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21화

윤정해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단미는 오른쪽 별채로 들어갔다. 3층으로 올라가려는데 2층에서 내려오는 나경이 보였다.단미를 보자 나경은 속에서 바로 분노가 치밀었다.전날 단미 때문에 박미영에게 호되게 혼났다. 아침에는 윤정해에게 일부러 다가가 사과도 하고 살갑게 굴었지만, 윤정해는 화를 내지는 않아도 예전보다 눈에 띄게 차가웠다.나경이 윤씨 집안에서 편하게 사는 데에는 박미영의 보호도 있었지만, 윤정해의 비위을 잘 맞춰 준 덕도 컸다.그런데 단미가 몇 마디 던진 것만으로 윤정해에게 쌓아 둔 ‘착하고 살뜰하며 은혜를 아는 아이’라는 이미지가 흔들렸다.나경이 단미 앞을 막아섰다. “이모부가 저한테 잘해 주는 걸 언니가 늘 질투한 거 알아요. 그런데 몇 마디 이간질했다고 이모부가 언니한테 사랑을 나눠 줄 것 같아요?”단미는 웃음이 날 뻔했다. “걱정 마. 그런 아빠는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절대 안 뺏어.”대놓고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단미의 눈빛에 나경은 모욕감을 느꼈다. 질투와 분노가 더 거세게 올라왔다.‘왜 나는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이모 부부의 눈치를 봐야만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지?’‘윤단미도 엄마가 죽은 건 똑같잖아. 내가 집도, 아버지 사랑도 빼앗았는데...’‘저 여자는 성인이 되자마자 윤성산업 지분 15%를 물려받고, 어렵지도 않게 최고 재벌가에 시집가서 사모님이 됐어.’‘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해?’단미가 아무렇지 않아 할수록 나경은 더 질투가 났다.윤씨 집안도 윤정해의 사랑도 필요 없다는 단미의 오만한 태도는 결국 지씨 집안이라는 뒷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단미 언니.”나경은 한 걸음 더 다가가 비웃었다. “친아버지도 무시하고 일부러 가족 사이 갈라놓는 언니 모습을 형부도 어제 다 봤어요. 형부가 언니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나경은 큰 집안일수록 효와 사람 됨됨이를 중요하게 본다고 믿었다.“내 아내가 뭐가 그렇게 잘못했다는 거지?”단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 쪽에서 낮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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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콜록, 콜록...”단미는 급히 손을 저었다. “괜찮아. 안 업어도 돼... 콜록...”성묘하러 산에 올라가면서 남편 등에 업혀 가는 건 너무 이상했다.‘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단미의 얼굴이 기침 탓에 붉어지자 호건이 등을 쓸어 줬다. “천천히 마시면 되잖아. 괜찮아?”“응, 괜찮아.”숨을 고른 단미는 앞서간 사람들과 거리가 더 벌어진 걸 확인하고 급히 물병을 닫아 호건에게 건넸다.“가자.”단미는 자기가 원래 들고 있던 바구니를 다시 받으려 했지만 호건은 돌려주지 않았다.“너는 네 몸만 잘 챙겨.”단미는 호건 양손을 내려다봤다. 원래부터 가장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는데 자기 것까지 더해졌다. 미안해서 그냥 둘 수가 없었다.“그래도 나만 빈손으로 가기는 좀 그렇잖아.”“그럼 이거 들어.”호건이 물병을 단미 손에 쥐여 줬다.단미는 말문이 막혔다.“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더 늦으면 일행을 다 놓치겠다.”호건은 짐을 든 채 먼저 산길을 올랐다.단미는 앞쪽 사람들과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걸 보고 더 따지지 못한 채 뒤를 따라갔다.묘역에 도착한 뒤 모두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단미는 호건의 이마와 관자놀이에 땀이 가득한 걸 봤다. 앞머리 몇 가닥도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햇빛 아래 땀 한 방울이 반듯한 턱선을 따라 흘러 운동복 위로 떨어졌다.“땀 닦아.”단미는 휴지를 꺼내 내밀었다. 호건을 한번 바라보며 진심으로 덧붙였다. “고생했어. 고마워.”젊고 힘이 좋다는 이유로 호건은 가장 무거운 짐을 거의 다 들었다.원래 호건이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평소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JF그룹 대표였다.오늘은 여러모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호건은 휴지를 받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야.”“물 좀 마셔.”단미는 들고 있던 물병을 내밀었다가 곧 멈칫했다.두 사람은 이제 같은 물병을 아무렇지 않게 돌려 마실 사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산을 오르며 단미가 이미 여러 번 입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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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마음속으로 할 말을 다 한 단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을 보니 호건은 묘 앞에 반듯하게 서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단미는 호건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돈 많이 벌게 해 달라고 비는 거야?”호건이 눈을 뜨고 단미를 바라봤다.단미는 친절하게 알려 주듯 속삭였다. “절 몇 번 올렸다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수천억 원을 벌게 하시진 못해.”“돈 얘기한 거 아니야.”호건은 꽤 진지했다. “다른 걸 빌었어.”단미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뭘?”호건은 단미를 한번 보고 대답하지 않았다. 준비한 술잔을 묘 앞에 올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끝까지 소원을 말하지 않는 호건을 보며 단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말하면 안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나?’‘별걸 다 믿네.’...성묘를 모두 마친 뒤 윤정해와 윤재성은 주변 정리를 더 하고 내려가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박미영은 나경을 데리고 먼저 내려갔다.단미와 호건도 남아 돕겠다고 했지만 윤재성이 막았다.“이런 건 우리가 하면 돼. 단미야, 너는 지 서방 데리고 여기 구경이나 좀 하고 내려가.”단미는 작은아버님 말을 이길 수 없어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박미영과 나경과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아 호건을 데리고 다른 산길을 택했다.검은 운동복을 입은 호건이 뒤를 따라오다가 산 아래쪽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뒤에서 발소리가 사라지자 단미가 돌아봤다. 이유도 없이 멈춘 사람처럼 보여 물었다.“왜 그래?”호건은 길가의 나무를 바라봤다. “열매 안 따?”단미도 시선을 따라갔다.바로 지난해, 단미가 호건을 끌고 와 꼭 같이 열매를 따자고 졸랐던 나무였다.기억이 떠오르자 단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곧 시선을 돌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 따고 싶으면 따. 난 배고파서 먼저 내려갈게.”“이 길 따라 내려오면 집으로 이어져. 난 먼저 갈게.”길을 한번 가리켜 준 단미는 그대로 아래로 걸었다.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호건의 눈에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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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저녁을 먹은 뒤 호건은 두 사람의 캐리어를 차에 실었다. 단미는 차 옆에서 윤재성과 진희선에게 인사했다.“작은아버님, 아주머님. 두 분 다 건강 잘 챙기세요.”“작은아버님, 오늘 내려오면서 보니까 산 아래 낚시터 둑 쪽 흙이 많이 무너졌어요. 거기 가서 낚시하지 마세요. 특히 겨울엔 절대 가지 마시고요.”윤재성이 웃었다. “알았어.”“아주머님도 겨울에 손발에 동상 비슷하게 올라오면 제가 드린 연고 꼭 바르세요. 그거 효과 좋아요.”진희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아직 여름인데 벌써 겨울 걱정까지 하세요?”단미의 눈빛이 잠시 멈췄다가 금세 웃었다. “그냥 생각난 김에 말씀드리는 거예요.”트렁크를 닫은 호건이 다가오자 윤재성이 말했다. “이제 출발해. 더 늦으면 산길이 어두워서 운전하기 힘들어.”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은아버님. 아주머님도 안녕히 계세요. 저희 올라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단미는 자기 대신 마지막 인사까지 해 버린 남자를 어이없이 쳐다봤다.‘마지막 그 말은 굳이 안 해도 되는데.’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호건이 운전대를 잡았고 단미는 조수석에 앉았다.윤재성과 진희선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차가 마당을 빠져나갔다.해가 지면서 차창 밖 풍경도 서서히 어두워졌다.고속도로에 들어가기 전까지 굽이진 산길을 꽤 오래 내려가야 했다. 커브를 몇 번 돌지 않았는데도 단미는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단미는 가슴을 누른 채 자세를 몇 번 고쳐 앉았다.움직임을 알아챈 호건이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단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좀 메스꺼워.”호건은 바로 속도를 낮췄다. “미안. 내가 너무 빨리 몰았나 봐. 이 정도면 괜찮아?”단미는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응. 이 정도면 괜찮아.”호건은 옆에 두었던 미지근한 물병을 건넸다. “물 좀 마셔.”“고마워.”몇 모금 마시자 울렁거리던 느낌이 조금 가라앉았다.이후 호건은 산길을 아주 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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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전화를 끊은 단미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언제 도착했어? 왜 안 깨웠어?”“방금.”차 안이 좁아서인지 조명이 어두워서인지, 단미는 호건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저기... 기사님은 왔어?”“왔어.”“아.” 단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도 빨리 들어가. 이틀 동안 내가 당신한테 여러모로 신세 졌네.”말을 끝내자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호건도 말없이 따라 내렸다.근처에서 한참 기다리던 기사는 두 사람이 나오자 곧장 다가왔다.단미는 기사에게 말했다. “지 대표의 캐리어는 트렁크에 있어요. 부탁드릴게요.”“네.”기사가 짐을 꺼내러 뒤로 갔다.단미는 그제야 호건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차 키를 달라는 뜻이었다.호건은 말없이 열쇠를 단미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이제 나흘 뒤면 숙려기간도 끝나.”단미는 열쇠를 쥔 채 물었다. “끝나는 다음 날 오전 8시 30분, 가정법원 확인기일에 맞춰서 올 수 있어? 확인받고 바로 이혼신고까지 끝내고 싶어.”밤빛 아래 호건의 짙은 눈이 단미를 오래 바라봤다. 문득 옅게 웃었다. “그렇게 급해?”“응. 꽤 급해.”단미는 숨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정세연과 약속을 마쳤다. 이혼 절차를 끝낸 바로 다음 날 연경남과 함께 경운시 하창동 유적 복원기지로 출발할 예정이었다.호건의 입가에 있던 희미한 웃음이 사라졌다.기사가 호건의 것과 함께 단미의 캐리어도 꺼내 옆에 세워 뒀다.“그럼 5일 뒤에 봐.”단미는 예의를 갖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차 잠금 버튼을 누른 뒤 기사에게 캐리어를 받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끝까지 호건을 다시 보지는 않았다.호건은 그 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생각에 잠긴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다음 날.단미는 스승 강성훈과 선배 세연에게 가져갈 선물을 모두 정리해 사진을 찍어 정세연에게 보냈다.[스승님이랑 선배 줄 건 이렇게 준비했어. 더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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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한 달 넘게 계획해 온 일이 이렇게 갑자기 중단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단미는 소파에 앉은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여린의 영상통화였다.단미가 받자마자 화면 가득 여린의 얼굴이 들어왔다.[단미야, 내일 송별회 때 뭐 먹을래? 고기? 파스타? 아니면 호텔 코스 요리?][난 그냥 강울시에서 유명한 향토 음식 먹으러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경운시 복원현장 들어가면 한동안 못 먹을 거잖아.]단미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해도 돼.”[안 해도 된다고?]여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안 되지. 준호가 사기로 했잖아. 괜히 걔 지갑 걱정해서 그러는 거 아니지?]말이 끝나자 화면 한쪽에서 남자 얼굴이 비집고 들어왔다.[맞아. 네가 이렇게 오래 일하러 멀리 가는 건 처음인데 송별회도 없이 보내면 친구도 아니지!]최준호였다.단미와 여린, 준호는 중학교 때부터 함께 지낸 친구였다. 셋이 오래오래 친구로 지내자고 해 놓고 결국 여린과 준호 둘이 연인이 됐다.단미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말했다. “돈 아껴 주려는 게 아니야. 나 진짜 못 가게 됐어.”[못 가?]두 사람은 동시에 놀라 외쳤다가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여린이 먼저 물었다. [왜? 무슨 일 생겼어?]단미는 한숨을 쉬며 조금 전 들은 내용을 설명했다.여린이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 [잘 돌아가던 복원 사업을 갑자기 멈춘다고?]단미가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여린은 안타까운 얼굴이 됐다. [우리 단미 진짜 속상하겠다.][괜찮아. 못 가면 못 가는 거지. 강울시에도 네 전공 살릴 수 있는 일은 많잖아.]준호도 맞장구쳤다. [맞아. 네 실력이면 어디서든 충분히 인정받아.]여린이 말했다. [정 안 되면 우리끼리 복원 스튜디오 차려도 되고.]두 사람이 번갈아 위로하는 걸 보며 단미는 결국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거기에 못 간다고 울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역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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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법적으로 이혼이 성립되기 전 마지막 며칠은 일정이 빼곡했다.멀리 떠날 필요가 없게 되자 갑자기 할 일이 사라졌다.고대하던 목표가 사라져서인지 의욕도 없고 몸과 마음이 축 늘어졌다. 단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밖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이어진 이틀 동안 단미는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졸리면 자고, 배가 고프면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소파와 침대를 오가며 이혼 전 남은 며칠을 그냥 흘려보낼 생각이었다.그런데 숙려기간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밤, 샤워하다가 갑자기 명치 아래쪽이 아파 왔다.통증이 심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단미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챙겨 입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밖으로 나오자 통증이 다시 사라졌다.사실 이틀 전부터도 배 윗부분이 은근히 아픈 적이 있었다. 오늘처럼 뚜렷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갑자기 왜 이러지?’예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침대에 누운 뒤에도 신경이 쓰였다.결국 몸을 일으켜 핸드폰으로 증상을 검색했다.[몸에 힘이 없고, 명치 주변이 가끔 아프며 메스꺼움도 있는데 무슨 문제일까요?]검색 버튼을 누르자 여러 결과가 쏟아졌다.아래로 갈수록 무서운 병명이 보였다.만성 위염.위궤양.역류성 식도염.심지어 위암과 관련된 글까지 있었다.단미는 하나씩 눌러 증상을 비교했다.어떤 글을 봐도 자기 상태와 한두 가지씩은 맞는 것 같았다.읽을수록 겁이 났다.‘설마 나... 큰 병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긴장하자 조금 전 아팠던 부위가 다시 은근히 뻐근한 듯했다.단미는 배를 누르며 참았다.‘안 돼!’병이 있든 없든 내일 병원에 가서 확실히 검사받아야 했다. 검색 결과만 보고 혼자 겁먹을 수는 없었다.밤새 깊이 자지 못한 단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소화기내과 전문의 진료를 예약해 증상을 설명했다.의사는 몇 가지를 묻고 검사 처방을 내렸다.결과가 나온 뒤 단미는 불안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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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단미는 검사지를 등 뒤로 감춘 채 세게 움켜쥐었다. 떨리는 손끝에 종이가 금세 구겨졌다.임신 사실 자체가 너무 갑작스러웠다. 단미도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내일이면 숙려기간이 끝나고 법원 확인기일이 잡혀 있었다.이 중요한 때 호건이 임신 사실을 알면 이혼 절차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아무 병도 아니야. 그냥 머리가 좀 ...”말하던 중 호건이 큰 몸을 가까이 붙였다.단미는 긴장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손에 쥐고 있던 검사지를 먼저 빼앗겼다.“돌려줘!”단미는 놀라 호건의 팔을 붙잡았다.호건은 왼팔을 잡힌 채 오른손으로 검사지를 높이 들어 내용을 읽었다.“임신?”그 두 글자에 단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호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단미를 봤다. “지금 네가 임신한 채로 이혼하자는 거야? 나 몰래 아이까지 데리고 나가려고?”단미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무슨 누명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씌워?’‘정말 자기 멋대로 생각하네.’“눈이 있으면 제대로 봐.”단미는 화가 나 검사지를 되찾아 임신 주수가 적힌 부분을 호건 눈앞에 들이밀었다.“임신한 시기가 언제인지 똑똑히 봐. 내가 한 달 전에 내가 임신할 걸 미리 알고 이혼하자고 했겠어?”“이건 당신 때문이잖아.” 단미는 검사지를 호건 가슴 쪽으로 던지며 화를 냈다. “그날 밤 당신이 무슨 굶은 사람처럼 끝도 없이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됐겠어?”호건은 검사지를 받아 들고 단미를 바라봤다. “너는 책임 없어?”“내가 무슨 책임이 있는데?”호건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날 새벽에는 네가 나 붙잡고 더 하자고 했잖아.”단미의 눈이 동그래졌다.그날 일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 “나는 이혼하자고 말하려던 거였어. 누가 그걸 더 하자는 뜻으로 알아들으래? 당신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가득했던 거지.”호건의 표정에 드물게 민망함이 스쳤다. 헛기침을 한번 했다.“네가 말을 끝까지 안 했잖아.”“당신이 말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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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호건에게 화가 나서인지 단미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러면 됐지?”호건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입술을 다물었다.단미에게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대답처럼 보였다.더 말하지 않고 호건을 지나쳐 걸었다.몇 걸음 가지 못해 손목이 붙잡혔다.단미는 돌아서 미간을 찌푸렸다. “또 뭐가 문제야?”호건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임신했잖아. 집까지 데려다줄게.”“필요 없어.”단미는 호건의 손을 힘주어 밀어내고 큰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외래동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단미야!”단미가 돌아보자 여린이 뛰어오고 있었다.“여린아? 네가 왜 여기 있어?”“너 병원에서 검사받는다는데 내가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걱정돼서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여린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 의사가 뭐래? 위가 안 좋은 거래?”단미의 속눈썹이 내려갔다. “병 아니래. 임신이야.”“뭐?”여린의 목소리가 크게 튀었다. 시선이 바로 단미의 배로 내려갔다.“너, 임신했어?”“그럼 이게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너 지호건이랑 내일이면 이혼 절차 끝나잖아. 지호건한테 말할 거야? 이혼은 어떻게 하고?”호건 이야기가 나오자 단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이미 알아. 다음 주 월요일에 임신중절수술 받고 이혼할 거야.”여린이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말했어? 설마 지호건이 아이 없애라고 한 거야?”단미는 고개를 저었다.병원에서 우연히 호건과 마주쳤고, 검사지를 들킨 일부터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그러니까 네가 스스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 거네?”여린은 단미의 손을 붙잡았다. “단미야, 정말... 괜찮겠어?”단미는 평평한 자기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목소리가 낮아졌다.“이 아이는 애초에 기다리던 아이가 아니었어.”아이를 낳으면 호건은 지씨 집안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양육 문제에 개입할 것이다.권력도 배경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미가 호건과 다투면 결국 아이가 지씨 집안으로 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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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월요일 아침, 병원.의사에게 지금 몸 상태로는 임신중절수술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자 단미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굳었다.“왜요?”단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지난번 상담할 때는 안 된다는 말씀이 없으셨잖아요.”“그때는 기본 검사만 한 상태였고, 오늘 수술 전에 필요한 정밀검사까지 끝낸 뒤 다 확인한 결과입니다.”담당 의사는 아침에 다시 진행한 검사 결과들을 펼쳐 놓았다.“현재 상태에서 무리하게 임신을 중지하면 출혈과 회복 문제를 포함해 산모의 건강 위험이 상당히 커질 수 있습니다.”“이후 임신 가능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다른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도 있어서 저는 수술을 권할 수 없습니다.”...여린은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고 단미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나오자, 여린은 겁이 나서 그러는 줄 알고 바로 달려가 손을 붙잡았다.“무서워하지 마. 요즘은 마취도 하잖아. 잠깐 눈 감고 있으면 금방 끝날 거야.”단미는 천천히 여린을 바라봤다.“의사 선생님이 내 몸 상태 때문에 수술하면 안 된대.”“뭐? 못 한다고?”여린은 완전히 멍해졌다.“몸이 어떻게 안 좋으면 수술도 못 해?”“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단미 역시 정신이 없었다.“전문용어를 너무 많이 설명해서 다 이해는 못 했는데, 쉽게 말하면... 나는 이 아이를 없애면 안 된다는 뜻이래.”여린은 급히 단미를 부축해 옆 의자에 앉혔다. 같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그럼 이제 어떡해?”단미는 답답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다 핸드폰 알림음을 들었다.화면을 확인하자 호건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그 위에는 단미가 아침에 병원에 도착해 보낸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나 지금 병원에 왔어. 오늘 오전 임신중절수술 받을 예정이야. 오후 2시 30분 가정법원 확인기일에는 늦지 말아 줘.]여린이 말했다. “수술을 못 한다면 그것도 운명 아닐까? 이 아이랑 인연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잖아.”“그럼 마음 편하게 낳는 쪽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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