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족의 군주, 칼데론. 그의 앞에 어느 날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여자, 타나. 타나는 마족도, 천족도 아니다. 불의의 사고로 생전 처음 보는 세계에 떨어져 버린, 본래의 이름은 '설미주'인 지극히 평범하기만 했던 인간일 뿐. 꿈처럼 낯선 세상에 떨어진 후, 그곳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한 건 마족의 군주 칼데론이었다. 그것도 인간을 하대하고 경멸하던 긴 세월을 살아 온 절대적인 존재.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집착은 거부할 수 없었다. 숨 막히는 애정 속에서 매일같이 흔들리고, 어느새 타나로서의 삶을 순응하며 살아가는 미주의 발칙하고 짜릿한 스토리. 운명처럼 시작된 만남의 끝은 과연 사랑일까. 아니면 욕정만이 들끓는 집착일 뿐일까.
View More유난히 하늘이 맑은 오후였다.
행복한 주말이란 걸 증명하듯 잠에서 깨어난 시간도 오전 11시.
하아, 늘어지는 여행지에서 즐기기 좋은, 딱 이상적인 시간이잖아?
미주는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여름은 끔찍하다며 투덜거렸다.
10평도 안 되는 오피스텔, 취객들이 개진상을 부리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최악의 최악이 더해진 나날이 그저 일상이었다.
스물다섯치고는 나름 평범한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에어컨을 틀다 멈칫. 전기세가 두려워 차라리 취객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는 스스로가 좀 처연하게 느껴졌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세상? 참 살만하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번졌다.
그동안 가족이라곤 필요 없다고 치부하며 살아왔는데, 이게 무슨 희소식인지.
키워주진 않더니, 죽을 때가 돼서야 핏줄을 향한 미안함이 들끓었었나?
그 마음이야 헤아릴 순 없겠지만 딱히 슬프진 않았다. 그냥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런 마음뿐이었다.
일단은 무작정 제주도 티켓부터 끊었다.
2억이라는 금액이 통장에 꽂히자, 현실에서 도망치듯 떠나고 싶어 돌아갈 티켓은 예매하지 않았다. 이 꿈만 같은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비록 혼자였지만 음식도, 사람도, 풍경도 모든 게 좋았다. 아마도 그건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거겠지.
텅텅 비어있던 통장이 채워지는 건, 생각보다 더 행복하고 짜릿한 기쁨이었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렌탈한 전기 자전거를 몰아 해변가를 쌩쌩 달렸다.
에어컨이 빵빵한 편의점보다 훨씬 더 더웠지만,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조차 축하 인사로 느껴질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
살면서 부단한 노력을 한 적도, 남들은 다 가지고 있다는 꿈같은 것도 딱히 없었는데. 왠지 이곳에서라면 생길 것 같은 기분. 남은 인생에 최선의 길이 열릴 것만 같은 설레는 기분.
한껏 신이 난 미주는 자전거 핸들을 꼭 쥐고, 무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가사까지 바꿔가며 흥얼거렸다.
“행복이 뭐 별거인가요. 뜻밖의 행운에 인생이 바뀌는걸요~♪”
그때였다.
콰아앙─!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둔탁한 충격이 들이닥쳤다.
얼마 후, 희미하게 귓가에 스친 건 다급한 의료진들의 목소리와 감은 눈 사이로 스며드는 새하얀 형광등의 잔광이었다.
“TA(교통사고) 환자입니다.”
“어레스트 왔었고, ROSC(자발 순환 회복)후에도 의식이 없습니다.”TA? ROSC?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떠드는지 다 들리는데?
그나저나 딱 봐도 사고가 난 것 같은데,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만큼 부상이 심각하단 뜻인가.
역시나 재수 없던 인생은 생에 첫 여행지에 와서도 마찬가지네.
그 행복이라는 이질적인 건, 치사하리만큼 짧게 스쳐 지나갔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불쑥 덮쳐 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솔직히 지나온 인생을 되짚어보면 로또 번호를 알려줘도 봐줄까 말까인데.
갑자기 교통사고? 이게 정말 최선이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신세 한탄과 함께 환자 이송용 스트레처에 실려 어디론가 향하던 중, 승려복을 입은 스님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옆을 스치는 찰나, 손등에 느껴지는 둥글둥글한 염불의 감각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언젠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열네 살 때였나? 친구를 따라 성당 교리 교육을 받던 중 잠이 쏟아져 졸고 있는데, 따스한 손이 손목을 붙잡아 흔들던 느낌.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땐 책상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자한 목소리로 교리 내용을 읊조리던 신부님과 잠시 눈이 마주쳤을 뿐.
그때랑 감각이 비슷했다. 뭐랄까, 꼭 인간이 주는 감각이 아닌 것 같았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어떤 신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종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늘 습관처럼 내뱉던, 지옥 같은 현실에서 꺼내달란 기도와는 사뭇 달랐다.
부디 이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는 것.
2억이라는 돈은 다 쓰고 죽어야 될 거 아니야!
‘살려만 주세요.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죽겠으니까. 누가 영원히 산다고 했어요? 씨발.. 지금이라도 좀 즐기겠다고. 나 따위 인간은 그냥 살려만 두고, 제발 좀 잊고 지내시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된 기도였다.
살려만 달라는 것도, 잊고 지내란 것도. 그렇게 포괄적인 기도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느 쪽을 믿냐고? 무엇이 정답인지는 몰랐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침묵만큼은 어울리지 않았다. “저는... 살아남을 수 있는 쪽을 믿겠습니다.”“나쁘지 않은 기준이군.”칼데론의 입꼬리가 올라간 게, 아무래도 타나의 대답이 마음에 꽤나 든 모양이었다.그의 손이 지도 위에서 떨어지자 빛나던 두 대륙이 서서히 빛을 거두며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혹시... 아르켈과 또.. 전쟁이 시작되는 건가요..?”“지금은 그쪽엔 영 흥미가 없는데.”기다란 손가락이 타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휘어잡았다.피부에 닿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눈빛과 압도적인 분위기. “흥미가 다른 곳에 생겼거든.”손가락에 힘이 더 실리며 피할 수도 없는 각도로 고개가 들렸다.숨이 흐트러 질만큼 파고드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뭔가 집요하고, 욕정이 드글드글 끓는 것 같달까.“군, 군주님..”“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어차피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딱히 갈 곳도 없는데. 그 모든 현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눈길을 피했다.이 남자는 왜 이렇게 마주 보는 것조차 버거운 것인가. 딸꾹. 어이없는 타이밍이었다. 놀란 마음이 만들어낸 몸의 반응.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이 결국 눈을 질끈 감게 만들어버렸다.“귀여운 소리가 나네.”또 한 번 딸꾹. 아랫입술 위로 손가락이 닿았다. 가볍게 스치는 듯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힘.스르륵 힘이 풀리듯 열리는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미약하게 새어 나왔다.“도망치지 말라는 말에는 시선도 포함이야.”스리슬쩍 눈을 뜬 타나는 어렴풋이 반짝이는 눈동자가 너무도 매혹적이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해져. 우린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테니까.”“네...”“넌 내 거잖아.”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뉘앙스가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들에 미치기라도 한 건지, 정말로 그의 것이 되고 싶다는 욕구
묵직한 기운이 정원 한가운데에 내려않더니, 이내 칼데론이 모습을 드러냈다.검은 셔츠와 바지. 다리 갑옷에 박힌 붉은 보석. 그리고, 그 보석보다 더 선명하게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타나는 곧바로 손을 거두고, 몰틴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드나?”단순한 감상 따위를 묻는 어조가 아닌 것 같았다.꼭 자신이 이곳에 어울리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아 순간 말을 잊지 못했다.“타나.”“예, 예쁩니다..”타나를 향해있던 칼데론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닿지 못한 붉은 꽃을 향해서.“아무 데나 손을 대는 습관부터 고쳐야겠군.”“죄송합니다.. 혹시.. 독이 있는 건가요?”조심스러운 질문에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독?”낮게 되물으며 꽃망울을 움켜쥐는 커다란 손. 순간 화려하던 꽃잎이 손안에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보다 더 질이 나쁘지. 특히 인간에게는.”숨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바닥으로 떨어진 꽃은 형태를 잃고 검은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아름다운 건 늘 대가를 요구한다.”“명심하겠습니다.”칼데론의 시선이 몰틴에게로 옮겨갔다.“나머지 안내는 내가 맡지.”“군주님, 어찌 그런...”“몰틴.”이름 하나에 말이 끝났다.몰틴은 이런 하찮은 일을 직접 하겠다는 군주의 뜻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바짝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따라 와.”타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곧게 뻗은 등, 흐트러짐 없지만 단단한 걸음.뒷모습만으로도 압도되는 존재감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시선을 발끝에 떨궜다.잠시 후, 묵직한 문이 열리며 드러난 공간은 도서관을 연상시켰다.높은 천장.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 서가들. 검은 나무로 짜인 책장마다 빼곡하게 꽂힌 책들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떨어졌다.“아르켈에서 태어나 이십 년을 살았다지.”“네? 네..”“그럼, 아르켈과 둠바스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보거라.”흠칫.아씨, 어떡하지? 이십 년은 무슨... 고작 이틀
칼데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려다봤다.그 시선은 지나치게 깊어서, 마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재미있는 선택을 하는군.”“제대로.. 보필하겠... 습니다... 대신 이런 방식으로는 말고요...!”겨우겨우 이어 붙인 말에 칼데론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눈동자는 겁을 먹었다 외치고 있는데, 저 쫑알거리는 입술은 제 침에 젖어 번들거리고. 어찌 이런 요물을 데려왔나 싶어 어이가 없다가도, 작고 새하얀 몸뚱어리가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웃음이 번지던 순간 그의 형체가 흐릿해졌다.엥? 또 사라졌어? 또?맞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서늘한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미주는 시녀복 자락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미쳤어 진짜.”첫 키스는 그렇다 쳐도 남의 목덜미는 왜 핥는데..? 내가 혹시 먹잇감 같은가?헉..! 설마 마족이라는 존재는 인간을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기도 하는 건가..?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날들이 감도 오질 않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단지 두려움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기만 하면 떠오르는 붉은 눈동자와 피부 위를 스치던 혀의 감각.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던 감각들.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동시에 지금의 이 평온이 부디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차라리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억지로라도 잠에 빠지려 애를 쓰면서. ***“타나 아가씨.”굵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미주, 아니. 타나는 반쯤 뜬 눈으로 급하게 몸부터 일으켰다.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휘청. “조심하시지요.”넘어지기 직전, 순식간에 뻗어 나온 팔이 허리를 받쳤다. “괜, 괜찮습니다..!”몰틴은 아무 일도 아니
미주는 두 눈을 껌뻑이며 시녀복자락을 꽉 움켜쥐었다.모두가 칼데론의 표식이라 말했다. 심지어 그조차도. 근데, 직접 새긴 게 아니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이야?“네..?”“억울하다, 또 버려졌다, 그래도 살고 싶다. 그렇게 외치던데.”칼데론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 세쟈르의 방에서 한낱 인간 따위를 마주했을 때. 그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옷을 벗긴 건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그저 계획이 틀어진 게 화가 나서, 나약한 몸뚱어리를 반으로 갈라 숨통을 끊어놓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깝다, 이렇게 아름다운 육신은 처음 본다. 그런 생각이 들어 살려놨을 뿐. 게다가 말라토 기둥에서 잠을 잔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미래. 그 미래에 대한 환영이 펼쳐져 자신의 손을 더럽힐 이유는 딱히 없어 보였다.근데 이상했다. 세쟈르의 방을 떠나온 뒤부터 그 미약한 목소리가, 마음속의 외침이 자꾸만 귓가를 파고들었다. “제... 제가요?”“너 따위가 무슨 생각을 하든 관심 없어. 이렇게 아름답게 빚어진 몸은 꽤 흥미롭거든.”낮게 깔린 목소리가 피부를 스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그건 여전히 표식 위를 맴도는 손끝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도망칠 틈조차 사라진 거리, 그의 그림자가 미주를 완전히 덮어버렸다.2미터에 육박하는 거구, 160cm도 채 되지 않는 작디작은 인간. 이대로 잡아먹인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쫄지말자, 떨지 말자.날 살려줬잖아. 이곳까지 데리고 오고, 방까지 내어줬잖아.“타나라고 했나.”아, 맞다. 이곳에서의 나는 설미주가 아니라 타나랬지. 이왕이면 어울리는 이름으로 살아야겠지.“네, 타나입니다.”그의 손이 스르륵 내려와 왼쪽 가슴 위에 멈췄다.젖꼭지에 느껴지는 야릇한 온기에 온몸 움찔거렸다.대놓고 만지기보단 심장박동을 느끼는 쪽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고작 얇은 천 하나가 유일한 방어막이었다. 스리슬쩍 몸을 비틀던 찰나 칼데론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피할 겨를도 없이 포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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