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해 봄, 나는 죽었다: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장군부의 측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은소는 차가운 돌계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손은 나무 대야에 담근 채로 손안의 옷가지를 한 번, 또 한 번 힘주어 문질렀다.대야의 물은 진작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열 손가락은 추위에 새빨갛게 얼어 있었고, 부르튼 마디마다 가느다란 상처가 여러 갈래로 터져 있었다. 찬물이 갈라진 살갗에 스며들 때마다 뼛속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정은소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심히 같은 동작만 되풀이했다.회임한 지도 어느덧 여덟 달.불러 오른 배의 무게 탓에 허리와 등이 끊어질 듯 쑤셨고, 퉁퉁 부은 두 다리는 오래 쪼그리고 있을수록 감각이 흐려졌다. 그러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리자 정은소는 한 손으로 돌계단을 짚고 자세를 바꾸려 했다.그 순간, 뱃속의 아이가 불안한 듯 세차게 발길질했다.“윽…….”갑작스러운 통증에 정은소의 몸이 움츠러들며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왜 이리 느려터진 것이냐! 옷 몇 벌 빠는 데 대체 얼마나 걸리는 게냐?”곁에서는 어멈 하나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고, 바닥에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뱉은 껍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멈은 정은소의 불러 오른 배를 힐끗 바라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기껏해야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몸종 주제에,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느냐. 빨래 몇 벌 하면서 어찌나 꾸물거리는지.”정은소는 젖은 옷가지만 내려다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시언이 개선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정은소가 머무는 별채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그저 바쁜 탓이라 생각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장군이니 밀린 군무와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거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그러나 그 한 달 동안 정은소는 뼈저리게 깨달았다.사람들이 권세의 향방에 따라 얼마나 손쉽게 태도를 바꾸는지, 그리고 신분이 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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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정은소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다 그대로 굳어 버렸다.매서운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깊은 겨울 아침이었다. 창호를 비집고 스며든 희끄무레한 햇살 아래, 고시언은 검은 비단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백옥대를 두르고 있었다. 꼿꼿이 선 모습은 갓 칼집에서 뽑아 든 검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그가 문 앞을 막아선 것만으로도 비좁은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듯했다.변방에 있을 때보다 피부는 조금 희어졌지만, 반듯한 미간에는 전보다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눈 밑에 희미하게 번진 푸른 기색은 그가 오랫동안 편히 잠들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했다.고시언의 묵직한 시선이 정은소에게로 향했다. 그 눈길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무거웠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은소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러온 배가 움직임을 더디게 했으나,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장군을 뵙습니다.”목소리는 잔잔했고 몸가짐은 반듯했다. 지나치리만큼 차분한 모습이라 어디에서도 흠을 찾아낼 수 없었다.고시언의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갔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으로 미처 감추지 못한 놀라움이 한순간 스쳤다.그가 개선해 도성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꼬박 한 달이었다. 그러나 정은소를 찾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별채로 오는 동안 그는 정은소가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보자마자 달려와 다리를 붙들고 어째서 이제야 찾아왔느냐며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었다. 혹은 눈시울을 붉힌 채 변방에서 나눈 정을 벌써 잊었느냐고 원망하거나, 그동안 겪은 설움을 늘어놓으며 명분을 달라고 매달릴지도 모른다고 여겼다.그런데 막상 마주한 정은소는 예상 밖으로 얌전했고, 기이할 만큼 평온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시언의 눈빛에 이내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그는 정은소가 권세가에게 빌붙으려는 여인들처럼 한때의 총애만 믿고 방자해지거나, 자신의 신분을 잊을까 줄곧 염려해 왔다. 그러나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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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조청아의 등장은 초라하고 낡은 방 안의 풍경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그녀는 금실로 무늬를 놓은 석류빛 겉옷을 입고 있었다. 옷깃과 소맷부리에는 눈처럼 흰 토끼털이 풍성하게 둘렸고, 잘록한 허리에는 벽옥으로 만든 패옥 장식이 드리워져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옥 장식이 맑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온몸에서 귀하고 우아한 기품이 흘러넘쳤다.그 뒤로는 시녀 넷과 어멈 둘이 줄지어 들어왔다. 가뜩이나 비좁은 방 안이 삽시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들이 몰고 들어온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은은한 향분 냄새가 퍼졌다.침상에서 막 일어난 정은소는 해진 푸른 무명 겉옷만 급히 걸치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마구 흩어져 있었고, 맨발에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였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무거운 몸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아가씨를 뵙습니다.”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방 안은 어둑하고 서늘했다. 맨발로 딛고 선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배 때문에 다리에 가해지는 무게도 평소보다 훨씬 컸다.하지만 조청아는 정은소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곧바로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정은소의 얼굴에서 시작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듯, 한 치도 빠짐없이 샅샅이 훑어보는 눈길이었다.흐릿한 빛 아래 선 정은소는 여러 번 빨아 빛이 바랜 푸른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수척했지만, 타고난 이목구비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맑고 단정한 눈매에 콧날은 곧았고, 도톰한 입술은 고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분을 한 점 바르지 않았음에도 은은한 매력이 배어 있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여덟 달이 넘도록 아이를 품은 몸이었지만, 크게 불러온 배를 제외하면 다른 곳은 그리 부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에 부드러운 모성이 배어 있어, 진흙 속에서도 희고 깨끗하게 피어난 연꽃을 보는 듯했다.조청아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이 가슴속에서 스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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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피였다.연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너…… 너, 연기하지 마! 난 힘도 주지 않았어!”정은소는 이미 대답할 수조차 없을 만큼 심한 통증에 휩싸여 있었다.뱃속의 아이를 누군가 거칠게 잡아당기는 듯했다. 한차례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밀려드는 격통에 숨이 턱턱 막혔다.“아이를…… 살려 줘…….”정은소는 남은 힘을 모아 겨우 말을 내뱉었다.연아는 당황한 얼굴로 문밖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바닥에 쓰러진 정은소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밖으로 달아났다.“내 잘못 아니야! 네가 혼자 넘어진 거야!”쾅!별채의 대문이 무겁게 닫혔다.정은소는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치맛자락 아래로 흘러나오는 피는 점점 많아졌고, 배를 찢어 내는 듯한 통증도 갈수록 심해졌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아이…….”그녀의 목소리는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끝까지 참아 왔던 눈물이 마침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내 아이…… 안 돼…… 제발…….”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별채는 장군부에서도 외진 곳에 있어 평소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도움을 청해도 희미한 신음은 닫힌 문밖으로조차 제대로 새어 나가지 못했다.정은소의 의식이 조금씩 흐려졌다. 눈앞으로 드리운 어둠도 갈수록 짙어졌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손톱이 닳도록 바닥을 긁었다. 손끝에서 밀려오는 통증으로라도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아야 했다.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의식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아이마저 잃게 될 것이다.정은소는 이를 악물고 팔꿈치로 바닥을 짚었다. 무거운 몸을 끌며 문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만삭에 가까운 배 때문에 고작 한 치를 움직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팔에 힘을 줄 때마다 배 속에서 격통이 치밀었고, 이마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식은땀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검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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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밤이 깊어지자, 고요하기만 하던 별채가 갑자기 분주해졌다.침상에 누워 있던 정은소는 별채의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을 들었다. 곧 여러 사람의 어지러운 발소리와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새 숯과 솜이불, 먹을거리와 약재가 들어왔다.고명원은 떠나기 전, 고시언이 앞으로 별채에도 좀 더 마음을 쓰겠다고 약속했다며 일러 주었다.그러나 정은소의 마음에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 물건들은 자신을 위해 보내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 뱃속의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자신에게 닥칠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바깥방에서 연아와 어멈이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 방에 정은소가 누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 말투였다.“어머, 귀한 물건이 이렇게나 많네. 횡재했네, 횡재했어.”연아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거리낌이 없었다.“어떤 사람은 정말 낯짝도 두껍죠. 뱃속에 아이 하나 들었다고 위세를 부리고, 아픈 척하면서 동정이나 사려 드니 말입니다.”연아는 음흉하게 두어 번 웃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안쪽에 있는 정은소가 똑똑히 들으라는 듯했다.“헌데 제가 듣기로는 그 아이도 태어나자마자 조 아가씨께 보내 기르게 한다던데. 그때가 되면 누구는 어떻게 살아가려나 모르겠네요?”어멈도 비웃음을 흘렸다.“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을지부터 두고 봐야지. 노부인과 장군께서 그 아이를 정말로 소중히 여기셨다면, 오늘 일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셨겠어?”정은소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손톱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도 내지 않았다.잠시 뒤 연아가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약사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발 가장자리에는 약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고, 약은 이미 김이 식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자, 어서 마셔.”연아는 침상 머리맡에 약사발을 툭 내려놓았다.“나중에 아이에게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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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명원이 별채를 찾아왔다.정은소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아 안태약을 마시고 있었다. 고시언이 보내 준 어멈들은 손놀림이 조금 굼뜨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다.따뜻한 약물은 혀가 저릴 만큼 썼다. 정은소가 단숨에 약을 삼키고 사발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문 앞에 나타난 고명원이 눈에 들어왔다.“고 태의께서 오셨군요.”그녀는 약사발을 내려놓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어제보다는 안색이 조금 나아져 있었다. 적어도 창백하던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두 눈 아래에 드리운 짙은 그늘은 여전했다.고명원은 먼저 정은소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진맥을 마친 뒤에야 소매 안에서 남빛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물건은 모두 팔았소. 은자는 여기에 들어있소.”“벌써요?”정은소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보니 안에는 은자 한 덩이와 잘게 나뉜 은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합하면 대략 스무 냥쯤 되었다.예상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정은소는 잠시 굳어 있다가 고명원을 올려다보았다.“이렇게나 많이 받았습니까?”자신이 맡긴 물건들의 품질이 아주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후하게 값을 쳐도 열다섯 냥이나 열여섯 냥을 받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고명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설명했다.“옷감이 소주와 항주에서 온 상품이더군. 정 낭자가 시세를 잘 몰랐던 모양이오. 옥팔찌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품질이 좋아서 제법 괜찮은 값을 받았소.”정은소는 고명원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하지만 고명원은 그녀가 캐묻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염려하지 말고 받으시오. 모두 정 낭자의 물건을 팔아 받은 은자이니.”물론 사실이 아니었다.그 옷감은 좋은 값을 받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고, 옥팔찌의 품질도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 고명원이 남몰래 자신의 은자 여덟 냥을 보태 스무 냥을 맞춘 것이었다.더 많이 보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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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고명원은 약상자를 들고 연아가 안내한 처소에 도착했지만, 고시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뜰 안은 고요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 하나가 그를 발견하자 서둘러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안내했다.조청아는 안쪽 방의 침상에 누워 비단 이불을 덮고 있었다. 얼굴에 다소 핏기가 없기는 했지만 정신은 맑아 보였다. 그녀는 고명원이 들어오자 힘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고 태의께서 오셨군요. 괜히 번거롭게 발걸음하시게 했네요.”고명원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침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약상자에서 진맥용 받침을 꺼냈다.조청아는 그 위에 손목을 올려놓으면서도 줄곧 고명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별 뜻 없이 묻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고 태의께서 요 며칠 별채를 자주 찾으시는 것 같던데, 정 낭자의 몸은 좀 어떻던가요?”고명원은 손끝으로 맥을 짚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태기는 안정되었습니다. 다만 당분간은 조용히 몸조리해야 해야 합니다. 다시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되거든요.”“그렇다니 다행이네요.”조청아는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저도 줄곧 정 낭자와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장군의 핏줄이니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는 안 되잖아요.”고명원은 대꾸하지 않고 진맥에만 집중했다.그러나 조청아는 이야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정 낭자가 어제 또 쓰러졌다면서요? 별채의 어멈도 참 너무했어요. 아이를 밴 사람에게 어찌 빨래를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자는 반드시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장군께도 말해 두었어요.”고명원은 진맥을 마치고 손을 거두었다.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소저의 맥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찬 기운을 조금 받은 것뿐이니 몸을 덥히는 약을 두 첩 정도 드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별채의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테니, 소저께서는 우선 몸을 돌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빈틈을 찾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조청아가 꺼낸 이야기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정은소의 상태에 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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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정은소가 떠나자 안쪽 방에는 다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조청아는 고개를 숙인 채 비단 이불 위에 번진 물기를 천천히 닦아 냈다. 젖은 자리를 문지르는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도 잔뜩 주눅이 든 듯 가냘팠다.“방금 일은 정말 정 낭자의 잘못이 아니에요…….”“알고 있소.”고시언은 침상 곁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뜻밖의 대답에 조청아의 손길이 잠깐 멎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청아,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사사로운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채, 마치 군영의 공무를 논하는 듯 건조했다.“정은소가 품고 있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오.”그 말에 조청아의 눈이 순간 환하게 빛났다. 고시언이 먼저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장차 그의 정실이 될 자신이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통방이 먼저 아이를 가졌다. 어느 여인이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도 조청아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애초에 혼례를 계속 미뤄 온 쪽은 조씨 가문이었다. 더욱이 지금의 고시언이 지닌 지위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를 얻기 위해 그 정도 인내를 감수할 가치는 충분했다.조청아는 속내를 감춘 채 더없이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말해 봐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을게요.”고시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조청아에게 등을 돌리고 선 그의 훤칠한 몸 위로 창밖의 희푸른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곧게 뻗은 어깨와 차가운 옆얼굴이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잠시 뒤,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아이가 태어나면, 그대가 원할 경우 그대 곁에 두고 기르게 하겠소.”“그게 무슨 말이에요?”조청아의 목소리에 감추지 못한 기쁨이 묻어났다.“당연히 원하죠. 당신의 아이는 곧 내 아이이기도 하니까요.”그러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상서부의 귀한 여식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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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정은소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장군께서 오셨군요.”“앉거라. 앞으로는 굳이 일일이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시언은 방 안으로 들어와 탁자 곁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정은소의 창백한 얼굴 위를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정은소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눈을 내리깐 채 말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고시언은 그런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소저와 상의한 일이 하나 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네가 품은 아이가 태어나면 조 소저의 곁으로 보내 기르게 할 생각이다. 조 소저는 장군부의 정실이 될 사람이니, 아이가 그 이름 아래 들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정은소의 가슴속으로 쓰디쓴 감정이 번졌다. 소매 끝을 붙잡은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고시언의 말에는 어떤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청아와 모든 일을 상의해 결정한 뒤, 그저 자신에게 결과를 알려 주러 온 것이었다.제 배로 낳을 아이인데도 정은소에게 허락된 것은 마지막에 통보받는 일뿐이었다.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고시언의 입을 통해 다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보이지 않는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조금씩 옥죄는 듯했다. 숨을 들이마시려 할수록 가슴이 막혀 왔다.“정은소?”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고시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정은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희미한 촛불 아래 드러난 고시언의 차가운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명을 내린 뒤 부하가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이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정은소는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인 끝에 힘겹게 물었다.“만약……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고시언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원하지 않는다고?”그의 목소리에는 뜻밖이라는 기색이 묻어났다. 정은소가 감히 그런 대답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잠시 뒤 고시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말투에는 희미한 불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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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청아는 노부인의 처소를 찾았다.그녀는 단아한 연자줏빛 겉옷을 입고 머리에는 백옥으로 만든 목련 비녀 하나만을 꽂았다.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는 수수한 차림이 안 그래도 가녀린 얼굴을 더욱 애처롭게 보이게 했다.“노부인께 문안드립니다.”조청아는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모으며 사뿐히 몸을 낮추었다. 인사를 올리는 목소리에는 아직 기운을 회복하지 못한 듯한 연약함이 묻어났다.아침 식사를 하던 노부인은 그 모습을 보자 곧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직접 다가가 조청아의 팔을 붙들고 일으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는데 어찌 벌써부터 여기까지 온 게냐? 어서 앉거라. 아침은 먹었느냐?”“예, 먹었습니다.”조청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노부인, 오늘 찾아온 것은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장군부에서 신세를 많이 졌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노부인은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침묵했다.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도 한결 옅어졌다.“돌아간다고? 물에 빠진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몸도 다 회복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서 무엇 하려고? 며칠 더 머물면서 부저에서 해 주는 보양식도 챙겨 먹거라.”조청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내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노부인의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헌데…… 더는 이곳에 머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노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말이냐?”조청아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인 채 손에 든 수건을 초조하게 비틀었다.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어제 정 낭자가 저를 보러 왔습니다. 굳이 제게 물을 따라 주겠다고 해서 말렸지만 듣지 않더군요. 그러다 물을 쏟았는데, 하필 그 모습을 시언이 보았습니다…….”그녀는 불안한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상한 것 같았습니다.”조청아가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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