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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분리수거하고 올게: Chapter 21 - Chapter 30

46 Chapters

제21화. 병든 작가 만들기

제보 문의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기사가 올라왔다.[베스트셀러 작가 서해, 보조 작가 원고 가로챘나]기사에는 한서윤과 최유리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유리가 서윤의 작품을 사실상 집필해 왔고, 수익 배분 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서윤이 대표이사인 남편까지 몰아냈다는 내용이었다.‘서해’는 얼굴도 본명도 거의 공개하지 않은 필명이었다. 서윤은 작품 뒤에 숨는 편이 편했다. 그런데 도진은 한 번의 자료 배포로 그녀가 지켜 온 경계를 모두 열어젖혔다. 예전 인터뷰 사진과 법인 등기 주소, 결혼 연도까지 기사에 붙었다.직원 단체방에도 메시지가 쌓였다. 누구도 도진의 주장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서윤은 새로 선임한 임시 대표를 통해 한 줄만 전달했다.[개별 연락에 답하지 말고 모든 자료를 법무팀으로 보내 주세요.]그 문장을 적는 손이 낯설었다. 전에는 직원이 몇 명인지도 도진에게 물어보곤 했다. 이제 그들의 생계까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했다.근거로 첨부된 것은 도진이 준비해 둔 예상 질의서와 유리의 이름이 들어간 작업표였다. 유리가 자료 조사를 맡았다는 기록은 교묘하게 ‘공동 집필’로 바뀌어 있었다.작업표 자체는 진짜였다. 유리가 시대 자료를 찾고, 오탈자를 검수하고, 서윤이 요청한 장면의 참고 사진을 모은 기록이었다.도진은 거짓말을 만들 때 사실을 전부 버리지 않았다. 사실 옆에 설명 하나를 바꿔 놓았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럴듯했다.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연달아 걸려 왔다. 받지 않자 문자로 질문이 도착했다.[최유리 작가의 원고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윤재하 이사와 언제부터 교제하셨습니까?]질문은 이미 답을 정해 둔 형태였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도진은 그녀가 당황해 한마디라도 잘못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전의 서윤이라면 억울함부터 설명했겠지만, 지금은 입을 여는 순서도 증거라는 것을 알았다.그 사진이 두 번째 기사에 실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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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내 이름을 되찾는 문장

서윤은 공지를 바로 삭제하지 않았다.도진의 계정 권한은 이미 회수됐지만, 예약 게시 기록과 접속 정보를 보존해야 했다. 플랫폼과 변호사가 화면을 저장하고 서버 자료 보존을 요청한 뒤에야 공지가 비공개로 전환됐다.그 사이 캡처는 수백 장씩 퍼져 나갔다.“개인 병력을 공개한 부분은 별도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미란이 말했다.“다만 지금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건 집필자 문제예요. 감정적인 해명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알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 안쪽이 말라붙었다. 첫 유산 뒤 휴재 공지를 썼던 날, 서윤은 독자들에게 개인 사정이라고만 밝혔다. 두 번째에는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재정비라고 적었다. 도진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게 하자며 병원 영수증까지 자신이 보관했다.그 배려가 오늘을 위해 모은 자료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진이 처음부터 계획했을 리는 없었다. 더 무서운 건, 한때 진심으로 서윤을 돌봤던 사람이 필요해지자 그 시간을 무기로 썼다는 사실이었다.서윤은 노트북을 열었다.9년 전 첫 작품의 초고부터 최근 신작까지 폴더가 연도별로 정리돼 있었다. 첫 문장을 쓴 날짜, 편집자에게 보낸 메일, 플랫폼에서 돌려받은 교정본, 다시 고친 파일이 차례로 남아 있었다.작가에게는 완성된 책보다 훨씬 많은 실패한 문장이 있었다. 삭제한 장면과 틀린 설정, 밤새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린 결말. 다른 사람이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은 문체보다 그 과정이었다.검증용 폴더에는 완성본보다 버린 자료가 더 많이 들어갔다. 손으로 그린 인물 동선, 휴대전화에 녹음한 대사 후보, 편집 의견을 받고도 채택하지 않은 결말까지 날짜순으로 묶었다. 서윤만 아는 비밀을 주장하는 대신, 다른 사람이 나중에 만들 수 없는 순서를 내놓는 편이 정확했다.당시 편집자였던 재하가 보낸 메일에는 인물의 선택을 다시 생각해 보자는 짧은 의견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서윤이 장문의 답장을 보낸 기록이 이어졌다.[이 인물은 용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택하는 겁니다. 그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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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아이를 핑계 삼지 마

최유리가 찾아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현관 비밀번호를 바꿔 둔 덕분에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인터폰 화면 속 유리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작가님, 잠깐만 얘기해요.“변호사한테 연락하세요.”- 민우 데리고 갈 데가 없어요. 보증금까지 묶였다면서요.“당장 나가라고 한 적 없어요. 계약 종료 절차와 유예 기간은 대리인 통해 전달할 거예요.”- 도진 오빠가 저도 속였어요.서윤은 대꾸하지 않았다.유리가 투명한 서류 봉투를 화면 앞으로 들어 보였다.- 오빠가 쓰던 태블릿이랑 회사 서류 가져왔어요. 작가님 서명 파일 원본도 있어요.서윤은 화면 속 서류보다 유리의 뒤를 먼저 살폈다.“민우는 지금 어디 있어요?”- 언니 집에 맡겼어요.“그 언니 아들이라고 했던 사람이요?”유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아니요. 그렇게 말하기로 선택한 거예요.”서윤은 현관문을 열지 않았다. 미란에게 연락해 자료를 안전하게 인계할 장소를 정했다. 유리가 정말 증거를 가져왔는지, 도진이 시킨 다른 덫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삼십 분 뒤, 두 사람은 미란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유리는 행사장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화장은 지워져 있었고 손톱 끝이 뜯겨 있었다. 하지만 초라한 얼굴이 책임까지 지워 주지는 않았다.“페이지온 지분이 유리 씨 앞으로 되어 있잖아요.”미란이 물었다.“명의만 제 거예요. 통장이랑 인감은 전부 오빠가 가지고 있었어요.”“그걸 모르고 빌려줬다는 겁니까?”유리는 고개를 숙였다.“알았어요. 작가님 회사에서 돈 들어오는 것도 알았고요. 나중에 작품 수익으로 갚으면 된다고 했어요.”“행사 뒤에 도진 씨를 만났습니까?”“네. 제가 왜 아무것도 못 쓰게 만들어 놨냐고 물었어요. 오빠는 잠깐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고 제가 대표니까 조사도 제가 먼저 받을 거라고…….”유리는 말을 멈추고 두 손을 맞잡았다.“그날 밤 계약서와 통장 약정을 처음부터 다시 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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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지켜야 할 가족

강명숙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문을 열어 주지 않자 경비실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윤은 정미란에게 행선지를 알리고 아파트 로비로 내려갔다.명숙은 서윤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낮췄다.“너, 그날 나랑 한 말 녹음했니?”“네.”“어떻게 어른 말을 몰래 녹음해?”“제가 같이 나눈 대화였어요. 거짓말한 부분 없이 그대로 제출했고요.”“그래도 미리 말을 했어야지.”“미리 말씀드렸으면 사실대로 대답하셨을까요?”명숙은 답하지 못했다. 손목에는 서윤이 지난 생일에 사 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도진이 어머니가 요즘 기운이 없다며 대신 골라 달라고 했던 물건이었다.서윤은 결혼 뒤 매달 생활비를 보냈다. 명절이면 여행비를 드렸고 병원 예약도 대신 잡았다. 명숙은 늘 딸이 생긴 것 같다며 서윤의 손을 잡았다.그 손으로 회사 돈을 받아 유리의 산후조리원 잔금을 냈다.“도진이 너희 집에 찾아왔니?”“안 왔어요. 왜요?”“전화도 안 받아. 회사에서도 쫓겨나고 통장까지 묶였다며. 어떻게 부부끼리 의논도 없이 사람 밥줄을 끊어?”“회사 돈을 빼돌리고 제 서명을 위조했으니까요.”“위조라니. 네가 도진이한테 다 맡겼잖아. 사인 한 번 대신한 걸로 사람을 감옥에 보내려고 해?”“작품 열두 편과 앞으로 쓸 작품까지 넘기는 서명이었어요.”“나중에 돌려놓는다고 했어. 사업하다 보면 명의를 잠깐 바꿀 수도 있지.”명숙은 지난번과 똑같이 범행의 이름을 바꿨다. 빼돌린 돈은 돌려 쓴 돈, 위조는 대신한 서명, 6년의 불륜은 아이 아빠 노릇이었다.“페이지온에서 받은 돈, 어머니 계좌로도 다시 들어갔어요.”명숙의 눈이 흔들렸다.“그건 도진이가 민우 생일에 쓸 거라고 잠깐 맡긴 거야.”“그러니까 수사기관에 그대로 설명하세요.”“가족끼리 정으로 한 일을 전부 죄로 만들 거니?”“가족이라서 제 돈을 숨겨도 되는 건 아니에요.”명숙은 서윤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1704호 보증금은 풀어 줘라. 유리가 애 데리고 갈 데가 없다잖니. 민우가 길바닥에 나앉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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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여긴 이제 당신 집이 아니야

서윤은 혼자 올라가지 않았다.미란이 경찰에 상황을 알리고, 아파트 보안 직원 두 사람이 문밖에서 기다렸다. 도진의 짐을 완전히 빼기 전이라 현관 비밀번호는 바꿨지만, 그는 가지고 있던 비상 열쇠로 들어간 듯했다.서윤은 휴대전화 녹음을 켠 뒤 문을 열었다.도진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만 붉었고, 앞에는 결혼사진 앨범이 펼쳐져 있었다.앨범은 침실 옷장 가장 위 칸에 넣어 둔 것이었다. 도진이 두 사람의 사진을 찾아 꺼내 놓았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1704호에 드나들던 동안에는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았을 것이다.첫 장에는 신혼여행 사진이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엉킨 서윤을 도진이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까지 전부 거짓이었다고 단정하면 오히려 쉬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때 도진이 행복했을 가능성과 오늘의 배신은 함께 존재했다.저때 행복했어도 오늘의 배신까지 없어지지는 않았다.“사람까지 데리고 왔어?”“문밖에 있어.”“내가 너한테 무슨 짓 할까 봐?”“모르지. 지금의 널 내가 어떻게 알아.”도진은 앨범을 덮었다.“앉아. 십 분만 얘기하자.”서윤은 현관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도진은 그 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지적하지 않았다.“어머니 만났어?”“응.”“그 사람 말 듣지 마. 원래 말 험하게 하잖아.”“민우 존재를 알고도 숨긴 건 맞더라.”“그건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어머니까지 끌어들이지 마.”처음으로 도진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다음 문장은 곧바로 달라졌다.“처음엔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 네가 유산하고 계속 나만 밀어냈잖아. 나도 숨 쉴 데가 필요했어.”“내가 병원에서 돌아온 날에도 그 여자 만났어?”“그런 식으로 묻지 마.”“언제부터인지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니까 그러잖아.”“처음 몇 번 만난 날짜까지 누가 기억해.”“아이 생긴 건 알았을 거 아냐.”도진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그때 끝내려고 했어. 유리가 임신했다고 해서……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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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7년이 전부 거짓말은 아니잖아

도진이 나간 뒤 집은 지나치게 조용했다.보안 직원이 비상 열쇠를 받아 갔고 미란은 다음 날 도어록까지 교체하라고 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동안 식탁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결혼사진 앨범은 도진이 펼쳐 둔 자리에 남아 있었다.소파에는 도진이 즐겨 쓰던 담요가 접혀 있었고 욕실에는 면도기가 남아 있었다. 신발장 한쪽도 그의 구두로 가득했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는데 집 안의 물건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서윤은 구두와 옷을 손대지 않았다. 전부 문밖에 쏟아 내고 싶은 충동은 잠깐이었다. 가져갈 기한과 방법을 변호사를 통해 정하면 됐다. 분노한 마음으로 또 다른 다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앨범을 버리지도, 다시 옷장 위에 올려놓지도 않았다. 상자를 하나 가져와 다른 서류와 함께 넣었다. 오늘 밤 무엇을 버릴지까지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가 쌓였다.도진 열두 통, 명숙 네 통, 모르는 번호 일곱 통. 해윤콘텐츠 직원들과 거래처가 보낸 메시지도 이어졌다. 서윤은 도진과 명숙의 번호를 대리인에게 전달한 뒤 알림을 껐다.다음 날부터 회사 정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서윤은 3년 만에 해윤콘텐츠 사무실의 모든 자리를 천천히 둘러봤다. 회의실과 편집실, 자료실까지 합쳐 직원은 열한 명이었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도진의 설명으로만 들었던 사람들이었다.콘텐츠 운영팀의 김민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작가님, 저희도 외주비가 이상한 줄 몰랐습니다. 대표님이 직접 결재한 건이라서…….”“직원들 탓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회사는 계속 운영되는 건가요?”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다. 서윤은 준비해 온 답을 꺼냈다.“정상 계약과 연재는 유지할 거예요. 급여도 밀리지 않게 할 거고요. 대신 각자 가진 업무 기록은 빠짐없이 제출해 주세요. 책임질 일이 있다면 그 기록대로 책임지면 됩니다.”불안한 표정들이 조금씩 풀렸다. 도진은 자신이 없으면 회사가 멈춘다고 말했지만, 회사는 여러 사람이 각자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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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이혼한 날 점심

석 달 뒤, 서윤은 도진과 이혼 조정실에서 다시 만났다.그동안 도진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회사 자료를 반환받는 날에도 양측 대리인만 참석했고, 수사기관 조사 일정도 겹치지 않게 잡았다. 도진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편지를 보냈지만 미란이 보관했다. 소송에 필요한 내용 외에는 서윤에게 전달하지 않았다.서윤은 주 1회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고 현관문 여는 소리만 나도 몸이 먼저 굳었다. 상담사는 도진을 용서하라고도, 빨리 잊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처음으로 자신의 회복에 마감 날짜를 정하지 않는 연습을 했다.석 달이 지나자 혼자 장을 보고 한 끼를 만들어 먹는 일이 조금 덜 낯설어졌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도진은 살이 빠져 있었다. 값비싼 정장 대신 구겨진 셔츠를 입었고, 손목에는 결혼반지도 시계도 없었다. 서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다.각자의 대리인이 앉은 뒤 조정 절차가 시작됐다.해윤콘텐츠 주식의 명의와 의결권은 서윤에게 있었고, 결혼 전 창작한 작품의 저작권은 서윤의 고유 재산으로 정리됐다. 혼인 중 형성된 회사 주식 가치와 공동재산에는 도진의 기여가 일부 인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진이 이미 받은 급여와 성과급, 회사가 청구한 횡령금과 손해배상액을 계산하면 그가 가져갈 금액은 거의 남지 않았다.서윤은 도진이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재산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도진이 정상적으로 일한 기간의 기여는 인정했고, 공동으로 마련한 예금도 법에 따라 나눴다. 대신 회사에서 빼돌린 돈은 회사에 반환하고, 위조와 불륜에 따른 손해는 별도로 책임지게 했다.정확히 나누는 일이 처음에는 분했다. 자신을 속인 사람에게 인정할 몫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그래도 복수라는 이름으로 남의 몫까지 가져오지는 않기로 했다. 자기 것이 돌아오는 데서 선을 그었다.도진 측 변호사는 형사 고소 취하를 조건으로 재산분할 청구를 포기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받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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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이번에도 내 이름으로

이혼 뒤에도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도진은 대표자로서 정상적인 외주 계약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이지온에는 실제 번역가도 편집자도 없었고, 제출된 결과물 대부분은 서윤과 직원들이 이미 만든 자료의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세금계산서 날짜와 송금 직후 유리의 개인 카드 대금이 결제된 시각도 맞아떨어졌다.서명 위조에 대해서는 서윤이 묵시적으로 허락했다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재하와 통화한 날 도진이 “편의상 했다”고 인정한 녹음, 미래 날짜가 적힌 계약서, 원본 서명 이미지의 파일 경로가 남아 있었다.도진의 진술이 바뀔 때마다 확인할 기록만 늘어났다. 그가 지운 파일보다 서버와 메일에 남은 흔적이 더 많았다.수사기관은 페이지온으로 빠져나간 돈과 위조 계약서를 하나씩 확인했다. 도진이 회사 노트북에서 자료를 지우려 한 기록, 서윤의 서명 이미지를 계약서에 삽입한 파일, 유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 메시지가 차례로 증거가 됐다.유리는 업무상횡령과 저작권 침해의 공범으로 조사를 받았다. 협조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태블릿과 대화 기록을 제출하고 피해 금액 일부를 반환한 사실이 수사에 반영됐다.언론에는 민우의 이름도 얼굴도 나오지 않았다.도진이 퍼뜨린 자료에 ‘자녀’라는 표현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서윤 측은 아이와 관련한 기사에는 어떤 확인도 해 주지 않았다. 플랫폼의 공식 발표도 작품과 계약 문제만 다뤘다.1704호의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 유리는 언니가 사는 지방으로 이사했다. 서윤은 그 소식을 변호사를 통해서만 들었다.명숙에게서는 긴 편지가 한 번 왔다. 도진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형량만은 줄여 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는 민우에게도 할머니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서윤은 답하지 않았다.대신 자신의 집을 옮겼다.부동산 중개인은 더 넓고 비싼 집도 보여 줬지만 서윤은 방 두 개와 햇빛이 오래 드는 거실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작업실 문이 침실과 마주 보지 않는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누가 자는지 살피며 밤새 조용히 타자를 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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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내가 정한 첫 번째 저녁

사건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다.판결문 요약을 보낸 미란의 메시지는 아침 일찍 도착했다. 서윤은 내용을 확인한 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하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도진이 몇 년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했지만, 그 숫자를 기다리며 1년을 산 것은 아니었다. 회사가 반환받은 돈은 피해액 전부에 미치지 못했다. 1704호 보증금과 압류된 예금, 도진 명의 자산을 합쳐 약 70퍼센트를 회수했다. 나머지는 민사 판결에 따라 계속 갚아야 했다.잃은 돈이 모두 돌아오지 않았어도 서윤의 삶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돈보다 먼저 돌아온 것들이 있었다.도진은 업무상횡령과 사문서위조 및 행사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피해액 일부가 반환됐지만, 범행 기간이 길고 서윤의 창작자 지위까지 빼앗으려 했다는 점이 불리하게 반영됐다.최유리는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피해 금액 반환 의무와 저작권 침해에 대한 민사 책임도 남았다. 페이지온은 폐업했고 작가 데뷔 계약은 전부 취소됐다.서윤은 판결을 들으러 법원에 가지 않았다.그날은 신작 완결일이었다.마지막 화 예약 공개를 확인한 뒤 직원들과 작은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새 대표는 분기별 결산서를 직접 설명했고, 서윤은 모르는 항목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회계 용어 하나를 묻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해윤콘텐츠는 규모를 줄였다. 무리하게 진행하던 해외 사업 두 건을 접고, 서윤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작품과 2차 사업만 남겼다. 매출은 도진이 대표이던 마지막 해보다 줄었지만 실제 이익과 현금 흐름은 오히려 안정됐다.직원들은 월말마다 각자의 업무 기록을 공유했다. 서윤도 집필 일정이 늦어지면 숨기지 않고 알렸다. 모든 것을 혼자 쥐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권한을 남에게 넘기지 않는 방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신작은 완결 당일 플랫폼 종합 1위에 올랐다.축하 행사에는 오랜 독자와 편집자, 함께 일한 제작진이 초대됐다. 서윤은 무대에서 작품 이야기를 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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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버리지 않기로 한 것들

세 달 뒤, 서윤은 새집의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재하와의 첫 저녁 뒤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영화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나왔고, 각자 고른 책을 바꿔 읽었다. 재하는 서윤이 답장을 늦게 보내도 이유를 묻지 않았고, 서윤은 바쁠 때는 다음 주에 보자고 먼저 말했다.한 달이 지났을 때 재하가 정식으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고마워서 그러는 건지 걱정되면 더 기다리겠습니다.”“고마운 건 맞아요. 그런데 고맙기만 한 사람이랑은 매주 저녁 안 먹어요.”서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재하는 입가가 조금 풀린 채 그 손을 잡았다. 서윤은 맞물린 손가락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그날 현관 앞에서 재하가 물었다.“키스해도 돼?”“응.”첫 입맞춤은 짧고 조심스러웠다. 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서윤은 눈을 감은 채 재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 과거와 비교할 필요 없는, 지금의 마음이었다.결혼사진과 신혼여행 기념품, 도진이 쓰던 오래된 명함, 효력을 잃은 법인 인감함이 한데 들어 있었다. 이사하는 날 결정을 미뤄 창고에 넣어 둔 물건들이었다.서윤은 거실 바닥에 앉아 하나씩 꺼냈다.사진 속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을 거짓이라고 부르지는 않기로 했다. 그때 행복했던 자신까지 부정하면 도진이 가져간 시간이 더 커질 것 같았다.사진은 사진대로 남았고, 결혼은 끝났다. 둘은 다른 사실이었다.서윤은 앨범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을 빼 따로 보관했다. 나머지는 종이와 비닐을 나눴다. 액자에서는 유리를 빼고 금속 고정핀을 분리했다.도진의 명함은 미련 없이 종이 상자에 넣었다. 법인 인감함은 회사에 확인해 이미 폐기 처리된 물건임을 확인한 뒤 일반 폐기물 봉투에 담았다.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서윤이 책장 조립을 도와 달라며 그날 아침 임시 비밀번호를 보내 줬다. 재하는 메시지를 받고도 정말 들어가도 되느냐고 다시 확인했다. 번거로울 만큼 묻는 태도가 서윤에게는 편했다.“나 왔어.”재하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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