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 나는 죽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정은소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역시 조청아가 꾸민 일이었다.정은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사당 안으로 들어가 줄지어 놓인 차가운 위패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춘화는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돌아갔다. 정은소에게는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았다.사당 바닥에 깔린 청색 벽돌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부터 스며든 냉기는 뼛속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두 다리가 저리고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뱃속의 아이도 불안한 듯 연신 발길질을 했다. 마치 아무 이유 없이 내려진 이 벌에 함께 항의하는 듯했다.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인적이 끊긴 사당은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닫힌 문틈으로 스며든 차가운 바람이 음습한 공기를 휘저으며 정은소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속의 온기가 조금씩 빠져나갔다.얼마나 지났을까.끝까지 버티던 정은소의 몸이 마침내 한계에 이르렀다.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그녀는 그대로 차가운 벽돌 바닥 위로 쓰러졌다.*사당 밖에는 연락을 받고 찾아온 주강이 서 있었다.별채를 지키도록 붙여 둔 병사가 정은소가 사당에 들어간 지 한 시진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며,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고 보고한 것이다.주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돌려 앞마당의 서재로 서둘러 향했다.그러나 서재 문 앞에 도착하자 호위가 그를 가로막았다.“주 부장, 장군께서 직접 나오실 때까지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주강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회랑 아래로 물러나 초조하게 같은 자리를 몇 번이고 오갔다.그렇게 또 한 시진이 흘렀다.*정오가 되어서야 노부인은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입까지 헹군 뒤 춘화에게 물었다.“춘화야, 정은소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느냐?”춘화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그러고 있을 겁니다. 노부인의 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떠날 배짱은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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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노부인은 핏기 없이 질린 정은소의 얼굴과 쉴 새 없이 떨리는 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정은소가 몹시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뱃속에는 엄연히 고씨 가문의 핏줄이 들어 있었다.“되었다. 그만 일어나거라.”노부인은 여전히 냉담한 목소리로 손을 내저었다.“춘화야, 별채로 데려가 마른 옷으로 갈아입혀라. 아이까지 추위에 떨다 잘못되게 해서는 안 된다.”춘화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가 정은소를 일으켰다.정은소는 혼자 힘으로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몸을 거의 전부 춘화에게 기댄 채 겨우 발을 내디뎠지만, 두 다리는 이미 감각을 잃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발밑이 구름처럼 허공에 뜬 듯 휘청거렸다.사당을 나서자 한낮의 햇살이 몸 위로 쏟아졌다. 그러나 정은소는 조금의 온기도 느끼지 못했다. 물에 흠뻑 젖은 옷이 차갑게 살갗에 들러붙었고, 겨울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온몸에 다시금 격렬한 떨림이 일었다.춘화는 그런 정은소를 부축하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걸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었다.“정은소,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버티는 것이냐? 변방에서 총애를 받았으면 뭐 하겠느냐. 결국 모든 것은 타고난 신분이 결정하는 법이다.”춘화는 힘겹게 걷는 정은소를 곁눈질하며 냉소를 흘렸다.“네 신분으로 아이를 낳아 본들 지켜 줄 힘조차 없을 것이다. 결국 아이까지 너를 따라 고생하게 만들 뿐이지.”정은소의 걸음이 순간 멎었다.그러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는 도리어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할 만큼 단단한 결의가 떠올랐다.“제 아이는 반드시 제가 지킬 겁니다.”춘화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은소를 바라보다가 이내 소리 내어 웃었다.“네가 무슨 수로?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우습기도 하지.”정은소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무거운 발을 한 걸음씩 내디뎌 끝내 별채까지 돌아갔다.대문을 밀어 열자 회랑 아래에 서 있는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한낮의 창백한 햇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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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별채에서는 춘화가 떠난 뒤, 고명원이 방문을 닫고 오늘 있었던 일을 자세히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춘화가 정 낭자를 사당에는 왜 데려간 것이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은소를 바라보았다.“설마 사당에서 벌로 무릎을 꿇다가 정신을 잃은 것이오?”정은소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닦아 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나직이 대답했다.“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고 태의께서는 더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고명원은 뜻밖의 대답에 잠시 굳었다. 이내 얼굴을 무겁게 가라앉히며 말했다.“정 낭자, 비록 형님의 통방이라고는 하나 뱃속에 품은 아이는 형님의 첫아이오. 이토록 부당한 일을 혼자 참을 필요는 없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형님께서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이오.”과연 그럴까?정은소는 이제 고명원처럼 순진하게 고시언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고명원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아무 일도 없습니다.”춘화의 말이 옳다는 것을 정은소도 알고 있었다.자신에게는 제 몸 하나 지킬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이를 지키는 길은 선택할 수 있었다.이번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사당에 가 무릎을 꿇었으니, 노부인과 조청아는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터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다시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아이만 무사하다면 자신이 조금 고생하는 것쯤은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고명원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정은소의 고집스러운 성정을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일은 아무리 캐물어도 들을 수 없을 터였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편히 쉬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러고는 약상자를 들고 별채를 떠났다.하지만 곧장 장군부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고명원은 고시언의 처소로 향했다.주강은 여전히 서재 밖을 지키고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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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고 태의.”정은소는 뜻밖이라는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옅게 미소 지었다.“어쩐 일로 또 오셨습니까? 열은 이미 내렸습니다.”고명원은 햇살 아래 더욱 희게 보이는 정은소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며칠 전보다 안색은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눈동자에 머물던 빛은 전보다 한층 흐려져 있었다. 아무리 담담하게 웃어도 걷히지 않는 근심이 엷은 안개처럼 두 눈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상태를 다시 살피러 왔소.”고명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정은소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평소처럼 맥을 짚어 몸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뱃속의 아이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정은소는 손목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으로 소매 끝을 무심코 매만지는 모습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사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한 가지 일을 줄곧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사리 결심이 서지 않았다.그런데 오늘 고명원이 다시 찾아왔다.정은소는 문득 이것이 어쩌면 하늘이 자신에게 보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태의.”정은소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반응을 살피는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묻어났다.“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고명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 보시오.”“집에 다녀오고 싶습니다.”정은소의 목소리는 몹시 가벼웠다.“어머니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시고, 동생은 아직 어립니다. 헌데 도성으로 돌아온 뒤 가족을 만난 것은 단 한 번뿐이라…….”고명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그렇다면 형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소? 지금은 몸이 무거우니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 형님께서 마차와 사람을 마련해 주실 것이오.”그러나 정은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장군께서는 요즘 혼례 준비로 바쁘십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노부인께서 아시면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실지도 모릅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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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고 태의…… 아니, 공자.”정은소는 휘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고명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정말 고맙습니다. 헌데…… 제게는 이 은혜를 갚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군요.”고명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소매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며 가볍게 대답했다.“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고명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했지만, 그 모습을 보는 정은소의 가슴에는 오히려 죄책감이 밀려들었다.지금은 그저 집에 한번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었다.그러나 훗날 자신은 정말로 장군부에서 달아날 생각이었다.만약 자신이 끝내 도망친다면 오늘의 일이 고명원에게까지 화를 불러오지는 않을까? 장군부 사람들이 고명원이 자신을 달아나게 도왔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다.정은소는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거듭 비틀었다. 한참을 망설인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공자, 미안합니다. 오늘 일이 장군의 귀에 들어가면…… 공자까지 곤란해질지도 몰라요.”고명원은 책에서 시선을 들어 정은소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한결같이 온화했다.“정 낭자는 지나치게 조심스럽소. 그저 병든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다녀오는 것뿐이오. 그게 떳떳하지 못한 일은 아니니, 형님께서 알게 된다고 해도 나무랄 이유는 없소.”정은소는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말을 삼켰다.고명원은 알지 못했다.정은소의 진짜 목적은 단순히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고명원은 그녀가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내 손에 든 책을 펼치고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조용히 내버려 두려는 듯했다.마차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고, 바퀴가 청석길을 구르는 규칙적인 소리만 마차 안을 잔잔하게 채웠다.그러던 중 정은소의 시선이 우연히 고명원이 읽고 있는 책에 머물렀다. 표지에는 몇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중 ‘상한’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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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마차 문이 거칠게 열리자 눈부신 햇살이 한순간에 쏟아져 들어왔다.정은소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역광 속에 선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마차 밖에는 주강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그 뒤로는 고시언이 검고 커다란 준마에 올라타고 있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의 눈길은 날 선 칼날처럼 곧장 마차 안을 파고들었다.고시언의 시선이 정은소의 어깨를 붙든 고명원의 손에 머물렀다. 뒤이어 한 권의 의서를 사이에 두고 바싹 붙어 앉은 두 사람의 모습으로 옮겨 가자, 그의 눈빛이 한층 어둡게 가라앉았다.순간 골목 안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정은소의 심장은 북이라도 울리듯 세차게 뛰었다.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힘껏 움켜쥔 채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형님.”고명원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목소리는 비교적 침착했다.그러나 고시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은 줄곧 정은소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부저로 돌아가거라.”얼음처럼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마부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즉시 대답한 뒤 말머리를 돌렸다.고명원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우선 정은소가 자리에 안정적으로 앉도록 부축했다. 그러고는 마차에서 내려 고시언이 탄 말 앞까지 걸어갔다.“형님.”그는 말 위의 고시언을 올려다보며 차분히 설명했다.“정 낭자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접니다. 정 낭자가 편찮으신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고, 마침 저도 오늘은 쉬는 날이라 가는 길에 데려다주려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고시언은 말 위에서 고명원을 내려다보았다. 담담한 어조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집에 가고 싶었다면 내게 말하면 될 일이었다.”그의 눈매가 서늘하게 좁혀졌다.“외간 남자인 네가 형의 통방을 데리고 부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녕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느냐?”고명원의 얼굴빛이 미세하게 변했다. 무언가 반박하려 했지만, 고시언이 손을 들어 말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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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정말 제 목숨 귀한 줄 모르는 여자였다.잠시 뒤, 일행은 모두 전청으로 자리를 옮겼다.노부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칼날처럼 매서운 시선을 정은소에게 내리꽂았다.“무릎을 꿇어라.”정은소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한 손으로 불러온 배를 받치며 천천히 무릎을 굽히려던 순간, 뱃속의 아이가 세차게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할머니.”고명원이 다급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정 낭자는 지금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도 정신을 잃었고, 이제야 겨우 태기가 안정되었는데 또 이처럼 무리하게 하면 자칫…….”“자칫 어찌 된다는 것이냐?”노부인이 싸늘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내가 아직 너를 나무라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먼저 나서서 감싸는구나?”고명원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런데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줄곧 침묵하던 고시언이 먼저 말했다.“할머니, 그만두십시오.”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감히 거역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노부인의 곁에 서 있던 조청아도 곧바로 팔을 부드럽게 붙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거들었다.“할머니, 정 낭자는 아이를 품은 몸이잖아요.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지만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우선 뱃속의 아이부터 생각해 주세요.”노부인은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너희가 하나같이 이런 식으로 감싸고도니 저 아이가 갈수록 겁도 없이 구는 게 아니냐.”하지만 끝내 정은소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그 뜻을 알아차린 조청아는 곧 시녀를 돌아보며 일렀다.“정 낭자에게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렴.”조청아는 사려 깊고 너그러운 태도로 노부인이 명을 거둘 명분을 만들어 주는 한편,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춘화는 둥근 걸상 하나를 가져와 아랫자리에 놓았다.정은소는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노부인과 아가씨께 감사드립니다.”그러고 나서야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은 흐트러짐 없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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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정은소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입술에는 희미하게 핏기가 가셔 있었다.“아가씨의 말씀이 옳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돌아오는 내내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해 둔 터였다.“제가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뿐이라 다른 일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습니다.”노부인이 찻잔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찻잔과 받침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깊이 생각하지 못했다고?”노부인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네 배 속에는 고씨 가문의 핏줄이 들어 있다. 저토록 배가 부른 몸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부저를 빠져나가 놓고, 고작 생각이 짧았다는 말로 넘어가려는 것이냐? 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네가 감당할 수 있었겠느냐?”정은소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참으로 은혜를 모르는구나.”노부인은 말을 이을수록 더욱 노기를 띠었다.“부저에서 언제 너를 박대한 적이 있느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이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하게 해 준 적이 없거늘.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감히 집안의 체면을 깎는 짓까지 저질러?”정은소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모두 제 잘못입니다. 잘못을 깨달았으니 노부인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곁에서 듣고 있던 고명원의 미간이 갈수록 깊이 찌푸려졌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섰다.“할머니, 정 낭자의 태기가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최근 며칠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이제 출산도 머지않았으니 가족이 그리워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노부인은 고개를 돌려 고명원을 바라보았다. 그를 훑는 눈길에는 의심과 탐색이 섞여 있었다.“명원아, 너는 사사건건 저 아이를 두둔하는구나.”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네가 태의라 환자만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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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정 낭자는 형님의 아이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머니와 동생의 얼굴을 보러 집에 가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바쁜 형님께 폐를 끼칠까 봐 말하지 못하고 제게 도움을 청한 것이 대체 무슨 잘못입니까?”고명원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격해졌다.고시언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짧은 웃음을 흘렸다.“명원아.”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헤아리기 어려운 의미가 배어 있었다.“너는 정은소를 참으로 각별히 생각하는구나.”그 말을 남긴 고시언은 몸을 돌려 회랑을 따라 걸어갔다.고명원은 그 자리에 선 채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 답답한 기운이 꽉 막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결국 그는 빠르게 뒤따라가 고시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굳은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묻어났다.“형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고시언은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고명원을 바라보았다.고명원도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정 낭자는 제 환자입니다. 저는 그저 정 낭자의 몸을 잘 돌보고,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게 도우려 했을 뿐입니다.”그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어 말했다.“그뿐입니다. 제가 다른 마음이라도 품었다고 생각하신다면 돌려 말하지 마시고 똑똑히 말씀해 주십시오.”회랑 아래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처마 밑을 스치며 두 사람의 옷자락을 흔들었다.고시언은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고명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되었다.”그는 손을 뻗어 고명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목소리에는 동생을 대하는 형 특유의 거리낌 없는 태도가 묻어났다.“나는 너를 믿는다.”고명원이 뜻밖이라는 듯 잠시 굳었다.“방금 한 말에 다른 뜻은 없었다. 말 그대로 네가 정은소를 세심히 보살피고 있다는 뜻이다.”고시언은 담담한 눈길로 고명원을 바라보았다.“좋은 일이지. 나도 흡족하게 생각한다.”고명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시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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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고명원의 모습이 회랑 끝으로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고시언은 그 자리에 선 채 아무 말이 없었다.주강은 조심스럽게 제 주군의 눈치를 살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겨우 용기를 내어 빠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정 낭자가 참으로 가엾습니다.”고시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장군, 노부인께서는 정 낭자에게 지나치게 엄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정 낭자는…….”말을 잇던 주강은 고시언의 눈빛이 한층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남은 말을 황급히 삼키고 고개를 푹 숙였다.더는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이윽고 고시언이 주강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목소리는 어느새 평소처럼 냉담하게 돌아와 있었다.“네가 처리할 일이 하나 있다.”주강은 곧바로 귀를 기울였다.고시언은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어 몇 가지를 지시했다. 거리가 가까운 주강 외에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였다.모든 당부를 마친 고시언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주강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감추지 못한 반가움이 떠올라 있었다.“장군, 이 일을 정 낭자가 알게 된다면 분명…….”고시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을 끊었다.“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 정은소에게도 마찬가지다.”주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장군, 어째서입니까? 분명 정 낭자를 위해…….”“시키는 대로 하거라.”고시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의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주강은 남은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든 뒤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고시언은 홀로 회랑 아래에 조금 더 머물렀다. 이윽고 차가운 바람을 등진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별채로 돌아온 정은소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했다.그녀는 하루 종일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창밖의 햇살이 기울고 방 안에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멍하니 같은 곳만 바라보았다.해 질 무렵,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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