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군주는 로맨티스트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19 챕터

제1화

유난히 하늘이 맑은 오후였다.행복한 주말이란 걸 증명하듯 잠에서 깨어난 시간도 오전 11시.하아, 늘어지는 여행지에서 즐기기 좋은, 딱 이상적인 시간이잖아?미주는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여름은 끔찍하다며 투덜거렸다.10평도 안 되는 오피스텔, 취객들이 개진상을 부리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최악의 최악이 더해진 나날이 그저 일상이었다.스물다섯치고는 나름 평범한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에어컨을 틀다 멈칫. 전기세가 두려워 차라리 취객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는 스스로가 좀 처연하게 느껴졌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세상? 참 살만하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번졌다.그동안 가족이라곤 필요 없다고 치부하며 살아왔는데, 이게 무슨 희소식인지.키워주진 않더니, 죽을 때가 돼서야 핏줄을 향한 미안함이 들끓었었나?그 마음이야 헤아릴 순 없겠지만 딱히 슬프진 않았다. 그냥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런 마음뿐이었다.일단은 무작정 제주도 티켓부터 끊었다.2억이라는 금액이 통장에 꽂히자, 현실에서 도망치듯 떠나고 싶어 돌아갈 티켓은 예매하지 않았다. 이 꿈만 같은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비록 혼자였지만 음식도, 사람도, 풍경도 모든 게 좋았다. 아마도 그건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거겠지.텅텅 비어있던 통장이 채워지는 건, 생각보다 더 행복하고 짜릿한 기쁨이었다.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렌탈한 전기 자전거를 몰아 해변가를 쌩쌩 달렸다.에어컨이 빵빵한 편의점보다 훨씬 더 더웠지만,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조차 축하 인사로 느껴질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살면서 부단한 노력을 한 적도, 남들은 다 가지고 있다는 꿈같은 것도 딱히 없었는데. 왠지 이곳에서라면 생길 것 같은 기분. 남은 인생에 최선의 길이 열릴 것만 같은 설레는 기분.한껏 신이 난 미주는 자전거 핸들을 꼭 쥐고, 무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가사까지 바꿔가며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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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으...?”느릿하게 눈꺼풀이 떠오르고, 제일 먼저 보인 건 새파란 하늘이었다.솔직히 제주도인 줄 알았다. 아마도 그렇게 믿고 싶었나 보다.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진 말이다.“타나..! 너 미쳤어? 진짜 말라토 기둥에서 잠이 든 거야?”눈이 크게 떠질 정도로 맑고 고운 목소리였다. 목소리처럼 얼굴도 예뻤다.커다란 눈에 긴 속눈썹, 애굣살 아래에 콕 박힌 작고 까만 점마저 매력적인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잘 빚어진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은 질투가 날 정도. 근데, 차림새는 영 이상했다.핑크색과 연두색, 하얀색이 조화를 이루는 천은 바람에 날려 하늘거렸고 곳곳에 장식된 진주들은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는 게, 어딘가 선계의 무희를 떠올리게 하는 차림새랄까.문제는 어깨와 가슴골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로 걸쳐졌다는 것. 음, 비유하자면... 딱 이거였다.야한 선녀..! 예쁘고도 농염한, 야시꾸리한 선녀.아직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미주는 커다란 나무 기둥 위에서 상체를 일으켜 그 여자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누, 누구....”“하, 얘가 잠이 덜 깼나 보네. 그래도 말라토 기둥은 절대 안 돼! 불행을 몰고 온다고 누누이 얘기했잖아.”여자는 경고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내뱉더니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그것도 평범하게 걸어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뭐야..? 설마 순간 이동이야..? 아니, 말라토가 뭘 어쨌다고?”순간 제주도에서의 사고가 머릿속을 스쳤다.역시나 죽은 건가? 그럼 이곳은... 말로만 듣던 천국이고? 맞네. 아픈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게 확실하네. 내 인생은 첫 번째 여행지에서 산산조각 난 거야.그럼.. 방금 봤던 여자는 혹시... 천사? 근데 무슨 천사가 저렇게 야해? 그리고,“왜 이렇게 몸이 가벼워?”자연스레 고개를 내린 순간, 미주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X자로 교차해 상체를 가렸다.젠장. 천국이고 나발이고,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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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일단 정신부터 차리자. 궁금한 걸 묻자. 물어보면 돼.“여기서는 제 이름이... 타나인가요?”여자의 날카롭던 눈빛이 의문으로 바뀌었다.그러더니 미주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구석으로 향했다.“너 진짜 이상해. 혹시... 어디 아파?” “아픈 건 아닌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친구끼리 갑자기 왜 존댓말이야!”하아, 미치겠네. 반말을 해도 되는 사이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가?“그, 혹시... 그쪽은 이름이...”“나 벨리오잖아!”아무래도 천국은 외국인가 보다. 타나, 세쟈르, 벨리오. 이름들이 말해주고 있잖아. 놀라지 마 설미주. 적응하면 돼.어차피 현생이 끝난 거라면 빠르게 적응하고, 천국에서의 새 삶을 당당하게 누려보자고.“으응... 벨리오. 미안.”“공주님 방에서 빨랫감이나 가져와.”“내가?”“그럼 내가 해? 공주님 전담 시녀는 너잖아!”우와, 나 시녀야? 천국에서도 결국 내 역할은 이따위야?너무하네. 이건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빨리!”“미안한데 벨리오, 혹시 어디로 가면 공주님 방일까?”벨리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조금만 더 못살게 굴면 분노가 터져버리기 직전인 것처럼.“나가서 왼쪽 건물! 핑크색 깃털 달린 방!”“고마워.”“바빠 죽겠는데, 이런 장난 재미없거든?”미주는 엉거추줌 건물을 나와 벨리오가 알려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굴곡진 지붕 위에 얹힌 기와가 신비로운 빛깔을 머금고 있었다.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신기함 투성이인 곳. 어느새 시녀라는 사실에 씩씩거리던 순간은 잊고 있었다.“미쳤네. 퀄리티 한 번 장난 아니네.”천국도 인테리어 하나는 끝장난다는 생각에 미주는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핑크색 깃털.깃털은 평범한 성인 여성의 몸보다 더 크고, 화려하고,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조차 그림 같았다. ‘여기구나. 세쟈르인지 뭔지 그 공주님의 방.’조심스레 문을 열었다.방 안에 풍경을 마주한 순간 미주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침대 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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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천국도 매한가지구나. 발랄한 집 주인 딸내미는 아버지 말에 꼼짝 못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밀회는 즐기고 싶고. 보나 마나 길길이 날뛰며 반대하는 남자겠지. 그러니까 야간 밀회를 계획하고 시녀한테 이런 부탁이나 하는 거잖아. “그렇게 할게요. 대신 저도 부탁이 있어요.”“뭐든 말해!”“오늘은 좀 쉬고 싶어요. 마음 편히 이곳저곳 구경도 좀 하고요.”세쟈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구경할 게 뭐가 있어? 넌 여기서 태어나 이십 년을 살았는데?”개풀, 저는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고요.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하아, 천국이란 곳 참 요상스럽네. 출생지에 나이까지 제멋대로 바꾸고. 다섯 살이나 깎아준 걸 고마워해야 돼?“아, 그냥... 마음이 좀 어지러워서요.”미주의 완벽한 연기에 세쟈르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흠, 그래. 마음대로 해. 시녀들에겐 이야기해둘게.”“감사합니다.”“푹 쉬다가 10시에 내 방으로 와. 알겠지?”근데 여기.. 시계가 있던가?아무리 둘러봐도 시계는커녕 핸드폰도 못 봤는데.. 시간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10시라면... 혹시..”“자꾸 속 터지게 할래? 팔색조가 스물두 번 울자마자 찾아오라고!”“알겠습니다.”거참, 신기하네. 이 요상스러운 곳도 결국 24시간이 똑같이 돌아간단 말이지? 시간은 팔색조라는 새가 알려주고?미주는 세쟈르의 방을 빠져나와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건물 뒤편, 반짝이는 돌 사이에 흐르는 맑은 샘물이 눈에 보였다.모든 것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 시녀라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고는 눈이 호강까지 하는 짜릿한 기분. 샘물 앞에 쪼그려 앉자, 기다란 갈색빛의 머리칼이 무릎을 간질였다.살면서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완벽한 애쉬 브라운 컬러감이 마음에 꼭 들었다. “머리 색은 예쁘네.”미소를 머금고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때였다.“설미주.”엥? 설미주?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누군가 이곳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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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드넓은 정원을 하염없이 거닐던 중, 삐옥삐옥 거리는 신비로운 새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소리는 정확하게 열여섯 번. 아..! 이게 바로 그 팔색조가 알려주는 시간이구나. 그럼 아직 네 시네? 맞지?“흠, 근데 아무리 봐도 돌아가는 상황을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저택이라고 하기엔 너무 넓었고, 사원이라기엔 또 평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와가 있는 궁전 쪽에 더 가까웠다.그것도 겁나게 갑부인, 천국에서의 대통령이 살법한.‘앗? 그럼 설마.. 아까 그 목소리 주인 양반네 집?’아직은 아무런 답이 서질 않았다.이곳에서 적응해 나가려면, 보다 더 많은 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야지.그래야 살아남는다. 그래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맞다, 벨리오!’ 벨리오는 쌀쌀맞긴 했지만, 분명 친구라고 했었다.현실에선 아니었지만, 이곳에선 믿을만한 친구이길 바라며 벨리오를 만났던 곳, 딱 봐도 주방으로 보였던 곳으로 황급히 걸었다.주방 안, 벨리오는 작은 화덕 앞에 앉아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사방팔방 달콤한 향으로 가득 찬 공간, 미주는 능글맞은 얼굴로 벨리오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벨리오!”“뭐야? 휴가라더니?”“소식 한번 빠르네.”상체를 기울여 주전자 안을 바라보자, 안에는 잘게 썬 과일로 보이는 것들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꿀을 넣었나? 향이 왜 이렇게 달콤해?“향이 좋네. 입맛 돈다.”“폐하께서 즐겨 드시잖아.”“폐하, 맞아.”“존함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 너도 그렇지?”난 모르는데? 그 존함이 뭔지? “그럼! 웅장하지! 네가 그 웅장한 기분을 더 느끼게 해줄래?”스리슬쩍 눈치를 보던 벨리오가 작게 웃었다. “오르테아스님, 만세!”아오..! 이름 외우다 머리 터지겠네 이거. 이름이 죄다 왜 이 모양이냐고. 설미주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들의 향연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단어들이 입에 붙기는커녕 머릿속은 자꾸만 실타래처럼 꼬여만 갔다.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오르테아스의 딸이 세쟈르 공주라는 것. “그,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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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가장 신기한 건 마족과의 전쟁은 삼백 년째 휴전 중이라는 것. 그들의 세계는 지상이 아닌 지하라는 말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맞아..! 마족들은 진짜 최악이지..!”“응. 다행히 폐하께서 입구를 봉쇄하셔서.. 둠바스에서 마족들이 올라올 걱정은 덜어냈잖아.”?잠깐만.아아..! 마족들이 사는 그 지하 세계가 둠바스고, 그 입구를 지금 오르테아스가 봉쇄했다고?OK. 이해 됐어,벨리오, 넌 참으로 순진해. 네 덕분에 조금씩 이 세계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거든. 나름 순진하고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만약 봉쇄가 뚫리면..?”“타나, 그건 불가능해. 칼데론이 심연수옥에 갇혀있는 한.”칼데론? 심연 수옥? 아~ 몰라! 벨리오! 이번에도 네가 말해.“아아, 맞네. 거기 얼마나 갇혀있었지?”“삼백 년도 더 됐지. 칼데론의 힘이 봉인된 날 길고 긴 전쟁도 끝났으니까. 심연수옥에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잖아.”이해가 쏙쏙 됐다. 천상계와 마족계를 다룬 소설을 한두 편 읽었던가? 보통 천계는 피해자, 마계는 가해자잖아. 됐고, 일계 시녀인 자신과는 어차피 상관없는 이야기. “나 오늘 휴가 낸 거, 사실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방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응? 괜찮아 타나?”“몰라, 눈앞에 뿌옇네. 아무래도 방까지 데려다 달라는 건... 조금 민폐겠지?” “코앞인데 뭘. 가자.”벨리오를 집요하게 구워삶아 시녀들의 방까지 알아낸 미주는 이내 폭신한 이불에 몸을 던지며 긴 숨을 내쉬었다. 침대 따윈 없었지만 그리 엉망이진 않았다.2인 1실, 방마다 딸린 나무 욕실. 이래서 종노릇도 대감 집에서 하라는 거겠지.“미친다 미쳐, 머리 아파 죽겠네.”잠깐 눈도 붙이고, 또 이불 위에서 뒹굴뒹굴. 그러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별건 없었다. 거울, 빗, 갈아입을 여벌의 옷가지들.모든 옷이 똑같은 칙칙한 하늘빛 컬러의 원피스긴 했지만.“천이 비싼 나라인가? 아닌데? 세쟈르 옷은 겁나게 화려하드만.”짜증 나는 계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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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혼자 남은 미주는 곧바로 이불 속에 몸을 숨겼다. 이불 속은 따뜻했고, 은은한 꽃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긴장은 됐지만 종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서 그런지,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졸려 죽겠다. 잠이나 자자...’그렇게 긴장했던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팔색조의 울음이 두세 번쯤 들렸을 때, “세쟈르.”묵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눈앞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미주는 본능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숨을 죽였다. 당연히 오르테아스인 줄 알았으니까.하지만,“네 아비의 죄를 원망해.”? 뭔가가 이상했다. 오르테아스라면 절대로 내뱉을 리 없는 말.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누군가 방 안에 있다는 기척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순간 폭신한 이불이 보이지 않는 손에 낚아채이듯 공중으로 들리더니, 침대를 벗어나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미주가 숨을 헉 삼켰다. 솔직히 저승사자를 마주한 줄 알았다.시커먼 도포 자락에 서늘하게 내려앉은 붉은빛 눈동자도 겁나게 이질적인데, 새까만 머리칼이 허리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렸음에도 분명 남자였다. 그것도 미친 듯이 잘생긴, 키는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그래서 이상하게 두려운.“누.. 누구세요?”남자는 발소리 없이 다가와 미주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흘렀다.목선, 쇄골, 잠옷 아래로 흐릿하게 드러난 몸 선을 훑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방 안은 세쟈르의 신력으로 가득했지만, 인간인 미주에게선 아무런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아.... 그게..”“여긴 분명 세쟈르의 방인데.”딸꾹.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딸꾹질과 함께 입술이 말라붙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몰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게다가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함을 풍기고 있었으니까.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진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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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으으으으으! 으으으 으 으으으 으으으! (살려주세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그가 조금 답답한 듯 인상을 쓰더니, 손끝으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순식간에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듯 빼액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변태에요? 남의 옷을 왜 마음대로 벗기는데요?”“흠.”남자는 생각했다. 이 인간은 분명 뒤지고 싶어 환장을 한 인간이라고.“저는 세쟈르 공주님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공주님께도 그러시면 안 되죠! 섹스는 서로의 동의에 이해서 이루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겁니다!”남자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배를 부여잡고는 낄낄거렸다.아무래도 옛말 중 하나는 확실하게 틀렸다. 웃는 얼굴에 침을 왜 못 뱉어? 뱉고 싶어 딱 죽겠는데.그러다 일순간 뚝 멈춰버린 웃음. 번뜩이는 붉은빛 눈동자가 미주를 향했다.“말라토 기둥에서 낮잠을 잤네?”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맞다. 그놈의 말라토 기둥. 이곳에 오자마자 세쟈르한테 핀잔을 먹었던 그 커다란 나무 기둥.“남 이사 어디서 자든 말든... 무슨 상관이세요?”그는 더러운 성질머리에 질려버린 표정을 짓더니,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미주는 이불이 다시 덮이고 나서야 조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낮잠을 잔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무슨 소린지 모를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곤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눈만 껌뻑이던 미주는 다리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자,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내려와 잠옷을 걸쳐 입었다. 맹랑한 성격에 감사한 순간이었다.쫄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어서 쫓아냈다고.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뻔했다고. 그렇게 믿으며 조금은 숨을 돌렸다.“씨이.. 정액?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그나저나 공주님이 위험한 건가? 알게 뭐야. 신력도 뭐, 상당하다며. 그 헤릴드라는 남자가 알아서 지켜주겠지. - 벌컥!문이 열리는 순간 미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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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겨드랑이 쪽에서 몰려오는 뻐근한 통증이었다.두 손은 한데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짚었다. 옷은 감히 세쟈르의 잠옷도 아깝다는 듯, 혹은 시녀라는 처지를 상기시키듯 하늘빛 원피스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이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도 자신은 하급 중에 하급이라는걸.‘대체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고개를 든 순간 오르테아스의 손이 턱 아래를 받쳤다.눈빛은 서늘했고, 미간은 잔뜩 구겨진 게. 좋은 주인은커녕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모습이었다. 미주의 입에서 기어들어갈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 오르테아스 님...”“칼데론의 표식이 새겨진 인간이, 이 신성한 아르켈 궁을 더럽히다니.”“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리고..”이게 다 남자에 미친 당신 딸 때문이라고, 세쟈르 대신 자는 척을 했다가 벌어진 일이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가당키나 한 걸까?아니? 당연히 딸 편이겠지. 그것조차 죄가 되어 버리는 건 순간이겠지. “말라토 기둥에서 잠을 잤다지.”“그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정말로 깨어나 보니 그곳이었습니다..”찰싹! 두터운 손이 미주의 뺨을 내리쳤다. 어찌나 힘을 실었는지, 귓가가 윙윙거리고 터진 입술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났다.억울한데, 억울해 죽겠는데. 이곳에 오고 난 뒤부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하아...”“태양이 가장 높게 걸렸을 때, 너는 말라토 기둥과 함께 소멸될 것이다.”“오, 오르테아스님...!”“그래, 감히 인간 따위가 지존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부터가 소멸할 이유로 충분하겠지.”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아파서, 억울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소멸이라는 단어가 슬펐다. 왜 이딴 곳에서 눈을 떴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내 선택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아름답다 여겼던, 천국이라 굳게 믿었던 곳에서조차 버림받았다.손을 움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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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등장에 미주는 눈을 더 크게 떴다.펄럭이는 천 사이로 드러난 갑옷 같기도, 신발 같기도 한 단단한 무언가.그건 두꺼운 종아리를 지나 정확하게 무릎까지 감싸고 있었고, 마치 어제 보았던 남자의 눈처럼 붉은 보석이 장식처럼 박혀있었다.“칼.. 칼데론..!” 오르테아스의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였다.블랙 셔츠 위에 걸친 시커먼 망토는 커다란 키보다 훨씬 더 길었고, 방금 막 내리친 벼락이 손바닥 위에서 멈춘 듯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미주를 향했다.“겁먹었네?”“당.. 당신이 왜...”“내 표식이 새겨진 건, 다 내 거니까.”얼떨떨했다. 내 거? 내가 왜? 지 멋대로 표식을 새겨놓고는?동시에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심연수옥에 갇힌 칼데론은 탈출했고, 그 복수를 위해 딸인 세쟈르를 겁탈하러 왔다가 하필 나를 만난 것.덕분에 나는 벼락에 맞아 불에 탄 시체가 되어버릴 뻔했는데.... 그런 나를 구하러 왔다고? 왜? 대체 왜?가장 이상한 건 아르켈 쪽의 반응이었다. 모두가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고작 한 사람을 두고 수많은 표정들이 똑같았다. “눈 좀 감지.”아니 아니, 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서요.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굉장히 궁금하거든요. “말 한번 더럽게 안 듣네.”네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딱 봐도 1대 100? 1000?자신 있으니까 오신 거 맞죠? 불에 탄 시체가 두 구가 되는 건 아니겠죠?쾅! 쾅! 쾅!보다 못한 오르테아스가 창을 휘두르며 벼락을 내리꽂았다.미주와 칼데론을 정확히 겨냥한 벼락이었으나, 그 빛들은 모조리 칼데론의 손바닥 위로 모여들더니 수십의 병사들을 향해 던져졌다. “으아악..!”“윽!”병사들의 비명도 끔찍했지만 세쟈르의 비명은 고막을 찢을 기세로 꺄아아악! 터져 나왔다. 그제야 미주가 질끈 눈을 감았다.눈좀 감으라는 그 말을 진작에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면서.오르테아스의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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