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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at ng Kabanata ng 부정맥 메이커: Kabanata 91 - Kabanata 100

105 Kabanata

90.

윤오의 차가 타운하우스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윤오가 먼저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선우는 거기에 발끈했을 테고, 윤오는 그 반응이 재미있다며 한 번 더 놀렸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평생 내가 지켜줘야겠다.’ 이 인간이 그런 말을 해놓고 별말없이 운전이나 하고 있었다. 별말이 없는게 다행일지도……. 선우가 슬쩍 옆을 훔쳐봤다. 핸들을 잡은 손. 반듯하게 뻗은 콧날. 전방을 주시하는 검은 눈. 전부 권윤오답게 단정했다. 아니, 왜 저렇게 태연한데? “야.” 선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윤오가 차를 세웠다. “도착했어.” “아, 진짜!” “왜.” “너 일부러 그러지?” 선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윤오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 “…..!” 선우가 숨을 참았다. “……” 윤오의 손이 선우의 어깨 너머로 뻗어왔다. 찰칵. 안전벨트가 풀렸다. “…….” 윤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본부장님?” 윤오가 창밖을 확인했다. 붉은 마세라티가 선우의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제야 윤오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 본부장님.” 좌불안석. 선우가 황급히 창문을 내렸다. 에단이 몸을 조금 숙였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요.” 그의 시선이 선우의 얼굴을 훑었다. “그게, 병원에 다녀와서…….” 선우의 입이 변명을 줄줄 뱉어댔다. 에단이 운전석으로 눈을 돌렸다. “생각보다 늦어서 걱정했습니다.” “아, 전화라도 하시ㅈ….” “네. 얘가 밥을 잘 못 챙겨 먹은 것 같아서요.” 선우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윤오가 끼어 들었다. “아닐텐데.” 선우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 빨리 내려버려야지. 선우가 허둥지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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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몇 번인가 뒤척이던 선우는 허리를 단단하게 감싼 팔의 온기에 눈을 떴다. 너무 따뜻해서, 다시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눈앞에 에단이 있었다. 평소라면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을 머리카락은 베개에 눌려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셔츠 단추 몇 개가 느슨하게 풀린 채였다. 빈틈없던 본부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제 침대에 누워, 아무 경계 없이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기도 해서 웃음이 났다. 아.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느라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선우는 한동안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엄청 길었다. 게다가 굴곡 하나 없이 반듯한 콧날하며. 잠든 사이 힘이 빠진 입술은 도톰했다. 어젯밤에도 수없이 봤으면서. 선우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슬쩍 돌아봤다.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보다가 걸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몰래 훔쳐보고 있는데. “더 자요.” 눈도 뜨지 않은 에단이 팔에 힘을 줬다. 선우의 몸이 그의 품 안으로 쑥 끌려갔다. “……!” 잠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직 7시 안 됐어.” 선우의 심장이 덜컥 뛰었다. “출근 준비 하셔야죠.” “싫은데.” 에단이 눈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회사 가면 다시 본부장하고 과장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얼른요.” 그제야 에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감청색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선우를 바라봤다. “지금은.” 평소보다 낮고 느린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에단이 선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김 과장 말고.” 손끝이 귓바퀴를 스치고 내려왔다. “그냥 내 앞에 있는 선우 씨만 할 건데.” ”…….“ “안 됩니까?” 선우의 심장이 괜히 한 번 더 뛰었다. “그렇게 물으시면.” 막 몸이 배배 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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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대회의실 안은 이미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긴 테이블을 따라 앉은 이사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석에 앉은 에단은 말없이 자료를 넘겼다. 차갑게 가라앉은 감청색 눈동자가 한 사람씩 지나갈 때마다, 회의실의 공기마저 한 톤씩 낮아지는 듯했다. 선우는 에단의 바로 옆자리에서 선우는 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정리했다. 예상했던 대로, 공격은 재무 이사부터 시작됐다. “제작 단가가 기존 예산보다 15%나 높습니다. 아무리 프리미엄 라인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단순한 초과 지출로 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에단의 손가락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 눈매가 서늘하게 좁아졌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선우가 먼저 노트북을 돌렸다. “단가 상승분은 단순한 비용 증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회의실의 시선이 일제히 선우에게 향했다. 선우는 흔들림 없이 화면을 띄웠다. “이번 병에 적용하는 무라노 공방의 특수 유리는 일반 유리보다 산소 투과율이 낮습니다. 실제 실험 결과, 개봉 전 보관 과정에서 산화로 인한 풍미 저하를 약 20% 정도 늦추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화면에 그래프가 올라왔다. “단순히 예쁜 병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트비트가 가진 숙성감과 향을 소비자가 마시는 순간까지 최대한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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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석의 넓은 시트에 몸을 묻은 선우는 이륙과 동시에 에단이 말한 대로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활주로를 박차고 오른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섰다. 창밖으로 눈부신 태양이 쏟아졌다. 구름 위의 햇빛은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선우가 눈을 찡그리자, 옆자리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던 에단이 말없이 손을 뻗었다. “아, 감사해요.” 창문 덮개가 절반쯤 내려왔다. 빛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자라고 했잖습니까.” 태블릿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에단이 말했다. “도착하면 바로 보트 타고 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기내의 낮은 진동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기내의 엔진음이 점점 일정한 리듬으로 변했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 소리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엔진음으로 갈라졌다. 익숙한 소리와 낯선 소리가 뒤엉켜 이상한 음악이 됐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 가끔은 무너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선우가 눈을 떴을 때, 비행기는 이미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 6월의 베네치아는 눈이 부셨다. 곤돌라가 미끄러져 가는 수로 위로 햇빛이 잘게 부서졌다. 물결마다 반사된 빛이 골목의 벽과 창문에 튕겨 올랐다. 에단이 고집하는 무라노 유리처럼 투명하고 선명한 빛이었다. 서울의 눅눅한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선우의 얇은 리넨 재킷을 스쳤다. “덥지는 않습니까?” 수상 택시에서 내리는 선우의 손을 에단이 자연스럽게 잡았다. 그는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친 채였다. 화이트 셔츠 소매는 팔꿈치 아래까지 단정하게 걷혀 있었다. “바람이 시원해서 좋아요. 서울은 벌써 한여름 같았는데.” “베네치아의 6월은 축복 같죠.” 에단이 선우를 바라봤다. “당신과 오기엔 딱 좋은 계절이고.” 선우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에단의 손이 가볍게 등을 감쌌다. 그가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 안쪽으로 선우를 이끌었다. *** 바닷바람에 닳은 붉은 벽돌과 빛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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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Per bacco! Ethan, Sunwoo! Venite qui! Subito!”(맙소사! 에단, 선우! 당장 이리 좀 와봐요!)그 순간 에단이 선우의 손목을 잡았다.“전화 끊으세요. 지금 안 들어가면 샘플 뒤틀립니다.”“아, 윤오야.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알겠어. 이따 연락ㅎ…….선우의 손가락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에단이 선우를 공방 안으로 이끌었다.다시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Guardate! Guardate!”(보세요! 보세요!)마르코가 긴 파이프 끝에 매달린 유리 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아직 붉은빛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유리가 불꽃을 받아 내부에서부터 빛나고 있었다.“È magnifico, vero? È proprio quello che volevi, Ethan!”(정말 근사하죠? 에단, 당신이 딱 원했던 바로 그겁니다!)에단이 선우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가마 앞으로 다가갔다.붉은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강하게 물들였다. 그가 선우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봤습니까?”빛이 병의 굴곡을 따라 흐를 때마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안쪽에서 붉은 잔광이 한 번씩 맥동했다.선우가 숨을 죽였다.“……심장 같아요.”눈앞의 병은 정말 심장을 닮아 있었다. 양쪽으로 둥글게 솟은 곡선이 가운데에서 한 번 움푹 패였다가, 아래로 갈수록 서서히 좁아졌다.유리 장인이 수천 번의 호흡과 손끝으로 다듬어낸 곡선에는 묘한 생명력이 있었다.​“이탈리아에서의 첫 번째 결과물입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이상해요.”“어떤 의미로?”“제가 그린 게…….”선우가 다시 병을 바라봤다.“진짜가 된 것 같아서요.”​“다행이네요. 당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마르코를 더 괴롭혀야 할 뻔했는데.”에단이 선우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갔다.그리고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화면이 바닥을 향했다.“지금 이순간에 집중하세요.”에단의 시선이 가마 속 유리로 향했다.“당신 눈앞에 있는 게 진짜니까.”“Guarda, Sun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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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이 답답한 듯 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샘플이 식으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마르코가 정리하는 동안 근처나 좀 걷죠.”선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에단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이 향한 곳은 무라노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이었다.관광객들이 몰려다니는 광장과 달리 이쪽은 한산했다. 오래된 벽돌담 사이로 작은 창문들이 드문드문 열려 있었고, 담장을 타고 올라간 부겐빌레아가 분홍색 꽃을 무더기로 피워내고 있었다.6월의 바람이 꽃 사이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운하의 물은 느리게 움직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 위로 낡은 집들의 색이 길게 흔들렸다.선우가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서울은 지금쯤 퇴근 전쟁이겠네요.”에단이 걸음을 늦췄다.“지금 선우 씨 눈앞에 있는 건 지옥 같은 테헤란로가 아니라 무라노의 물길입니다.”선우가 피식 웃었다.“본부장님은 서울이 그렇게 싫으세요?”“아뇨.”에단이 선우를 바라봤다.“당신이 서울을 생각하는 게 싫은 것 같은데.”두 사람은 운하를 가로지르는 작은 나무 다리 앞에 멈춰 섰다.에단이 난간에 팔을 기대었다. 물 위로 지나가는 배의 그림자가 그의 셔츠 위로 느리게 흔들렸다.그가 주머니를 뒤졌다.“…….”담배라도 꺼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온 것은 작은 민트 사탕이었다.“금연 중입니다.”에단이 사탕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아…….”선우가 얼떨결에 입을 벌렸다.작은 사탕이 혀끝에 닿았다. 설탕의 달콤함이 혀끝에 얌전히 머물렀다가, 조금씩 녹으면서 민트의 시원한 향이 뒤늦게 올라왔다.“맛있습니까?”“네.”선우가 사탕을 굴리며 대답했다.“괜찮네요.”에단이 다시 운하를 바라봤다. 선우도 애써 수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리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정작 선우의 마음만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본부장님은 제가…….”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선우가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이었다.수로 저편에서 작은 전동 보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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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노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은 많지 않았다. 정확히는, 선우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할 건 다 한 사이였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감격스러운 전개인가! 그런데도. “선우 씨.” “네!” 대답이 너무 우렁차게 튀어나왔다. “괜찮습니까?” “무, 물론이죠?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요.” 있었다. 가능하다면 방금 전의 자신을 무라노 운하에 살짝 밀어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먼저 키스했어! 그것도 그냥 입술만 갖다 댄 게 아니었다. 멀쩡히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목덜미를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겨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이었던가, 제가. 고백은커녕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해서 십 년 넘게 속을 끓였던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 “그런데 왜 저를 안 봅니까?” 왜겠어요. 선우의 얼굴이 화르륵 불탔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방금 키스한 장면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문제는 복기할수록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다는 거였다. 나. 이 사람을. 조…좋아……. “Forza, entrate! Non restate lì impalati!” (빨리 들어와! 문간에 그렇게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생각이 결론을 짓기도 전에, 마르코가 문 안쪽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Marco, calma. Sono passati appena venti minuti.” (마르코, 진정해요. 겨우 20분 지났잖아요.) “Venti minuti?! Per te, forse! Io ho aspettato abbastanza da diventare vecchio!” (너한테나 그렇겠지! 난 기다리다 늙어 죽을 뻔했어!) 마르코의 성화에 에단이 작게 웃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입니다.” “본부장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선우가 작게 받아쳤다. “은근히 사람을 재촉하시잖아요.” “그건 선우 씨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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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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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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