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견 보낼 땐 언제고 이혼하자니 난리야?: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기태우에 의해 강진으로 파견된 지 3년째 되던 날, 온진아는 처음으로 이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로 그녀는 의사에게 들은 어머니의 상태를 덤덤하게 전했다.혈액 감염으로 인한 위급 상황, 언제든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절박한 소식이었다.온진아는 당장 부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하지만 소식을 들은 기태우는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차갑게 내뱉었다.“네가 의사야?”그 말인즉슨 돌아와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비아냥이었다.온진아인들 자신이 의사가 아니라는 걸 모를까. 당연히 의술로 엄마를 살릴 수 없겠지.하지만 그분은 다름 아닌 그녀의 엄마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엄마의 곁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평소라면 기태우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단 한 번도 거스른 적 없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용기를 냈다.“엄마 곁을 지키고 싶어서 그래. 며칠만 휴가 좀 쓸게. 업무에는 지장 없도록 할게. 제발, 태우야.”전화기 너머의 기태우가 잠시 침묵했다.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한 적 없던 아내의 뜻밖의 고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이윽고 다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아직 죽은 건 아니잖아.”그 잔인한 한마디에 온진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굳었다. 이 남자의 모진 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하지만 기태우는 그녀의 분노를 비웃듯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주제 파악 좀 해. 네가 나한테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할 자격 있어?”지난 3년이 그랬듯 기태우는 그녀의 감정도, 생각도, 심지어 그녀라는 존재 자체에 한 치의 관심도 없었다.부부라는 이름표만 달고 있을 뿐 정말이지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온진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결혼을 제안한 것도,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겪었을 때 손을 내밀어준 것도 기태우였다. 심지어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입양을 제안한 것도 이 남자였는데...가슴을 찌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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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기태우가 이렇게 빨리 사직 처리를 해주다니.온진아는 충격과 비통함에 휩싸였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내쫓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누가 돌아오라고 했어?”맞은편의 기태우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수화기 너머로 듣던 그 냉혹하고 건조한 말투 그대로였다.그래,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아는 ‘기태우’였다.“어제 전화로 말했잖아.”온진아는 최대한 그의 눈을 피했다. 그 서슬 퍼런 냉기에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내가 허락했었나?”“엄마가 위독하시다고 분명 말했어.”“그래서 뭐?”기태우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봤다.“회사가 네 사적인 감정까지 책임져야 해?”그가 온진아를 보는 시선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잔잔한 수면처럼 아무런 파동도 없이 그저 철저한 무시만이 담겨 있었다.“회사 가서 직접 징계받아.”징계라니?사실 온진아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퇴사까지 한 마당에 그가 자신에게 뭘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말을 꺼냈다간 분명 귀찮은 실랑이가 벌어질 터, 지금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징계 문제는 회사 가서 인사팀하고 제대로 얘기할게. 오늘은 다른 용건으로 왔어.”“용건 있으면 가정부랑 얘기해.”기태우는 더 이상 그녀와 대화할 마음이 없는 듯 시계를 흘긋 보더니 자리를 뜨려 했다.이를 본 온진아도 더 이상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나 지금 돈이 필요해.”그 말을 들은 기태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얼마나?”그의 질문에 온진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내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겨우 안착하는 기분이었다. 목소리에도 절로 힘이 빠졌다.“3억 4천.”이내 이 남자가 오해할까 염려되어 황급히 덧붙였다.“엄마가 편찮으셔서 입원하셨는데 지금 내가 가진 돈을 다 합쳐도 3억 4천만 원이 더 필요해.”말을 마친 온진아는 앞에 서 있는 남자, 자신의 남편이라 불리는 기태우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래도 허락해 주겠지. 일은 제쳐두더라도 그들은 부부이니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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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기유영의 기묘한 말과 더불어 지금 짓고 있는 오만하고도 의기양양한 표정은 온진아에게 묘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이 일과 기유영이 관련이 있는 걸까?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기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온진아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기하람이 재빨리 나서서 고자질을 시작했다. 녀석은 온진아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아빠, 저 여자가 날 괴롭혔어요! 아까 막 때리려고 했다니까요. 흑흑... 저 못된 아줌마 좀 혼내주세요!”말이 끝나자마자 기하람은 눈물을 쥐어짰다. 아까 또또를 괴롭힐 때의 잔혹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저토록 소름 끼치는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온진아는 두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며 아연실색했다.하지만 기태우는 그 가식에 완벽히 속아 넘어갔다. 아니, 믿고 싶은 쪽을 선택한 것이겠지!“하람이한테 사과해.”그 말을 듣는 순간, 온진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무슨 일인지 경위도 묻지 않고 시비도 가리지 않은 채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과를 요구하다니. 이 남자는 정말이지 편애가 너무 심했다.온진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기태우를 쳐다보며 사과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또를 안고서 그곳을 벗어났다.등 뒤로는 기하람의 울음소리와 기유영의 달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온진아의 귀에는 그 모든 것이 그저 공허한 조롱처럼 들릴 뿐이었다.동물병원에 가는 내내 또또는 그녀의 품 안에서 멈추지 않고 떨었다. 아무리 달래고 또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동물병원에 도착하자 수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의학 생활 수십 년 만에 이렇게 심하게 다친 강아지는 처음 본다고 했다. 몸 곳곳의 멍과 골절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보다 정신적인 충격과 심장 기능의 손상이 심각하다고 했다. 결국 필요한 물리적 처치를 마친 뒤, 수의사는 온진아에게 그저 최선을 다하되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기라고 조심스럽게 권했다.활기차고 사랑스럽던 또또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온진아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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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전화의 주인공은 진승호였다.그는 기천 그룹 강진 지사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이자 매출의 80%를 책임지는 거물이었다. 온진아의 모든 협력사 중에서도 단연 소통하기 제일 편한 상대이기도 했다.그 당시 온진아에게 강진은 척박한 땅이었다. 가진 것 없는 신출내기였던 시절, 세상의 냉대 속에 웅크려 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바로 진승호였다. 그가 투자를 시작하자 비로소 다른 이들도 온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진승호는 협상 과정에서 억지를 부리거나 몸값을 깎는 일 없이 늘 호탕하고 진솔했다. 어쩌면 이런 점들이 그가 수년간 온진아의 ‘귀인’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다.그녀는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전화를 받았다.“승호 씨, 안녕하세요.”“네, 온진아 씨.”진승호는 언제나 그랬다. 깍듯하고 겸손한 태도로 갑을 관계의 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온진아가 몇 번이나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한결같이 예의를 지켰다.“부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 들었습니다.”“네, 어젯밤에 도착했어요.”혹여 일 때문에 걱정할까 봐 온진아가 덧붙였다.“프로젝트는 양정원 씨한테 인수인계 다 마쳤어요. 궁금한 점 있으시면 그쪽으로 연락하셔도 되고 저한테 직접 말씀해주셔도 됩니다.”“일 때문에 연락 드린 건 아닙니다.”진승호는 그녀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뗐다.“급하게 내려가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그게...”망설임 끝에 온진아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실은 어머니가 편찮으셔서요.”“많이 위중하신가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나요?”그 말에 온진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의 일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들은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미처 대답하기도 전, 진승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돈 필요해요 아니면 다른 지원을 해드릴까요?”다른 사람이었다면 불쾌했을 질문이었지만 진승호의 어조는 지나치게 따뜻하고 진중했다. 온진아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계산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말이다.벼랑 끝에 몰린 탓이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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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온진아가 채움 별장에 다시 발을 들이자마자 입구에서 마주친 가정부가 대뜸 쏘아붙였다.“여긴 왜 왔어요?”아침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노골적인 적의와 경계심, 누군가 미리 단단히 일러둔 게 분명했다. 다만 온진아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응수했다.“여기 내 집이에요. 내가 내 집에 오는 게 뭐 문제 돼요?”“뭐라고요? 한심해서 정말!”가정부가 코웃음을 쳤다.“이 집 주인은 기 대표님과 유영 씨뿐이에요. 어디서 굴러먹던 가짜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가정부는 당장이라도 문을 닫아걸 기세였다.“당장 나가. 경비원 부르기 전에.”그때 온진아가 문틈에 손을 끼워 넣고 차분하게 말했다.“말하는 꼴 보니까 기유영이 나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떠벌렸나 봐? 근데 이것도 말해줬어? 나 성질 더럽고 폭력적인 성향이 있어서 한 번 손대면 뒷감당 안 돼.”말을 마친 그녀는 일부러 손바닥을 휙 들어 가정부를 위협했다.아니나 다를까 가정부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온진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고작 겁 좀 준 것만으로 이렇게 나오다니, 기유영이 뒤에서 얼마나 자기 험담을 늘어놓았을지 눈에 선했다.“비켜. 내 물건만 챙겨서 바로 나갈 거니까.”정말이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온진아는 기태우와 백년해로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평생 소중히 간직해 온 앨범이며 사진, 유년 시절부터의 추억이 담긴 선물들을 모두 이 집으로 옮겨 왔었다.이제 다 끝났으니 그 잔해들도 모두 거두고 떠날 참이었다.온진아와 가정부가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가정부는 잠시 망설이다 마지못해 길을 비켜주었다.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곧게 2층으로 향했다.결혼할 때만 해도 안방에서 살 줄 알았던 온진아는 모든 짐을 안방 서랍에 넣어두었었다. 하지만 지금 방문을 열어보니 안방의 배치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골랐던 가구들은 이미 다른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심지어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물건들마저 사라지고 없었다.“여기 있던 물건들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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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다미’의 본명은 유다미. 그녀는 변호사이자 온진아가 살아온 25년 인생에서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고등학교에서 만나 같은 대학교까지 진학하며 7년을 함께했다. 그 세월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한 존재가 되었고 말 그대로 지피지기였다.결정적인 균열은 3년 전, 온진아가 기태우와 결혼하려 했을 때 찾아왔다. 유다미는 필사적으로 이 결혼을 말렸다. 그녀는 온진아에게 거듭 말했었다. 기태우가 네 생각만큼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그 사람하고 있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하지만 그때 온진아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온통 사랑에 눈이 멀어 기태우와 결혼할 생각뿐이었으니까. 조금의 사랑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설령 없더라도 감정은 키워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에게는 기다릴 인내심도 시간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다.유다미는 온진아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결국 둘은 인연을 끊었고 그 후로는 어떤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일을 다시 돌아보니 온진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마 유다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말린 거겠지.안타깝게도 그때의 온진아는 그걸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전화에서는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진아는 혹시 끊어진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다미야, 듣고 있어?”“응.”그제야 유다미가 짧게 대답했다.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처음의 서먹함은 조금 사라진 듯했다.“너 지금 어디야?”온진아는 고개를 들어 채움 별장의 간판을 쳐다봤다. 유다미를 더 이상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아 결국 근처 골목 이름을 둘러댔다.“거기서 기다려. 금방 갈게.”“아니, 나는...”“기다려.”온진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다미가 싹둑 잘랐다.“금방 갈 거야. 30분도 안 걸릴 테니까 일단 따뜻한 데 가서 앉아있어.”“알았어.”그 말에 온진아는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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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온진아가 집에 들른 이유는 단 하나, 강아지 또또를 데려오기 위함이었다.유다미는 또또를 기억하고 반가운 마음에 안으려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얌전하던 또또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갑자기 으르렁거리고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이내 구석에 웅크려버렸다.“얘 왜 이래?”유다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사람을 무서워해.”“왜?”“전에 심하게 학대당했어.”온진아는 딱히 숨기지 않고 채움 별장에서 또또가 겪었던 일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들은 유다미는 격분하여 욕설을 퍼부었다.“기태우랑 기유영이 비인간적인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하람이 그 녀석까지 별반 다를 바가 없어?”유다미가 사람을 죽일 기세로 쳐들어가려는 걸 온진아가 말렸다. 일이 너무 혼란스럽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제 막 유다미와 만났는데 소중한 친구까지 이 난리 통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온진아의 만류에 유다미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고 또또의 짐을 챙겨 함께 집을 나섰다.온진아의 집에서 유다미의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유다미가 사는 곳은 조용하고 우아하며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별장 구역이었다.사실 유다미는 태생부터 남달랐다. 부성의 유성 그룹 외동딸로 집안은 부동산 사업을 크게 일궜다. 기천 그룹처럼 전국구 대기업은 아니지만, 부성 상류층에서는 충분히 명함을 내밀 정도였다.다만 그녀는 가업 승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법학 전공에만 매달렸다. 이 문제로 집안과 갈등을 겪었고 지난 몇 년간은 가족과의 연락도 거의 끊고 혼자 살고 있었다.오늘 온진아를 데려온 곳도 유성 그룹이 소유한 별장 단지 중 한 곳이었다.여러 겹의 보안 절차를 거쳐 집에 들어서자마자 유다미는 냉장고부터 뒤졌다. 몇 년간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던 그녀였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그냥 내가 할게.”온진아가 또또를 잘 돌본 뒤, 부엌으로 들어섰다.“아니야, 내가 할 수 있어.”“그럼 내가 야채라도 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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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기태우, 그 인간의 만행이 틀림없었다.온진아가 기하람을 때린 일에 앙심을 품고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다니.애초에 그 남자가 협박할 때부터 온진아는 마음의 준비를 다 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당당하게 맞설 각오였다. 그녀는 기태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다만 어머니를 건드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온진아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기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다시 걸자 아예 전원이 꺼져 있었다.사면초가인 그녀, 의사는 쉴 새 없이 병원을 옮기라며 독촉했다. 다급해진 온진아의 머릿속에 통장 속 10억 원과 전에 진승호가 언급했던 ‘자원 제공’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그녀는 결심한 듯 진승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울리자마자 통화가 연결됐고 그 바람에 온진아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오히려 휴대폰 너머로 진승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진아 씨, 무슨 일이시죠?”온진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네, 승호 씨,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물론이죠. 편하게 말씀하세요.”남자의 통쾌한 대답에 그녀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다름이 아니라 부성 쪽에 잘 아시는 의료 인프라가 있으신지 여쭙고 싶어서요.”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굳이 뭘 더 숨길까?“실은 저희 어머니가 급성 백혈병으로 입원 중이신데 다니던 병원에서 갑자기 퇴원을 종용해서요. 상황이 너무 급박한데 갈 곳을 찾지 못해 염치 불고하고 연락드렸어요. 혹시 곤란하시다면 바로 끊겠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걱정 마세요. 어머님 문제는 제가 해결해드릴게요.”진승호는 일단 그녀를 안심시켰다.“솔직히 말하자면 진아 씨가 먼저 전화하지 않았더라도 제가 연락하려고 했습니다. 어머님께서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조치를 취하고 있었거든요.”“정말요?”온진아의 가슴에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단순히 기쁨을 넘어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물론입니다.”진승호가 계속 말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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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어머님께서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후속 치료도 걱정 마세요. 강인 병원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장비를 갖추고 있으니 진아 씨 어머님도 반드시 나아지실 겁니다.”“정말 감사합니다.”온진아는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했다. 딱히 보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자연스럽게 퇴사 이야기를 꺼냈다.“저 이미 기천 그룹에 사직서 냈어요. 한 달 뒤면 완전히 정리될 겁니다.”통화를 이어가던 중, 온진아는 전화기 너머로 낮고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강진 방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귀에 쏙 박히는 좋은 음색이었다.“혹시 지금 바쁘신가요?”그녀는 혹여 방해될까 조심스럽게 진승호에게 물었다.“아니요, 괜찮습니다.”진승호가 짧게 답하며 덧붙였다.“방금 누가 지나가서요.”온진아는 더 캐묻지 않았다.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전화한 거였으니까.“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통화를 종료한 진승호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방금 급한 마음에 대표님을 ‘지나가던 사람’이라고 둘러댔는데 화를 내시진 않을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 대표님께서 온진아 씨와 소통할 때 본인 정보를 철저히 숨기라고 당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임기응변이었다.“죄송합니다, 대표님.”도하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다음부턴 주의하도록 해.”“명심하겠습니다.”“그리고 병원에 연락해서 당분간 담백함 위주의 식단으로 바꿔. 과일이랑 디저트까지 전부 다.”“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한편, 온진아가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리자 어머니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던 탓인지 구미란의 눈동자는 한동안 초점이 흐려 보였다.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야 온진아를 알아봤다.“진아니? 어떻게 벌써 왔어?”“엄마 보러 왔죠.”온진아는 어머니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뭐 드시고 싶은 건 없는지 묻고 싶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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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기태우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기유영과 함께 파인다이닝까지 보낸 뒤에야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온진아의 전화를 일부러 끊었던 건 계산된 행동이었다. 하루 종일 그녀를 방치해두면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꼬리를 내릴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생각은 좀 정리됐어?”“뭐가?”온진아의 말투는 지나치게 차가웠다. 평소 기태우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비위를 맞추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이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짧은 시간 안에 사람의 성격이 이렇게 변할 리 없었다. 그는 온진아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기에 이런 태도를 그저 밀당이나 관심 끌기로 치부했다.“말 안 해도 알 텐데.”기태우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잘 모르겠으니까 할 말 없으면 끊을게.”온진아는 화장실 안에 있었지만, 혹여나 문밖의 어머니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하람이한테 사과하는 일 말이야.”‘하! 역시 그거였군.’“말했잖아. 내 잘못 아니라고. 절대 사과 안 해.”그녀가 단호하게 쏘아붙였다.“오늘 일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네? 잊지 마. 내가 병원 한 곳을 연결할 수 있으면 두 번째라고 못 할 리 없어.”기태우는 온진아의 어머니가 병원을 옮겼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상황까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온진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제 입으로 당당하게 악행을 인정하다니.이 남자와 말싸움하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 상황을 어떻게 현명하게 마무리하느냐였다.현재 어머니가 강인 병원에 있긴 하지만 이곳 역시 부성이라 기씨 가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기태우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다. 진승호에게 이미 너무 많은 신세를 진 터라 온진아는 더 이상의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도대체 원하는 게 뭔데?”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주 쉬워. 하람이한테 사과하고 강진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평범하게 지내라고.”‘꿈 깨, 인간아!’온진아는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두 가지 요구 중 어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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