 수업도 다니고.”할 말은 다 했고, 원재환도 딸이 주관이 뚜렷하다는 걸 알았다. 더 잔소리하지 않고 어깨를 토닥인 뒤 어머니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접시를 찬장에 넣고 침실로 돌아온 원희연은 핸드폰을 집었다가 알림창에 뜬 친구 추가 요청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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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원희연은 새벽 3시가 다 돼서야 다시 잠들었다.다음 날 오전 10시, 미리 맞춰 둔 알람이 원희연을 깨웠다.비몽사몽 일어나 보니 부모는 이미 출근한 뒤였고 부엌에는 아침 식사가 따뜻하게 준비돼 있었다.세수를 마친 원희연은 아침을 먹으며 오후에 잡힌 두 건의 면접 일정을 확인했다.첫 면접은 2시, 두 번째는 4시 반이었다. 두 곳 모두 집에서 30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이동 경로를 확인한 원희연은 방으로 돌아가 면접 때 입을 옷과 서류를 정리하며 준비했다.오후 1시에 가방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두 남자는 밤을 꼬박 새운 듯한 모습으로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원희연을 보자 도경환이 바로 일어나 앞을 막았다. 목소리에는 피로와 간절함이 가득했다.“희연아, 우리 얘기 좀 하면 안 돼?”원희연은 시간을 확인하고 담담하게 답했다.“미안해. 볼일이 있어서 지금은 시간이 없어.”또다시 거절당한 도경환은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도경환이 길을 비키지 않자 원희연은 더 말할 생각도 없이 왼쪽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단지 입구로 향했다.힘을 주어 지나가던 원희연의 몸이 다친 오른손에 부딪쳤다. 막 딱지가 앉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피가 배어 나와 붕대를 붉게 물들였다.도경환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멀어지는 뒷모습만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눈에는 깊은 슬픔이 차올랐다.졸음 때문에 쓰러지기 직전이던 박지석은 붕대에 번지는 피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둘러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경환아, 상처가 또 터졌어. 빨리 병원부터 가자.”도경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붕대를 풀어 보려는 박지석의 손을 밀어내고 원희연을 빠르게 뒤쫓았다.말을 전혀 듣지 않는 모습을 본 박지석은 하늘을 향해 답답한 한숨을 내쉰 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첫 면접이 끝난 시각은 오후 3시 반이었다.원희연이 건물 밖으로 나와 택시를 부르려다가 언제 따라왔는지 모를 도경환을 발견했다.도경환은 화단 옆에 서서 고집스러운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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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두 번째 면접을 마치고 건물 아래로 내려왔을 때 도경환과 박지석이 보이지 않자 원희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서쪽으로 기운 해를 바라보며 밖에서 저녁을 먹을지 집에 갈지 고민하던 때,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면접 끝났어요? 분위기는 어땠어요?]임정엽이 보낸 메시지였다.두 차례 면접 모두 분위기가 좋았던 걸 떠올린 원희연은 합격 가능성이 꽤 높다고 생각했다.곧이어 귀여운 강아지가 앞발로 ‘확인’을 표시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곧바로 답장이 왔다.[잘된 것 같으니 축하해야겠네요. 저녁은 제가 살게요.]원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거절하려 했다.두 번째 면접은 임정엽이 추천해 준 자리였다. 거절하기도 미안해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를 지우고 ‘제가 사야죠’라고 고쳐 보냈다.[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지금 어디예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주소를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저녁 메뉴도 골라 주세요.]주소를 보낸 원희연은 맛집 앱을 열어 식당을 검색했다.청온시에 오래 살지 않아서 명절마다 친척들과 몇 군데를 가 본 게 전부였다.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20분쯤 살펴본 끝에 무난한 스테이크 집을 선택했다.예약을 마치자 임정엽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원희연은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안전띠를 매고 예약한 스테이크 식당이 어딘지 알려줬다.임정엽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뒷좌석에서 작은 케이크 상자를 꺼내 원희연에게 건넸다. 표정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가득했다.“전에 이 집 케이크를 먹어 봤는데 정말 좋아했다고 했잖아요. 마침 근처를 지나서 하나 샀습니다. 예전 맛과 같은지 먹어 봐요.”무심코 한 말을 기억해 뒀을 줄 몰랐다. 원희연은 뜻밖의 배려에 놀라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고팠지만 임정엽이 깔끔한 성격이라는 말을 떠올렸다.원희연은 상자를 열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뒀다. 식당에 도착한 뒤 먹을 생각이었다.먹지 않는 모습을 본 임정엽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말투는 여전히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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