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주가 에러 났습니다!: Chapter 1 - Chapter 10

11 Chapters

1. 거북목+컴퓨터+21세기 현대판 노예=직장인

적막한 사무실에 소음이 울려퍼졌다. “어후~ 죽겠어요, 진짜로~!” 옆자리 동료가 파티션 위로 스트레칭을 하면서 그리 말했다.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러는 게 한두 번인가요?” “민지씨는 어쩜 그렇게 침착해요?! 전 아예 직종을 옮길까봐요.” “그래도 이 회사만큼 돈 잘 주는 곳 없잖아요. 대기업 빼고는.” “뭐, 그건 그렇죠.” 대한민국 중견 게임사의 3년 차 메인 개발자, 김민지. 그게 내 이름이었다. 그것도 365일 중 300일을 라꾸라꾸 침대에서 자는 지독한 야근 노예. 동료는 이때다 싶었는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요즘 가끔 출근하는 것도 너무 힘들다니까요?!” “하하, 저도 마찬가지예요.” “차라리 차에 치이고 싶어요.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까 그렇게라도 쉬고 싶다니까요, 요즘?!” “그거 완전 동감이요….” 이 정도면 회사가 아니라 정신과를 가야 했지만 일해야 하니까 못 갔다. 반차라도 쓸까 했지만, 회사는 지금 게임 출시가 얼마 안 남은 상황이라 빡센 크런치 모드였다. 다들 일하느라 바쁜데 나만 얌체같이 쏙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잤지만 그런 나 자신을 세뇌하듯 달랬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았다. 만약 정신과에 가면 필히 우울증과 번아웃으로 진단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상태였는데도 일하고 또 일했다. ‘…다들 이러고 사니까.’ 이런 게 너무 일상이라 잠도, 밥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이런 특수한 환경이 익숙하게까지 느껴졌다. 움직이지 않는데도 며칠째 잠을 못 자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위기감이 들었다. ‘큰일이군.’ 벌써 연일 이어지는 밤샘 야근으로 눈 밑에는 지독한 다크서클이 훈장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어느덧 옆에 앉아있던 동료도 다 퇴근한 그때였다. “김 대리이-! 아직도 못 끝냈어?!” 새벽 4시, 정적에 잠긴 사무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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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절, 그리고 빙의?!

이 팀장이 입꼬리를 비비 꼬며 비열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리 말했다. 결국은 다 매출이었다. ‘그걸 누가 모르겠냐.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이 말이야.’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화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남주인 카시안이 벌써 4천 번 넘게 죽는 시나리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4,444번이요”“그래서 뭐?”“유저들도 이제 구르는 게 가혹하고 지겹다고 피드백해요. 이렇게 가면 엔딩이 너무 조잡하고, 끝도 없고요.”논리적인 반박에 이 팀장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그는 서류철로 내 머리를 기분 나쁘게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착각하지 마, 김 대리. 실력도 감도 없는 게 그럼 말이라도 잘 들어야 할 것 아냐. 위에서 까라면 그냥 좀 까!”허구한 날 이런 걸로 맞는 게 아픈 건 아니었지만 불쾌했다. 어쩐지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듯 한 기분이었다.‘왜 내가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월급만 아니었어도 이딴 회사 따위는.’하지만 그 월급 때문에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살 거라면 회사를 계속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이어서 그가 내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차갑게 입을 뗐다.“오늘 내로 남주가 배신당해서 죽는 데드엔딩 새로 만들어놔. 안 그럼 내일부터 네 자린 없어, 알아들어?!”그는 팀장 주제에 사원을 언제든 자를 수 있다고 예고했다.그거야 당연했다.‘이 팀장은 이 회사를 물려받을 그 귀한 외동아들이시니까.’나는 말하면서 속으로 자조했다.-주식회사 이곳의 회장은 자기 손자를 끔찍이도 예뻐라 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자신이 아끼는 손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걸로 유명했다.이리안 팀장은 그야말로 낙하산 재벌 3세였다.‘이걸 입사 직전에라도 알아야 했던 건데….’그럼 신입 치고 꽤나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해도 안 들어왔을 터였다. 보기에만 멀끔하고 성격은 쓰레기 같은 팀장은 그대로 결재 서류철을 내 책상 위로 던지고 휑하니 나가버렸다.“그럼 이만 야근 열심히 하고!”쿠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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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녕, 세실리아 공녀?

“…으음.”그 순간 지독할 정도의 한기가 전신을 덮쳐왔다.“얼마나 잔 거지…?”너무 추운 곳에서 오래 잤는지 코가 시렸다. 그런데 사무실 특유의 쿰쿰한 에어컨 냄새가 아니었다.코끝을 찌르는 건 서늘하고 지독할 정도로 짙은 생장미 향이었다.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앞에 펼쳐진 생경한 광경에 난 숨을 거칠게 들이켰다.“흐읍…!”초록색 파티션도, 이 팀장이 자기가 쓰다가 질려서 회사에 대충 버린 중고 책상도 없었다. 방 안은 환한 화려한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 피처럼 붉은 벨벳 러그. 또 차갑게 빛나는 하얀 대리석 바닥까지.나는 당황해서 허공으로 뻗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뭐야, 이건?!’마우스를 하도 쥐어서 손목 터널 증후군과 굳은살이 박여 있던 투박한 손이 아니었다.핏줄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하얗고 가녀린, 생소한 손이었다.동시에 시야 주변으로 연분홍빛 곱슬 장발이 찬란하게 흘러내렸다.“…!”난 비명을 삼키며 벌떡 일어나 방 한구석에 있는 전신거울로 달려갔다. 거울 속에는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 인형 같은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병약하고 청초한 미모였다.“설마… 세실리아 공녀?”그 말을 내뱉자마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모를 리가 없지, 내가 코드로 직접 만든 여주니까.’그것도 피폐물답게 남주 카시안에게 많이 살해당하는 비운의 영애. 거울 속에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여자가 바로 그녀였다.“하하, 이럴 수가….”웹소설에서나 보던 빙의가 현실이 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직접 새벽까지 잔혹한 사망 설정을 때려 박은 피폐물 속에.“후우, 어찌 됐든 살아야 해.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갈 구멍을 먼저 찾아야겠어.”나는 심호흡을 하며 이 곳의 현재 위치와 탈출할 동선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개발자로서 내가 구축한 게임 속 타임라인을 역추적하는 게 우선이었다. 우선 날짜부터 챙겨보았다.[8월 15일]달력을 뒤적이자 오늘이 바로 황실 건국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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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했던 빙의가 아냐

이윽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을 바꿨다.“아니지, 드디어 내가 이곳을 탈출할 열쇠를 찾았다고 해야 하나.”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의 핏빛 눈동자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광기가 출렁였다.‘분명 카시안과 세실리아의 첫 만남은 연회장 내부여야 할 텐데?’바로 내일이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그가 스토리를 무시하고 하룻밤 일찍 날 찾아왔다.고오오-그가 들어온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 했다. 카시안이 온몸으로 풍기는 중압감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마검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기가 침실의 고급 카펫을 까맣게 태웠다.‘위험해.’내 머릿속에서 지금 당장 도망가라며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려댔다. 카시안은 스토리를 깡그리 무시하고서 내 구역에 난입했다.‘이걸 어떡하지? 그야말로 대형 버그잖아!’그때 카시안이 내 목덜미에 검날을 더 바짝 밀어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낮고 서늘한 음성으로 내 귓가에 입을 뗐다.“기이하군, 내가 이 세계의 벽을 찢고 그 너머의 존재를 강제로 끌어 내렸는데.”이어서 그가 내 턱을 검날로 가볍게 치켜 올리며 이어 말했다.“고작 이런 나약한 몸뚱이에 숨어 있을 줄이야.”그의 알 수 없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지금 무슨 버그가 나서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거지?’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였다. 우선 난 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평정심을 가지고 말했다.“…전하, 갑자기 찾아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영애인 척 연기해야 했다. 말투는 철저히 그라시아 제국의 예법을 따랐지만 결국은 내 몸이 문제였다. 나는 최대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입을 열었다.“숙녀의 방에 왜 이리 무서운 무기를 들고 오셨습니까. 전하의 서슬 퍼런 마기에 숨을 쉬기조차 어렵습니다.”내 신체는 평생 모니터 앞에서 코딩만 하던 직장인의 몸뚱이였다.치맛자락을 쥐는 손끝은 어설프게 굳어 있었고,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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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체가 발각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담담함을 유지하려 애써 말했다.“그저… 전하의 살기에 너무 놀라 몸이 굳었을 뿐입니다.”허나 내 눈동자는 멈추지 않았다. 방 안의 구조와 탈출할 수 있는 시스템적 사각지대를 찾느라 분주했다.그 치밀한 눈빛의 움직임이 카시안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카시안은 그런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검을 거칠게 거두어 칼집에 꽂았다.쿠웅-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을 채웠던 살벌한 마기가 걷혔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 내 뺨을 손가락 등치로 슬쩍 쓸어내리며 말했다.“좋다. 세실리아 공녀. 그 어색하고 눈에 밟히는 몸짓, 어디 오늘 밤 연회장에서도 끝까지 버텨보아라.”이어서 그가 나를 지나쳐 테라스 창문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네가 이 세계의 운명을 쥔 특별한 존재인지, 아니면 내 칼날에 목이 날아갈 존재인지 연회장에서 지켜보지.”그는 그 말만을 남긴 채 공간에 다시 노이즈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사아아-방 안의 공기가 정상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나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막혔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허억!”드레스 뒷자락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카시안은 대체 뭘 알고 나를 시험하려는 걸까.’무엇보다 확실한 건, 내 몸짓에서 엄청난 위화감을 감지했다는 사실뿐이었다.‘연회장 이벤트를 피하는 건 불가능해, 그럼 이제 어떡하지?’그렇다면 정면 돌파뿐이었다. 게임 개발자로서 시스템의 동선과 구역 정보는 내가 제일 잘 알았다.연회장에서 최대한 귀족들 사이에 묻혀 숨어 지내야 했다.그의 의심을 지우는 것만이 내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잘도 흘러서 벌써, 황실 건국 연회가 개최되는 날.으리으리한 황궁의 대연회장.드르륵-거대한 황금빛 문이 열리는 순간 눈이 멀 것 같이 화려한 조명이 쏟아졌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넓은 연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사방에서는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보기만 해도 가식적인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내가 연회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영애 몇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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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Shall we dance?

귀족의 우아한 목례 대신 부장님에게 인사하는 직장인의 각도가 튀어나왔다. 영애들의 화려한 부채질이 순간 딱 멈췄다. 그녀들은 내 어색한 인사법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눈을 좁히며 말했다.“공녀, 오늘 몸이 많이 불편하신가 봐요?”“예? 왜요.”“예법이 참…… 독특하시네요.”“아하하,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봅니다.”나는 그녀들이 더 파고들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뗐다.“그러게요. 지병이 도져 일어서 있는 것조차 무리가 있군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급한 마음에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성큼성큼 걸았다.종종걸음으로 우아하게 걷는 영애들 사이에서 내 걸음걸이는 혼자 튀고 있었다.*“아흐으… 죽겠네, 진짜.”결국 나는 연회장 가장 사각지대인 디저트 테이블 뒤로 피신했다.탁자 위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달콤한 마카롱과 초콜릿 분수가 빛났다.“와, 맛있겠다.”안 그래도 단 게 땡겼는데 다행이다.회사에서 밤샘 야근을 할 때마다 내 영혼을 달래주던 게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난 귀족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그리고 극도의 긴장을 풀기 위해 마카롱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으음, 맛있어.”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에도 내 눈은 주위를 경계하느라 바빴다.경비병들의 교대 시간과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계산하느라 바쁘게 눈을 굴렸다.내 머리 위 허공에서 낮고 차가운 음성이 뚝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공녀의 체통은 어디로 가고 구석에서 쥐새끼처럼 행동하는 거지?”“?!”마카롱을 삼키려던 목구멍이 순간적으로 턱 막혔다.가슴을 쾅쾅 치며 고개를 들자 카시안 황태자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그가 와인 잔을 든 채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우리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나는 황급히 마카롱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잡아 입을 뗐다.“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와인 잔을 건드리고 말았다.챙그랑-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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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의심, 의심, 또 의심

‘갑자기 이런 전개로 간다고?’전혀 기쁘지 않았다. 난 아연실색하다 그냥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네, 넷? 뭐, 뭐라고요?!”“함께 춤추겠냐고 물었어. 이제는 귀도 잘 안 들리는 모양이지.”잔뜩 핀잔을 준 그가 다시금 말했다.“이러니 팔 떨어지겠으니 어서.”나는 완전히 경악했다. 그가 무슨 속셈인지 전혀 모르겠다.이 완벽한 폭군 앞에서 내 서툰 연기는 벌써 한계에 다다랐다.허나 카시안의 제안을 별 이유도 없이 거절하는 것은 황제 모독이자 즉결 처형 사유였다.‘괜히 시답지도 않은 걸로 변명하면 금방 알아채겠지.’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심정으로 그의 거친 손을 잡았다.큰 손이 내 허리와 손을 잡자 숨이 턱 막혔다. 그의 손바닥은 수많은 전투로 다져진 굳은살로 단단했다.그의 핏줄 돋은 강력한 아귀힘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진짜 무서워 죽겠네.’이런 건 설레지 않았다. 그저 목숨줄이 간당간당하게 느껴질 뿐이었다.터벅터벅-연회장 중앙으로 걸어나가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왈츠 음악이 타이밍 좋게 다시 시작되었다.‘스텝을 기억해 내야 해. 내가 설정한 동선이 있을 텐데.’머릿속으로 부랴부랴 게임 속 연회장 가이드를 복기했다.오른발 앞으로, 왼발 옆으로, 그리고 모으고. 1, 2, 3.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긴장감 속에 첫 발을 내디뎠다.하지만 내 몸은 야근으로 인해 하체 근육이 완전히 퇴화한 직장인이었다.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드레스 자락은 자꾸만 내 발목을 걸고넘어졌다.푹-!내 하이힐 앞코로 카시안의 검은 가죽 구두를 강하게 걷어찼다.그것도 모자라 뾰족한 뒷굽으로 콱 밟아버리기까지.“윽!”카시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가차 없이 찌푸려졌다.제국의 황제와 황후 다음으로 권력이 큰 남주의 발을 대놓고 정통으로 찍어 누른 순간이었다.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이게 다 학창시절부터 몸치, 박치라. 춤 좀 배울 걸. 그것도 아니면 운동 좀 할 걸.’벌써 체력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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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체 들키기 일보직전!

“몸이 약해 오랜 기간 침소에만 누워 지내다 보니 스텝이 서툽니다.”오래 쉬어서 그런 설정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하려 애썼지만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까지 숨기진 못했다. 게다가 내 시선은 그의 얼굴이 아닌, 연회장 구석의 출구 좌표를 쫓고 있었다.카시안이 내 귀를 스치듯 위험하게 속삭이며 입을 열었다.“나와 춤을 추면서 눈을 굴리며 도망칠 궁리나 하다니. 그 가당치도 않은 대담함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이어서 그가 내 귓가를 잘게 물듯이 낮게 말했다.“그렇게 도망치고 싶나? 정말 처형당하고 싶어서 이러지?”“아, 아닙니다.”내 대답에 코웃음을 친 그가 음산하게 말했다.“연회가 끝나면 그 어설픈 껍데기를 내 손으로 직접 벗겨주마.”그의 목소리에는 살벌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이거야 원, 죽겠구만.’산뜻한 음악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고조될수록 내 수명도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내 어색한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가 이미 내 정체를 밝히고 있었다.그렇게 웅장했던 왈츠의 마지막 엔딩 음이 길게 끌리며 끝이 났다.‘1분 1초가 느리게 지나갔어.’짝짝-그때 귀족들의 가식적인 박수 소리가 대연회장에 울려 퍼졌다.하지만 카시안은 내 손목을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이리로.”“네, 네에?”그는 나를 붙잡은 채 연회장 뒤편의 어둡고 고요한 테라스로 이끌었다.차가운 달빛만이 내리죄는 조용하고 완전히 고립된 공간이었다.“도망쳐도 소용없어, 사방에 방음 마법이 걸려 있거든.”언제 해놨는지, 카시안의 말대로 연회장의 소음이 완벽히 차단됐다. 그 말은즉슨, 여기서 내가 끔찍하게 칼에 맞아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바로 본론부터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가 딴 소리를 했다.“그나저나 조용해서 좋군, 그렇지 않나?”그게 더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하나도 좋지 않은데, 일단 그렇게 말해야겠지.’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답했다.“그, 그러게요.”속마음은 전혀 달랐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하자, 카시안은 나를 거칠게 대리석 벽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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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카시안의 울분이 터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날 4천 번 이상 루프시키고는? 내가 깨달은 후로 사망 스크립트를 얼마나 봤는지 알아?” 전혀 예상치 못한 카시안의 폭탄 발언에 내 사고 회로가 정지됐다. ‘뭐라고?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뭔지는 몰라도 지금 카시안이 말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싶다. 이런 내 간절한 마음에 반응하듯 앞에 파란색 선택지 창이 번쩍였다. 개발자 권한의 비상 가동 시스템이었다. 띠롱-! [돌발 이벤트 발생! 카시안이 당신의 정체를 간파했습니다.] 생존을 위한 대화 스크립트를 선택하십시오. 1. 설득하기 2. 거짓말치기 3. 모르쇠하기 선택지들을 확인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왜 그냥 대충 도망간다는 선택진 없는 건데!’ 과거에 바쁘다고 일단은 대충 야매로 짜놓았던 쓰레기 코드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나는 다급하게 1번 [설득하기]를 선택했다. ‘그래, 사람이니 대화를 하자!’ 난 칼이 목에 대어져 있는 이 순간에도 그에게 말했다. “으윽, 우리 대화를 좀 하는 게 어때요?” [판정 실패! 당신의 권위 수치가 부족합니다. 카시안은 지금 당신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카시안이 내 목을 강하게 조여왔다. 그가 내 숨통을 짓누르며 냉혹하게 말했다. “대화라니? 나를 4천 번 죽인 자의 입에서 나오는 대화치고는 참 가볍군.” 안 되겠다, 난 황급히 2번 [거짓말치기]를 연타했다. “실은 저는 전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둘 사이에 시련을 준 거죠!” [판정 실패! ‘연기’ 수치 미달. 카시안의 ‘광기’ 수치가 상승합니다.] 그가 내 턱뼈가 부서질 듯 손귀에 힘을 주며 격분하여 입을 열었다. “사랑해서 시련을 주었다고? 그 주둥이를 확 찢어버리기 전에 가만히 있지 그래?” 카시안의 적안이 진심으로 살벌하게 타올랐다. 마지막 3번 [모르쇠하기]를 궁여지책으로 발동시켰다. “제, 제가 그랬다고요? 저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에러: 시스템 에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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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새로운 조력자 등장!

이어서 그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 낮게 말했다.“말했잖아. 이 세계의 균열을 열고 너를 부른 건 나라니까?”그의 마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마기가 내 발목을 뱀처럼 감아 쥐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네가 만든 그 어떤 치트키도 작동하지 않아. 그러니 쥐새끼처럼 튈 생각은 그만하시지.”그러니 물리적으로 몸이 묶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카시안의 검날이 내 심장을 찌르기 위해 천천히 다가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팅-!갑자기 사방의 모든 소음과 불빛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달빛의 흐름도, 바람에 흔들리던 테라스의 커튼도 딱 멈춰버렸다.심지어 내 심장을 찌르려던 카시안의 마검과 그의 표정마저도 흑백으로 멈췄다.“어라?”이게 내 착각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시간이 정지된 상태였다.그렇게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였다. 허공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시스템처럼 울려퍼졌다.[내가 도와줄까?]“누구야?”[널 도와줄 사람.]“그러니까 이름이?”그때 머리 위 허공에서 경쾌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쏟아졌다.“으음, 일단은 에이든이라고 해둘까.”나는 위를 쳐다보며 소리쳤다.“뭐야, 이렇게 말 걸 수 있었잖아?! 그럼 왜 아까처럼 말 걸었어?”“그거야 색다르면 기분 좋으니까? 아무튼 안녕!”부웅-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나온 소년이 허공에서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와, 진짜 눈 뜨고 못 봐주겠네.”이어서 그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얄밉게 입을 뗐다.“그 어설픈 눈빛이랑 뻣뻣한 몸짓 때문에 데이터가 오염될 뻔했잖아. 하마터면 나도 억류될 뻔 했다고.”“그게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야?”“상관있지. 내가 있어야 너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그는 사방이 정지된 흑백의 공간 속에서 홀로 찬란한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게다가 눈부신 백발에 짙은 벽안을 반짝이는 수려한 미소년이었다.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그 소년의 등장을 보며, 내가 날카롭게 물었다.“당신 누구야? 설마 이 스크립트를 정지시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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