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ício / 영혼을 건 계약 / Capítulo 11 - Capítul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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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서주훈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눈앞의 옷장을 바라보기만 할 뿐, 문을 열 용기는 없었다.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거세지는 심장 박동은 옷장 안에 자신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이 그 속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서주훈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지만 끝내 옷장 문을 열지 못했다.그때 유하라가 방으로 들어와 옷장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서주훈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주훈아, 왜 그래? 방금 이쪽에서 소리가 나길래 와봤어.”유하라는 방 안을 둘러봤고, 텅 빈 방과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 모습을 확인하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지희가 정말 눈치껏 스스로 나가 버린 건가?’서주훈은 유하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옷장 앞에 서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본 여자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옷장으로 향했다.유하라는 별생각 없이 손을 뻗어 옷장 문을 열었고, 그 안을 본 순간 비명을 질렀다.“꺅!”유하라의 비명에 서주훈은 정신을 차렸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내려앉았다.옷장 안에는 눈을 감은 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진지희가 들어 있었다.죽기 직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시신은 공기에 닿는 순간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했고, 보랏빛 시반이 희미하게 드러나더니 지독한 악취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그리고 서주훈은 그 시신을 보는 순간 눈이 붉게 물들었다.“지희야!”서주훈의 목소리는 억누를 수 없는 떨림으로 가득했고,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 없던 남자는 끝내 무너져 내렸다.“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서주훈은 조심스럽게 진지희의 시신을 옷장 안에서 안아 올렸고, 그 모습을 본 유하라는 공포에 떨며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유하라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경찰과 법의관은 신고받은 즉시 곧바로 현장에 도착했고, 그때쯤 유하라도 마음을 진정시킨 상태였기에 초인종이 울리자 서둘러 문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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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유하라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끝내 서주훈을 이길 수는 없었고, 결국 서주훈이 준 보상을 받아 외국으로 떠나는 항공권을 샀다.진지희의 부검 결과가 나온 날, 서주훈은 부검 보고서에 적힌 사망 시각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16일 전?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지희를 만났는데?’서주훈이 의문을 털어놓자 직원도 잠시 멍해졌지만, 곧 단호하게 설명했다.“대표님, 부검을 담당한 분은 저희 경찰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법의관이세요. 그분의 보고서가 틀릴 리는 없어요.”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서주훈은 자신의 발걸음마저 허공을 걷는 것처럼 허무하게 느껴졌다.‘이미 죽은 사람이 나랑 무려 일주일이나 함께 생활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서주훈은 믿을 수 없었다.시신을 발견한 날 시신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부패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 시신이 지희가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이미 죽었지만 어떤 이유로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그 생각이 떠오르자 그동안 이상하다고 느꼈던 일들이 다시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16일 전, 진지희가 갑자기 자신에게 여러 통의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막상 찾아갔을 때는 멀쩡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던 일.벽에 갑자기 생긴 단 7장뿐인 달력, 그리고 그 달력을 모두 뜯어낸 날 이후로는 더 이상 진지희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던 일.그리고 그날 실수로 진지희를 밀쳐 넘어뜨린 뒤, 황급히 일으켜 세우려다가 우연히 느꼈던 차가운 체온과 잡히지 않던 맥박까지 다 생각났다.모든 단서가 마치 두 번째 가능성이 진실이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서주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하지만, 결국 그 7일 동안의 진지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마치 정체 모를 힘이 지운 것처럼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서주훈은 유하라가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여자를 붙잡고 진지희에 관해 물었다.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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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서주훈은 메신저를 열어봤고, 그곳에서 뜻밖의 증거를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 안에는 유하라와 진지희의 대화 기록, 그리고 9일 전 유하라가 진지희만 볼 수 있도록 올린 SNS 게시물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화면을 가득 채운 자극적인 말들을 본 서주훈의 눈은 순식간에 붉어졌다.서주훈은 유하라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서주훈은 그것들을 모두 캡처한 뒤 유하라에게 보내고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지희를 두 번밖에 만났고 다른 연락한 적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이건 다 뭐야?]유하라는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아직 비행기 안에 있는 듯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쪽에서 답장이 왔다.유하라는 영상 하나를 보내왔는데, 영상 속에서 서주훈이 보낸 캡처 사진들을 하나씩 열어 봤지만, 화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여기엔 아무것도 없어.]영상 속에서 새하얗게 비어 버린 캡처 화면을 본 서주훈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사진을 전송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빈 화면뿐이었다.서주훈은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 끝에 결국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진지희가 죽은 후 7일 동안 있었던 일들은 오직 자신만 기억하고 있었고, 오직 자신만 볼 수 있었다.그러자 서주훈은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이 밀려왔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나만 기억하는 걸까?’서주훈은 그렇게 미쳐갔다.죽은 사람에게 사후 7일이 존재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서주훈이 포기하지 않고 수없이 반복해 검증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리고 진지희를 죽인 범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정신을 차려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 반드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게 하겠다고 했다.그것을 제외하면 서주훈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그 일로 서철호와 강영란은 근심 끝에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고, 결국 새로운 후계자를 다시 정한 뒤 서주훈을 후계 서열에서 완전히 포기했다.그러던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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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염라대왕님, 저는 사람을 하나 찾고 싶어요!”서주훈은 그 자리에 꼼짝없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지만, 염라대왕은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꺼냈다.한참 뒤, 염라대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아이는 이미 영혼이 소멸해 완전히 사라졌으니, 너는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거라.”그 말이 떨어지자 서주훈은 벼락을 맞은 듯 그대로 굳어 버렸고, 염라대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소멸해서 완전히 사라졌다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 지희가 왜 사라졌다는 거죠?”서주훈은 염라대왕 앞에 완강히 버티고 섰고, 염라대왕 앞에서 자신은 개미보다도 하찮은 존재였지만 끝내 한 발짝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그러자 염라대왕의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그 아이와 나 사이에 거래가 하나 있었다.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고 영혼이 소멸하는 대가를 치르는 대신, 너와 작별을 위한 시간을 쓰려고 7일을 얻은 거야.”“그리고 그 기한이 끝났으니 자연히 영혼이 소멸해 사라진 것이지.”염라대왕의 말이 한 글자씩 떨어질 때마다 서주훈의 마음도 끝없이 추락했고, 마지막에는 좌절감과 절망감에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지희가 영혼이 소멸되는 대가로 7일을 바꿨다고? 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서주훈을 바라보던 염라대왕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안개로 이루어진 거울 하나가 나타났다.그리고 그 거울에서는 진지희가 죽기 직전의 순간부터 모든 장면이 비치기 시작했다.진지희는 온몸에 여러 차례 칼에 찔려 죽어 가고 있었다.하지만, 서주훈은 진지희가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유하라가 열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구조 요청 전화를 몇 번이고 끊어 버렸다.마지막에는 유하라가 서주훈이 방심한 틈을 타 대신 전화를 받았지만, 진지희의 도움 요청을 들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진지희의 마지막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꺾기 위해서였다.[지희야, 무슨 일이야? 주훈이는 지금 나 죽 끓여 주고 있어서 전화받을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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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저도 거래를 하고 싶어요.”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입을 연 서주훈의 말에 이번에는 염라대왕마저 잠시 멈칫했다.“거래? 무슨 거래를 하고 싶다는 것이냐?”염라대왕의 눈에는 흥미가 가득했고, 서주훈이 제안한 거래에 꽤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염라대왕이 곧바로 거절하지 않자 서주훈의 눈에는 희미한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이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주훈은 자기 생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털어놓았다.“제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대가로, 지희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생을 얻고 싶어요.”이것이 바로 서주훈이 진지희와 염라대왕의 거래를 본 뒤 생각해 낸 유일한 방법이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염라대왕은 웃음을 터뜨렸다.“그 아이는 너와 함께한 7일을 얻는 대가로 영혼이 완전히 소멸해 환생할 기회조차 잃었어.”“그런데 너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내놓으면 너와 그 아이의 다음 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염라대왕은 고개를 저으며 서주훈의 오만함과 무지함을 크게 비웃었다.운명을 바꾸는 데 필요한 대가는 너무나도 크기에 마음만 먹는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더구나 서주훈이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영혼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사람의 수명이었다.염라대왕의 말에 서주훈은 부끄러워 안절부절못하게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그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더 내놓으면 됐다.“바꿀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 제가 가진 것을 치러야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전부 포기할게요!”서주훈의 말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 말이 뜻밖이었는지 염라대왕도 서주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하지만 염라대왕은 결국 다시 고개를 저었다.“설령 그렇다 해도 그 아이가 환생 한 번 정도 할 수 있을 뿐이야. 너희 둘의 인연까지는 보장할 수 없어.”그 말을 들은 순간 서주훈은 그대로 침묵했다.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력감으로 가득 차버린 것 같았다.이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더라도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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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김주훈은 이 지역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집에 돌아올 시간이 있었다.김주훈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젊은 시절 무리하게 일한 탓에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그리고 김주훈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해에는 이미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집에는 저축해둔 돈도 없었지만 다행히 김주훈은 매우 성실했고, 학창 시절 내내 장학금과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기에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또한 부모 때문에 원서를 낼 때에도 시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 단 한 곳만 선택했고, 다른 도시로 멀리 떠나지 않았다.그래야만 매주 시간을 내서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기 때문이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오후 4시였다.다락방에서 내려오자 부모인 김운호와 이경안은 김주훈이 사 온 과일을 다시 아들의 배낭에 넣고 있었다.그리고 김주훈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자 손놀림은 오히려 더 빨라졌다.그 모습을 본 남자는 얼른 다가가 두 사람을 말린 뒤 과일을 다시 꺼내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아빠, 이 과일은 일부러 두 분 드리려고 사 온 거예요. 지원금도 나오니까 저는 학교에서 다 먹을 수 있어요.”“두 분 몸도 안 좋으신데 자꾸 아무것도 못 드시고 저만 챙기려고 하지 마세요.”김운호는 다시 과일을 가방에 넣으려 하며 김주훈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내가 모를 줄 아니? 지원금이 나온다고 해도 우리한테 과일을 주면 너는 못 먹는 거잖아.”“과일은 비싸고, 넌 학생인데 우리 둘까지 챙겨야 하잖아. 그러니 네가 네 몸 잘 돌봐야지.”“아빠, 그건 억지죠. 두 분이 계속 이러시면 다음부터는 그냥 물건만 두고 바로 갈 거예요. 집에 안 있을 거예요.”김주훈은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과일을 모두 다시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배낭을 집어 든 채 화가 난 척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결국 김운호와 이경안은 김주훈을 이기지 못하고 과일을 받아들었다.헤어질 시간이 되자 부부는 아쉬운 마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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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여자아이는 남자에게 갑자기 자기 마음을 고백했다.뜻밖이었던 것은 김주훈은 그 고백을 들은 순간 남자의 눈에 스쳐 지나간 동요를 분명 느꼈다.그런데 결국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여자애를 밀어냈다는 점이었다.“난 네 삼촌이야. 나한테 넌 그냥 조카라고.”그 말을 들은 김주훈은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터뜨리며 낮게 욕했다.“거짓말쟁이, 위선자.”버스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지나며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어진 진동에 김주훈은 잠에서 깼다.창밖을 내다본 김주훈은 너무 깊이 잠든 탓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김주훈은 깜짝 놀라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자마자 서둘러 내렸고, 두 정류장 사이가 꽤 멀었기 때문에 걸어서 되돌아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김주훈은 길을 걸으며 방금 꾼 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었다.한참 동안 애써 떠올려 보았지만, 자신이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거짓말쟁이, 위선자’라는 말만 기억날 뿐이었다.그 외에는 조금 전까지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그러자 갑자기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이 밀려왔다.무엇을 잊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는 생각만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정류장을 지나친 탓에 시간을 많이 허비한 김주훈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저녁 8시가 다 되어 있었다.기숙사는 개인 공간이 거의 없었고, 한여름이라 밤이 되어도 기온은 전혀 내려가지 않았으며, 매미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기숙사에는 에어컨이 있었지만 아무도 전기요금이 아까워서 틀지 않았고, 천장에 달린 낡은 선풍기만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김주훈은 잠시 책을 읽다가 침대에 올라갔다.혹시라도 다시 꿈꾸게 된다면 버스에서 꾸던 그 꿈이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고, 그 여자아이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었다.허황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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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바로 옆에 있던 룸메이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김주훈의 귀와 아주 가까이에서 울려 퍼졌다.그러나 김주훈은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하게만 들렸다.주변의 모든 것이 차단된 듯했고 김주훈의 눈에는 오직 그 여학생만 보였다.룸메이트는 결국 김주훈의 등을 세게 한 대 치고는 어이없다는 듯 정신을 차리라고 했다.“야, 인제 그만 좀 봐. 조회 이제 시작해. 그렇게 넋 놓고 쳐다보고 있지만 말고 마음에 들면 기회를 봐서 가서 말을 걸어.”“여기 아무리 오래 서서 보고 있어 봤자 소용없잖아.”룸메이트는 김주훈을 끌고 앞으로 걸어갔고, 김주훈도 그제야 정신을 차려 시선을 거둔 뒤 앞으로 걸어갔다.한편, 노지희도 누군가의 시선이 오랫동안 자신에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노지희는 시선이 느껴진 방향을 바라봤지만, 그곳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누가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의아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둔 노지희를 본 옆 사람은 이미 단상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학생회장을 한 번 바라본 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래?”조금 전 느껴졌던 시선은 이미 사라졌었고, 노지희는 자신이 괜한 착각을 한 것으로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무 졸려서 그런가 봐.”“오늘 조회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어젯밤 그렇게 늦게 잤으니까 그렇지.”류영서는 노지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잠시 후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다시 말했다.“오늘 오전엔 수업도 없잖아. 끝나면 들어가서 좀 더 자. 지금은 내 어깨 빌려줄게.”“영서야, 너 진짜 짱이다.”노지희는 류영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가장 편한 자세를 찾더니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가볍게 들려오는 노지희의 숨소리를 들은 류영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표정을 지었다.‘이런 상태로 잠을 잔다고? 도대체 얼마나 졸린 거야?’한숨을 내쉰 류영서는 몸을 조금 옮겨 자기 몸으로 노지희를 가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했다.조회는 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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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트레이가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고, 국 대부분이 반대편으로 쏟아졌으며 지나가던 남학생의 몸 위로도 뜨거운 국물이 일부 튀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지희는 화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앗!”뜨거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뜨거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김주훈은 가슴과 배에 전해지는 통증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신음을 들은 노지희는 깜짝 놀라 서둘러 물었다.“저기, 괜찮으세요?”김주훈은 몇 번 깊게 숨을 쉰 뒤에야 겨우 진정되어 노지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괜찮아요.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음식을 쏟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다시 사드릴게요.”너무도 자연스럽게 사과하는 모습에 노지희는 오히려 순간 멍해졌다.‘어떻게 다친 사람이 제일 먼저 사과하고 보상해 주려는 거지?’게다가 이 일은 전적으로 김주훈의 잘못도 아니었다.“괜찮아요. 제가 다시 사서 먹으면 돼요.”노지희는 바닥에 쏟은 국을 아쉽게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은 뒤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김주훈에게 건넸다.그러고는 김주훈의 옷에 묻은 얼룩을 가리키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가격이 얼마 안 하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뜨거운 국물이 튄 곳은 정말 괜찮으세요?”김주훈은 노지희가 건네준 휴지를 받아 조심스럽게 옷을 살짝 벌려 몸에 묻은 음식물을 닦아낸 뒤에야 머쓱한 듯 노지희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때 막 트레이를 내려놓고 돌아온 류영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야?”노지희의 설명을 간단히 들은 류영서는 한산한 식당을 한 번 둘러본 뒤, 눈앞에서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는 김주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하지만 노지희에게는 굳이 말해 주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잖아? 두 사람도 그런 건가 보네.”류영서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숙여 노지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생긴 것도 꽤 잘생겼는데? 어때? 연락처라도 교환해서 계속 연락해 볼래?”말을 마치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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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기숙사 안에서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며 이어가던 이야기가 겨우 진정되었다.그리고 잠시 쉬려고 하던 그때 노지희의 휴대폰에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고개를 내려 확인해 보니 김주훈이었다.[선배님, 오늘 저 때문에 아침밥 다 쏟으셨잖아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제가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도 될까요?]어깨 위로 불쑥 머리 하나가 튀어나와 노지희의 휴대폰 화면을 쓱 훔쳐보더니, 곧이어 류영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봐봐, 밥까지 사 준다잖아. 듣기로는 집안 형편도 많이 어렵다던데,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겠어?”김주훈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순간, 노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이상하게도 김주훈의 집안 형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는 도리어 집이 꽤 잘 살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하지만 류영서가 김주훈의 집안 형편이 어렵다고 말하자 노지희는 그제야 문득 떠올렸다.노지희는 김주훈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김주훈은 바로 지난해 수석이었고,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부모님을 위해 A대학교를 선택한 사람이었다.당시 이 일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효자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고, 부모에게 발목이 잡혔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더 좋은 학교를 선택했다면 장래가 전도유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김주훈 본인은 그런 말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김주훈은 자신의 능력이라면 학교 하나 때문에 달라질 일은 없으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그 이야기에서 김주훈의 성적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남자의 가정환경이었다.고등학생 때부터 김씨 집안의 생활비는 사실상 김주훈 혼자서 벌어서 댔다.그 사실을 떠올린 노지희는 먼저 호기심 많은 룸메이트를 밀어내고 재빨리 자신의 침대로 들어가 침대 커튼을 닫았다.그러고는 진지한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냈다.[정말 괜찮아요, 후배님. 곧 기말고사니까 지금은 공부에 더 집중해야 할 시기잖아요. 후배님 실력이면 장학금 받는 건 문제없을 거라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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