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심연의 군주는 로맨티스트: Chapter 11 - Chapter 19

19 Chapters

제11화

다리에 힘이 풀린 세쟈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폐하, 어, 어떡해요..? 네...? 칼데론은 저희 어머니를 죽인 원수라고요..!”정작 어머니를 죽인 건 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던 세쟈르. 그녀는 눈앞에서 농락당한 아버지가, 칼데론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타나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오르테아스 역시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휘청거렸다. “도통 모르겠구나, 어찌 심연수옥의 문이 열렸단 말인가.”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착한 심연수옥 입구.이 세계에서의 바다는 아르켈의 소유도, 둠바스의 소유도 아니다. 늘 중립을 유지하는 바하족의 영역이다. 오직 신력이 있는 자만이 숨을 쉴 수 있는 바닷속. 그곳에 위치한 심연수옥은 마치 검푸른 광택으로 둘러진 동굴 같았다. 동굴 안, 고여있지도 흐르지도 않는 물은 신비했으나 숨을 들이마시면 폐 속까지 서늘하게 젖어드는 느낌은 소름이 돋았다. “사, 사슬이...”세쟈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선이 향한 곳이는 벽과 바닥에 박혀있는 사슬이 헐겁게 풀려 있었다. 말이 되질 않았다. 그건 절대로 녹슬지 않는 금속일 뿐더러 단순히 묶기 위함이 아니라 닿는 순간 체온을 앗아가고, 마력을 잠식하며, 의지까지 서서히 깎아내린다. 그래서 이곳에 머무는 존재는 하나같이 비슷해진다. 숨을 쉬고 있지만 살아 있는 것과는 다른 상태로. 근데, 칼데론은 이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탈출했다고? 그것도 삼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불길하다. 당장 궁 병력을 강화해야겠다.”“폐하..! 폐하도 아시잖아요! 칼데론은 마음만 먹으면..”“겁먹지 마라. 신의 가호는 늘 아르켈을 향하고 있으니.”시간마저 느리게 가라앉는 곳, 오르테아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세상에 존재하는 검은색은 단 하나뿐이라 믿어왔었다. 헌데 아니었다. 단순한 블랙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찬란하고 신비하고 고귀한.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방 안의 분위기. 미주는 실크처럼 미끄럽게 빛나는 검고 얇은 이불을 거둬내고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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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군주님께 고개를 바칩니다.”수십의 기사단이 한 문장을 동시에 토해내며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일제히 허리를 꺾는 순간, 금속 갑옷이 맞물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높게 솟은 왕좌의 등받이에서는 짙고도 오묘한 보랏빛 기운이 느리게 일렁이고 있었다.그 위에 앉은 칼데론은 다리를 느슨하게 벌린 채, 턱을 괸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압도적인 시선.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자리엔 단 하나도 없었다.다만 한 치의 오차 없이 같은 각도로 숙여진 머리들 사이, 유독 무겁고 거대한 갑옷을 걸친 자가 있었다.심연의 기사단 수장, 로일드.그는 한쪽 주먹을 단단히 쥔 채, 팔을 들어 이마에 가져다 댔다.“감히 시선을 올립니다.”칼데론은 흥미 따윈 없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고는 등마저 등받이에 더 깊게 기댔다.“보고하라.”“현재 게이트 주변 경계를 강화하였습니다. 다만 아르켈 측에서는, 아직까지 어떠한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습니다.”심연의 기사단 수장이자 칼데론의 직속 집행자, 로일드. 그가 말하는 게이트는 아르켈과 둠바스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지만, 오르테아스의 봉인으로 인해 그동안 균열 하나 없이 봉쇄되어 있었다. 물론 칼데론의 귀환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지만 말이다. “당분간은 경계만 유지하라.”“예, 심연의 기사단은 군주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언제든 명을 내려주십시오.” 로일드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지만, 칼데론은 관심 없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왕좌의 팔걸이만 가볍게 두드렸다.톡, 톡, 톡.시선마저 이미 다른 곳으로 흘러 있었다. ***희뿌연 수증기가 공간을 잠식한 정화실. 이름만 좀 쌔했을 뿐, 내부는 그냥 목욕을 하는 공간이었다, 미주는 욕조 앞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검은 대리석 욕조 안에는 투명한 물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조금 전 마주했던 몰틴의 무표정한 얼굴이 스쳤다. 그리고 칼데론. 마족의 군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기면서도, 정작 위협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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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미주는 두 눈을 껌뻑이며 시녀복자락을 꽉 움켜쥐었다.모두가 칼데론의 표식이라 말했다. 심지어 그조차도. 근데, 직접 새긴 게 아니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이야?“네..?”“억울하다, 또 버려졌다, 그래도 살고 싶다. 그렇게 외치던데.”칼데론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 세쟈르의 방에서 한낱 인간 따위를 마주했을 때. 그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옷을 벗긴 건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그저 계획이 틀어진 게 화가 나서, 나약한 몸뚱어리를 반으로 갈라 숨통을 끊어놓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깝다, 이렇게 아름다운 육신은 처음 본다. 그런 생각이 들어 살려놨을 뿐. 게다가 말라토 기둥에서 잠을 잔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미래. 그 미래에 대한 환영이 펼쳐져 자신의 손을 더럽힐 이유는 딱히 없어 보였다.근데 이상했다. 세쟈르의 방을 떠나온 뒤부터 그 미약한 목소리가, 마음속의 외침이 자꾸만 귓가를 파고들었다. “제... 제가요?”“너 따위가 무슨 생각을 하든 관심 없어. 이렇게 아름답게 빚어진 몸은 꽤 흥미롭거든.”낮게 깔린 목소리가 피부를 스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그건 여전히 표식 위를 맴도는 손끝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도망칠 틈조차 사라진 거리, 그의 그림자가 미주를 완전히 덮어버렸다.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 160cm도 채 되지 않는 작디작은 인간. 이대로 잡아먹인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쫄지말자, 떨지 말자.날 살려줬잖아. 이곳까지 데리고 오고, 방까지 내어줬잖아.“타나라고 했나.”아, 맞다. 이곳에서의 나는 설미주가 아니라 타나랬지. 이왕이면 어울리는 이름으로 살아야겠지.“네, 타나입니다.”그의 손이 스르륵 내려와 왼쪽 가슴 위에 멈췄다.젖꼭지에 느껴지는 야릇한 온기에 온몸 움찔거렸다.대놓고 만지기보단 심장박동을 느끼는 쪽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고작 얇은 천 하나가 유일한 방어막이었다. 스리슬쩍 몸을 비틀던 찰나 칼데론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피할 겨를도 없이 포개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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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칼데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려다봤다.그 시선은 지나치게 깊어서, 마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재미있는 선택을 하는군.”“제대로.. 보필하겠... 습니다... 대신 이런 방식으로는 말고요...!”겨우겨우 이어 붙인 말에 칼데론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눈동자는 겁을 먹었다 외치고 있는데, 저 쫑알거리는 입술은 제 침에 젖어 번들거리고. 어찌 이런 요물을 데려왔나 싶어 어이가 없다가도, 작고 새하얀 몸뚱어리가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웃음이 번지던 순간 그의 형체가 흐릿해졌다.엥? 또 사라졌어? 또?맞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서늘한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미주는 시녀복 자락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미쳤어 진짜.”첫 키스는 그렇다 쳐도 남의 목덜미는 왜 핥는데..? 내가 혹시 먹잇감 같은가?헉..! 설마 마족이라는 존재는 인간을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기도 하는 건가..?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날들이 감도 오질 않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단지 두려움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기만 하면 떠오르는 붉은 눈동자와 피부 위를 스치던 혀의 감각.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던 감각들.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동시에 지금의 이 평온이 부디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억지로라도 잠에 빠지려 애를 쓰면서. ***“타나 아가씨.”굵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미주, 아니. 타나는 반쯤 뜬 눈으로 급하게 몸부터 일으켰다.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휘청. “조심하시지요.”넘어지기 직전, 순식간에 뻗어 나온 팔이 허리를 받쳤다. “괜, 괜찮습니다..!”몰틴은 아무 일도 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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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묵직한 기운이 정원 한가운데에 내려않더니, 이내 칼데론이 모습을 드러냈다.검은 셔츠와 바지. 다리 갑옷에 박힌 붉은 보석. 그리고, 그 보석보다 더 선명하게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타나는 곧바로 손을 거두고, 몰틴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드나?”단순한 감상 따위를 묻는 어조가 아닌 것 같았다.꼭 자신이 이곳에 어울리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아 순간 말을 잊지 못했다.“타나.”“예, 예쁩니다..”타나를 향해있던 칼데론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닿지 못한 붉은 꽃을 향해서.“아무 데나 손을 대는 습관부터 고쳐야겠군.”“죄송합니다.. 혹시.. 독이 있는 건가요?”조심스러운 질문에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독?”낮게 되물으며 꽃망울을 움켜쥐는 커다란 손. 순간 화려하던 꽃잎이 손안에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보다 더 질이 나쁘지. 특히 인간에게는.”숨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바닥으로 떨어진 꽃은 형태를 잃고 검은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아름다운 건 늘 대가를 요구한다.”“명심하겠습니다.”칼데론의 시선이 몰틴에게로 옮겨갔다.“나머지 안내는 내가 맡지.”“군주님, 어찌 그런...”“몰틴.”이름 하나에 말이 끝났다.몰틴은 이런 하찮은 일을 직접 하겠다는 군주의 뜻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바짝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따라 와.”타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곧게 뻗은 등, 흐트러짐 없지만 단단한 걸음.뒷모습만으로도 압도되는 존재감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시선을 발끝에 떨궜다.잠시 후, 묵직한 문이 열리며 드러난 공간은 도서관을 연상시켰다.높은 천장.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 서가들. 검은 나무로 짜인 책장마다 빼곡하게 꽂힌 책들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떨어졌다.“아르켈에서 태어나 이십 년을 살았다지.”“네? 네..”“그럼, 아르켈과 둠바스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보거라.”흠칫.아씨, 어떡하지? 이십 년은 무슨... 고작 이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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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어느 쪽을 믿냐고? 무엇이 정답인지는 몰랐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침묵만큼은 어울리지 않았다. “저는... 살아남을 수 있는 쪽을 믿겠습니다.”“나쁘지 않은 기준이군.”칼데론의 입꼬리가 올라간 게, 아무래도 타나의 대답이 마음에 꽤나 든 모양이었다.그의 손이 지도 위에서 떨어지자 빛나던 두 대륙이 서서히 빛을 거두며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혹시... 아르켈과 또.. 전쟁이 시작되는 건가요..?”“지금은 그쪽엔 영 흥미가 없는데.”기다란 손가락이 타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휘어잡았다.피부에 닿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눈빛과 압도적인 분위기. “흥미가 다른 곳에 생겼거든.”손가락에 힘이 더 실리며 피할 수도 없는 각도로 고개가 들렸다.숨이 흐트러 질만큼 파고드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뭔가 집요하고, 욕정이 드글드글 끓는 것 같달까.“군, 군주님..”“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어차피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딱히 갈 곳도 없는데. 그 모든 현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눈길을 피했다.이 남자는 왜 이렇게 마주 보는 것조차 버거운 것인가. 딸꾹. 어이없는 타이밍이었다. 놀란 마음이 만들어낸 몸의 반응.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이 결국 눈을 질끈 감게 만들어버렸다.“귀여운 소리가 나네.”또 한 번 딸꾹. 아랫입술 위로 손가락이 닿았다. 가볍게 스치는 듯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힘.스르륵 힘이 풀리듯 열리는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미약하게 새어 나왔다.“도망치지 말라는 말에는 시선도 포함이야.”스리슬쩍 눈을 뜬 타나는 어렴풋이 반짝이는 눈동자가 너무도 매혹적이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해져. 우린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테니까.”“네...”“넌 내 거잖아.”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뉘앙스가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들에 미치기라도 한 건지, 정말로 그의 것이 되고 싶다는 욕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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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어? 물이다!"귓가에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자연스레 걷던 중, 물웅덩이 하나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아르켈에서 봤던 샘물에 비해 아름답진 않았지만, 혹시 그때의 목소리를 또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기대감이 차올라 쪼그려 앉았다.맑은 물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꼭 들떠있는 것 같아 미소가 번졌다.“둠바스랑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네.”그때였다. 물결이 이상하게 흔들리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린 무언가가 물 안에서 튀어 올랐다. ..?차가운 감촉이 허리를 단단하게 휘감았다. 밧줄? 아니, 왜 이렇게 끈적해? 설마 침...? 그럼... 혀... 혀야...?첨벙!발버둥을 칠 겨를도 없이 물속으로 끌려들어 간 몸이 허우적거렸다.입과 코를 향해 사정없이 터져오는 공기방울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 사이, 몸은 점점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깊이, 더 깊이. 몰틴의 경고를 들었어야 했는데, 그 쪽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전히 허리를 휘감은 그것은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단단하게 조여들었다.빛이라곤 하나 없는 어둠 속, 타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하나였다.‘칼데론 님..’입으로는 내뱉지 못한 채 그저 간절하게.‘부디.. 저를... 구해주세요...’끝도 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의식이 점점 가라앉았다. 딱 숨이 멎기 직전, 어둠을 찢고 스며드는 붉은빛이 감은 눈 사이로 스쳤다.***“켁.. 켁켁..”물로 막혀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폐 안쪽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고,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흐릿하게 열린 시야 너머, 정말로 그가 있었다.그렇게 간절하게 불렀던 존재 칼데론. 조용히 흩날리는 머리카락엔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고, 옷도 보송보송해 보이는 게. 마치 지금 벌어진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 같았다.“자꾸 입을 맞추게 만드네?”아, 설마 인공호흡으로 살려준 거야?감사지, 완전 감사지. 하.. 살았다. 이번엔 진짜 죽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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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젖은 몸이 그의 옷에 닿는 게 신경 쓰여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늦었다.너무도 가볍게 그의 품에 안긴 상태였고, 검은 머리칼과 검은 망토가 바람에 흩날렸다. “놓.. 놓아주세요..!”“입.”“네..?”“그 입 좀 어떻게 할 수 없나.”순간, 개구리의 혀과 눈을 모조리 뽑아버린다는 서늘한 말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굳이 품에 안겨 이동 당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몇 걸음 걷지도 않아 공간이 바뀌었다.익숙한 공기, 익숙한 습기.잠이 들기 전, 늘 뜨거운 물로 몸과 마음을 녹이는 나름 힐링의 장소가 된 정화실. 이제야 타나를 내려놓은 그는 아무렇지 않게 드레스 어깨끈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꺄악...!”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려 손으로 급히 가려봤지만, 이미 한쪽이 흘러내려 새하얀 젖가슴이 툭 튀어나온 뒤였다. 간신히 젖꼭지만 팔로 가려봤지만, 팔 사이로 흘러나온 말랑한 살결을 전부 감추진 못했다.“흑개구리가 사는 물은 아주 더러워.”“그, 그래서요..?”“씻어야 한다고. 당장.”그의 손이 반대쪽 어깨끈으로 향했다. 옷을 벗기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타나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제, 제가 할게요..!”흔들리는 목소리, 하지만 분명한 의지.붉은 시선이 제 손목을 붙잡은 희고 가는 손가락을 향했다. “흠.”이 인간은 겁이 없는 것인가, 맹랑한 것인가. 자꾸만 자신을 가로막는 타나가 눈엣가시 같은데 이상하게 그 새하얀 살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어찌 물기를 머금은 피부가 이리도 아름답던가. 타나라는 인간을 보면 자꾸만 욕정이 끌어 오른다. 그것도 활활 타오르듯이. 그 이질적인 감정은 일만 년을 살아온 그에게도 처음이라 멀리하려 했거늘. 지금은 고작 인간 따위에게 손목이 붙잡혀 그대로 멈춰 있었다.씻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솔직히 그뿐만이 아니었다.저 보드라운 살결을 밤이 새도록 더듬고, 쓰다듬고, 닿는 자리마다 제 것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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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이곳에서 지내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는 칼데론이 무화과를 꽤 좋아한다는 것. 달콤한 향에 이끌려 발걸음이 멈춘 곳은 주방이었다. 그곳에는 무화과가 한가득 쌓여있었고.익숙한 색, 익숙한 크기, 익숙한 향.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 이상할 만큼 반가웠다.타나는 잘 익은 무화과 하나를 집어 들고, 코끝에 가져다 댔다. “와.. 진짜 똑같네.”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녀들이 스리슬쩍 시선을 주고받았다. 군주가 아르켈에서 데려온 인간 여자.소문으로만 떠들던 존재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으니. 누군가는 부러움이 담긴 눈으로, 또 누군가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군주님께서 잼도 좋아하시나요?”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답했다.“아니요, 늘 생과육만 찾으십니다.”“음... 주방에 혹시 설탕이 있나요?”“네, 물론입니다.”세상에, 설탕이 있어?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겪어온 이곳 세상도 뭐,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먹고, 자고, 일하고. 마족이든 인간이든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였다. 타나의 눈이 반짝이자 눈치가 빨랐던 시녀들이 하나둘 자리를 내어주었다.군주가 아끼는 여자라 들었으니 그리할 수밖에. “고맙습니다!”타나는 작은 무쇠 냄비를 불 위에 올려 무화과를 듬뿍 썰어 넣고는 설탕을 섞어 한쪽 방향으로 천천히 저었다.거품이 올라오면 걷어내고, 과육이 익어 뭉개지고, 농도가 진해질 때까지 한참을 말이다. “아, 죄송한데.. 레몬도 있을까요?”“예, 아가씨.”마지막으로 레몬즙까지 싸서 넣자 향이 한층 더 또렷해졌다.한 김 식히고 투명한 유리병에 넣어 마무리까지 끝내자 왜 이렇게 어깨가 으쓱거리는지.주방을 나선 타나는 잼이 담긴 유리병이 소중한 무언가라도 된 듯 가슴께이 끌어안고는, 성안을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렸다.“어디 계시는 거지?”회의실, 응접실, 왕좌로 이어지는 복도까지. 그 어디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얼른 무화과 잼을 먹는 모습이 보고 싶은데. 먹고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도 궁금한데. 그러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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