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 나는 죽었다

그해 봄, 나는 죽었다

By:  송이나경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goodnovel4goodnovel
Not enough ratings
30Chapters
3views
Read
Add to library

Share:  

Report
Overview
Catalog
SCAN CODE TO READ ON APP

회임 여덟 달째, 정은소는 고시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를 제 귀로 똑똑히 듣고 말았다. “아이만 남기고 어미는 없애거라.” 그녀는 고작 잠자리 시중을 드는 몸종이었고, 그는 나라를 지키는 대장군이었다. 변방에서 그가 건넨 온기와 다정한 눈길을 사랑이라 믿었던 건, 결국 정은소 혼자뿐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철저히 깨달았다. 자신은 고시언에게 아이를 낳아 줄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음이 완전히 식어 버린 정은소는 남몰래 모아 둔 돈으로 장사를 시작하고, 변방에서 익힌 의술을 밑천 삼아 떠날 날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리고 고시언이 정실을 맞아들이는 혼례 날, 정은소는 그의 사촌동생이자 태의인 고명원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위장한 뒤 아이를 데리고 강남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곳에서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의원을 열고 의술을 펼치며,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단단히 일구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흐른 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시언은 천하를 샅샅이 뒤져 마침내 정은소를 찾아냈다. 고시언은 달아날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정은소를 벽 앞으로 몰아붙였다. 오랜 세월을 헤매다 겨우 찾아낸 사람을 눈앞에 둔 그의 눈은 핏발이 선 채 붉게 젖어 있었다. “짐과 함께 돌아가자.” 그러나 정은소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의 맥을 짚더니 담담하게 진단을 내렸다. “감기입니다. 약 세 첩 지어 드리지요. 진료비는 은자 두 냥입니다.” “걱정 말거라. 이번에는 외상으로 달아 두지 않을 테니.” 고시언은 그녀의 손에 옥새를 쥐여 주며 낮게 말했다. “짐도, 이 강산도…… 이제 모두 네 것이다.”

View More

Chapter 1

제1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장군부의 측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은소는 차가운 돌계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손은 나무 대야에 담근 채로 손안의 옷가지를 한 번, 또 한 번 힘주어 문질렀다.

대야의 물은 진작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열 손가락은 추위에 새빨갛게 얼어 있었고, 부르튼 마디마다 가느다란 상처가 여러 갈래로 터져 있었다. 찬물이 갈라진 살갗에 스며들 때마다 뼛속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정은소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심히 같은 동작만 되풀이했다.

회임한 지도 어느덧 여덟 달.

불러 오른 배의 무게 탓에 허리와 등이 끊어질 듯 쑤셨고, 퉁퉁 부은 두 다리는 오래 쪼그리고 있을수록 감각이 흐려졌다. 그러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자 정은소는 한 손으로 돌계단을 짚고 자세를 바꾸려 했다.

그 순간, 뱃속의 아이가 불안한 듯 세차게 발길질했다.

“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정은소의 몸이 움츠러들며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왜 이리 느려터진 것이냐! 옷 몇 벌 빠는 데 대체 얼마나 걸리는 게냐?”

곁에서는 어멈 하나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고, 바닥에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뱉은 껍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멈은 정은소의 불러 오른 배를 힐끗 바라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기껏해야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몸종 주제에,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느냐. 빨래 몇 벌 하면서 어찌나 꾸물거리는지.”

정은소는 젖은 옷가지만 내려다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시언이 개선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정은소가 머무는 별채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저 바쁜 탓이라 생각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장군이니 밀린 군무와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거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그 한 달 동안 정은소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들이 권세의 향방에 따라 얼마나 손쉽게 태도를 바꾸는지, 그리고 신분이 낮은 사람의 목숨이 이 장군부에서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아…….”

뱃속이 다시금 쥐어짜이듯 아파 왔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쥔 옷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잔뜩 늘어나 형체가 망가져 있었다.

정은소는 옷을 대야에 내려놓고 돌계단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래 쪼그려 앉아 있던 두 다리는 피가 통하지 않는 듯 저리고 무거웠다. 손을 놓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아, 그녀는 계단 모서리를 꽉 움켜쥔 채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멈.”

정은소는 가까스로 몸을 바로 세운 뒤,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는 어멈을 바라보았다.

“요 며칠 계속 배가 아픕니다. 번거롭겠지만 사람을 시켜 안태약 한 첩만 지어 오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멈은 입안에 남은 껍질을 퉤 뱉어 내고는 정은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윽고 주름진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랐다.

“안태약? 지금 장군부가 얼마나 바쁜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냐? 노부인께서 장군의 혼사를 준비하시느라 온 집안이 분주하다. 시종들이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는데, 누가 한가하게 네 약이나 지으러 다녀오겠느냐?”

정은소는 추위에 핏기를 잃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헌데 배가 너무 아파서…….”

“아프면 뭐 어쩔 것이냐?”

어멈은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툭툭 털었다.

“너도 이제는 네 처지를 똑똑히 알아야지. 장군과 조 소저의 혼례가 코앞이다. 곧 어엿한 정실부인이 들어오실 텐데, 몸종 하나가 아이를 무사히 낳든 말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느냐?”

말을 마친 어멈은 코웃음을 치더니 허리를 흔들며 뜰을 빠져나갔다.

정은소는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갈라진 상처 위로 손톱이 파고들었지만, 찬물에 얼어붙은 손끝은 통증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저런 모진 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만은 달랐다. 이 아이는 정은소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고시언의 핏줄이자 고씨 가문의 후손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외면한다 해도, 설마 고시언이 제 아이마저 모른 척할까.

정은소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시언의 처소를 향해 한 걸음씩 천천히 움직였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는 제 것이 아닌 듯 무거웠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부터 무릎까지 둔중한 통증이 번졌고, 불러 오른 배가 아래로 쏠리는 듯했다. 회랑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더는 걷지 못하고 벽을 짚은 채 한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회랑 밖에서는 메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딪혀 가느다란 마찰음을 냈다. 정은소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발을 떼려 했다.

그때 앞쪽 모퉁이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부인과 고시언이었다.

“시언아, 청아와의 혼례 날짜도 정해졌으니 이제 그 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노부인의 목소리에는 이견을 허락하지 않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시언의 낮은 목소리는 평온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별채에 머물고 있는 아이 말이다. 회임한 그 몸종.”

노부인은 마치 처리하기 번거로운 물건 하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가 태어난 뒤까지 제 어미 곁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래도 네 첫아이인데, 몸종이 낳아 길렀다는 소문이 돌면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대로 청아에게 보내 기르게 하고, 청아의 자식으로 올리도록 하거라.”

정은소의 발이 바닥에 못 박힌 듯 굳었다.

회랑을 휘돌던 겨울바람이 옷자락 안으로 스며들었으나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몸 안을 흐르던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어, 손끝과 발끝까지 싸늘하게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노부인은 잠시 뜸을 들인 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아이는…… 적당히 처리하거라. 그래야 청아의 마음에도 앙금이 남지 않을 것 아니냐.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다.”

뒤이어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는 네가 줄곧 변방에 있었고, 청아와의 혼담도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 내 마음이 조급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고 말았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후회스럽구나.”

그 말을 끝으로 회랑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은소는 터져 나오려는 숨소리를 막으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몸을 지탱하려 차가운 벽에 어깨를 기댔지만, 무릎에서는 자꾸만 힘이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다렸다.

고시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단 한마디라도 자신과 아이를 위해 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저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면 충분했다. 당장 결정할 수 없으니 시간을 달라는 한마디만 해 준다면, 아직은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고시언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마치 정은소와 뱃속의 아이가 아니라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의 생사를 논하는 듯했다.

“할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가볍게 허공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정은소에게는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되어 가슴 한가운데를 깊숙이 꿰뚫었다.

노부인은 고시언의 대답이 흡족한 듯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마지막 당부를 덧붙였다.

“다만 이 일은 아직 청아에게 알리지 말거라. 예전에 상서 댁에서 혼사를 차일피일 미루었으니, 이번에는 저들도 조금 애가 타게 두어야지.”

“할머니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돌아서서, 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까지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두 다리는 돌처럼 굳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은소는 무너지지 않으려 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손톱이 거친 벽면을 긁으며 깊은 자국을 남겼고, 부서진 가루가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어미의 절망을 느끼기라도 한 듯 뱃속의 아이가 세차게 몸을 뒤틀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아랫배에서 시작해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정은소는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허리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추웠다.

그녀는 장군부의 겨울바람이 이토록 차갑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정은소는 바깥채를 쓸고 닦는 허드렛일을 맡은 시녀에 불과했다. 어느 날 노부인을 모시는 주 어멈이 찾아와 변방으로 가 소장군의 시중을 들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정은소의 어머니는 중병으로 앓아누운 상태였다. 약값은 나날이 불어났고, 동생의 학비는 석 달이나 밀려 있었다. 아무리 끼니를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하루하루를 버티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주 어멈은 변방으로 가기만 하면 노부인이 정착금으로 은자 백 냥을 내릴 것이라 했다. 만일 장군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면 이백 냥을 더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은자 백 냥.

누군가에게는 그저 넉넉한 돈일지 몰라도 정은소에게는 가족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돈이었다. 어머니의 약을 사고, 정은호의 밀린 학비를 내고도 한동안 굶지 않을 수 있는 돈이었다.

정은소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와 함께 변방으로 떠난 시녀는 두 명이 더 있었다.

하나는 노부인의 처소에서 일하던 큰시녀 춘화였다. 춘화는 용모가 단정하고 말씨와 몸가짐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래 고시언의 곁에서 시중들던 연아로,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어려울 만큼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서 정은소는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애초에 고시언의 눈에 들리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약값을 마련할 은자 백 냥은 이미 어머니의 손에 들어갔고, 동생의 밀린 학비도 치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변방에 도착한 뒤 아무리 고된 일을 시킨다 해도 기꺼이 감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시언의 눈에 든 사람은 춘화도, 연아도 아닌 정은소였다.

그와 함께한 변방의 나날은 정은소가 감히 꿈꿔 본 적조차 없을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드넓은 들판을 달릴 때면 고시언은 그녀의 뒤에 앉아 직접 고삐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밤이면 그녀의 손을 잡고 붓을 쥐는 법부터 글자를 쓰는 법까지 하나하나 일러 주었다.

차가운 모래바람이 군막을 뒤흔드는 밤에는 정은소를 품에 안은 채 잠들었다. 심지어 군의 곁을 드나들며 약초와 침술을 익힐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까지 했다.

그 다정함은 척박한 변방에서 피어난 유일한 봄과도 같았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자 정은소는 도성으로 돌아와 태교를 시작했다.

그때의 그녀는 참으로 어리석고 순진했다. 마침내 평생을 맡겨도 좋을 사람을 만났다고 믿었다. 변방의 춥고 긴 밤을 함께 견뎌 낸 만큼 두 사람의 마음도 단단히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전, 승리를 거두고 장군부로 돌아온 고시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정은소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단 한 번도 별채를 찾지 않았다. 안부를 묻지도, 뱃속의 아이가 무탈한지 살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정은소는 그저 바쁜 탓이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으며 스스로를 속여 왔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변방에서 그가 베풀었던 온정도, 다정하게 내려다보던 눈빛도,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보냈던 밤도 결국 거울 속에 비친 달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에 불과했다.

고시언은 장군이었고, 정은소는 그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몸종이었다.

머나먼 변방에서 그에게는 외로움을 달래 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마침 정은소가 그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정은소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 믿었다. 마침내 자신에게도 기댈 곳이 생겼다고 여겼고, 뱃속의 아이는 두 사람이 함께 기다려 온 소중한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시언의 눈에, 그리고 이 장군부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그저 아이를 낳기 위해 쓰이다가 버려질 도구에 불과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마지막 쓸모마저 다할 터였다. 더구나 정실부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될 테니,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없애려 하고 있었다.

정은소는 벽을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손바닥에는 손톱이 파고든 붉은 자국이 선명했으나, 이제 그런 통증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한 걸음씩 되짚어 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듯했다. 배를 쥐어짜는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지만, 이제는 아픈 곳이 몸인지 가슴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목 놓아 울며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별채로 돌아온 정은소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았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끊기자 방 안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팔로 불러 오른 배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네 어미가…….”

말을 잇기도 전에 목이 메었다. 정은소는 한참 뒤에야 갈라진 목소리로 뱃속의 아이에게 속삭였다.

“너무 어리석었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애써 참아 왔던 눈물이 끝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지난 한 달 동안 견뎌야 했던 온갖 냉대와 설움도 고시언이 내뱉은 그 한 마디만큼 그녀를 깊이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

한편 회랑에서는 노부인이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겨울바람만 휑하니 지나가는 회랑에 고시언과 부장 주강만 남아 있었다. 변방에서 두 사람을 오래 지켜보았던 주강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끝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 정말로…… 정 낭자를 없애실 생각입니까?”

그로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변방에서 고시언이 정은소를 얼마나 아끼고 살뜰히 보살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고시언은 주강을 한 차례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었다.

이제는 정은소를 한번 찾아가 보아야 할 때였다.

*

정은소는 차가운 바닥에 앉은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새 꺼지지 않던 등잔불이 가느다랗게 흔들리다 마침내 사그라들고, 창호지 너머로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번져 왔다.

이튿날 아침, 정은소는 동경 앞에 앉아 초췌해진 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과 핏기 없이 메마른 입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낯선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만큼은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던 슬픔이 조금씩 걷히고, 그 자리에는 차갑고 또렷한 이성이 자리 잡았다. 이윽고 정은소의 눈빛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이 서렸다.

그때, 고요한 뜰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묵직하고 익숙한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문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잠시 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차가운 아침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문턱을 넘어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고시언이었다.

Expand
Next Chapter
Download

Latest chapter

More Chapters

To Readers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No Comments
30 Chapters
제1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장군부의 측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은소는 차가운 돌계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손은 나무 대야에 담근 채로 손안의 옷가지를 한 번, 또 한 번 힘주어 문질렀다.대야의 물은 진작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열 손가락은 추위에 새빨갛게 얼어 있었고, 부르튼 마디마다 가느다란 상처가 여러 갈래로 터져 있었다. 찬물이 갈라진 살갗에 스며들 때마다 뼛속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정은소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심히 같은 동작만 되풀이했다.회임한 지도 어느덧 여덟 달.불러 오른 배의 무게 탓에 허리와 등이 끊어질 듯 쑤셨고, 퉁퉁 부은 두 다리는 오래 쪼그리고 있을수록 감각이 흐려졌다. 그러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자 정은소는 한 손으로 돌계단을 짚고 자세를 바꾸려 했다.그 순간, 뱃속의 아이가 불안한 듯 세차게 발길질했다.“윽…….”갑작스러운 통증에 정은소의 몸이 움츠러들며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왜 이리 느려터진 것이냐! 옷 몇 벌 빠는 데 대체 얼마나 걸리는 게냐?”곁에서는 어멈 하나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고, 바닥에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뱉은 껍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멈은 정은소의 불러 오른 배를 힐끗 바라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기껏해야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몸종 주제에,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느냐. 빨래 몇 벌 하면서 어찌나 꾸물거리는지.”정은소는 젖은 옷가지만 내려다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시언이 개선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정은소가 머무는 별채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그저 바쁜 탓이라 생각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장군이니 밀린 군무와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거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그러나 그 한 달 동안 정은소는 뼈저리게 깨달았다.사람들이 권세의 향방에 따라 얼마나 손쉽게 태도를 바꾸는지, 그리고 신분이 낮은
Read more
제2화
정은소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매서운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깊은 겨울 아침이었다. 창호를 비집고 스며든 희끄무레한 햇살 아래, 고시언은 검은 비단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백옥대를 두르고 있었다. 꼿꼿이 선 모습은 갓 칼집에서 뽑아 든 검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그가 문 앞을 막아선 것만으로도 비좁은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듯했다.변방에 있을 때보다 피부는 조금 희어졌지만, 반듯한 미간에는 전보다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눈 밑에 희미하게 번진 푸른 기색은 그가 오랫동안 편히 잠들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했다.고시언의 묵직한 시선이 정은소에게로 향했다. 그 눈길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무거웠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은소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러온 배가 움직임을 더디게 했으나,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장군을 뵙습니다.”목소리는 잔잔했고 몸가짐은 반듯했다. 지나치리만큼 차분한 모습이라 어디에서도 흠을 찾아낼 수 없었다.고시언의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갔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으로 미처 감추지 못한 놀라움이 한순간 스쳤다.그가 개선해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꼬박 한 달이었다. 그러나 정은소를 찾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별채로 오는 동안 그는 정은소가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보자마자 달려와 다리를 붙들고 어째서 이제야 찾아왔느냐며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었다. 혹은 눈시울을 붉힌 채 변방에서 나눈 정을 벌써 잊었느냐고 원망하거나, 그동안 겪은 설움을 늘어놓으며 명분을 달라고 매달릴지도 모른다고 여겼다.그런데 막상 마주한 정은소는 예상 밖으로 얌전했고, 기이할 만큼 평온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시언의 눈빛에 이내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그는 정은소가 권세가에게 빌붙으려는 여인들처럼 한때의 총애만 믿고 방자해지거나, 자신의 신분을 잊을까 줄곧 염려해 왔다. 그러나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Read more
제3화
조청아의 등장은 초라하고 낡은 방 안의 풍경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그녀는 금실로 무늬를 놓은 석류빛 겉옷을 입고 있었다. 옷깃과 소맷부리에는 눈처럼 흰 토끼털이 풍성하게 둘렸고, 잘록한 허리에는 벽옥으로 만든 패옥 장식이 드리워져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옥 장식이 맑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온몸에서 귀하고 우아한 기품이 흘러넘쳤다.그 뒤로는 시녀 넷과 어멈 둘이 줄지어 들어왔다. 가뜩이나 비좁은 방 안이 삽시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들이 몰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은은한 향분 냄새가 퍼졌다.침상에서 막 일어난 정은소는 해진 푸른 무명 겉옷만 급히 걸치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마구 흩어져 있었고, 맨발에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였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무거운 몸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아가씨를 뵙습니다.”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방 안은 어둑하고 서늘했다. 맨발로 딛고 선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배 때문에 다리에 가해지는 무게도 평소보다 훨씬 컸다.하지만 조청아는 정은소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곧바로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정은소의 얼굴에서 시작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듯, 한 치도 빠짐없이 샅샅이 훑어보는 눈길이었다.흐릿한 빛 아래 선 정은소는 여러 번 빨아 빛이 바랜 푸른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수척했지만, 타고난 이목구비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맑고 단정한 눈매에 콧날은 곧았고, 도톰한 입술은 고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분을 한 점 바르지 않았음에도 은은한 매력이 배어 있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여덟 달이 넘도록 아이를 품은 몸이었지만, 크게 불러온 배를 제외하면 다른 곳은 그리 부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에 부드러운 모성이 배어 있어, 진흙 속에서도 희고 깨끗하게 피어난 연꽃을 보는 듯했다.조청아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이 가슴속에서 스멀스
Read more
제4화
피였다.연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너…… 너, 연기하지 마! 난 힘도 주지 않았어!”정은소는 이미 대답할 수조차 없을 만큼 심한 통증에 휩싸여 있었다.뱃속의 아이를 누군가 거칠게 잡아당기는 듯했다. 한차례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밀려드는 격통에 숨이 턱턱 막혔다.“아이를…… 살려 줘…….”정은소는 남은 힘을 모아 겨우 말을 내뱉었다.연아는 당황한 얼굴로 문밖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바닥에 쓰러진 정은소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밖으로 달아났다.“내 잘못 아니야! 네가 혼자 넘어진 거야!”쾅!별채의 대문이 무겁게 닫혔다.정은소는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치맛자락 아래로 흘러나오는 피는 점점 많아졌고, 배를 찢어 내는 듯한 통증도 갈수록 심해졌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아이…….”그녀의 목소리는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끝까지 참아 왔던 눈물이 마침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내 아이…… 안 돼…… 제발…….”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별채는 장군부에서도 외진 곳에 있어 평소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도움을 청해도 희미한 신음은 닫힌 문밖으로조차 제대로 새어 나가지 못했다.정은소의 의식이 조금씩 흐려졌다. 눈앞으로 드리운 어둠도 갈수록 짙어졌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손톱이 닳도록 바닥을 긁었다. 손끝에서 밀려오는 통증으로라도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아야 했다.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의식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아이마저 잃게 될 것이다.정은소는 이를 악물고 팔꿈치로 바닥을 짚었다. 무거운 몸을 끌며 문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만삭에 가까운 배 때문에 고작 한 치를 움직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팔에 힘을 줄 때마다 배 속에서 격통이 치밀었고, 이마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식은땀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검붉은
Read more
제5화
밤이 깊어지자, 고요하기만 하던 별채가 갑자기 분주해졌다.침상에 누워 있던 정은소는 별채의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을 들었다. 곧 여러 사람의 어지러운 발소리와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새 숯과 솜이불, 먹을거리와 약재가 들어왔다.고명원은 떠나기 전, 고시언이 앞으로 별채에도 좀 더 마음을 쓰겠다고 약속했다며 일러 주었다.그러나 정은소의 마음에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 물건들은 자신을 위해 보내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 뱃속의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자신에게 닥칠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바깥방에서 연아와 어멈이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 방에 정은소가 누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 말투였다.“어머, 귀한 물건이 이렇게나 많네. 횡재했네, 횡재했어.”연아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거리낌이 없었다.“어떤 사람은 정말 낯짝도 두껍죠. 뱃속에 아이 하나 들었다고 위세를 부리고, 아픈 척하면서 동정이나 사려 드니 말입니다.”연아는 음흉하게 두어 번 웃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안쪽에 있는 정은소가 똑똑히 들으라는 듯했다.“헌데 제가 듣기로는 그 아이도 태어나자마자 조 아가씨께 보내 기르게 한다던데. 그때가 되면 누구는 어떻게 살아가려나 모르겠네요?”어멈도 비웃음을 흘렸다.“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을지부터 두고 봐야지. 노부인과 장군께서 그 아이를 정말로 소중히 여기셨다면, 오늘 일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셨겠어?”정은소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손톱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도 내지 않았다.잠시 뒤 연아가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약사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발 가장자리에는 약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고, 약은 이미 김이 식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자, 어서 마셔.”연아는 침상 머리맡에 약사발을 툭 내려놓았다.“나중에 아이에게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괜히
Read more
제6화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명원이 별채를 찾아왔다.정은소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아 안태약을 마시고 있었다. 고시언이 보내 준 어멈들은 손놀림이 조금 굼뜨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다.따뜻한 약물은 혀가 저릴 만큼 썼다. 정은소가 단숨에 약을 삼키고 사발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문 앞에 나타난 고명원이 눈에 들어왔다.“고 태의께서 오셨군요.”그녀는 약사발을 내려놓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어제보다는 안색이 조금 나아져 있었다. 적어도 창백하던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두 눈 아래에 드리운 짙은 그늘은 여전했다.고명원은 먼저 정은소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진맥을 마친 뒤에야 소매 안에서 남빛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물건은 모두 팔았소. 은자는 여기에 들어있소.”“벌써요?”정은소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보니 안에는 은자 한 덩이와 잘게 나뉜 은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합하면 대략 스무 냥쯤 되었다.예상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정은소는 잠시 굳어 있다가 고명원을 올려다보았다.“이렇게나 많이 받았습니까?”자신이 맡긴 물건들의 품질이 아주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후하게 값을 쳐도 열다섯 냥이나 열여섯 냥을 받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고명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설명했다.“옷감이 소주와 항주에서 온 상품이더군. 정 낭자가 시세를 잘 몰랐던 모양이오. 옥팔찌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품질이 좋아서 제법 괜찮은 값을 받았소.”정은소는 고명원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하지만 고명원은 그녀가 캐묻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염려하지 말고 받으시오. 모두 정 낭자의 물건을 팔아 받은 은자이니.”물론 사실이 아니었다.그 옷감은 좋은 값을 받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고, 옥팔찌의 품질도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 고명원이 남몰래 자신의 은자 여덟 냥을 보태 스무 냥을 맞춘 것이었다.더 많이 보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
Read more
제7화
고명원은 약상자를 들고 연아가 안내한 처소에 도착했지만, 고시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뜰 안은 고요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 하나가 그를 발견하자 서둘러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안내했다.조청아는 안쪽 방의 침상에 누워 비단 이불을 덮고 있었다. 얼굴에 다소 핏기가 없기는 했지만 정신은 맑아 보였다. 그녀는 고명원이 들어오자 힘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고 태의께서 오셨군요. 괜히 번거롭게 발걸음하시게 했네요.”고명원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침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약상자에서 진맥용 받침을 꺼냈다.조청아는 그 위에 손목을 올려놓으면서도 줄곧 고명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별 뜻 없이 묻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고 태의께서 요 며칠 별채를 자주 찾으시는 것 같던데, 정 낭자의 몸은 좀 어떻던가요?”고명원은 손끝으로 맥을 짚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태기는 안정되었습니다. 다만 당분간은 조용히 몸조리해야 해야 합니다. 다시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되거든요.”“그렇다니 다행이네요.”조청아는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저도 줄곧 정 낭자와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장군의 핏줄이니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는 안 되잖아요.”고명원은 대꾸하지 않고 진맥에만 집중했다.그러나 조청아는 이야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정 낭자가 어제 또 쓰러졌다면서요? 별채의 어멈도 참 너무했어요. 아이를 밴 사람에게 어찌 빨래를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자는 반드시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장군께도 말해 두었어요.”고명원은 진맥을 마치고 손을 거두었다.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소저의 맥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찬 기운을 조금 받은 것뿐이니 몸을 덥히는 약을 두 첩 정도 드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별채의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테니, 소저께서는 우선 몸을 돌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빈틈을 찾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조청아가 꺼낸 이야기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정은소의 상태에 관해서도
Read more
제8화
정은소가 떠나자 안쪽 방에는 다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조청아는 고개를 숙인 채 비단 이불 위에 번진 물기를 천천히 닦아 냈다. 젖은 자리를 문지르는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도 잔뜩 주눅이 든 듯 가냘팠다.“방금 일은 정말 정 낭자의 잘못이 아니에요…….”“알고 있소.”고시언은 침상 곁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뜻밖의 대답에 조청아의 손길이 잠깐 멎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청아,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사사로운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채, 마치 군영의 공무를 논하는 듯 건조했다.“정은소가 품고 있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오.”그 말에 조청아의 눈이 순간 환하게 빛났다. 고시언이 먼저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장차 그의 정실이 될 자신이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통방이 먼저 아이를 가졌다. 어느 여인이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도 조청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애초에 혼례를 계속 미뤄 온 쪽은 조씨 가문이었다. 더욱이 지금의 고시언이 지닌 지위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를 얻기 위해 그 정도 인내를 감수할 가치는 충분했다.조청아는 속내를 감춘 채 더없이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말해 봐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을게요.”고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조청아에게 등을 돌리고 선 그의 훤칠한 몸 위로 창밖의 희푸른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곧게 뻗은 어깨와 차가운 옆얼굴이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잠시 뒤,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아이가 태어나면, 그대가 원할 경우 그대 곁에 두고 기르게 하겠소.”“그게 무슨 말이에요?”조청아의 목소리에 감추지 못한 기쁨이 묻어났다.“당연히 원하죠. 당신의 아이는 곧 내 아이이기도 하니까요.”그러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상서부의 귀한 여식인 자
Read more
제9화
정은소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장군께서 오셨군요.”“앉거라. 앞으로는 굳이 일일이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시언은 방 안으로 들어와 탁자 곁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정은소의 창백한 얼굴 위를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정은소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눈을 내리깐 채 말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고시언은 그런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소저와 상의한 일이 하나 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네가 품은 아이가 태어나면 조 소저의 곁으로 보내 기르게 할 생각이다. 조 소저는 장군부의 정실이 될 사람이니, 아이가 그 이름 아래 들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정은소의 가슴속으로 쓰디쓴 감정이 번졌다. 소매 끝을 붙잡은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고시언의 말에는 어떤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청아와 모든 일을 상의해 결정한 뒤, 그저 자신에게 결과를 알려 주러 온 것이었다.제 배로 낳을 아이인데도 정은소에게 허락된 것은 마지막에 통보받는 일뿐이었다.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고시언의 입을 통해 다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보이지 않는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조금씩 옥죄는 듯했다. 숨을 들이마시려 할수록 가슴이 막혀 왔다.“정은소?”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고시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정은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희미한 촛불 아래 드러난 고시언의 차가운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명을 내린 뒤 부하가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이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정은소는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인 끝에 힘겹게 물었다.“만약……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고시언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원하지 않는다고?”그의 목소리에는 뜻밖이라는 기색이 묻어났다. 정은소가 감히 그런 대답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잠시 뒤 고시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말투에는 희미한 불쾌감
Read more
제10화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청아는 노부인의 처소를 찾았다.그녀는 단아한 연자줏빛 겉옷을 입고 머리에는 백옥으로 만든 목련 비녀 하나만을 꽂았다.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는 수수한 차림이 안 그래도 가녀린 얼굴을 더욱 애처롭게 보이게 했다.“노부인께 문안드립니다.”조청아는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모으며 사뿐히 몸을 낮추었다. 인사를 올리는 목소리에는 아직 기운을 회복하지 못한 듯한 연약함이 묻어났다.아침 식사를 하던 노부인은 그 모습을 보자 곧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직접 다가가 조청아의 팔을 붙들고 일으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는데 어찌 벌써부터 여기까지 온 게냐? 어서 앉거라. 아침은 먹었느냐?”“예, 먹었습니다.”조청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노부인, 오늘 찾아온 것은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장군부에서 신세를 많이 졌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노부인은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침묵했다.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도 한결 옅어졌다.“돌아간다고? 물에 빠진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몸도 다 회복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서 무엇 하려고? 며칠 더 머물면서 부저에서 해 주는 보양식도 챙겨 먹거라.”조청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내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노부인의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헌데…… 더는 이곳에 머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말이냐?”조청아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인 채 손에 든 수건을 초조하게 비틀었다.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어제 정 낭자가 저를 보러 왔습니다. 굳이 제게 물을 따라 주겠다고 해서 말렸지만 듣지 않더군요. 그러다 물을 쏟았는데, 하필 그 모습을 시언이 보았습니다…….”그녀는 불안한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상한 것 같았습니다.”조청아가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눈가
Read more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