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결국 경남은 물고기를 몇 마리 잡지 못했다. 그래도 해가 산 너머로 기울 무렵 단미는 너그럽게 오늘 훈련은 끝이라고 경남에게 선언했다.돌아가는 길에 경남이 물었다. “누나, 내일은 무슨 훈련을 해요?”단미가 답했다. “앞으로 사흘 동안 계속 여기 와서 낚시할 거야.”“네?” 경남의 얼굴이 무너졌다. “또 낚시요?”“지구력은 하루 만에 생기는 게 아니야. 시간을 들여 몸에 익혀야 해.”단미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복원 작업은 조용하고 오래 걸려. 외부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 필요하고, 오랜 시간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해.”경남을 한 번 바라본 단미가 말을 이었다. “급한 성미부터 가라앉혀야 나중에 복원실에서도 제대로 버티지.”단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다. 설명에는 이상하게 사람을 납득시키는 힘이 있었다. 경남은 진지한 얼굴로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조용한 밤.호건은 안방 소파에 혼자 앉아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예전에는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집에 오면 단미가 있었다.단미는 늘 눈을 휘며 웃었고, 하루 동안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지치지도 않고 호건에게 재잘거렸다.수많은 밤, 두 사람은 바로 이 침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지금은 달랐다.호건은 방 안을 둘러보다 침대 맞은편 벽의 어색하게 비어 있는 자리에 시선을 멈췄다.이 방에는 아내는커녕 웨딩사진조차 남지 않았다.안방이 텅 빈 만큼 마음 한구석도 이상하게 허전했다.호건은 핸드폰을 들고 단미의 번호를 찾았다. 생각하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끊으려는 때는 이미 전화가 연결된 뒤였다.[여보세요?]부드러운 목소리에 의문이 섞여 들려오자 호건의 등이 저도 모르게 꼿꼿해졌다.호건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뒤 최대한 평소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단미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호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릎 위에 둔 손을 주먹 쥔 채 머리를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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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정산금이 들어왔다는 건 두 사람 사이를 묶고 있던 것이 또 하나 사라졌다는 뜻이었다.이제 남은 건 숙려기간 뒤 법원의 이혼 의사확인을 받고 이혼신고를 마치는 일뿐이었다. 그때가 되면 부부였던 두 사람의 사이는 정말 끝난다.단미는 그 뒤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경남을 가르치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았다.그렇게 보름 넘는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추석이 가까워졌다.단미의 집안에는 추석이면 고향에 내려가 조부모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차례를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다.단미는 윤정해의 가족과 함께 있는 게 아무리 싫어도 그날만큼은 고향으로 내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뵀다.그곳에 사는 작은아버지 윤재성도 만날 수 있었다.윤재성은 화가였다. 20여 년 전 사랑하던 아내가 출산 중 세상을 떠났고 아이마저 살리지 못한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의 유골함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 곁을 지켰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윤재성은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추석을 하루 앞둔 날, 단미는 혼자 차를 몰고 고향으로 향했다.전날 밤, 윤정해가 전화를 걸어 함께 출발하겠느냐고 물었지만 단미는 바로 거절했다.고향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때였다.차가 대문 가까이 가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문 앞에 나와 기다리는 윤재성이 보였다.윤재성은 단미의 차를 알아보자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차가 편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더 활짝 열었다.단미는 차를 마당에 세운 뒤 문을 열고 내려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작은아버님, 저 왔어요!”윤재성이 다가와 사랑스러운 조카를 바라봤다. “왜 네가 직접 운전해서 왔어? 네 아버지 일행이랑 같이 안 온 건 그렇다 쳐도, 지 서방은 기사 하나 붙여 줄 생각도 못 했대?”“3시간 넘게 혼자 운전하면 얼마나 위험한데... 예전에는 올 때마다 기사 보내 주더니 이번에는 왜 혼자 오게 했어.”윤재성은 늘 단미를 친딸처럼 아꼈다.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에도 걱정과 사랑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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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단미는 빠른 걸음으로 마당에 나왔다. 고개를 들자 아까는 없었던 차 두 대가 서 있었고, 차 옆에는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그중 느닷없이 나타난 호건을 확인하자 단미의 발이 그대로 얼어붙었다.머리가 잠깐 멈춘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기척을 들은 호건이 고개를 돌렸다. 단미가 멍하니 서 있는 걸 보고 곧장 다가왔다.말을 건네려던 호건은 단미 뒤에서 윤재성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먼저 공손하게 인사했다.“작은아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인사를 하면서도 호건은 티 나지 않게 단미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그래, 잘 지냈지.”윤재성은 웃으며 몇 마디 안부를 나누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 단미를 바라봤다. “단미야, 너 이틀 전 통화할 때 지 서방은 일이 바빠서 이번에는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단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적당한 핑계를 찾으려는데 호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때는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못 올 수도 있으니 단미가 괜히 가족들에게 기대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단미랑 같이 안 오고, 네 장인 일행이랑 들어왔어?”호건은 무심코 단미를 한번 바라본 뒤 설명했다. “같이 온 건 아닙니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뒤 우연히 만났습니다.”“맞아요, 작은아버님. 저희도 형부랑 길에서 만났어요.”나경이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믿는 미소를 띠며 호건을 바라본 채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나경은 오래전부터 윤민재를 따라 윤재성에게도 자연스럽게 작은아버님이라고 불렀다.“언니, 이모부가 같이 내려가자고 했는데 싫다고 했다면서요? 전 형부랑 따로 오는 줄 알았는데, 언니가 먼저 혼자 와 있었네요?”겉으로는 가볍게 묻는 말 같았지만 속뜻은 달랐다. 부모와도 같이 오지 않고 남편과도 따로 움직인 단미가 제멋대로 굴었다는 의미였다.단미는 돌려 까는 나경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 궁금한 건 호건이 왜 여기까지 왔느냐는 것뿐이었다.“작은아버님, 호건 씨가 목마른가 봐요. 안에 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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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숙려기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미는 마지막까지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다.멀찍이 선을 긋는 단미를 보며 호건은 지난해 이맘때를 떠올렸다.당시 호건이 함께 고향에 내려왔을 때, 단미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다음 날 성묘를 마친 뒤에는 신이 나서 호건을 산 여기저기로 끌고 다녔다. 어릴 때마다 놀던 곳을 하나씩 보여주고 유실수에서 열매도 따게 했다.정장에다 구두까지 갖춰 입은 호건을 보고 단미는 웃으며 말했다. “이 차림으론 안 돼. 다음에는 편한 옷 입고 와. 그래야 나무에도 올라가서 같이 딸 수 있지.”그때 단미의 눈은 별빛이라도 담긴 듯 반짝였다.지금은 아니었다. 호건을 바라보는 눈에 반가움은 없었고, 오히려 찾아온 걸 번거로워하는 기색까지 느껴졌다.가정법원에서 협의이혼 의사확인 신청을 하고 나온 날 이후, 단미는 호건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마주하자 단미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색했다.“일단 여기서 좀 쉬어. 난 작은아버님한테 할 말이 있어.”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단미는 밖으로 나갔다.호건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차는 시내로 돌려보내라고 했다....안쪽 거실을 나온 단미는 바깥채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윤정해와 마주쳤다.단미를 보자 윤정해가 곧장 물었다. “단미야, 지 서방이 안에 있니?”당장 사위에게 달려가 뭔가 부탁할 사람 같은 표정을 보니 단미의 속이 답답해졌다.“아버지, 윤성산업 일은 호건 씨랑 아무 상관 없어요. 앞으로 호건 씨를 찾아가서 일 부탁하지 마세요.”윤정해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내가 언제 지 서방한테 일을 부탁했다고 그래?”“그럼 왜 여기까지 오라고 하셨어요?”“내가 오라고 했다고? 그건 그냥...”“어쨌든 앞으로는 호건 씨 좀 그만 찾으세요.”단미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아버지를 지나쳐 걸어갔다.윤정해만 영문도 모른 채 복도에 남았다.전날 윤정해는 해율만 사업 협의를 하려고 JF그룹에 갔다가 호건을 만났다.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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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단미가 나경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느긋하게 호건이 빼 준 의자에 앉은 단미는 일부러 나경 쪽을 돌아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나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사도우미인 진희선이 반찬을 내오는 동안 윤재성이 윤정해에게 물었다. “민재는 올해도 안 내려왔어?”박미영이 급히 대신 대답했다. “민재는 해외에서 학교 다니느라 수업이 너무 바빠요. 일정 맞추기도 힘들어서 굳이 오라고 안 했어요.”“그래도 애가 마음은 있어요. 어젯밤에 일부러 전화해서 나경이한테 내일 성묘할 때 할아버지랑 할머니께 자기 몫까지 절 올려 달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단미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올해 열아홉인 윤민재는 박미영이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키운 아들이었다. 어릴 때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시골은 불편하다며 투정을 부렸고, 도착한 날부터 집에 돌아가겠다고 성화를 해댔다.4년 전 조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예 고향에 내려오지도 않았다. 박미영은 매년 명절이면 아들을 감싸려고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 냈다.오늘도 마찬가지였다.단미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식탁에는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했고, 오랜만에 식욕이 제대로 돌았다. 다른 말 없이 열심히 먹기만 했다.볼이 빵빵해질 만큼 먹는 모습을 보던 호건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예전에는 단미가 이렇게 잘 먹는 걸 왜 몰랐지?’볼 안에 먹을 걸 가득 넣은 모습이 작은 햄스터 같았다.진희선이 새 요리를 내놓으며 단미에게 낮게 말했다. “아가씨, 이 돼지갈비찜은 선생님께서 꼭 해 달라고 하셨어요. 아침부터 푹 졸였으니까 얼른 드셔 보세요.”“와, 냄새 너무 좋아요. 아주머님도 고생하셨어요.”단미는 윤재성에게도 웃었다. “작은아버님도 고마워요.”호건은 단미가 진희선과 윤재성을 향해 눈을 휘며 웃는 걸 바라봤다. 사랑받는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편안하고 해맑은 표정이었다.잠시 넋을 놓고 보는데, 단미가 갈비 한 점을 집어 먹더니 눈을 반짝이며 엄지를 세웠다.“진짜 부드럽고 간도 딱 맞아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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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1층 거실에 들어서자 단미는 멈추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나경이 불렀다.“언니, 저녁 먹기 전에 작은아버님께 약재 상자 하나 드리는 거 봤는데... 혹시 최상급 홍삼이에요?”‘홍삼?’뒤늦게 들어오던 윤정해가 바로 단미를 바라봤다.단미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나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단미가 호건 앞에서도 이렇게 거칠게 말할 줄 몰랐던 나경은 잠깐 굳었다. 그러나 곧 다시 순하고 약한 표정을 만들었다.“언니, 화내지 마요. 이모부가 얼마 전에 몸이 안 좋으셨잖아요. 의사도 기력 회복에 좋은 약재를 챙기라고 했는데, 좋은 홍삼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아까 언니가 작은아버님께 드린 게 아주 좋은 거라고 해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단미는 팔짱을 낀 채 나경의 연기를 구경했다. “그래서?”박미영이 못마땅하게 끼어들었다. “단미야, 그렇게 좋은 걸 구했으면 아버지부터 챙겨야 하는 거 아니니?”“친아버지랑 작은아버지 중 누가 너랑 더 가까운지도 몰라?”단미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를 친딸처럼 키운 건 작은아버님이니까, 당연히 작은아버님이 더 가까워요.”윤정해의 표정이 굳었다.단미는 세 사람을 한번 훑었다. “작은아버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친딸처럼 아껴 줬어요. 제가 어른이 되어서 작은아버님 챙기는 게 뭐가 잘못됐죠?”곁에 서 있던 호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미간도 아주 조금 좁혀졌다.그 표정을 보고 나경은 속으로 기뻐했다. 호건이 단미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더 착한 얼굴을 만들어 말했다.“언니가 작은아버님 챙기는 게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래도 이모부가 언니 친아버지잖아요.”“작은아버님이 아무리 잘해 줘도 친아버지보다 더 가까울 수는 없지 않아요? 역시 피로 이어진 가족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요.”“그러니까...”단미는 일부러 놀란 얼굴로 윤정해를 한번 보고, 다시 믿기 어렵다는 듯 나경을 바라봤다.“네 말은, 우리 아버지가 널 얼마나 친딸처럼 아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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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2층에 올라가자 아래층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호건은 걸음을 조금 재촉해 단미를 따라잡았다.“가족들과 사이가 나빠?”단미는 호건을 보지도 않고 계단을 올랐다. “봤잖아. 나 되게 불효막심한 딸이야.”2층과 3층 사이 계단참에 이르자 호건이 긴 다리로 앞으로 나서 단미 앞을 막았다.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저 사람들이 너한테 잘못한 거야.”“네가 불효한 게 아니고.”스스로 아는 사실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말은 달랐다. 묻어 두었던 감정이 건드려지자 단미의 눈이 시큰거렸다.단미는 입술을 세게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고집스럽게 참으면서도 억울한 단미의 표정을 보니 호건은 양심에 찔렸다.호건은 결혼한 뒤 몇 번 단미와 함께 본가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가족들과 크게 부딪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단미도 오늘처럼 가족들을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그래서 친어머니가 없더라도 적어도 장인인 윤정해는 딸을 잘 챙기는 줄 알았다.윤정해가 처조카인 나경을 친딸보다 더 살뜰하게 대할 줄은 몰랐다.“왜 예전에는 이런 얘기 한 번도 안 했어?”단미의 긴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아래로 늘어진 손끝도 조금 오므라들었다.두 사람의 집안 차이는 원래도 컸다.호건을 좋아했던 시절, 단미는 호건에게 늘 가장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호건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 자기 집안에서 무시당하고 초라해지는 모습을 굳이 보일 이유가 없었다.본가에 같이 올 때마다 속이 뒤집혀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윤씨 집안의 보기 싫은 모습을 호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지금은 달랐다.5일 뒤면 숙려기간이 끝난다. 확인기일을 거쳐 이혼신고까지 마치면 단미와 호건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 된다.호건이 윤씨 집안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을 어떻게 보든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조금 전에도 호건 앞에서 거리낌없이 다 말해 버린 것이다.“당신한테 말했으면 뭐가 달라졌는데?” 단미가 가볍게 웃었다. “당신이 대신 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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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진짜 괜찮아.”호건이 말했다. “그럼 나가서 좀 쉬어. 다시 불편해지면 작은아버님께 약 있는지 여쭤볼게.”단미는 호건을 한번 올려다봤다. 욕실 조명이 따뜻해서인지 평소 차갑게만 보이던 남자의 표정이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응.”단미는 시선을 거두고 호건의 옆을 지나 방으로 나왔다.안방으로 들어오자 진희선이 두 사람의 캐리어를 옮겨서 나란히 놓은 게 보였다. 그제야 단미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오늘 밤 호건과 같은 방을 써야 했다.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직 부부였기 때문이다.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단미는 마음을 다잡았다. 돌아섰을 때 표정은 이미 아무렇지 않았다.“나 먼저 씻을게.”말을 마치고 옷장에서 잠옷을 골랐다.계절에 맞는 얇은 슬립 원피스를 한번 봤다가, 결국 시원한 소재의 긴팔 잠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건은 작은 소파에 앉아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호건이 눈을 들자 단미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그런데도 강한 시선이 자기에게 머물러 있는 게 느껴졌다. 몸을 거의 가리는 긴팔 잠옷을 입고 있는데도 괜히 어색했다.“여기는 다들 일찍 자. 당신도 빨리 씻는 게 좋을 거야.”단미가 재촉했다.호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단미는 보지 않았지만 캐리어 지퍼가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 뒤이어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문이 잠기고서야 단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진희선이 정리해 둔 침대를 보니 또 고민이 생겼다.방 안의 소파는 작았다. 예전 신혼집 안방에 있던, 성인 한 명이 충분히 누울 수 있는 큰 소파와는 달랐다.결국 오늘은 호건과 같은 침대에서 자야 했다.다행히 결혼한 뒤 윤재성이 단미를 위해 큰 침대로 바꿔 줬다. 두 사람이 한쪽씩 쓰면 서로 건드리지 않고 잘 수 있었다.잠시 생각한 단미는 옷장에서 이불 하나를 더 꺼냈다....샤워를 마친 호건이 방으로 나오자 단미는 침대 한쪽에 기대앉아 있었다. 핑크빛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푸른색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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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단미의 숨결이 고르고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린 호건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단미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한 뒤 침대 옆 리모컨을 집어 에어컨 온도를 약간 낮췄다.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호건은 단미 쪽으로 돌아누운 채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모습을 지켜봤다. 단미는 이불 속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잠결에 뒤척이며 천천히 호건 쪽으로 다가왔다.손끝이 따뜻한 곳에 닿자 익숙한 습관처럼 호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호건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단미가 덮고 있던 핑크 이불을 옆으로 걷어 내고, 말랑하게 몸을 붙여 오는 사람을 자기 이불 안으로 감쌌다.가늘고 부드러운 손은 위치를 기억하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호건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단미가 잠들 때마다 하던 버릇이었다.호건은 한 손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가까이서 깊이 잠든 단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익숙한 향기가 가까이 스며들자 보름 넘게 비어 있던 마음 한쪽이 비로소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단미는 오랜만에 푹 잤다.몽롱한 잠결에 손바닥 아래 감촉이 익숙하고 편안해서 손가락을 몇 번 움직였다. 단단한 근육이 잡히자 눈썹이 움찔했고, 단미는 갑자기 눈을 떴다.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남자의 목울대였다.단미의 눈이 커졌다. 달콤했던 잠이 단번에 달아났다.불길한 가능성을 떠올린 단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바로 위에 잠든 호건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숨을 삼킨 단미는 아래를 다시 확인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자기가 호건의 이불 속에 들어와 있었고, 몸까지 품에 꼭 붙어 있었다.‘이게 왜 이렇게 된 거야?’어젯밤 그렇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해 놓고, 아침에 눈 떠 보니 자기가 먼저 품 안에 들어와 있었다.‘진짜 창피해.’단미는 숨소리까지 죽인 채 몸 위의 이불을 살짝 걷었다. 호건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품에서 빠져나왔다.침대 끝까지 물러난 뒤에야 안도의 숨을 쉬고, 곧바로 내려와 욕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욕실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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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단미는 윤재성이 들고 있던 제수용 과일 상자를 받아 옆에 내려놓았다. “호건 씨는 아직 안 내려왔어요.”“콜록, 콜록...”뒤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윤재성이 돌아보니 윤정해가 가슴을 누른 채 기침하고 있었다.“단미야, 안에 물건이 많아서 답답한가 보다. 네 아버지 좀 밖에 모셔다 앉혀.”단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리 멀쩡하잖아요.”“얘도 참.”윤재성이 단미의 머리를 가볍게 톡 건드리며 낮게 말했다. “지 서방이 내려오라고 부르러 가는 길에 네 아버지도 좀 부축해 드려.”단미는 윤재성의 말에는 약했다. 윤재성이 직접 부탁하는데 굳이 거절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알았어요.” 대답한 단미는 손에 들었던 물건을 내려놓고 윤정해에게 가 팔을 받쳤다.본채 밖으로 나와 앞마당 돌의자에 앉혀 놓자마자 단미는 손을 놓고 돌아서려 했다.“단미야.”윤정해가 불렀다.단미는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바라봤다. “또 무슨 일이에요?”윤정해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아빠가 예전에... 너한테 많이 잘못했다는 거 알아. 네가 나에 대한 원망이 많은 것도 알고.”몇 년 전부터 단미가 점점 자신에게 차가워지는 건 윤정해도 느끼고 있었다.어릴 때 단미는 아버지 생일이면 손으로 작은 선물을 만들어 놓고 칭찬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 했다. 언제부터인지 생일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반대로 윤재성의 생일이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려와 직접 축하했다.이제는 친아버지를 향해 웃어 주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는 일조차 드물었다.전날 단미가 직접 ‘작은아버님이 친아버지보다 더 가깝다’라고 말했을 때 윤정해는 비로소 깨달았다.자기가 이제 와서 조금 다정하게 군다고 예전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딸이 어리지는 않았다.“내가 나경이한테 잘해 준 걸 네가 마음에 두는 것도 알아. 그런데 걔는 양친이 다 없고 의지할 데도 없어서 안쓰러웠어. 그래서 조금 더 챙기는 것뿐이야.”단미가 차갑게 웃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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