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온진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개인의 식성까지 고려해 맞춤 식단을 제공하다니 이 병원의 서비스는 정말이지 완벽 그 자체였다.식사가 한창일 무렵, 유다미가 병실을 찾았다. 아까 주소를 물어볼 때 온진아는 혹여나 그녀가 힘들까 봐 오지 말라고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구미란은 유다미를 보자마자 무척 반가워했다. 온진아와 유다미의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어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딸의 친구를 무척 살갑게 대했다.두 사람이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유다미가 기태우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 하자 온진아는 서둘러 핑계를 대며 그녀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밖으로 나온 뒤, 온진아는 어머니의 병환과 자신의 퇴사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역시 예상대로 유다미는 듣자마자 펄쩍 뛰며 온진아를 나무랐다.“너 진짜 왜 그래?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숨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하는 거야? 내가 해결 못 하면 우리 부모님이라도 계시잖아!”“너는 네 일로도 부모님께 폐 끼치기 싫어하잖아.”“그게 같니? 내 일은 어떻게든 내가 해결한다 쳐도 네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유다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툭툭 내뱉는 성격이지만 그 투박한 말 속에는 언제나 온진아를 향한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자기가 생각해도 면목이 없어진 온진아는 절친이 쏟아내는 잔소리를 그저 묵묵히 받아낼 뿐이었다.사실 처음엔 유다미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녀 역시 부모 도움 없이 고군분투 중이니 사는 게 녹록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유다미의 말대로 일이 꼬였을 때 부모님께 손을 벌리게 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두 사람 다 부성시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혹여 기태우가 유다미네 가족까지 건드릴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유다미는 몇 마디 쏟아내고는 금세 기분이 풀린 듯했다. 그녀의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그래서 앞으로 어쩔 거야? 어머니께는 계속 숨길 셈이야?”“일단은 그래. 엄마 몸 좀 추스르신 뒤에 말씀드려야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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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기천 그룹 내에 온진아의 고정석은 없었다. 하지만 유동 자리가 넉넉했기에 빈자리를 골라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이미 사직서를 냈지만, 아직 퇴사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해야 할 업무는 산더미였다. 강진 프로젝트팀은 그녀가 직접 꾸리고 키워온 팀이었다. 팀원들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온진아는 자신이 떠나기 전, 그들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힘을 보태고 싶었다.오전 근무시간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기태우에게 몇 시에 볼지 묻는 카톡을 한 통 보냈을 뿐 나머지는 전부 업무에 쏟아부었다.정오가 되자 동료들이 하나둘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온진아는 카톡을 확인했지만 기태우에게선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덮고 점심을 해결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로비 앞, 멀지 않은 곳에서 기태우의 모습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의 뒤로는 기유영과 몇몇 무리가 함께였다.전부 낯익은 얼굴들, 과거 온진아를 수없이 따돌리고 괴롭혔던 기태우의 친구들이었다. 그녀는 저들에 대한 감정이 바닥을 기었다.굳이 엮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려는 찰나, 누군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온진아?”온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 들은 척하려 했다. 하지만 채 자리를 피하기도 전에 그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진짜 너네? 잘못 본 줄 알았잖아. 왜 이렇게 살쪘냐?”말을 건 사람은 차선재였다. 어릴 때부터 기태우와 어울려 다니던 녀석으로 가구업체를 운영하는 집안 자제였다. 기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그들의 서클에 끼어 있는 놈이었다.예전 같았으면 기태우의 눈에 들기 위해 그 주변 인물들까지 비위를 맞췄을 온진아였다. 그들이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뱉고 도를 넘는 장난을 쳐도 그저 웃으며 넘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차피 끝낼 사이였고 굳이 이들의 비위를 맞추며 감정을 소모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온진아는 그를 차갑게 훑고는 그대로 지나쳐 가려 했다.하지만 고작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차선재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어이, 이게 무슨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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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온진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기태우를 사랑한 것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잘못된 선택과 후회의 시작이었다.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참담한 상황이 뒤섞여 진저리가 났다. 그녀는 찰떡궁합으로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냉담하게 응시하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말 다 했니?”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온진아가 입을 열 것이라고는, 더구나 이렇게 반격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언제나 묵묵히 당하기만 했던 그녀인데 오늘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차선재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뭐라고?”“들은 대로야. 이해력이 달려?”온진아가 사정없이 받아쳤다.“야, 너 다시 한번 말해봐!”기유영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차선재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그는 분풀이라도 하듯 더 독기 어린 말투로 온진아를 몰아붙였다.한편 그녀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순간 허공에서 툭 튀어나온 발이 그녀의 발목을 낚아채듯 걸었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무릎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상대는 바로 차선재였다.온진아가 바닥을 뒹구는 꼴을 본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까닥였다.무릎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온진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선뜻 일어설 수가 없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우원빈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입가에 미미한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그 옆에 기유영은 팔짱을 낀 채 오만하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리고 기태우, 그는 여전히 차갑고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마치 바닥에 처박힌 저 여자가 누구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온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닥을 짚고 다시금 몸을 일으키려 애쓰던 그때, 허공에서 불쑥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그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렸더니 한유건이 묵묵히 일으켜 세우려 했다.온진아는 저들과 한통속인 한유건에게 도움받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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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순진한 게 나쁠 건 없지.”우원빈이 맞장구쳤다.“태우가 옆에서 지켜주고 우리 같은 든든한 오빠들이 있는데 유영이가 굳이 철들 필요가 뭐가 있겠어.”우원빈은 늘 기유영을 친여동생처럼 아꼈다.과거 어머니와 함께 우씨 가문으로 들어올 때, 그에게는 핏줄을 나눈 여동생이 있었다. 당시 네 살이었던 우원빈과 고작 한 살배기였던 여동생.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살아가던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동생이 사라졌다고 통보했다.어린 나이의 우원빈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울며불며 떼를 써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잃어버렸으니 다신 찾을 생각 말고 우리끼리라도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고.어머니의 말대로 우원빈의 삶은 그 뒤로 탄탄대로였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승승장구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휑하게 뚫려 있었다.그런 그에게 기유영은 남다른 의미였다. 수년 전, 큰 눈망울과 발그레한 뺨을 가진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잃어버린 여동생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가끔 그녀가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우원빈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원래 그렇게 사랑받으며 귀하게 자라야 한다고 믿었다.여동생이 살아있었다면 본인도 그렇게 아꼈을 테니까.일행은 기유영을 중심으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며 레스토랑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그 시각, 온진아는 아까의 사건 때문에 밥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터덜터덜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자기 자리를 보고 멈칫했다. 오전까지 쓰던 자리가 시끌벅적했고 사람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다가가 보니 다들 밀크티와 과일을 나눠 먹고 있었다.온진아의 노트북과 자료가 있던 자리는 그들의 간식거리로 엉망이 되었고 심지어 노트북 위에는 물이 쏟아져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뻔히 빈자리가 많은데도 굳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누가 봐도 노골적인 괴롭힘이었다.온진아는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을 밀치고 자기 물건을 챙기려 했다. 그때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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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여자는 온진아의 일침에 순간 본색을 드러냈다. 테이블 위에 있던 밀크티를 낚아채더니 온진아의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부은 것이다. 온진아가 황급히 가방을 들어서 막았지만 뜨거운 액체와 끈적한 토핑이 가방 전체를 엉망으로 적시고 말았다.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가방을 테이블에 툭 던지며 말했다.“닦아.”“뭐라고?”여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너 뭐 돼? 내가 안 닦으면 어쩔 건데?”“그럼 오늘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살벌한 대치가 이어지던 그때,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경쾌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문밖에서 나타난 우아한 자태의 주인공은 기유영이었다.아까 기태우 일행과 레스토랑으로 향했던 그녀가 어떻게 이토록 빨리, 그것도 정확히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녀의 등장이 결코 우연이 아님은 직감할 수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기유영은 지극히 온화하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 다툼이라도 난 건가요?”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 사람들이 앞다투어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온진아에게 철저히 불리하게 왜곡된 버전이었다.이야기를 다 들은 기유영은 예상외로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먼저 사과했다.“죄송해요. 여러분들 노고에 보답하려고 준비한 건데 이런 일로 마음 상하게 하다니 제 본래 의도가 아니었어요. 대신... 제가 닦아드리면 될까요?”그녀는 온진아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선한 눈빛을 보냈다. 예전에 그 서슬 퍼런 독설을 내뱉던 기유영과는 아예 딴판이었다.온진아는 문득 기하람의 그 능숙한 태세 전환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단번에 깨달았다.그녀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기유영을 직접 닦게 둘 리가 없었다.순식간에 모든 비난의 화살은 온진아에게 쏟아졌다. 주제 파악 못 한다는 둥, 적당히 좀 해라는 둥, 회사 분위기 흐리지 말라는 식의 비아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온진아는 진저리가 났다. 수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짜고 치는 역겨운 연극에 더 이상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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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당장 내 사무실로 와.]온진아는 어차피 기태우를 찾아갈 생각이었기에 이 남자의 말투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10분 뒤, 기태우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이 열려 있어 두 번 노크하고 들어섰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창가 쪽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예전의 온진아라면 기태우가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전혀 개의치 않고 회의실 한쪽에 있는 손님용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하며 그를 기다렸다.통화를 마친 기태우가 고개를 돌리고 이 광경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또 무슨 수작인 걸까? 예전 같으면 제 방에 함부로 앉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해 쩔쩔매던 그녀였다. 말 한마디를 나눌 때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고개를 들지 못하던 온진아가 이제는 아예 대놓고 밀당을 하겠다는 건가.“진아야.”기태우가 그녀를 불렀다. 주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경고를 담은 서늘한 음성이었다.“오늘 아주 회사를 발칵 뒤집었다며.”온진아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평온한 눈빛이었다.“무슨 말이야?”“몰라서 물어?”기태우는 쓴웃음을 지었다.“동료를 괴롭히고 사내 질서를 어지럽히고 심지어 상사한테 가방을 닦으라고 시켰다던데 위세가 아주 대단해!”그 말을 듣는 순간, 온진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진실을 이렇게까지 왜곡할 수 있다니. 기유영이 벌써 그에게 입을 맞췄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이왕 이렇게 된 이상 설명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이미 그는 온진아를 가해자로 낙인찍어 놓은 상태였으니까.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짓눌렸던 무릎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온진아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습관적으로 기태우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온진아는 이를 악물고 꼿꼿이 섰다.“고작 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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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기천 그룹 빌딩을 빠져나온 온진아는 곧장 강인 병원으로 향했다.도착했을 땐 마침 저녁 식사 시간대라 간호사가 정성스럽게 구미란의 식사를 돕고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영양 균형이 완벽하게 잡힌 정성이 가득 담긴 식단이었다.항암 치료 중인 구미란은 늘 기운이 없고 졸려 했지만, 몸이 크게 야위지는 않았다. 의료진이 그녀의 회복을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온진아가 나타나자 간호사들은 식사했느냐고 물었고 아직이라는 말에 서둘러 그녀의 저녁상까지 차려왔다.여전히 온진아의 입맛을 고려한 메뉴와 신선한 과일들이었다.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해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녀는 따뜻한 음식을 한술 뜨고 나서야 비로소 몸에 온기가 돌았다.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병원 서비스가 이 정도로 세심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진승호 덕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막막했던 순간,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었다는 사실에 온진아는 가슴 깊이 고마움이 차올랐다.식사를 마치고 어머니와 한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유다미의 집은 그녀의 말대로 1년 내내 출장이 잦아 온진아와 강아지 또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며칠 정성으로 돌본 덕에 또또는 이제 사람을 그리 경계하지 않았다. 가끔 온진아 곁으로 다가와 몸을 비비기도 했지만, 여전히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그녀는 욱신거리는 무릎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한창 약을 펴 바르던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기태우의 할머니 박현옥이었다.온진아는 약통을 옆으로 밀어두고 전화를 받았다.“네, 할머니.”전화기 너머로 박현옥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곧장 들려왔다.“진아 너 부성에 들어왔다며? 이 녀석아, 돌아왔으면 할머니한테 연락했어야지!”기씨 가문에서 온진아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사람은 바로 박현옥이었다.과거 그녀와 기태우의 결혼을 찬성했던 건 기씨 가문을 통틀어 할머니뿐이었다. 심지어 나중에 온진아가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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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도무지 알 수 없는 두 글자였다. 온진아는 메시지를 읽고는 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곧바로 삭제해 버렸다.5분 후, 기태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는데 이번엔 전화였다.받자마자 냉소적인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카톡 못 봤어?”온진아는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다.“봤어.”“근데 왜 답이 없어?”“무슨 주소를 말하는 건데?”“설마 모르는 척하는 거야? 어제 할머니께 직접 부탁한 거 아니었어?”그제야 온진아는 어제 할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태우와 함께 오라던 그 당부. 하지만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린 상태였다.“할머니께 그런 부탁드린 적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데리러 오지 마. 주소도 안 보낼 테니까.”“어쭈? 내가 직접 데리러 가길 바라는 거야?”기태우는 그녀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비꼬았다.“착각하지 마. 당연히 기사를 보낼 거니까.”온진아는 그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그럼 기사도 보내지 마.”“야, 너 잘난 척 좀 그만해 제발!”기태우가 냉소를 터트렸다.“튕기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직접 데리러 가길 원하는 건 네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이야.”대체 어쩌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걸까? 온진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그런 생각 한 적 없어.”예전엔 감히 바랄 수 없었고 앞으론 그럴 필요조차 없으니까.결혼 생활 3년 동안 와이프의 집 주소도 모르는 남자라니. 앞으로는 그와 엮일 일 따위 한 톨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맘대로 해.”말을 마친 기태우가 전화를 툭 끊었다.온진아도 개의치 않고 덤덤하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그녀의 거처에서 기씨 저택까지는 수십 킬로미터 거리였다. 지하철도 한 번에 닿지 않아 택시를 갈아타고 1시간 반이 걸려서야 겨우 도착했다.택시에서 내리던 찰나, 마침 옆으로 묵직한 엔진음을 내며 롤스로이스 컬리넌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차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내렸는데 기태우와 기유영, 그리고 기하람이었다. 톤을 맞춘 듯 같은 색감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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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안수희는 온진아에게로 시선을 홱 돌리며 쏘아붙였다.“유영이 좀 봐라. 나이도 비슷한 애가 어쩜 그렇게 격이 달라? 넌 유영이의 반만이라도 닮으려고 노력을 좀 해 봐.”“그만해라. 말이 너무 많구나.”박현옥이 날카롭게 안수희를 쏘아붙였다. 이내 다시 온진아에게 물었다.“진아 너 아까부터 걷는 게 좀 불편해 보이던데. 다리를 다친 거니?”“아니요, 괜찮아요.”온진아가 고개를 저었다.“그냥 잠깐 부딪힌 거예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박현옥은 곧바로 기태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태우야, 평소에 진아 좀 잘 챙겨. 밖으로만 돌지 말고! 남편으로서 네가 책임져야 할 몫이 있는 거란다.”할머니가 말을 꺼낼 때, 기태우는 기하람을 안고 기유영과 무언가 다정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한순간 실내에 적막이 감돌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기태우의 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가업은 줄곧 박현옥의 손을 거쳐왔다. 그런 세월 덕분에 집안 내 그녀의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몇 년 전 건강 문제로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영향력은 여전했고 웬만해서는 그녀의 말에 토를 다는 이가 없었다.기유영은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고 기태우만이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 할머니.”기태우와 기유영을 유독 따르던 기하람은 두 사람이 꾸중을 듣는 분위기가 되자 바로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아이는 평소 박현옥을 조금 무서워하긴 했다. 다른 어른들은 모두 오냐오냐 받아주는데 유독 증조할머니만은 자신을 엄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박현옥을 향해 쏘아붙였다.“흥, 우리 아빠한테 그러지 마세요!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에요!”다들 기하람의 돌발 행동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오직 기유영만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박현옥은 어린아이와 말씨름을 할 수도 없어 불만스러운 화살을 기태우에게 돌렸다.“봤니, 태우야? 너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냐? 버릇이 이게 뭐니. 예전엔 진아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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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기하람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안수희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싫어! 정말 싫다고요!”온진아가 직접 선택권을 쥐게 된다면 뻔할 뻔 자였다. 필시 기하람을 직접 키우겠다고 나설 테니까. 어차피 그녀는 기하람의 엄마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사실 기하람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온진아와 기태우가 통화하는 걸 옆에서 엿들으면 그녀는 늘 기하람의 안부를 묻고 가끔 사진을 보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물론 번마다 기태우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그 여자는 끈질기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무엇보다 저렇게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엄마라니,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기하람은 유영 고모처럼 예쁘고 세련된 사람이 엄마였으면 좋겠고 또한 고모가 자신을 돌봐주길 바랐다.기유영 역시 초조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법적으론 온진아가 기하람의 엄마이니 할머니의 지지까지 업고 진심으로 키우겠다고 나선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불안해진 기유영이 몰래 기태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기태우는 그런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그 역시 온진아가 줄곧 기하람을 키우고 싶어 하며 아이와 관계를 개선하려 애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가 없으면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할 명분이 없다는 걸 그 여자도 아는 모양이지. 하지만 온진아가 무슨 생각을 하든 혹은 무엇을 원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으니까.“할머니.”“할머니.”기태우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온진아의 목소리가 그보다 한발 앞서 끼어들었다.순간 주위에 서늘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기하람과 기유영의 표정에는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다는 듯 옅은 분노가 서려 있었고 기태우는 그저 팔짱을 낀 채 흥미롭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답변에 받아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태도였다.“할머니.”온진아는 나지막이 다시 한번 입을 뗐다.“저 하람이 안 키울래요.”사실 더 속 시원하게 내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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