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끝이라고 믿었던 우리

작가:  무구최근 업데이트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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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미와 지호건이 결혼한 지 2년째 되던 어느 날. 단미는 우연히 호건의 여동생이 던진 질문을 듣게 된다. “새언니랑 채림 언니가 동시에 오빠 앞에 서 있어. 둘 중 한 사람만 아내로 골라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호건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채림.”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단미는 울며 남편에게 매달리는 대신,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이혼을 선택했다. 하지만 협의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날,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하필 호건에게 현장에서 임신 사실을 들키고 만다. 단미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의사는 현재 몸 상태로는 임신중지를 권하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자 호건은 두 가지 선택지를 내놓았다. 첫째, 이혼을 취소하고 다시 부부로 돌아간다. 둘째, 예정대로 이혼한다. 아이는 단미가 키우되, 출산 전까지는 호건과 한집에서 지낸다. 단미는 망설임 없이 두 번째를 골랐다. 그렇게 그녀는 전남편과 기묘한 이혼 후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함께 살기 시작한 뒤, 호건이 달라졌다. 일 년 내내 쉬는 날도 없이 회사에 매달리던 남자가 매일 정시에 귀가했다. 틈만 나면 단미의 곁을 맴돌았고, 뱃속 아이에게 좋다는 핑계로 온갖 정성을 단미에게 쏟아부었다. 마치 이혼하기 전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제야 하나씩 되돌리려는 사람처럼.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태어난 날. 아기를 품에 안은 단미를 호건이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오래도록 입을 맞춘 남자가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아기는 네 거야.” 잠시 후, 단미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대신 넌 내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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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화

“우리 이혼하자. 재산 정리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

“이혼한 뒤에는 우리 사이에 더는 어떤...”

침대 끝에 앉은 윤단미는 머릿속으로 준비한 말을 다시 되짚고 있었다.

그때 욕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단미는 몸을 굳혔다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을 바라봤다.

2초 뒤, 문이 완전히 열렸다.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허리에 달랑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걸어 나왔다.

은은한 침실 조명 아래,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반듯한 턱선을 타고 내려간 물방울은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 위에 맺혔다.

지호건이 점점 가까워지자 단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이나 다듬었던 말을 차근차근 꺼내려 했다.

“우리...”

단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호건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곧이어 큰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었다.

“읏...”

남은 말은 뜨거운 키스에 막혔다.

단미가 호건의 맨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호건은 허리를 단단히 감아쥐고 깊게 입을 맞추며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호건은 평소 차분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침대 위에서는 달랐다.

억눌러 둔 열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사람처럼 거침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단미를 침대 위로 눕힌 채 입술을 놓지 않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익숙하고 능숙하게 단미가 입은 잠옷의 허리끈을 풀었다.

“잠깐...”

단미는 겨우 입술을 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 할 말 있어.”

호건의 움직임이 멎었다. 뜨겁고 가쁜 숨이 가까운 거리에서 얽혔다.

단미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에는 욕망이 짙게 번져 있었다.

“끝나고 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어지자 호건은 다시 단미의 입술을 물었다.

단미가 웅얼거리며 꺼내려던 말까지 모조리 삼켜 버리듯 깊고 집요했다.

숨이 흐트러진 단미는 머릿속까지 희미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며 다시 말하려 했지만, 호건은 오히려 두 손목을 붙잡아 양옆으로 눌렀다.

이 순간 호건은 늘 말이 적었다. 대신 행동으로 밀어붙였다.

낮은 조명 아래, 침대 위에서 겹친 두 사람 주위로 뜨거운 숨결과 짙은 기류가 번졌다.

...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길었던 정사가 끝났다.

밤새 시달린 단미는 기운이 다 빠졌다.

평소라면 이대로 호건의 넓은 품에 파고들어 잠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준비했던 문장은 이미 엉망이 됐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나...”

단미는 호건의 가슴에 댄 손으로 밀어내려 했다. 격렬한 정사 뒤라 온몸에 힘이 풀려, 그 힘은 밀어내기보다는 가볍게 건드리는 수준에 가까웠다.

은은한 빛 아래 단미가 눈을 들었다.

눈에는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고, 촉촉한 눈동자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 흐릿하게 빛났다.

숨을 고르며 꺼내는 목소리마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고 달았다.

“나 하고 싶은데... 당신이랑...”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

그 말을 끝까지 꺼내기도 전에 호건이 몸을 뒤집어 다시 단미 위를 덮었다.

“오늘은 꽤 적극적이네?”

호건이 귓불을 가볍게 깨물며 낮게 웃었다. 잠긴 목소리에는 은근한 뜻과 함께, 기분이 좋아진 사람 특유의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아직 정신이 멍한 단미는 눈만 크게 떴다.

‘뭐라는 거야?’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키스가 귓가에서 뺨으로 옮겨왔다.

“나랑 또 하고 싶어?”

“그럼 해줄게.”

호건은 한 손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말이 끝나자마자 입술을 깊게 겹쳤다.

윤단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해준다는 건데?’

‘내가 원한 게 그거라고?’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거야?’

‘누가 이걸 원한다고 했어?’

“나... 그게 아니라...”

입술 사이로 겨우 흘러나온 설명은 호건의 열기에 다시 묻혔다. 뜨겁고 강한 기세가 단미를 빈틈없이 감쌌다.

단미는 오래 버티지 못한 채 다시 시작된 격렬한 밤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날 밤은 끝이 길었다.

...

다음 날, 단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

그녀는 온몸이 뻐근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예상대로 방 안에는 호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울시를 대표하는 대기업 JF그룹의 대표 호건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일 중독자였다.

결혼한 2년 동안 두 사람이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은 밤뿐인 날이 많았다. 낮에는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잦은 출장은 호건의 일상이었다.

단미는 협탁 위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보려다 호건이 남긴 메시지를 발견했다.

[오늘 홍주시로 출장 간다. 사흘 뒤에 돌아와.]

‘어쩐지 어젯밤 유난히 급하더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인 이유가 있었다.

단미는 생리 때문에 일주일 가까이 호건과 거리를 뒀던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오늘부터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호건은 출장을 앞둔 전날이면 유난히 집요했다. 며칠치 몫을 한꺼번에 미리 채워 두려는 사람처럼 단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단미는 더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길지 않았다. 익숙하게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

단미의 손끝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응.”

잠깐 정적이 흘렀다. 단미는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지금 통화 괜찮아? 할 말 있어.”

[무슨 일인데?]

“나...”

막 입을 열려던 때,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먼저 수영복 갈아입고 올게. 이따 수영장에서 봐!]

그 목소리를 듣자 머릿속이 울리는 듯했다. 단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주채림의 목소리였다.

‘그럼 주채림이랑 같이 홍주시에 간 거야?’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만난다고?’

‘출장이라며?’

전화기 너머가 몇 초간 조용해진 뒤, 호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금 처리할 일이 있어. 할 말 있으면 돌아가서 듣지. 먼저 끊을게.]

호건이 먼저 통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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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챕터
제1화
“우리 이혼하자. 재산 정리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이혼한 뒤에는 우리 사이에 더는 어떤...”침대 끝에 앉은 윤단미는 머릿속으로 준비한 말을 다시 되짚고 있었다. 그때 욕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단미는 몸을 굳혔다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을 바라봤다.2초 뒤, 문이 완전히 열렸다.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허리에 달랑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걸어 나왔다.은은한 침실 조명 아래,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반듯한 턱선을 타고 내려간 물방울은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 위에 맺혔다.지호건이 점점 가까워지자 단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이나 다듬었던 말을 차근차근 꺼내려 했다.“우리...”단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호건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곧이어 큰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었다.“읏...”남은 말은 뜨거운 키스에 막혔다. 단미가 호건의 맨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호건은 허리를 단단히 감아쥐고 깊게 입을 맞추며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호건은 평소 차분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침대 위에서는 달랐다. 억눌러 둔 열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사람처럼 거침없었다.지금도 그랬다. 단미를 침대 위로 눕힌 채 입술을 놓지 않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익숙하고 능숙하게 단미가 입은 잠옷의 허리끈을 풀었다.“잠깐...”단미는 겨우 입술을 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 할 말 있어.”호건의 움직임이 멎었다. 뜨겁고 가쁜 숨이 가까운 거리에서 얽혔다. 단미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에는 욕망이 짙게 번져 있었다.“끝나고 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어지자 호건은 다시 단미의 입술을 물었다.단미가 웅얼거리며 꺼내려던 말까지 모조리 삼켜 버리듯 깊고 집요했다.숨이 흐트러진 단미는 머릿속까지 희미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며 다시 말하려 했지만, 호건은 오히려 두 손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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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통화 종료음이 들렸지만 단미는 한동안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움직이지 못했다.한참 뒤에야 손을 내렸고, 생각은 일주일 전으로 돌아갔다.그날 단미는 호건과 함께 지씨 집안 본가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단미는 식사를 마친 뒤 2층 방으로 올라가 잠시 쉬었다.잠에서 깨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우연히 거실에서 나누는 호건과 여동생 지윤희, 어머니 김혜정의 대화를 듣게 됐다.“오빠, 딱 하나만 물어볼게.”윤희가 호건을 바라봤다. “새언니랑 채림 언니가 동시에 오빠 앞에 서 있어. 둘 중 한 사람만 아내로 골라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호건의 대답은 짧았다. “채림.”술장 뒤편에 서 있던 단미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가슴 한가운데가 얼음물에 잠긴 듯 서늘해졌다.“설마, 오빠가...”윤희가 말을 잇기도 전에 호건의 핸드폰이 울렸다.곧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그래. 지금 돌아가지.”“회사에 일이 생겼어. 난 먼저 갈게. 나중에 새언니한테 전해줘.”호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몇 걸음 가다가 멈춰 서서 윤희에게 덧붙였다. “아까 얘기한 건 새언니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 괜한 말 만들지 말고.”윤희가 코웃음을 쳤다. “진짜 최악이네.”어둑한 곳에 숨어 있던 단미는 구두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윤희의 한숨 섞인 말이 들렸다.“오빠가 채림 언니를 고르면, 새언니는 대체 뭐가 되는데? 남들 웃음거리라도 되라는 거야?”그 말은 날카로운 바늘처럼 단미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하... 새언니 너무 억울하겠다.”“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김혜정이 차갑게 말했다. “원래 호건이랑 결혼할 사람은 채림이었어. 단미는 운 좋게 빈자리에 들어온 거지. 우리 집 며느리가 된 것만으로도 과분한 줄 알아야지.”“네 할머니가 단미를 손주며느리로 찍지 않았으면, 단미 집안 정도로 우리 집과 혼사를 논할 수나 있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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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예의를 갖추지 않은 건조한 단미의 태도에 박미영이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어른한테 말버릇이...”“그만해!”윤정해가 낮은 목소리로 끊었다. “단미가 오랜만에 집에 왔잖아. 당신도 말 좀 줄여.”면박을 당한 박미영의 표정이 굳었다. 나경은 분위기를 살피다가 얼른 일어나 중간에 끼어들었다.“이모, 이모부 말씀이 맞아요. 언니도 오랜만에 왔는데 일단 밥부터 먹어요.”윤정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미 쪽으로 다가갔다. 목소리를 한결 누그러뜨렸다. “단미야, 밥 먹자.”두 사람이 식탁으로 향하는 모습을 본 나경은 박미영에게 바짝 붙어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이모, 이모부가 부탁할 일이 있으니까 저렇게 맞춰주는 거예요. 윤단미 같은 애랑 괜히 싸워서 뭐 해요?”그 말을 듣자 박미영의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두 사람도 뒤이어 식탁에 앉았다.가사도우미들이 내내 준비한 음식이 식탁 가득 올라왔다.“단미야, 배고프지? 이것도 좀 먹어.”윤정해가 유난히 다정한 얼굴로 고기 한 점을 단미의 그릇에 놓았다.나경도 단미에게 억지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오늘 음식은 이모부가 언니 온다고 주방에 특별히 부탁한 거래. 많이 먹어요.”단미는 식탁을 한 번 훑었다. 음식은 풍성했지만 단미가 좋아하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그중 두 가지는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 음식이었다.윤정해가 그릇에 놓아준 고기 역시 마찬가지였다.하나같이 단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기분이 축 가라앉아 있던 단미는 이제 와 부녀 사이가 다정한 척하는 연기에 장단을 맞출 마음이 없었다.젓가락도 들지 않고 윤정해를 바라봤다. “할 말 있다고 불렀잖아요. 무슨 일이에요?”딸의 눈에 선명한 거리감을 본 윤정해의 표정이 잠시 어색해졌다. 이내 부드러운 얼굴을 꾸몄다.“단미야, 지 서방이... 정말 며칠째 출장 중인 거냐?”단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출장인지 아닌지는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전화해 봤어. 며칠 동안 강울시에 없다고 하더라. 회사에도 두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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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단미가 경매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간은 저녁 8시였다.입장 확인 데스크로 걸어가며 가방을 뒤져서 초대장을 찾았다.초대장을 꺼내 고개를 든 단미는 입구의 레드카펫 앞에 검은 밴 한 대가 멈추는 것을 봤다. 주최 측 고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고, 차량이 멈추자 맨 앞의 남자가 직접 뒷문을 열었다.저 정도 의전이라면 차 안에 탄 사람이 평범한 손님은 아닐 것이다.단미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차 문이 열렸다. 반짝이는 검은 구두가 바닥을 밟았고,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남자가 내려 주최 측 인사와 악수했다.몸짓 하나하나에 높은 자리에 익숙한 사람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그 차분하고 반듯한 얼굴을 확인한 단미는 그대로 굳었다.‘지호건?’‘홍주시에 출장 간다더니?’‘왜 강울시에 있어?’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반대편 문이 열렸다. 붉은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꾸민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상대를 알아본 단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가로등 아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채림은 환한 미소를 띠고 차를 돌아 호건 곁으로 갔다. 단미는 초대장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주채림이랑 경매에 오려고 출장이라고 거짓말한 거야?’단미가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두 사람은 주최 측 임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름밤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지나갔다. 단미는 입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가로등 아래 단미의 외로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오래 머뭇거린 끝에 단미는 초대장을 옆 쓰레기통에 넣고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집으로 돌아온 단미는 안방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답답함이 가시지 않자 핸드폰을 집어 아무 영상이나 넘겨 보기 시작했다.생각을 딴 데로 돌려 환기하고 싶었다.영상을 오래 보니 눈이 아파 습관처럼 SNS 앱으로 넘어갔다. 별생각 없이 피드를 내렸다.그러다 한 게시물에서 손가락이 멈췄다.보름 전 한 파티에서 채림이 먼저 연락처와 SNS 계정을 물었다. 엮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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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알아.”단미가 바로잡듯 말했다. “우리 둘의 감정과는 상관없는, 집안 간 정략결혼이었지.”호건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혼하겠다고 하면 너희 부모님도 동의해?”“나는 내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성인이야.” 단미는 또박또박 말했다. “내 결혼은 내가 결정해.”호건은 입술을 다문 채 평소와 다른 단미를 살폈다. 눈에는 생각을 읽으려는 기색이 어렸다.“걱정하지 마. JF그룹 돈 노리는 거 아니야.” 단미가 말을 이었다. “재산 분할은 네가 정해. 난 이의 없어.”“결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호건은 가라앉은 눈으로 단미를 바라봤다. 경고인지 확인인지 모를 만큼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한번 끝내면 되돌릴 생각은 하지 마.”‘이혼하고 나서 내가 다시 매달릴까 봐 걱정하는 건가?’‘절대 후회하지 않아.’단미가 답하려던 때 호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하룻밤 동안만 다시 생각해.”호건이 단미를 한 번 바라봤다. “내일도 네 뜻이 바뀌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해 줄게.”단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한마디만 남겼다.“처리할 일이 있어. 오늘은 서재에서 잘 거야.”단미는 말문이 막혔다.‘봐. 또 저래. 할 말도 안 끝났는데 일부터 하러 가잖아.’어차피 늦은 밤에는 가정법원 업무도 끝난 뒤였다. 단미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좋아하는 여자랑 이틀이나 시간을 보냈으니 밀린 일이 많긴 하겠지.’‘실컷 바쁘게 일해라.’호건이 안방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단미에게는 편한 일이었다....다음 날 아침 7시, 단미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단미를 본 가사도우미 오정란이 조금 놀랐다. “사모님, 일찍 일어나셨네요.”“좋은 아침이에요, 이모님.”단미는 미소로 인사한 뒤 다이닝룸 쪽을 바라봤지만 호건은 보이지 않았다.“아직 서재에 있어요?”오정란이 답했다. “대표님은 오늘 새벽 6시에 나가셨어요. 지금쯤 회사에 계실 거예요.”“뭐라고요?”단미는 눈을 크게 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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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단미는 오후 내내 자기 아파트에서 생활용품을 정리했다. 오정란의 전화를 받고는 막 건물 밖으로 나와 근처 칼국숫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매일 늦게 들어오는 일 중독자인 호건이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와서 저녁을 먹을 줄 몰랐다.통화를 마친 단미는 곧장 루아힐로 돌아갔다.집에 도착하자 식탁 쪽에 앉아 있는 호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일부러 일찍 왔네.’‘이혼 얘기를 빨리 끝내고 싶은 모양이지.’단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정란이 음식을 내오려 하자 먼저 말했다. “이모님, 저희 이야기부터 할게요. 식사는 나중에 주세요.”오정란은 단미가 좋아하는 반찬을 들고 서 있다가 당황한 얼굴로 호건을 바라봤다.호건은 단미를 한 번 본 뒤 오정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리를 비우라는 뜻이었다.식탁에 둘만 남자 단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일 아침 가정법원에 갈까?”호건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윤성산업에 해율만 사업을 줬는데도 부족해?”단미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무슨 말이야?”‘이혼 이야기를 하는데 웬 프로젝트?’“친환경 에너지 사업은 윤성산업에 줄 수 없어. 대신 해율만 복합개발에서 손해 보지 않게 해 줄 수는 있어.”“그게 지금 무슨 뜻인데?”단미는 몇 초간 생각하다가 그의 오해를 알아챘다. “설마... 내가 윤성산업을 친환경 에너지 사업에 넣어 달라고 이혼으로 협박하는 줄 알았어?”호건은 대답하지 않은 채 단미를 바라보며 부정하지 않았다.단미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결혼할 때 나는 분명히 말했어. 윤성산업을 특별히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회사 일은 회사 원칙대로 하라고.”“윤성산업이 프로젝트를 따든 못 따든 나랑 상관없어.”단미는 숨을 고르고 다시 분명히 말했다. “내가 이혼하려는 이유는 더 이상 당신한테 시간도 마음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야.”호건은 단미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검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혼하고 나서 윤성산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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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아침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단미는 호건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혼 절차에 필요한 서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서류를 읽는 데에 정신이 팔린 채 걷다가 갑자기 단단한 가슴에 이마를 부딪쳤다.“아...”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들자 호건의 깊은 눈과 마주쳤다.“왜 말도 없이 멈춰?”“너...” 호건이 단미를 바라봤다. “진짜 이혼할 거야?”“잘 생각해. 이 문을 나가서 신청서를 내고 나면 우리 관계는...”“확실해.”단미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호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후회 안 해?”“안 해.”평소에는 한번 정한 건 되묻지 않는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확인을 반복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 이혼하고 나서 내가 당신한테 매달릴 일 없어. 계속 확인 안 해도 돼.”단미는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제 갈 수 있지?”호건은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 더 말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돌아서 문밖으로 향했다.차 옆에서 기다리던 민석은 두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겼다.전날 밤 호건에게서 이혼합의서를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두 귀를 의심했다.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게다가 호건은 며칠 전만 해도 아내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출장 일정까지 바꿔 돌아왔는데, 갑자기 이혼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잠시 생각하는 사이 두 사람이 가까이 오자 민석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대표님, 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단미가 예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실장님.”민석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단미는 감사 인사를 하고 먼저 탔고, 호건도 뒤이어 옆자리에 앉았다.차가 출발하자 조수석에 있던 민석이 서류 한 부를 뒤로 건넸다.“대표님, 요청하신 서류입니다.”호건은 첫 장의 ‘이혼합의서’라는 제목을 확인한 뒤 단미에게 내밀었다. “추가할 내용이 있는지 봐.”미리 합의서까지 준비했을 줄 몰랐던 단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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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단미는 호건의 문제 제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문제야?”[웨딩사진에는 나도 찍혀 있어.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없애 버려?]“그럼 어떡해?” 단미가 되물었다. “이혼할 건데 그걸 계속 걸어 둬? 나중에 당신이 재혼하면 새 아내가 볼 때 불편하겠잖아.”[너...]호건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단미도 바로 받아쳤다. “이상한 쪽은 당신이야.”[어쨌든 그렇게 한 건 잘못이야.]뜬금없이 혼이 나자 단미도 기분이 상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웨딩사진 속 호건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르자 다시 화가 났다.“사진에서 당신이 꼭 억지로 결혼식 끌려온 사람처럼 서 있었잖아. 그런 건 진작 버려야 했어.”[윤단미.]감정 변화가 적기로 유명한 남자인데, 오늘 목소리에는 분명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왜 큰소리야?”단미도 화냈다.‘재산 정리에는 한마디도 따지지 않던 사람인데... 웨딩사진 때문에 전화해서 싸우려는 건가?’‘대체 왜 저래? 일부러 시비 거는 건가?’‘재산을 너무 많이 주기로 한 게 갑자기 아까워진 거야?’‘그래도 그런 걸로 쪼잔하게 굴 사람은 아닌데.’단미가 통화 이유를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사이 호건은 다시 평소처럼 차분해졌다.[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끊지.]그 말만 남기고 호건이 전화를 끊었다.단미는 핸드폰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이유는 모르겠지만 혹시 몰라 단미는 바로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주얼리는 하나도 안 가져왔어. 드레스룸 안 주얼리 보관함에 전부 있으니까 확인해 봐.]웨딩사진은 돈이 되는 물건도 아니니 작은 문제였다. 하지만 호건이 사 준 주얼리들은 하나하나 가격이 상당했다. 나중에 그걸 가지고 나갔을 때 호건이 그것을 문제 삼으면 훨씬 번거로워질 수 있었다.잠깐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단미는 더 신경 쓰지 않고 열쇠와 핸드폰을 챙겨 늦은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깊은 밤.도심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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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단미의 스승 강성훈은 업계에서 복원계의 ‘신의 손’이라 불리는 최고 수준의 고미술품 복원가였다.2년 전 강성훈은 문화유산보존원의 특별 의뢰를 받아 전문 복원팀을 꾸렸다. 팀은 경운시의 하창동 유적지로 파견돼 출토 문화재와 오래된 유물을 복원하는 장기 사업을 맡았다.그 뒤로 단미는 강성훈을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다.강성훈은 작업에 들어가면 거기에 틀어박혀 세상일을 잊는 사람이었다. 핸드폰조차 작업실 밖에 두는 날이 많았다.그래서 전날 밤 전화를 받지 않자 단미는 강성훈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자신의 상황과 다시 팀에 합류하고 싶다는 뜻을 함께 적었다.적어도 며칠은 지나야 답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여린이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 정세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선배.”세연은 인사도 길게 하지 않고 물었다. [너 이혼한다며?]단미는 눈을 내리깔고 짧게 대답했다. “네.”[하창동 유적지 프로젝트 끝나기 전에 지호건 마음 얻을 거라고 자신하지 않았어?]단미는 할 말을 잃었다....하창동 유적지 복원 사업은 3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였다. 당시 결혼 때문에 참여를 포기했을 때 세연은 단미에게 물었다. “남자 마음 얻는 게 문화재 복원보다 쉬울 거라고 진짜 확신해?”그때 단미는 자신 있게 답했다. “선배들 작업 끝내고 돌아오기 전에 반드시 성공할 거야.”그리고 단비는 2년 만에 실패를 인정했다....세연이 물었다. [남편이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거야?]“아니.” 단미가 답했다. “내가 먼저 했어.”세연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지호건이 너 괴롭혔어?]“그 정도는 아니야. 다만...”단미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목소리를 안정시켰다. “결혼할 때는 그 사람의 예전 관계가 완전히 끝난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나 봐.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 사람 사이에 내가 계속 끼어 있을 이유는 없잖아.”세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혼이야 잘 끝내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건데...”단미는 스스로를 비웃듯 말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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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생각보다 너무 젊으셔서 놀랐어요. 아니, 잠깐만요. 제 스승님 은사님의 마지막 제자라면... 저도 막내 스승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죠?”“우리 분야는 그런 호칭까지 따지지 않아. 내 스승님, 그리고 경남 씨의 스승님과 팀원들이 하는 일은 보안 서약을 걸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그래서 밖에서는 일부러 직업이나 관계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고. 내 이름은 단미야.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돼.”경남은 눈앞의 단미를 다시 바라봤다. 그녀는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 맑게 정돈된 이목구비 때문에 오히려 자신보다 어려 보일 정도였다.“그래도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몇 살이세요?”단미가 답했다. “스물다섯.”“저보다 세 살 많으시네요. 그럼 ‘누나’라고 부를게요. 이름만 부르면 너무 무례하게 들리니까요.” 경남이 활짝 웃었다.단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경남은 기분 좋게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앞으로 한 달 동안 잘 부탁드릴게요, 단미 누나.”단미도 잔을 들어 가볍게 맞댔다. “잘해 보자.”...바로 다음 날, 단미는 경남을 낚시터로 불렀다.경남은 신이 나서 따라나섰지만, 막상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강가에 도착하자 표정이 굳어졌다.“누나, 한여름에 이렇게 햇볕이 강한데... 진짜 여기서 낚시해요?”“응.”낚싯대를 정리하려고 쪼그려 앉은 단미를 보며 경남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낚시 좋아하시면 제가 좋은 곳 알아요. 나무 그늘도 많고 시원해서 정말 편하고, 거기 가면 제가...”“난 여기가 좋은데?”단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챙이 넓은 모자를 경남의 머리에 씌워 줬다. 그러고는 낚싯대 하나를 손에 쥐여 주며 강가 쪽 바위를 가리켰다.“저기 앉아서 낚아.”경남은 햇볕에 달궈진 바위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누나, 차라리 여름에 하면 좋은 다른 걸 하러 가는 건 어때요? 여기 날씨랑 환경은 낚시하기에 너무 가혹한데요.”단미는 낚싯대를 들고 걸어가 두 바위 위에 천을 하나씩 깔았다. 그중 한 곳에 앉은 뒤 경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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