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들이 에러 났습니다!

남주들이 에러 났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By:  비밀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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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 상사 밑에서 만년 대리 게임 개발자 김민지. 오늘도 게임 <그라시아 제국의 꽃>을 개발하는데, 자꾸만 오류가 발생한다. 그러다 이세계로 끌려가게 되고, 정해준 운명을 따라야 했던 남주들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설상가상으로 황태자, 기사단장, 남부 대공 등 남주들 외 숨겨진 캐릭터 해금이 열리며 대공까지 나타나는데… 그야말로 남주들이 에러났다. 등장인물들이 회빙환한 세계관, 이세계에 빙의한 자들이여, 서로 싸워라! 이제 더 이상 회빙환은 그만둬! 과연 공녀 세실리아는 남주들과 서로 화해하고 이세계를 탈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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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 거북목+컴퓨터+21세기 현대판 노예=직장인

적막한 사무실에 소음이 울려퍼졌다.

“어후~ 죽겠어요, 진짜로~!”

옆자리 동료가 파티션 위로 스트레칭을 하면서 그리 말했다.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러는 게 한두 번인가요?”

“민지씨는 어쩜 그렇게 침착해요?! 전 아예 직종을 옮길까봐요.”

“그래도 이 회사만큼 돈 잘 주는 곳 없잖아요. 대기업 빼고는.”

“뭐, 그건 그렇죠.”

대한민국 중견 게임사의 3년 차 메인 개발자, 김민지.

그게 내 이름이었다.

그것도 365일 중 300일을 라꾸라꾸 침대에서 자는 지독한 야근 노예.

동료는 이때다 싶었는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요즘 가끔 출근하는 것도 너무 힘들다니까요?!”

“하하, 저도 마찬가지예요.”

“차라리 차에 치이고 싶어요.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까 그렇게라도 쉬고 싶다니까요, 요즘?!”

“그거 완전 동감이요….”

이 정도면 회사가 아니라 정신과를 가야 했지만 일해야 하니까 못 갔다.

반차라도 쓸까 했지만, 회사는 지금 게임 출시가 얼마 안 남은 상황이라 빡센 크런치 모드였다.

다들 일하느라 바쁜데 나만 얌체같이 쏙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잤지만 그런 나 자신을 세뇌하듯 달랬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았다.

만약 정신과에 가면 필히 우울증과 번아웃으로 진단받았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상태였는데도 일하고 또 일했다.

‘…다들 이러고 사니까.’

이런 게 너무 일상이었다.

잠이나 밥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이런 특수한 환경이 익숙하게까지 느껴졌다.

움직이지 않는데도 며칠째 잠을 못 자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위기감이 들었다.

‘큰일이군.’

벌써 연일 이어지는 밤샘 야근으로 눈 밑에는 지독한 다크서클이 훈장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어느덧 옆에 앉아있던 동료도 다 퇴근한 그때였다.

“김 대리이-! 아직도 못 끝냈어?!”

새벽 4시, 정적에 잠긴 사무실을 찢고 날카로운 고함이 꽂혔다.

“대가리가 굳은 거야, 그것도 아니면 손가락이 쳐부러진 거야?”

낙하산으로 들어온 우리 팀 만악의 근원, 이 팀장이었다.

혀가 굳은 걸 보니 또 밖에서 술쳐먹고 잡도리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어어? 사람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안 그래?”

그는 서슬 퍼런 눈으로 내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눈이 시린 모니터 앞.

화면에는 피폐 미연시 게임의 복잡한 소스 코드들이 가득했다.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는 회사의 사활이 걸린 <그라시아 제국의 꽃>이었다.

빈 카페인 음료 캔이 굴러다니는 내 책상 위로 그가 서슬 퍼런 눈을 들이밀었다.

“더 도파민 나오게 엔딩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해! 더 자극적이게, 응? 알았지, 김 대리?!”

그는 할 줄도 모르면서 하라는 건 많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요.”

지금도 납치, 감금에 더불어 남주 처형 엔딩까지 있었다.

‘그럼 나보고 남주를 고문이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손톱이라도 뽑으라는 건지….’

팀장이 하는 말마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이러는 자기가 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봐봐. 남주가 처참하게 구를수록 매출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거 몰라?”

이 팀장이 입꼬리를 비비 꼬며 비열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리 말했다. 결국은 다 매출이었다.

‘그걸 누가 모르겠냐. 해도 해도 정도가 있지, 이 말이야.’

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화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남주인 카시안이 벌써 4천 번 넘게 죽는 시나리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4,444번이요”

“그래서 뭐?”

“유저들도 이제 구르는 게 가혹하고 지겹다고 피드백해요. 이렇게 가면 엔딩이 너무 조잡하고, 끝도 없고요.”

논리적인 반박에 이 팀장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는 서류철로 내 머리를 기분 나쁘게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 김 대리. 실력도 감도 없는 게 그럼 말이라도 잘 들어야 할 것 아냐. 위에서 까라면 그냥 좀 까!”

허구한 날 이런 걸로 맞는 게 아픈 건 아니었지만 불쾌했다. 어쩐지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듯 한 기분이었다.

‘왜 내가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월급만 아니었어도 이딴 회사 따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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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장인 잔혹사
하지만 그 월급 때문에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살 거라면 회사를 계속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그가 내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차갑게 입을 뗐다. “오늘 내로 남주가 배신당해서 죽는 데드엔딩 새로 만들어놔. 안 그럼 내일부터 네 자린 없어, 알아들어?!” 그는 팀장 주제에 사원을 언제든 자를 수 있다고 예고했다. 그거야 당연했다. ‘이 팀장은 이 회사를 물려받을 그 귀한 외동아들이시니까.’ 나는 말하면서 속으로 자조했다. -주식회사 이곳의 회장은 자기 손자를 끔찍이도 예뻐라 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자신이 아끼는 손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걸로 유명했다. 이리안 팀장은 그야말로 낙하산 재벌 3세였다. ‘이걸 입사 직전에라도 알아야 했던 건데….’ 그럼 신입 치고 꽤나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해도 안 들어왔을 터였다. 보기에만 멀끔하고 성격은 쓰레기 같은 팀장은 그대로 결재 서류철을 내 책상 위로 던지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럼 이만 야근 열심히 하고!” 쿠웅-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텅 빈 사무실에 무겁게 울렸다. 나는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이 개쓰레기 새끼가 진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욕감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나는 힘없는 일개 월급쟁이 개발자일 뿐이었다. 타다닥- 나는 스트레스를 삼키기 위해 키보드를 부서져라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 원한 게 지독한 피폐라면 아주 가루가 되도록 만들어주지.” 카시안의 핵심 설정에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데드 엔딩을 때려 박았다. 여주의 배신, 단두대 처형, 자해로 자살까지 온갖 비극을 누더기처럼 구깃구깃 엮었다. [Status: Absolute_Despair] [Loop_Count: 4,444회 처형 확정]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저주를 읊조렸다. “이 팀장놈, 집에서 레고나 밟아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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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뜻밖의 등장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상황은 너무 명확했다. 자신은 게임 속 악역 영애가 되었다. 그것도 가장 빨리 죽는 캐릭터. 원작 속 세실리아의 엔딩은 끔찍했다. 황태자를 괴롭힌 악녀. 여주를 모함한 귀족 영애. 결국 황태자의 분노를 사고 끝내 모든 것을 잃는다. 마지막에는 다름아닌 북부 대공 카이로스 발테온에게 처형당한다. “아니.” 세실리아는 얼굴을 감싸 쥐면서 절망했다. “왜 하필 얘야?” 차라리 주인공이면 몰랐다. 공략 대상과 사랑에 빠지고. 행복한 엔딩을 보면 된다. “근데 왜 하필 죽는 역할에 빙의한 거야?!” 그 순간, 다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메인 목표: 생존하십시오.] 세실리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끝?” 잠시 후. 새로운 문장이 추가됐다. [실패 시: 사망] “…….” [그럼 행운을 빕니다.] 세실리아는 멍하니 창을 바라봤다. “너 진짜 성의 없다.” 하지만 불평할 시간은 없었다. 오늘은 원작 기준으로 세실리아가 황태자와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그 자리에서 황태자에게 미움을 사면 끝이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원작대로 움직여야 했다. 황태자 리온 에르하르트. 제국 최고의 남자이자 다정하고 완벽한 황태자. 세실리아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그를 괴롭히지 않고 여주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게 조용히 살아남는 것이었다. “좋아.” 세실리아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이번 생은 조용하게 살자.” 그렇게 결심한 순간.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영애님.” 시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큰일입니다.” 세실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데?” 시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말했다. “북부 대공께서 오셨습니다.” 세실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누구라고?” “카이로스 발테온 대공입니다.” 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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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상한 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원작 어디에도 이런 장면은 없었다. 꿀꺽- 세실리아는 침을 삼켰다.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다.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오늘은.” 카이로스가 낮게 입을 열었다. “몇 번째지.” “……네?” “이번이 몇 번째냐고 물었다.” 세실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이지...?’ 하지만 카이로스의 표정은 진지했다. 장난이나 시험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당연히 그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그 대답에 카이로스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실망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역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기억은 없군.” 세실리아는 그제야 확신했다. 이 남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어쩌면 이 세계에 대해서, 어쩌면 자신에 대해서. 원작에는 없는 정보였다. 게임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공략집 어디에도 이런 대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공님은.” 세실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를, 전에도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카이로스는 잠시 침묵했다. 휘이잉- 창밖에서 바람이 세게 불었다. 커튼이 흔들리며 붉은 그림자가 방 안에 일렁였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그녀의 뺨 가까이 가져갔다. 닿지는 않았다.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마치 닿는 순간 무언가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그가 속삭였다. “몇 번이고, 만났다.” “근데 저는 왜...” “그런데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카이로스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대신 그가 몸을 살짝 숙였다. 시선이 정확히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 “다르게 해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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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갑작스런 방문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영애님.” 아까 그 시녀였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바로요.” 세실리아는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원작 속 세실리아의 아버지, 에델하르트 공작은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딸을 사랑하기보다는 딸을 도구로 여기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지금, 다급하게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아니?” “그게……” 시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결국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북부 대공께서 다녀가셨다는 소식이 벌써 성 안에 퍼졌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공작님께서, 그 일을 전혀 모르고 계셨던 눈치셨어요. 대공께서는 아무런 방문 절차도 없이 그냥, 곧장 영애님 침실로 오셨다고 합니다.” 세실리아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북부 대공이 아무 통보도 없이 공작가에 들어와 그대로 자신의 방까지 왔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결례가 아니었다. 제국의 서열과 예법을 완전히 무시한, 거의 선전포고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세실리아에게 돌아갈 터였다. 공작의 집무실 문 앞에 서자 세실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 방에 들어가는 순간부터가 진짜 무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원작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몰락이 시작될 수도 있었다. * 똑똑- 이윽고 문이 열렸다. 책상 앞에 앉은 남자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 세실리아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에델하르트 공작은 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 “북부의 대공이 왜 여기까지 왔지?” “…저도 잘 모릅니다, 아버지.” “모른다라.” 공작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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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뜻밖의 만남
카이로스가 방을 나섰다. 그 뒤에도 세실리아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마치 겨울바람이 잠시 스쳐 지나간 간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방금.”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방금 벌어진 일 때문인지. 그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원작에 없던 남자가 원작에 없던 대사를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남자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미쳤나 봐.” 세실리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껏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다. 조용히, 원작대로. 그런데 방금 그 순간, 살아남는 것보다 더 궁금한 것이 생겨버렸다. ’저 남자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또 몇 번이고 만났다는 그 말은 무슨 뜻이고?‘ 그때 눈앞에 다시 푸른 창이 떠올랐다. [알림] [비정규 변수와의 접촉 이후, 시스템 예측 정확도가 하락했습니다] [예측 정확도: 94% → 81%] 세실리아는 그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13%라니.‘ 고작 대화 한 번으로 예측이 그만큼 흔들렸다는 뜻이었다. 마치 잘 짜인 각본 안에 낯선 즉흥연기가 끼어든 것처럼. 세계 전체가 조금씩 삐걱이기 시작했다.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영애님.” 아까 그 시녀였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바로요.” 세실리아는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원작 속 세실리아의 아버지, 에델하르트 공작은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딸을 사랑하기보다는 딸을 도구로 여기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지금, 다급하게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아니?” “그게……” 시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결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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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불호령이 떨어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장 오늘 저녁, 황실에서 여는 무도회에 참석해라. 그곳에서 황태자 전하와의 만남을 확실히 성사시켜.” 역시나, 완전히 도구 취급이었다. 아버지란 작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북부 대공에 대한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네가 황태자와 이어질 상대라는 것을 세상에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세실리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저녁에 벌써 무도회를 가야 한다니.‘ 원작 기준으로는 아직 한참 남은 이벤트였다. 그런데 지금, 예정에도 없던 시점에 갑자기 황태자와의 만남이 앞당겨지고 있었다. “아버지, 그건…” “내 말에 토 달지 마라, 네가 잘못한 것을 안다면 말이야.” 공작의 목소리가 낮고 단호했다. “오늘 저녁까지 준비를 마쳐. 더 이상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 쿵- 그러고 나서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세실리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었다. 카이로스와의 만남 하나로 예정에도 없던 이벤트가 앞당겨졌다. ’이건 원작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야.‘ 세실리아가 알고 있는 최소한의 지식. 이제 그것조차 더는 안전망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 저녁, 황궁의 정원. 수백 개의 등불이 나무 사이사이를 밝히고 있었다. 은은한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세실리아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정원 한가운데 서서, 낯선 얼굴들 사이를 지나는 자신을 느꼈다. ’우와… 신기해라.‘ 벌써 원작에서 수십 번 읽었던 배경이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니, 활자로 읽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진한 향수 냄새와 옷자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자갈길의 감촉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에델하르트 영애.”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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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공의 정체는…?
세실리아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원작에 없던 두 남자의 만남. 그것도 자신을 사이에 둔 채로. 카이로스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비켰다.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찾아온 사람처럼. “대공.” 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했지만, 그 아래 깔린 날카로움은 숨길 수 없었다. “오늘 다과회에 초대장을 보내드린 기억이 없습니다만.” ”…“ 카이로스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실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정원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숨을 멈췄다. “대공님, 지금 뭘……” 세실리아가 당황해서 물었다. 허나 카이로스는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한 곡, 추지.” 리온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서늘해졌다. 정원의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 자리의 공기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세실리아는 리온과 카이로스,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서 갇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손을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잡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눈앞에 다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경고] [두 개의 비정규 변수가 동시에 활성화되었습니다] [원작 붕괴율 급상승 중 - 현재 42%] [어서 선택하십시오] 세실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원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카이로스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었다. 세실리아는 숨을 죽인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정원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리온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이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다정함을 가장한 경고. 세실리아는 그 사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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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황태자마저도…!
“그야, 당연히…” “지금의 당신한테는 그렇게 느껴질지 몰라도, 난 아니라서 말이지.” 세실리아의 발이 잠깐 엇갈렸다. “으앗!” 그때 카이로스가 능숙하게 그녀를 붙잡아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거리가 순간적으로 더 가까워졌다. “무슨 뜻인지, 제발 제대로 말해주세요.” “말해도.” 카이로스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믿지 않을 거다.” “그걸 어떻게 알죠?” “…” 카이로스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때 음악이 끝겼다. 어색한 춤이 끝나자마자 대공은 자리를 물러났다. 아쉽다는 듯이 손을 끝까지 잡고 있었던 것만 빼면.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보지.” 세실리아는 정중히 예를 갖추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더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 그렇게 정원 한쪽 구석. 등불이 닿지 않는 어두운 벤치. 세실리아는 그곳에 앉아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덜덜-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카이로스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라니.’ 원작 어디에도 세실리아와 카이로스가 사전에 만난 기록은 없었다. ‘애초에 카이로스라는 캐릭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것은, 대체 어느 시점의 일인가. “…설마.” 세실리아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설마 회귀?’ 게임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클리셰였다. ‘만약 카이로스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면.’ 그가 말하는 ‘몇 번이고’라는 표현도,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는 말도 전부 설명이 됐다. 저벅저벅- 그때, 등 뒤에서 조용한 발소리가 들렸다.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사실 또 카이로스인가 싶어 돌아봤다. 허나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리온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리온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조금 전 정원에서 보였던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더 차갑고 계산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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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공이 두 명?
세실리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리온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비슷한 걸 보고 있다니.’ 그 역시 시스템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리온도, 카이로스처럼 원작에는 없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거야?’ 원작 속 완벽한 황태자였던 것뿐이었던 남자. 그런데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세실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눈앞에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알림] [또 다른 비정규 변수가 감지되었습니다] [대상: 리온 에르하르트] [해당 인물의 데이터에서 알 수 없는 접근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세실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그날 밤. 세실리아는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카이로스의 알 수 없는 말들. 리온의 서늘한 미소와 의미심장한 질문. 그리고 계속해서 흔들리는 원작 붕괴율.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세실리아가 알고 있던 게임은 이미 게임이 아니었다.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또 그 진실들은 서로 얽혀 하나의 거대한 비밀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뭐야, 이 세계.” 세실리아는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부스럭- 그때 창문 너머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세실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어두웠고,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창문을 잠갔던 것 같은데.’ “…누, 누구야?!” “…” 허나 대답은 없었다. “하아, 하…” 대신 어둠 속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세실리아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커튼 뒤로 시선을 던진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거기에는, 오늘 낮에 만났던 것과는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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