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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식어버린 심장을 버리고: Chapter 11 - Chapter 20

23 Chapters

제11화

강도혁이 황급히 병원 응급실로 뛰어갔다.가정법원 직원이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내인 임윤지에게 연락을 취했다.“정보 모두 맞아요. 수고 많으셨습니다.”임윤지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와 강도혁의 이혼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 달 뒤면 그녀는 더 이상 강도혁의 아내가 아닐 것이다.하지만 강도혁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백나희가 눈을 떴을 때 땀범벅이 된 강도혁이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냐며 다그쳤다.그녀가 서럽게 흐느끼며 울부짖었다.“아무도 날 예뻐해 주지도, 사랑해 주지도 않잖아. 살아봤자 눈엣가시일 텐데 차라리 죽는 게 나아. 흐흑...”강도혁이 인내심 있게 백나희를 달랬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준 사랑이 부족해? 다신 네 몸에 상처 내지 마.”그의 품에 안긴 백나희가 몰래 입꼬리를 씩 올리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강도혁이 한눈을 파는 사이 임윤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도혁 오빠는 바로 나한테 달려와. 너한테는 진작에 질려버렸어.]강도혁이 백나희를 재운 뒤에야 휴대폰을 확인했다. 수많은 부재중 전화를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가정법원 업무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조금 전 ‘가정법원’을 사칭했던 전화가 무조건 보이스피싱일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복도 의자에 앉아 자택 거실의 CCTV 앱을 켠 그는 화면이 새까만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겨우 밤 9시였다. 임윤지가 이렇게 일찍 자는 사람이 아니었다.‘임경수랑 집에 간 거 아니었어?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지?’미친 듯이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벌컥 연 순간 불길한 예감이 훅 끼쳐왔다.“윤지야.”강도혁이 칠흑같이 어두운 거실을 향해 임윤지를 불렀다.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그가 목청을 높여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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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일주일간의 요양 끝에 임윤지의 몸이 거의 다 회복되었다. 퇴원 절차를 마친 뒤 가장 먼저 임경수의 병실로 향했다.임경수가 수술을 앞두고 일련의 치료와 검사를 받는 중이었다. 큰 이변이 없다면 조만간 인공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을 터.심한결이 하얀 의사 가운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임윤지의 곁에 조용히 서 있었다.점점 혈색이 도는 임경수의 얼굴을 본 임윤지가 벅찬 감회를 털어놓았다.“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며칠 전만 해도 아빠를 영영 잃는 줄만 알았거든요.”심한결이 안경을 들어 올렸다.“아버님의 상태가 저희 예상보다 훨씬 좋아요. 따님과 더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강하신 것 같아요.”임윤지가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 아빠 잘 부탁드릴게요.”임윤지가 병원비를 수납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의자 위에 두고 간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심한결이 전화를 끊으려다가 그만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여보세요? 임윤지 씨 맞으십니까? 가정법원인데요. 이혼 건으로...”마침 급히 돌아온 임윤지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네. 주소 드릴 테니까 이혼 확인서가 나오면 그쪽으로 택배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그 자리에 굳어버린 심한결이 민망함에 손만 비벼댔다.“죄송해요. 사생활을 엿들으려던 건 절대 아니었어요.”임윤지가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전 이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둬야죠.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찬란하게 빛나는 미래가 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심한결이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용감한 분이시네요. 하늘도 절대 윤지 씨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임윤지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참, 이 근처에 묵을 만한 집이 있을까요? 아빠를 돌봐야 해서 당분간은 병원 근처 집을 구해야 할 것 같아요.”심한결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했다.“이 근처에서는 방 구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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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강도혁은 이때까지도 임윤지가 그를 떠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저 홧김에 잠시 가출한 것뿐이라고 확신했다.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우미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윤지 어디 갔어?”도우미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 대답했다.“사흘 전에 사모님께서 집 내부 수리를 해야 한다며 유급 휴가를 주시곤 도우미들을 전부 내보내셨어요.”강도혁이 불같이 화를 내더니 집사에게 집 안의 모든 가구를 원래 있던 그대로 똑같이 사다 놓으라고 명령했다.“하나라도 달라선 안 돼. 윤지가 있을 때랑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 놔.”이어서 비서를 호출했다.“나랑 윤지 명의로 된 부동산을 싹 다 뒤져봐. 아빠까지 데리고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비서가 가려던 그때 강도혁이 다시 비서를 불러 세웠다.“무운시에 있는 요양원도 모조리 알아봐. 아빠랑 거기로 들어갔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당장 윤지의 행방을 찾아내.”비서가 깍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모든 지시를 마친 뒤에도 강도혁의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통제 불능의 감각이었다.가업을 물려받은 이래 세상 모든 일이 강도혁의 손바닥 안에서 굴러갔다.백나희와의 불륜 스캔들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무운시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때도 그는 태연했다.그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면 7년 전처럼 임윤지가 다시 받아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들이 강도혁의 계획을 벗어나고 있었다. 상황이 점차 통제선을 넘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기분이었다.머릿속에 임윤지에게 첫눈에 반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스쳤다.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임윤지는 자존심이 강하고 당찬 여자였다. 돈 많은 자들을 시기하지도 않았고 강도혁의 재력 앞에 굽신거리지도 않았다.지금까지 강도혁이 대시했던 여자 중 가장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가장 힘든 과정 끝에 손에 넣은 여자였다. 때로는 그를 깊은 좌절감에 빠뜨리기도 했다.임윤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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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백나희가 강도혁의 비서에게서 임윤지와 임경수가 함께 종적을 감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녀가 병실에서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더니 당장 간병인을 불러 짐을 챙기라고 했다. 오늘 바로 강도혁의 집으로 들어갈 심산이었다.샤넬 투피스를 차려입고 손에 에르메스 신상 백을 든 백나희가 현관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그러고는 선글라스를 벗고 이사 업체 직원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지시했다.“조심 좀 해요. 그쪽 물건들 다 한정판 보석들이라고요.”“아앗, 내 드레스. 바닥에 끌리잖아요.”일렬로 늘어선 도우미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거실에 서서 안주인 행세를 하는 백나희를 지켜보았다.백나희가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거들먹거리며 쏘아붙였다.“왜들 그렇게 쳐다봐? 당장 올라가서 안방 치우지 못해? 미래 사모님의 일을 그르치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야?”도우미들이 서둘러 우르르 몰려가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들 앞으로 이 집에서의 나날이 험난할 것이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백나희가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입고 거실 소파에 대자로 누웠다. 그러고는 각도를 바꿔가며 셀카를 수십 장 찍은 뒤 임윤지에게 모조리 전송했다.[임윤지, 네가 공들여 꾸며놓은 이 집에 내가 이렇게 빨리 들어올 줄은 몰랐지?][네 덕분에 힘 하나 안 들이고 재벌가 사모님 생활을 누리게 생겼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며칠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맸음에도 강도혁은 임윤지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날 오후 비서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임윤지에 관한 정보가 말소되었다고? 아예 조회가 안 돼?”비서가 전화 너머로 다시 한번 말했다.“네, 사모님의 휴대폰 번호는 물론 SNS 계정도 전부 삭제되었어요. 대표님, 주제넘은 말씀입니다만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절대 찾지 못하도록 스스로 모든 퇴로를 끊어버리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강도혁이 바에 앉아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바 테이블에 던져둔 휴대폰이 끊임없이 진동했다. 발신자가 백나희였으나 화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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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임경수의 치료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심한결과 임윤지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자연스레 길어졌다.심한결이 무심코 던지는 의학 서적 얘기나 난해한 전문 용어에도 임윤지는 거의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갔다.“내 생각엔 이건 다중 모달 영상 기술을 기반으로 관상동맥 플라크의 안정성을 평가하는 것 같아요. 이런 여러 영상 기술을 결합해서...”말을 잇던 임윤지가 멈칫했다.“내가 혹시 엉뚱한 소릴 했나요?”심한결의 얼굴에 감탄이 번졌다.“아니요. 아주 정확해요. 의학 쪽에 조예가 꽤 깊은 것 같은데 따로 공부한 적이 있어요?”그녀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나타났다.“조예라니요, 당치 않아요. 아빠가 워낙 오랫동안 편찮으시다 보니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주워들은 게 다예요.”심한결이 임윤지에게 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순간 임윤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가 이내 빛을 잃었다.“대학교 때 전공이 의학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게다가 이젠 나이도 있어서 이해력이나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아요.”그녀가 들고 있던 심장내과 서적을 덮으며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난... 안 될 것 같아요.”하지만 심한결의 생각은 달랐다.“나이가 배움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윤지 씨에겐 더 큰 무기가 될 수도 있죠.”임윤지가 의아해했다.“무기요? 나이 많은 게 무기가 된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심한결이 아차 싶어 황급히 사과했다.“미안해요.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남들한테 없는 7년이라는 임상 경험이 윤지 씨한테 있다는 뜻이었어요.”임윤지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자 처음 인공 심장 연구를 시작했을 때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털어놓았다.“인공 심장 분야가 오랫동안 사람들한테 외면받아 왔어요. 당시 지도 교수님도, 동기들도 하나같이 연구 방향을 바꾸라고 설득했었죠.”실험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돈이 필요했지만 당시의 심한결에겐 둘 다 턱없이 부족했다.온 유럽을 뛰어다녔으나 변변한 투자금 한 푼 받지 못했다.인공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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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임윤지가 사라진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강도혁이 미친 듯이 온 세상을 뒤졌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수염이 덥수룩한 채 매일같이 술에 빠져 지냈다.백나희가 쫓겨나듯 그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속으로는 도무지 분을 삭일 수 없었다.‘조금만 더 버티면 임윤지를 완벽하게 지워내고 강도혁의 옆자리를 완전히 꿰찰 수 있는데 내가 왜 포기해야 해?’그녀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기로 하고 또다시 얕은수를 썼다.비서가 강도혁의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대표님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왔어요.”강도혁이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윤지 일 아니면 날 찾지 말라고 했을 텐데.”비서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백나희 씨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서 지금 병원에서 응급조치 중이랍니다.”강도혁이 짜증을 내며 손을 휘저었다.“그건 의사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나한테 말해?”분위기를 살피던 비서가 쭈뼛거리며 나가려던 그때 강도혁이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됐어. 그냥 내가 가볼게. 안 그러면 또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모르니까.”응급실 문 앞에 다다른 강도혁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백나희의 통화 소리를 들었다.“강도혁 지금 완전 내 손바닥 안이야. 저번에 내가 임윤지한테 호흡기 뺏겼다고 거짓말했을 때 내 말만 믿고 임윤지 머리를 바닥에 찧게 한 거 있지? 머리가 다 터졌었어.”문고리를 잡고 있던 강도혁이 멈칫했다.“임윤지 생각만 하고 있길래 전에 혈액 팩 하나 훔쳐서 손목을 그은 척했었어. 그랬더니 아주 미쳐 날뛰더라? 이번에도 그냥 비타민 몇 알 삼킨 건데 바로 달려오겠대.”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강도혁이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백나희, 방금 한 말 다시 해봐.”혼비백산한 백나희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오빠... 언제 왔어?”강도혁이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윤지한테 호흡기 뺏겼다는 게 거짓말이라고 했던 거기서부터 다 들었어.”백나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나... 나 그런 말 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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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임경수가 하루가 다르게 혈색이 좋아지며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그리고 임윤지는 석 달 동안 공부에 매진한 끝에 의대에 무사히 합격했고 본격적으로 심장내과를 배우기 시작했다.심한결이 한 손에 활짝 핀 노란 장미를, 다른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임윤지의 앞에 나타났다.“한잔할래요?”임윤지가 눈웃음을 지었다.“좋아요.”그녀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가득 차렸다.“건배!”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르자 심한결이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지 씨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임윤지 역시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한결 씨,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아빠뿐만 아니라 나까지 치유해 줬잖아요. 진심으로 감사해요.”심한결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솔직했다.“사실 나 윤지 씨를 좋아해요.”술잔을 쥐고 있던 임윤지가 멈칫하더니 시선을 늘어뜨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결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 어떤 얘기든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사이로 지냈으면 좋겠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심한결이 씁쓸한 눈빛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그럼요. 우리는 영원히 좋은 친구죠. 게다가 윤지 씨는 요리 솜씨까지 끝내주는 소중한 친구예요. 윤지 씨가 해주는 갈비찜은 정말 예술이거든요.”임윤지가 그제야 안도하며 다시 잔을 들어 그와 건배했다.“우리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며칠 뒤 임윤지가 외곽에 집을 구매하여 심한결의 집에서 나왔다.심한결은 그녀의 이사를 돕는 척하며 몰래 중요하지 않은 물건 몇 개를 숨겨두었다. 다음 날 해 질 녘, 그가 임윤지의 집 문을 두드렸다.“여긴 어쩐 일이에요?”임윤지가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아직 정리가 덜 돼서 좀 어수선하니까 이해해 줘요.”심한결이 개의치 않았다.“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가져다주려고 왔어요.”그를 본 임경수가 환하게 웃더니 바둑 한판 두자고 했다.완벽하게 매끄러운 의사소통은 아직 무리였지만 기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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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5년 후 무운 공항.비서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강도혁의 뒤를 따라갔다.“대표님, 클라이언트가 이미 떠났다고 합니다. 우린...”강도혁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췄다.“클라이언트 담당 부서는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수 있어?”비서가 땀을 닦았다.“의료 산업은 우리 주력 분야도 아니고 이런 문제가 생긴 게 한두 번도 아니지 않습니까.”그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제안했다.“이쯤에서 의료 쪽 사업을 접으시는 게...”강도혁이 짜증을 내며 비서의 말을 가로챘다.“의료 사업에 뛰어든 건 후회 안 해. 이건 윤지랑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야. 이를 악물고서라도 끝까지 밀고 나갈 거라고.”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클라이언트와 연락하도록 할게요.”같은 시각 임윤지가 단정한 오피스룩 차림에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를 허리춤까지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선글라스를 벗으며 마중 나온 친구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하영아, 5년 만이네. 정말 보고 싶었어.”안하영은 임윤지가 무운시에 있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두 사람이 끌어안던 그때 임윤지의 귓가에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스쳤다.임윤지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훤칠한 키의 남자가 기둥 뒤에 서 있었는데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임윤지, 뭘 그렇게 멍하니 봐?”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시끌벅적한 공항 안에서 ‘임윤지’라는 외침이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강도혁의 귓가에 정확히 꽂혔다.인파가 쏟아져 나오는 곳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린 강도혁의 시선이 어느 한 익숙한 뒷모습에 고정되었다.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더니 그 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윤지야!”그런데 유학을 떠나는 학생 무리가 쏟아져 나오며 강도혁의 앞을 가로막았다.다급해진 그가 그 뒷모습을 향해 다시 한번 목이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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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호텔로 향하는 차 안, 안하영이 몰라보게 달라진 임윤지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5년 만에 만났는데 심장내과 쪽 전문가가 되었을 줄이야.”임윤지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사실 나도 신기해. 한결 씨 말처럼 정말 이쪽으로 타고난 소질이 있었나 봐.”안하영이 중요한 이름을 놓치지 않았다.“한결? 남자친구야?”그러자 임윤지가 짐짓 때리는 시늉을 했다.“아니야. 그냥 친한 친구야.”안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5년 전에 나한테 떠나니까 찾지 말라는 메시지 하나 달랑 남겼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바로 전화했는데 이미 없는 번호라고 나오더라.”임윤지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바로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나도 겁이 났거든... 그 사람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서.”안하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미안하긴. 네가 떠났을 때 강도혁이 맨날 우리 회사 밑에 와서 날 귀찮게 굴었었어.”과거 임윤지가 강도혁과 만난다고 했을 때부터 안하영이 극구 반대했었다.“윤지야, 강도혁 같은 재벌은 죄다 바람둥이야. 그 자식 고백 받아주기만 해봐. 너랑 바로 절교할 거야.”하지만 결국 임윤지는 강도혁의 여자친구가 되었고 그 때문에 안하영이 그녀의 연락처를 차단하기까지 했었다.그러다 두 사람의 결혼식 당일, 웨딩드레스를 입고 초조하게 안하영을 기다리던 임윤지의 앞에 안하영이 나타났다. 임윤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한아름 안고서.임윤지가 사라진 뒤 강도혁은 두 사람이 무조건 연락을 주고받을 거라 확신했다. 하여 핼쑥해진 얼굴로 끈질기게 매달렸다.“제발 윤지 소식 좀 알려줘. 너무 보고 싶어.”강도혁에게 시달리다 못해 짜증이 난 안하영이 쏘아붙였다.“이미 새 여자도 만났다면서 굳이 왜 찾는 건데?”그가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새 여자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윤지...”안하영이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가식 떨지 마, 강도혁.”“한때는 부잣집 도련님들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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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대표님, 찾았습니다.”비서가 무운시 의료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 하나를 내밀었다.[국제 심장병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려면 무운시로.]강도혁이 초청자 명단을 꼼꼼히 훑었지만 임윤지의 이름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사모님께서 신분을 지우고 떠나셨으니 이름을 바꾸신 게 아닐까요?”아니나 다를까 명단에 임윤지와 느낌이 비슷한 이름 하나가 있었다.[임윤경.]“당장 이 임윤경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사해. 이 사람이 윤지일 확률이 높아.”비서의 일 처리가 아주 신속했다. 전화 몇 통을 돌린 끝에 ‘임윤경’이 묵고 있는 호텔을 알아냈다.1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강도혁이 즉시 차를 돌려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호텔 프런트 직원 역시 공항 직원과 마찬가지로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임윤경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비서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강도혁이 호텔을 다 때려 부쉈을 것이다.“대표님, 차라리 가장 무식한 방법이 낫겠어요. 여기서 기다리시죠.”그렇게 강도혁과 비서가 호텔 로비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임윤지는 방에서 간단히 씻은 뒤 호텔 근처의 작은 선술집에서 안하영과 가볍게 한잔할 생각으로 내려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로비 소파에 앉아 있는 강도혁을 한눈에 발견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필사적으로 태연한 척하며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 강도혁이 다가와 그녀를 잡았다.“윤지야.”임윤지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죄송한데 사람 잘못 보셨어요.”강도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윤지야, 나한테 화내는 건 다 참을 수 있어. 하지만 모른 척만은 하지 마.”임윤지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제 이름은 임윤경입니다. 그쪽이 말하는 윤지가 아니니 자중하세요. 한 번만 더 이러면 당장 경찰 부를 겁니다.”강도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윤지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날 모른다고 할 수 있어?”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강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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