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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버려진 보청기: Chapter 1 - Chapter 10

11 Chapters

제1화

“나는 정말 네가 9살 때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여민준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방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와, 역시 민준 형이야. 대단하다.”“다음에 치료 다 끝나면 직접 옆에서 말해 봐. 진짜 울지 궁금하네. 맨날 얌전한 척하는 모습이 완전 여우 같잖아.”“하예슬이 그 말을 들으면 뭐 어쩔 건데? 장애 있는 사람을 누가 좋아해. 민준 형이니까 불쌍해서 받아준 거지.”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가방 안에 넣어 둔 재활 확인서를 손에 꼭 쥔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수능이 끝난 뒤,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다른 지역의 병원을 찾아다니셨다.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앓아온 귀 질환을 치료했다.이제 더 이상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됐다.오늘은 내 생일 파티였다.오늘만큼은 여민준에게 깜짝선물을 주고 싶었다.이제 내 귀는 다 나았으니, 앞으로 여민준에게 짐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깜짝이벤트는, 오히려 내게 잔혹한 진실을 들려주는 일이 되어버렸다.여민준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심장을 깊숙이 찔렀고,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따끔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어 여민준을 바라봤다.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여민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고개를 숙인 채, 내 하얀 보청기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웃었다.“그만해.”“그래도 예슬이가 어릴 때 내 목숨 한 번 살려준 애인데, 이런 말은 조심해서 해야지. 걔 앞에서 하면 안 되잖아.”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바로 여민준의 뜻을 알아차린 듯했다.“알았어. 우리 입단속 확실히 할게.”“예슬이가 형 같은 사람을 만난 것만 해도 다행이지. 평생 귀 안 들리는 채 살아도 형 곁에 있을 수 있으면 된 거 아니야?”또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됐어. 예슬이도 어쨌든 여린 여자잖아. 나처럼 털털하게 너희랑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고. 너무 놀리지 마.”그때 이소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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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문득, 나는 올해 크고 작은 모임에서 이런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음을 떠올렸다.여민준은 내 보청기를 빼고 다정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했다.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내 귀에 보청기를 끼워줬다.사람들은 항상 여민준이 사랑 고백을 했다거나, 맹세를 했다거나, 절대 나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거라고 말했다.만약 내 귀가 치료되지 않았다면 그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숨겨진 잔인한 말과, 그 달콤함 속에 섞여 있던 날카로운 조각들을 나는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그때 이소라가 갑자기 말했다.“아, 맞다.”남자의 어깨를 감았던 팔을 풀며, 거리낌 없이 내게 사과했다.“미안해. 우리 남자끼리 늘 이렇게 장난쳐서. 너 질투하지 마.”여민준이 웃으며 받아쳤다.“됐어. 맨날 남자처럼 굴기나 하고. 여자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말을 끝낸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 장난치며 쫓고 쫓기는 놀이를 시작했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익숙하다는 듯 바라봤다.나는 눈을 감고 돌아서서 가려 했지만, 눈치 빠른 이소라에게 팔을 붙잡혔다.이소라의 눈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다들 너 때문에 시간 내서 온 거잖아. 네 생일이라고 일부러 모인 건데, 갑자기 가겠다고?”여민준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마치 내가 떼를 쓰는 어린아이인 것처럼 달래는 목소리였다.“네 선물도 아직 안 풀었잖아. 그만 좀 해. 또 공주병처럼 굴지 말고.”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 순간 여민준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우리 헤어져. 앞으로 다시 연락하지 마.”그 말을 남긴 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휴대폰에는 계속 메시지가 도착했다.[너 또 왜 이러는 거야? 다들 힘들게 와서 네 생일 축하해주고, 선물까지 준비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가면 어떡해?][소라는 원래 성격이 털털한 애야. 너희 여자들처럼 괜히 예민하고 가식적으로 구는 사람이 아니라고. 내 어깨에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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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여민준의 팔은 그대로 허공에 멈춰 섰다.한참이 지나서야 저린 팔을 내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너 오늘 대체 왜 이래?”“처음에 내 고백 받아줄 때는 눈물까지 글썽이더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달라져?”“너 예전에 얼마나 얌전하고 말 잘 듣던 아이였는지 기억 안 나?”가슴이 답답했다.이제는 여민준과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그동안 줄곧 아름다운 꿈속에 빠져 있었다.여민준이 오직 나만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믿었다.언젠가는 함께 S시로 대학을 가고,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생활하며,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자연스럽게 약혼하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으며 행복할 줄 알았다.하지만 오늘, 그 모든 진실이 잔인하게 드러났다.나는 이제야 깨달았다.여민준이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내가 여민준에게 의미하는 건, 어릴 적 한 번 목숨을 구해준 짐 덩어리일 뿐, 그 이상 아무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는 존재였다.깊이 숨을 들이쉰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헤어지자는 말 진심이야. 앞으로 연락하지 마.”그러자 여민준이 갑자기 화를 냈다.여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던지며, 눈빛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너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여민준의 말을 끊으며 내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말을 가려서 해야지.”“비도 맞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따뜻한 물로 씻고 쉬어. 시간도 늦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밥 먹고 가라는 말은 못 하겠다.”엄마도 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며 공손히 미소 지었다.“우리 예슬이는 이미 소원도 빌었고, 선물도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이 케이크는 네가 가져가서 먹어.”“집에 조심히 들어가. 남자라고 해도 밖에 다닐 때는 늘 안전 조심해야 해.”여민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대충 알고 있었다.예전에는 여민준이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부모님이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주셨다.문전박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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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물고기는 7초밖에 기억하지 못한대. 하지만 나는 아니야.”“나는 영원히 너를 지켜줄 거야.”어린 시절의 그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나는 정말 네가 9살 때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만약 9살의 하예슬이 18살의 여민준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면, 아마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그동안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수도 없이 겪어왔다.그래서 여민준의 태도 변화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사람은 결국 성장한다.그때 내가 여민준의 목숨을 구했고, 여한그룹은 그 일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 집에 여러 도움을 주었다.지난 몇 년 동안 사업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이익을 양보해 온 것도 충분히 진심 어린 보상이었다.결국 우리 사이는 이미 서로 빚진 것 없는 셈이었다.그리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나는 엄연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이지, 누군가의 부속품이 아니며, 남에게 기대 살아갈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그래서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마음 다 정했어요.”나는 엄마와 함께 대학 지원 원서를 수정했다.S시 대신 J시로 올렸다.처음에는 오늘 밤 잠을 한숨도 못 잘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잠은 놀라울 정도로 잘 왔다.나는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잠이 덜 깬 채 무심결에 휴대폰을 확인했다.카톡의 특별 알림에 음성 메시지 두 통이 와 있었다.여민준이었다.스피커 너머 여민준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화 풀었으면 나 차단한 거 풀어. 너도 이제 어린애 아니면서 왜 계속 이런 식으로 굴어?][어제 소라가 네가 갑자기 자리를 떠난 것 때문에 너무 미안해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심지어 옥상에 올라가서 죽겠다고까지 했어. 다행히 내가 말렸고.][시간도 아직 남았으니까 내가 소라랑 친구 몇 명 데리고 스위스에 가서 스키 타면서 기분 전환 좀 하려고 해. 괜히 질투하지 마. 어쨌든 소라가 그렇게까지 한 것도 네 책임이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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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어제 정말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어. 네가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네. 난 그냥 민준이를 친구처럼 대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않으면 안 될까?”이소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결국 다 내 잘못이야.”“내가 선을 지켰더라면 네가 그렇게 나가지 않았을 텐데. 아주머니, 제가 정말 죄책감 때문에 옥상에서 뛰어내릴 뻔했지만, 절대 탓하지 마세요...”“할 말 다 했어?”박수정은 이소라의 말을 끊고 비웃듯 말했다.“요즘 애들은 어려서부터 못된 것만 배워서, 맨날 남사친 짓거리나 하고 다닌다니까.”“내 딸이 너랑 따지지 않는 건 어릴 때부터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이야. 쉽게 욕하지도 않고, 함부로 남을 헐뜯지도 않지. 그런데 너희 부모님은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주셨니?”“매일 남자들 사이에만 끼어 있으면서, 남녀유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거니? 부모님이 안 알려주셨다면 내가 알려줄게.”“너 같은 행동을 요즘 인터넷에서는 뭐라고 하더라... 걸크러시 코스프레인가?”나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그리고 곧바로 이소라의 손을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너한테서 겨드랑이 냄새 나.”“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니까, 괜히 친한 척하지 마.”이소라는 온몸이 굳었다.박수정의 말을 똑똑히 들은 이소라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져,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서 있었다.유한선이 곧바로 이소라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아주머니, 지금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소라가 하예슬 때문에 거의 뛰어내릴 뻔했다니까요!”나는 유한선을 슬쩍 훑어보았다.그리고 어제 유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하예슬이 그 말을 들으면 뭐 어쩔 건데? 장애 있는 사람을 누가 좋아해. 민준 형이니까 불쌍해서 받아준 거지.”순간 구역질이 났다.“나는...”여민준은 본능적으로 내게 다가와 예전처럼 내 손을 잡으려 했다.“민준아...”이소라의 낮은 부름 소리를 듣고, 붉게 부은 눈을 본 순간, 결국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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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뭐, 뭐라고?”여민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언제부터였어?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나는 웃었지만, 눈빛엔 서늘함만 가득했다.“그게 중요해? 내가 듣지 못한다는 걸 이용해서 했던 일들... 너 스스로 잘 알고 있잖아.”여민준은 주먹을 꽉 쥐고 그 자리에 굳은 채 말을 꺼내지 못했다.이소라의 눈에는 질투가 스쳤고, 거리낌 없이 나를 비난했다.“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정말 몰랐네. 우리 모두 네 귀가 영구적인 손상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렇게 쉽게 나을 리가 없잖아.”이소라는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네가 장애인이 아니기만 하면 민준이가 다시 널 좋아해서 공주님처럼 모실 거라고 생각한 거야? 너도 이런 계산적인 면이 있었구나. 민준아, 절대 속지 마.”그 말을 들은 여민준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여민준은 방금 전의 죄책감에서 벗어난 듯, 다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소라 말이 맞아. 그만 좀 해. 내가 언제 네가 장애인이라 싫다고 했어? 뭐 하러 나한테 거짓말까지 해? 그래, 이렇게 하자.”“방금 한 말은 없던 일로 하고, 우리랑 스위스 여행에 같이 가겠다고 약속해. 네가 나를 속인 일도 이번에는 넘어가 줄게. 이게 네 마지막 기회야.”나는 여민준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나는 엄마의 팔을 끼고 그대로 돌아섰다.그때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왠지 예슬이가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뭐가 달라져? 그 얼굴 그 차림새 그대로잖아?”“설명은 못 하겠는데... 뭔가 하나 빠진 느낌이야.”이소라가 억울한 목소리로 답했다.“예슬이는 원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좀 거만했잖아. 아마 네가 착각한 거겠지.”그 말을 들은 사람은 머리를 긁적였다.“그럼 내가 잘못 본 건가...”다음 날, 여민준은 이소라의 휴대폰으로 내게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하지만 나는 단 한 통도 받지 않았다.비행기 탑승 시간이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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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부모님은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환하게 웃으셨다.“이미 해외에 가서 치료받았어. 이제 귀도 정상적으로 회복됐단다.”그 말을 들은 강희진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하지만 강희진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도 민준이가 돌아온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될까? 민준이도 이 사실을 알 권리가 있잖니.”“어릴 적에 맨날 그 뒤만 졸졸 따라다녔고,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그런 마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겠어?”나는 고개를 숙여 탁자 위의 찻잔을 바라보았다.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아주머니, 저와 민준이는 이제 서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억지로 붙잡고 있으면 결국 서로만 힘들어질 뿐이에요.”여중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우리 가족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여중기는 더 설득하려는 강희진을 막고, 집사에게 혼인 서약서를 가져오라고 했다.두 장의 서류가 눈앞에서 찢어지고,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며, 결국 한 줌의 재가 되는 모습을 바라봤다.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리고 부탁했다.“아주머니, 이 일은 당분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아주세요. 나중에 천천히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두 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러나 그날 밤, 나는 여민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나는 당연히 여민준이 약혼 해지 소식을 들은 줄 알았다.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수능 원서 지원도 잘못 작성하다니, 너 진짜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내가 미리 확인해 보지 않았으면 너 J 시에서 대학 다닐 뻔했어.][내가 이미 네 지원서를 다시 바꿔놨어. 소라도 S시 대학을 지원했더라. 소라는 집안 사정도 좋지 않고 등록금조차 감당하기 힘들다잖아. 같은 학교 친구로서 우리가 조금 도와주는 게 맞지 않을까?]여름밤 무더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그런데 나는 오히려 온몸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심장이 그대로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내 지원서를 바꿨다고?’그래, 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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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계속 답장 안 하면, 내가 소라 데리고 해외여행 가는 수도 있어.]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아무 말 없이... 오로지 차단하고 삭제할 뿐이었다.개학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비행기를 타고 그대로 J시로 향했다.한편, 여민준은 초조한 마음으로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여민준의 손에는 손수 만든 인형이 들려 있었다.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분홍색, 바로 여민준이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었다.내가 그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하며, 여민준은 이미 마음이 들떠 있었다.하지만 문이 열렸을 때, 그곳에는 여민준이 기다리던 사람이 없었다.여민준은 무심코 물었다.“아저씨, 아주머니. 예슬이 집에 있어요?”“방학 동안 한 번도 못 봤는데... 선물도 가져왔고, 이제 곧 개학이라 같이 가려고요.”박수정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말하는 걸 깜빡했네. 예슬이는 이미 학교 등록하러 갔어. 너랑 같이 갈 필요는 없어.”여민준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내가 아직 화가 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여민준은 몸을 돌려 가려 했지만, 하동훈에게 붙잡혀 모호한 몇 마디 충고를 들었다.“어떤 일들은 한번 놓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법이야.”“개학하면 우리 회사도 많이 바빠질 거고, 나와 네 아주머니도 너를 계속 맞아줄 시간이 없을 것 같구나. 그러니 앞으로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면 한다.”여민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려 했다.그런데 문을 열자, 거실 소파에는 부모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여민준은 더욱 의아해졌다.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여중기가 여민준을 불렀다.“앞으로 예슬이 집에 가지 마.”“예슬이는 이미 타지로 대학 다니러 갔고, 혼인 약속도 한 달도 전에 취소되었으니, 앞으로 너희는 그저 어릴 적 함께 자란 소꿉친구일 뿐, 그 외 아무 관계도 아니야.”여민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잖아요. 지금 저한테 장난치는 거예요?”하지만 고개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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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때 여민준은 오로지 이소라를 달래는 데만 정신이 팔렸었다.그래서 정작 그날의 내가 보청기를 끼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공통 지인을 통해 여민준이 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아마도 여민준은 마침내 내 귀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술자리에서 내가 이미 그 끔찍한 말들을 모두 들었다는 걸 떠올린 것이겠지.하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나는 J시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바빴다.힘든 일정에 지칠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 시절만큼 자유롭고 편안했던 적이 없었다.나는 여러 동아리에 가입했고,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선배가 주최한 미팅에도 참석했고, 몇몇 남학생들과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했다.그래서 여자 기숙사 건물 앞에서 익숙한 남자의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그냥 돌아서서 피하려 했다.하지만 여민준이 나를 먼저 발견하고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그리고 조금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보고 싶었어.”“우리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룸메이트들은 우리가 무슨 관계라도 있는 줄 알고 한참 눈치를 주며 웃더니, 먼저 자리를 피해 주었다.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아무 표정 없이 여민준을 바라봤다.“할 말 있으면 빨리 해. 나 들어가서 쉬어야 해.”여민준의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미안해. 그날은 그냥... 다들 나한테 몰아붙이는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한 거야.”“네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냥 체면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거야.”“그리고 그날 소라랑 만나기로 했던 것도 장난이었어. 우리 진짜 데이트한 거 아니야.”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정말 그것뿐이야?”나는 여민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네가 내 보청기를 벗겨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때마다 그런 심한 말 했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가지고 놀게 만든 거 아니야?”“이소라랑 데이트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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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여민준이 넋을 잃고 제자리에 서서 말없이 침묵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살짝 몸을 비켜 여민준을 피해 돌아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다음 날, 여민준은 이미 건물 아래에 없었다.기숙사에서 늘 아침 운동을 하던 룸메이트가 내게 말했다.“어제 그 사람 왔었는데, 다시 자기 학교로 돌아간대. 앞으로는 너 괴롭히지 않겠다고 하더라.”나는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하고, 계속 내 일에 집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공통 지인의 SNS를 통해 여민준과 이소라가 사귀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다.그 친구는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둘이 진짜 하루 종일 붙어 다닌대. 완전 꿀 떨어지는 커플이라니까.][여민준이 학교에서 인기 엄청 많대. 얼굴도 잘생겼고 집안도 좋으니까 당연한 건가?][이소라는 요즘 질투 때문에 힘들어한다더라.][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말투만 보면 걱정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내 근황을 떠보려는 게 뻔했다.하지만 나는 정말 바빴다.수업을 들어야 하고, 동아리 활동도 참여해야 하며, 룸메이트와의 유대감도 쌓아야 했다.그래서 매번 친구와의 대화는 대충 얼버무리는 식이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에게서 갑작스러운 메시지가 왔다.[여민준이랑 이소라 헤어졌어!]나는 조금 놀랐다.어쨌든 너무 빨랐으니까.공통 지인이 보내온 음성 메시지를 듣고서야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됐다.이소라는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하지만 여민준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여민준은 이소라에게 600만 원을 보내며 말했다.“아이를 지워.”하지만 이소라는 거절했다.“넌 내 몸은 걱정 안 돼? 혹시 이번에 수술하면 다시는 아이를 못 가지게 되면 어떡할 건데?”그러자 여민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너 지금 드라마 찍어? 한 번 유산하면 평생 임신 못 한다는 그런 드라마는 그만 좀 봐. 빨리 가서 해결해.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들지 말고.”말다툼 중, 여민준이 실수로 밀치는 바람에 이소라는 그 자리에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 피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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