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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식어버린 심장을 버리고: Chapter 1 - Chapter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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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찾았어. 우리 아빠 드디어 이식받을 수 있게 됐어!”강도혁이 덤덤하게 말했다.“알고 있어.”그의 말투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나희가 너의 아빠보다 훨씬 젊어서 회복도 더 잘 될 거고 앞으로 사회나 미래에 기여할 가능성도 더 커. 득실을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이 심장 나희가 먼저 이식받는 게 맞아.”임윤지가 목소리를 높였다.“득실을 따져? 강도혁, 이건 우리 아빠 목숨이야. 저 안에서 기계에 의지해 이 심장 하나만 바라보고 누워 계신다고. 그리고... 백나희가 엊그제 종합검진 받았을 때 겨우 가벼운 협심증이라고 했잖아. 수술 따위 전혀 필요 없는 상태란 말이야.”임윤지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 강도혁에게 온 힘을 다해 던졌다.“네 눈으로 직접 봐. 네가 온실 속 화초처럼 애지중지하니까 조금만 아파도 엄살을 부리지. 백나희가 위독하다고? 강도혁, 너 양심은 있기나 해?”강도혁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얇은 검진 결과지를 훑었다. 하지만 얼굴에 놀란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그 순간 임윤지는 절망에 빠졌다.‘강도혁이... 이미 다 알고 있었어.’그가 고급 코트 안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A4 용지 몇 장을 느긋하게 꺼냈다.“서명해. 심장 우선 이식권을 백나희한테 양도하겠다는 자발적 장기 기증 양도 동의서야.”눈앞이 아득해지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임윤지가 주저앉지 않으려고 차가운 벽을 꽉 잡았다.“꿈도 꾸지 마!”임윤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도혁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임윤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임윤지, 현실을 똑똑히 봐. 네 아빠가 지금 뭐로 간신히 숨을 붙이고 계시지? 중환자실에 있는 비싼 장비들 덕분이야. 서명하고 심장을 나희한테 줘. 그럼 저 장비들이 계속 돌아가도록 보장해줄게. 네 아빠한테 맞는 다음 심장이 나타날 때까지.”강도혁이 하던 말을 잠시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거절해도 돼. 대신 10분 뒤에 네 아빠의 모든 연명 장치를 떼어버리겠다는 동의서에 서명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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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강도혁은 무운시 재계에서도 알아주는 바람둥이였다. 그의 전용기에는 늘 다른 얼굴의 미인이 있었다. 한 파티장에서 임윤지를 만나 첫눈에 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임윤지를 만난 다음 날, 강도혁이 주변의 여자들을 싹 정리하고 전용기 운항 스케줄을 전부 취소했다.무더운 여름인데도 매일같이 4백억 원을 호가하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들고 임윤지의 회사 밑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강도혁의 측근들까지 찾아와 강도혁이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이토록 지극정성을 쏟는 모습을 난생처음 본다며 임윤지를 설득했다.“희대의 바람둥이가 마음을 잡았다는데 한 번만 믿어봐.”임윤지의 친한 친구들 역시 은근히 두 사람을 이어주었다.“강도혁한테도, 너한테도 기회를 한 번 줘.”하지만 임윤지는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았다.그녀와 강도혁 사이에 가로놓인 신분 차이를 잘 알고 있었고 강도혁이 이러는 게 그저 일시적인 호기심일 뿐 며칠 지나면 잊힐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강도혁의 애정 공세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야근을 마친 어느 늦은 밤 창밖에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임윤지가 창문 너머로 빗속에 홀로 서 있는 강도혁을 발견했다. 그의 고급 맞춤 정장이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 엉망이 돼버렸다.그녀가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강도혁이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너. 네가 날 한 번만 바라봐 준다면 내 목숨이라도 줄 수 있어.”그 한마디에 임윤지가 완전히 경계심을 허물었고 임경수의 반대마저 무릅쓰면서 강도혁과 결혼했다.결혼 후 강도혁이 더욱 지극정성으로 잘해줬다.임윤지가 무심코 흘리듯 말한 물건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든 수억 원을 호가하든.사람들은 임윤지가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면 강도혁이 위성에서라도 하나 따다 줄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결혼을 반대하던 임경수조차 태도를 바꿨다.“강 서방은 믿음직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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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임윤지가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8년 동안 살아온 ‘집’으로 돌아왔다.거실 문을 열자마자 백나희가 강도혁의 품에 나른하게 안겨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울었는지 백나희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강도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백나희를 달랬다.“그만 울어, 울보야. 더 울면 눈이 퉁퉁 부어서 개구리 왕눈이 되겠어.”백나희가 강도혁의 가슴을 치며 어리광을 부렸다.“미워. 내가 왜 개구리 왕눈이야? 개구리 왕눈이는 오빠지.”임윤지가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남편과 내연녀가 꽁냥거리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봤다. 마음이 식어버려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강도혁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윤지 왔어? 장인어른은 좀 어떠셔?”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부하들을 시켜 임경수의 연명 장치를 떼어버린 인간이 지금 위선적으로 안부를 묻고 있다.임윤지가 백나희를 힐끗 쳐다봤다.“네 덕분에 아직은 돌아가지 않으셨어.”강도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임윤지, 지금 누구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거야?”‘누구한테 말하냐고? 당연히 내 아빠를 죽이려 한 원수지.’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백나희가 강도혁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늑대 오빠, 토끼가 윤지 언니를 화나게 한 거야?”임윤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늑대? 토끼?”이건 한때 임윤지와 강도혁이 쓰던 애칭이었다. 늑대는 여전히 그였지만 토끼는 백나희로 바뀌어 있었다.이보다 더 기가 찬 일이 있을까?임윤지의 표정이 달라진 걸 강도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애초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지도.그가 백나희를 돌아보며 다정하게 볼을 꼬집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백나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나 입원해 있는 동안 옆에 있어 줄 거지? 간호사가 케어해 주는 건 싫단 말이야. 하나도 다정하지 않아.”‘입원?’임윤지가 고개를 숙였다. 강도혁이 장기 기증 양도 동의서를 받아내자마자 백나희의 수술을 서두른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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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따져 묻는 강도혁의 전화를 끊고 난 뒤 임윤지가 침대에 누워 에어컨 바람을 쐬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백나희를 응시했다.“지금 이 모습을 내가 사진 찍어서 강도혁한테 보낼까 봐 두렵지도 않아?”백나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보내고 싶으면 보내. 도혁 오빠가 안들 뭐 어쩌겠어? 오히려 내가 귀엽다고, 인생을 즐길 줄 안다고 칭찬할걸? 너처럼 하루 종일 죽상 쓰고 있는 여자를 보면 오빠가 얼마나 지겹겠어.”임윤지가 실소를 터뜨렸다.“너처럼 당당한 내연녀는 또 처음 봐. 백나희, 죽어도 남의 가정은 깨지 않겠다면서 큰소리쳤던 거 벌써 잊었어?”백나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수치심과 분노가 밀려와 임윤지에게 따지려고 다가가다가 돌연 그녀와 1m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에 있던 호흡기를 빼서 임윤지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사랑받지 못하는 쪽이야말로 내연녀야. 도혁 오빠가 날 믿을지, 널 믿을지 한번 볼까?”백나희가 임윤지의 발치에 무릎을 털썩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언니, 제발 호흡기 돌려줘. 숨을 못 쉬겠어.”임윤지가 멍하니 서 있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걷어찼다.강도혁이 달려 들어와 백나희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임윤지가 들고 있던 호흡기를 빼앗아 백나희에게 씌웠다.“나희야, 괜찮아?”백나희가 강도혁의 품에 힘없이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언니한테 뭐라 하지 마. 언니도 내가 아저씨 심장을 가로챘다는 생각에 잠깐 이성을 잃어서 그런 걸 거야...”강도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왜 이렇게 착해 빠진 거야? 그러니까 저런 악독한 인간한테 괴롭힘당하지.”그의 시선이 임윤지에게 향했다. 두 눈에 일말의 애정도,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나희한테 심장 이식을 해주기로 결정한 건 나야. 화풀이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 이러면 나희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임윤지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벽 모서리에 달린 CCTV를 가리켰다.“내가 그런 거 아니야. 못 믿겠으면 CCTV 확인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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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임윤지의 머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걸 보고서야 강도혁이 멈추라고 지시했다.강도혁의 뒤에 숨은 백나희가 턱을 치켜든 채 바닥에 처참하게 엎드린 임윤지를 내려다보았다.강도혁이 혐오 가득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툭 던졌다.“이번엔 경고로 끝내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머리를 조아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뒤 더는 임윤지를 거들떠보지 않고 백나희를 달래는 데만 전념했다.임윤지가 이를 꽉 악물었다. 긴 머리가 그녀의 얼굴 절반을 가렸다.그런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발을 내디디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고꾸라져 정신을 잃었다.눈부신 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임윤지가 실눈을 뜬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뒷모습이 점점 또렷해져 자세히 보니 아버지였다.순간 정신이 번쩍 든 임윤지가 임경수의 손을 잡으러 달려갔다. 그런데 분명 한 걸음 떨어진 정도로 가까웠는데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기진맥진할 때까지 달렸으나 임경수의 뒷모습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아빠, 나 버리고 가지 말아요.”...“환자분, 정신 좀 차려보세요.”간호사가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임윤지를 깨웠다.“임신하신 분이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해서 어떡해요? 산모 몸이 약하면 아이도 잘 자라기 힘들다고요.”머리가 윙 해진 임윤지가 간호사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임신했다고요?”간호사가 초음파 검사 결과를 건넸다.“벌써 7주 차네요. 지금이 제일 조심해야 할 시기인 거 아시죠?”임윤지가 아직 평평하기만 한 아랫배를 절망적인 심정으로 어루만졌다.‘왜 하필 지금 강도혁의 아이를 가진 거야?’침대 위에 엎드려 주먹으로 침대를 내리쳤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강도혁이 백나희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이 임윤지가 더 이상 ‘집’이라 부를 수 없게 된 그곳에 홀로 돌아왔다.거실에 강도혁과 찍은 결혼사진이 여전히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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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임윤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없이 창백해지더니 서둘러 가슴팍을 부여잡았다.고개를 들어 한껏 순진무구한 척 서 있는 백나희를 쳐다봤다. 백나희가 재빠르게 면도칼을 손가락 사이로 감추는 모습이 임윤지의 시야에 들어왔다.임윤지가 폭로하기 전에 백나희가 먼저 선수 쳤다.“언니, 도혁 오빠의 시선을 끌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때와 장소는 가려야지.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노출하면 어떡해? 일부러 오빠 망신 주려는 거야?”임윤지가 즉각 반박했다.“백나희, 분명 네가 끊은...”“그만해, 임윤지!”강도혁의 미간에 짙은 혐오감이 서렸다.“너한테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는 걸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딴 더러운 수작으로 시선을 끌려 해?”임윤지의 두 눈에 실망감이 번졌다.“내 드레스 어깨끈을 자른 건 백나희야. 못 믿겠으면 당장 쟤 손가락 사이에 면도칼이 숨겨져 있는지 확인해 봐.”그의 눈빛에 의심이 스쳤다.“나희야, 정말 네가 그랬어?”백나희가 고개를 내저었다.“아니. 오빠, 나 못 믿어?”커다랗고 순진한 두 눈을 깜빡이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내가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그저 불청객일 뿐이네. 당장 나갈게. 두 번 다시 안 오면 되잖아.”강도혁이 다급히 백나희를 품에 끌어안았다.“네가 억울하게 몰릴까 봐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네가 그런 거 아니라고 믿어.”강도혁의 어깨너머로 임윤지를 쳐다보는 백나희의 눈동자에 득의양양함이 스쳤다.“언니가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 그러니까 뭐라 하지 마. 언니 옷 갈아입혀 주고 올게.”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임윤지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넌 나희를 모함하는데 나희는 오히려 네 편을 들어줬어. 임윤지, 적당히 좀 해.”옷을 갈아입은 뒤 임윤지가 백나희를 피해 파티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백나희가 보란 듯이 길을 가로막았다.“임윤지, 네가 무슨 수로 날 이기겠어?”아무도 없는 구석진 곳에 다다르자 백나희가 불쌍한 토끼 같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성을 드러냈다.임윤지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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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병원으로 향하는 길, 강도혁의 눈빛이 갑자기 또렷해지더니 백나희의 조막만 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어서 눈 떠. 안 그러면 늑대가 잡아먹을지도 몰라.”백나희가 입을 삐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흥, 내가 진짜로 기절 안 해서 실망했어?”강도혁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요망한 여우 같은 것.”백나희가 계속 입을 삐죽거렸다.“왜 경찰한테 윤지 언니를 잡아가라고 했어? 진짜로 오빠한테 화내면 어떡하려고?”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네가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윤지가 널 민 건 사실이잖아. 윤지는 고집이 너무 세. 며칠 갇혀 지내면 기 좀 꺾이겠지. 맨날 사람 비꼬는 걸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백나희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난 또 강도혁이 내 수작을 눈치챈 줄.’그러고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애교를 부렸다.“다치진 않았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단 말이야. 내 심장 좀 만져봐...”눈치 빠른 운전기사가 뒷좌석의 가림막을 올렸다. 차 안이 이내 끈적한 열기로 가득 찼다....임윤지가 유치장 차가운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 임경수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그녀를 연행해 온 경찰이 백나희가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48시간 후에 나갈 수 있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백나희를 너무 과소평가했고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깊은 밤, 무자비한 발길질에 정신이 번쩍 들고 나서야 백나희의 악독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백나희가 같은 유치장에 있었던 여죄수들을 매수했던 것이었다.“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들겨 패줘요.”쏟아지는 매타작 속에서 임윤지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를 순순히 내버려 둘 리 만무했다.덩치 큰 여죄수 하나가 그녀의 배를 자비 없이 걷어찼다. 임윤지가 신음을 내뱉더니 하혈하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로 뜨거운 피가 왈칵 쏟아졌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와중에도 몸 안에서 무언가가 무참히 뜯겨 나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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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비행기가 이륙할 무렵 창밖으로 무운시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였다.점차 작아지는 빌딩을 내려다보던 임윤지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7년 전, 그녀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은 채 무운시에 첫발을 내디뎠다.무운시의 공기에 섞여 있던 은은한 꽃향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이 도시에 발을 내딛자마자 바로 마음에 들었다.결혼식 날 강도혁이 평생 임윤지를 배신하지 않겠노라 맹세했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임윤지가 시선을 거두고 임경수의 이불깃을 꼼꼼히 여며주었다. 지루하고 기나긴 비행 내내 임윤지의 신경은 오롯이 임경수에게만 쏠려 있었다.“손님 여러분, 비행기가 한 시간 뒤에 착륙할 예정이니 착륙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임윤지의 팽팽했던 신경이 그제야 풀렸다.“드디어... 드디어 도착했어.”바로 그때 아랫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출발 전 의사가 신신당부했었다.“유산 직후이니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하지만 그녀는 그 지옥 같은 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약만 처방받고 비행기에 올랐다.지금 상공 만 미터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진통제 두 알을 먹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통증이 가라앉기는커녕 갈수록 심해졌다.임윤지가 좌석에 기댄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이것도 하늘이 내리는 벌일까? 아빠의 소원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 내 아이를 지키지 못한 죄를 묻는 거겠지.’끔찍한 고통에 머릿속이 혼미해졌다. 시야에 강도혁의 냉혹한 눈빛이 어른거렸다가 곧이어 백나희의 악독한 얼굴이 겹쳐졌다.그리고 사흘 밤낮으로 이어지던 유치장 여죄수들의 끔찍한 모욕과 폭행까지.누군가 임윤지의 어깨를 짚은 그때 그녀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놀라신 건가요?”임윤지가 고개를 천천히 들자 안경을 쓴 단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혹시 도움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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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으악.”임윤지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비행기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끊어졌던 기억의 파편들이 서서히 맞춰졌다.무운시만 벗어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강도혁이 남긴 상처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지독했다.“깼어요?”어느새 잠에서 깬 남자가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안경 너머 옅은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전 크리스라고 합니다. 여긴 베를린 샤리테 대학병원 입원 병동이고요.”임윤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우리 아빠, 우리 아빠는요?”크리스가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안심시켰다.“아버님도 같은 병원에 계세요. 입원 절차도 다 마치셨고요. 유산 후유증으로 출혈이 심해서 방금 수술을 마쳤고 이제 고비는 넘겼습니다.”임윤지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비웃었다.“출혈이 심했다고요? 전 제가 죽는 줄 알았어요.”크리스의 두 눈에 호기심이 맴돌았다.“무슨 일을 겪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그의 시선이 임윤지의 몸에 있는 시퍼런 멍 자국에 닿았다가 잠깐 멈칫하고는 이어 말했다.“죽을 고비를 넘기면 반드시 큰 복이 온다는 말이 있죠. 모진 시련이 끝났으니 앞으론 찬란하게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임윤지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선생님이 그런 말도 아실 줄은 몰랐네요.”크리스가 안경을 고쳐 썼다.“사실 저 화인국 사람이에요. 이쪽에서 대학교를 다녀서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계속 남아서 일하게 됐죠. 화인국 이름은 심한결이에요. 이 이름을 부르셔도 돼요.”임윤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심한결이요? 인공 심장 연구 센터의 심한결 교수님 말씀이신가요?”그가 바로 3년 전 임윤지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락했던 바로 그 의사였다.당시 임경수가 심각한 심정지를 겪었는데 주치의가 먼저 인공 심장을 이식한 뒤 적합한 공여자를 기다려보자고 제안했었다.임윤지가 수소문 끝에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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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무운시, 어느 병실 안.강도혁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깎은 다음 침대에 누워 있는 백나희에게 한 조각씩 먹여줬다.백나희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오빠, 이렇게 하루 종일 내 곁에만 있으면 윤지 언니가 싫어하지 않아? 언니가 오빠 원망하면...”“그럴 리 없어.”강도혁이 그녀의 말을 가로채더니 아주 자신만만하게 답했다.“윤지는 절대 내 곁을 안 떠나. 아니, 못 떠나.”마음속에서 짙은 질투심이 피어오른 백나희가 떠보듯 물었다.“오빠, 언니랑 이혼하고 나랑 결혼하는 건 어때?”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꽃이 피었고 눈빛에 기대감이 가득했다.과일칼을 쥔 강도혁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눈동자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윤지는 내 와이프야. 그 자리는 아무도 못 흔들어. 나랑 윤지의 감정을 넌 이해 못 해. 네가 돈을 얼마나 원하든 다 줄 수 있어. 하지만 윤지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헛된 꿈은 꾸지 마.”백나희의 얼굴에 피어 있던 웃음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하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하고는 강도혁의 팔을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그냥 농담한 건데 무섭게 왜 그래.”하지만 강도혁의 눈빛이 여전히 차가웠다.“이런 거로 농담하지 마. 윤지가 들으면 상처받아.”백나희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알았어. 앞으론 조심할게.”강도혁의 말투가 그제야 누그러졌다.“핑크 다이아몬드 갖고 싶다고 했지? 이따가 비서더러 가져오라고 할게.”백나희가 즉각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보이더니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그 순간 강도혁은 문득 임윤지에게서 벌써 사흘째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7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푹 쉬고 있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 사 올게.”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백나희가 입을 열었다.“배 안 고픈데...”하지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강도혁이 그저 병실을 나갈 핑계가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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