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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분리수거하고 올게: Chapter 31 - Chapter 40

46 Chapters

제31화. 자고 갈래?

마지막 상자를 버린 지 보름이 지난 토요일, 서울에는 밤부터 비가 내렸다.서윤과 재하는 거실 바닥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재하가 고른 영화였는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범인이 보였다. 서윤은 참지 못하고 리모컨을 들었다.“저 비서가 범인이야.”“아직 사람도 안 죽었어.”“그래서 지금 끄자는 거야. 두 시간 뒤에 확인하면 더 억울하잖아.”“내가 고른 건데.”“지난번에 내가 고른 것도 삼십 분 만에 나왔잖아.”재하는 반박하지 못하고 남은 와인을 마셨다. 화면이 꺼지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시계는 열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재하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택시 부를게.”“이 비에?”“아까보다 덜 와.”거짓말이었다. 베란다 유리에는 빗물이 줄을 지어 흘렀다. 재하는 와인도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고, 내일 아침 일정도 없었다. 그래도 당연한 듯 머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서윤은 그가 호출 화면을 여는 것을 보다가 물었다.“자고 갈래?”재하의 손가락이 멈췄다.“괜찮겠어?”“안 괜찮으면 안 물었지.”“비 때문에 붙잡는 거면 소파에서 잘게.”“윤재하.”서윤이 이름을 부르자 그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응.”“내가 자고 가라고 했어. 이유까지 대신 정하지 마.”“알았어.”대답은 빨랐지만 재하의 귀가 조금 붉어졌다. 서윤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빈 잔을 치웠다.재하는 주방에서 잔을 씻고, 서윤은 욕실 수납장에서 새 칫솔을 꺼냈다. 포장을 뜯으려다 잠시 손이 멈췄다. 세면대 위 컵에는 칫솔 하나만 꽂혀 있었다. 혼자 살기 시작한 뒤 일부러 하나만 두었던 자리였다.“수건 어디 있어?”욕실 밖에서 재하가 물었다.서윤은 새 칫솔을 컵 옆에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아래 서랍. 회색은 쓰지 마. 그건 걸레야.”“왜 수건이랑 같이 둬?”“세탁하고 잘못 넣었어.”“지난번 설명서도 잘못됐고?”“그 얘기 계속할 거야?”“오늘까지만.”재하는 수건을 꺼내 들고 웃었다. 긴장이 풀리자 서윤도 따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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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제 남자친구요

사진이 올라온 것은 사흘 뒤였다.서윤의 신작 사인회가 끝난 저녁, 재하가 행사장 뒤편에서 코트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둘 다 선명하지 않았지만 제목에는 물음표가 붙었다.[서해 작가, 전 담당 이사와 열애 중?]기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짧은 글이었다. 행사에 왔던 관객이 올린 사진을 연예 계정이 가져다 썼고, 다른 계정들이 같은 문장을 복사했다.김나리가 태블릿을 들고 작업실로 들어왔다.“작가님, 홍보팀에서 대응 여부 물어보는데요.”“작품 행사 사진이잖아요. 저 사람들은 제 책 얘기는 안 해요?”“열애 쪽이 조회 수가 다섯 배 높대요.”“그럴 것 같았어요.”서윤은 화면을 확대했다. 재하가 코트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자신은 한 손에 독자가 준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었다.숨기고 싶은 사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대응하지 말죠. 사생활은 확인하지 않는다고만 해 주세요.”나리는 화면을 한 번 더 내렸다. 좋은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건 당시 재하가 서윤을 도왔다는 사실을 두고 처음부터 둘이 관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댓글도 보였다. 도진이 퍼뜨렸던 이야기를 제목만 바꿔 다시 붙인 문장이었다.“이건 허위 사실로 모아 둘까요?”서윤은 댓글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날짜랑 주소만 보존해 주세요. 대응할지는 법무팀이 보고 정하게 하고요.”“작가님 계정에서는요?”“오늘 예정된 신작 외전 공지만 올릴게요.”전 같으면 댓글을 밤새 확인했을 것이다. 해명하지 않은 문장이 사실로 굳을까 두려워 한 사람씩 붙잡고 설명하려 했을지도 몰랐다.지금은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허위 기사 삭제 요청은요?”“사귀는 건 허위가 아니니까요.”나리의 눈이 잠깐 커졌다. 곧 업무용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입꼬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네. 홍보팀에 그렇게 전달할게요.”“나리 씨.”“네.”“웃어도 돼요.”“이미 다들 알고 있었어요.”“누가요?”“회사 사람들 전부요.”서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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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대신 결정하지 마

두 사람의 첫 다툼은 사소하지 않은 일에서 시작됐다.신작의 영상화 계약을 준비하던 제작사에서 윤재하를 각색 자문으로 요청했다. 9년 전 첫 원고부터 최근작까지 읽었고, 플랫폼의 원작 관리 체계를 잘 안다는 이유였다.서윤이 그 사실을 들은 것은 제작사 미팅 자리였다.“윤 이사님은 고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제작사 대표가 무심코 꺼낸 말에 서윤은 들고 있던 계약서를 내려놓았다.“언제요?”“지난주에요. 작가님과 사적인 관계라 공정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하셔서요. 저희는 양쪽에서 동의하시면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단호하시더라고요.”미팅을 마친 뒤 서윤은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저녁에 만나.”“무슨 일 있어?”“만나서 얘기해.”재하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왔다. 서윤은 카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손을 흔들지 않았다.그가 맞은편에 앉았다.“제작사 다녀왔어?”“알고 있었네.”“자문 제안 얘기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재하는 곧바로 변명하지 않았다. 물잔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서윤을 보았다.“내가 고사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사귀는 상태에서 네 작품 계약에 들어가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고사한 걸 묻는 게 아니야. 왜 말하지 않았냐고.”“말하면 네가 신경 쓸 것 같았어.”“내가 신경 쓸지 말지도 네가 정했네.”재하의 입이 다물렸다.서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짧게 말하려고 애썼다.“네 판단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나도 네가 자문을 맡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그럼…….”“결론이 같으면 과정은 없어도 돼?”“그런 뜻은 아니야.”말을 꺼낸 재하가 스스로 멈췄다. 도진이 자주 쓰던 문장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미안해.”“지금 바로 사과받으려고 부른 거 아니야.”“알아.”“내 일 때문에 네가 뭘 포기하거나 물러날 때는 말해 줘. 허락받으라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데서 나를 이유로 결정하지 말라는 거야.”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말하면 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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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이것만 해 줘

마감을 사흘 앞두고 서윤의 속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커피를 빈속에 마신 탓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을 거르고 저녁까지 버티자 명치 아래가 단단하게 조였다. 김나리가 죽을 사 오겠다고 했지만 서윤은 원고 한 장만 더 보고 먹겠다며 돌려보냈다.그 한 장이 다섯 장이 됐다.저녁 약속을 취소하려고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어디 아파?“그냥 속이 좀 안 좋아.”- 병원 갈래?“내일 가도 돼.”- 내가 갈까?“질문 하나씩 해.”재하가 잠시 조용해졌다.- 지금 혼자 있고 싶어?서윤은 대답하려다 책상 위 식은 커피를 보았다. 혼자 있을 수는 있었다. 혼자 있고 싶은지는 달랐다.“아니.”- 그럼 갈게. 병원은 네가 정해.재하는 삼십 분 뒤에 도착했다. 손에는 약봉지가 아니라 얇은 외투와 생수만 들려 있었다.“약 안 사 왔어?”“무슨 병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맞는 말인데 조금 얄밉네.”“걸을 수 있어?”서윤은 일어서다 다시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 재하가 팔을 내밀었지만 먼저 붙들지는 않았다. 서윤이 손을 얹자 그제야 힘을 받쳐 주었다.야간 진료를 하는 내과에서 급성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며칠 동안 자극적인 음식과 커피를 피하고 처방약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입원은 안 해도 됩니다. 대신 오늘은 일하지 마세요.”재하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을 나오자 서윤이 말했다.“왜 네가 대답해?”“대답 안 했어. 그냥 들었다고 한 거야.”“집에 가서 노트북 숨길 생각 하지 마.”“안 숨겨.”“선을 뽑는 것도 안 돼.”“그런 적 없어.”“미리 말하는 거야.”재하는 편의점에서 흰죽과 이온음료를 샀다. 계산대 앞에서 초콜릿을 집었다가 서윤의 시선을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그건 네가 먹으면 되잖아.”“네 앞에서 먹으면 화낼 것 같아서.”“사 와. 한입만 뺏어 먹게.”“의사가 자극적인 거 먹지 말랬어.”“초콜릿이 얼마나 자극적이라고.”“방금 고개 끄덕였다고 혼났는데 이번엔 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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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내가 정한 회사

해윤콘텐츠를 인수하고 싶다는 제안은 봄에 들어왔다.국내에서 손꼽히는 콘텐츠 기업이었다. 제안서 첫 장에는 서윤이 예상한 것보다 큰 금액이 적혀 있었다. 회사 지분 전부와 서해라는 필명의 향후 5년간 우선 계약권을 함께 넘기는 조건이었다.김나리가 숫자를 보고 작게 숨을 들이켰다.“이 정도면 팔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뒤까지 읽어 봐야죠.”서윤은 제안서를 덮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숫자를 잘 아는 사람에게 먼저 내밀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재무 담당자와 새 대표, 저작권 변호사를 차례로 불렀다.회의는 세 번 열렸다.첫 번째 회의에서는 회사의 현재 가치를 계산했다. 두 번째에는 인수 뒤 직원들의 고용 조건과 진행 중인 계약을 확인했다. 세 번째에야 서윤의 집필권과 필명 사용 범위를 다뤘다.직원들에게도 제안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확정되지 않은 금액까지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인수가 성사되면 근무지와 고용 형태가 바뀔 수 있다고 설명했다.“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의견을 듣겠지만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약속할 수는 없어요.”누군가는 큰 회사의 복지를 기대했고, 누군가는 지금 팀이 흩어지는 것을 걱정했다. 회의가 끝난 뒤 나리가 남았다.“작가님은 뭘 원하세요?”서윤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그걸 확인하려고 회의하는 중이에요.”예전에는 대표가 이미 정한 결론을 직원들에게 통보했다. 이번에는 의견을 듣되 결정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기로 했다.인수 금액은 충분히 컸다. 대신 서윤이 다음 작품을 쉬고 싶을 때도 회사의 연간 출간 계획에 맞춰야 했다. 영상화와 해외 번역 계약의 최종 승인권도 인수사에 넘어갔다.“작가님이 경영에서 완전히 빠지고 집필만 하실 수 있다는 장점은 있습니다.”새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윤은 그 문장을 들으며 손에 든 펜을 굴렸다.집필만 하면 된다는 말은 한때 가장 달콤했다. 계약과 숫자는 다른 사람이 처리하고 자신은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 결과가 나빴다고 해서 모든 도움을 거부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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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같이 살아 볼래?

재하의 전세 계약 만료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처음에는 어느 동네로 옮길지만 이야기했다. 재하는 회사와 가까운 곳을 원했고, 서윤은 주차가 편한 곳을 골라 보라고 했다. 둘은 주말마다 부동산 앱을 켜 놓고 서로 마음에도 없는 집을 평가했다.“여긴 거실이 너무 작아.”“혼자 사는데 이 정도면 돼.”“책은 어디 둬?”“회사에 두면 되지.”“네 책 회사에 있는 거 싫어하잖아.”“그럼 버릴게.”“그 말 취소해.”서윤이 재하의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그가 웃으며 다시 가져갔다.집을 세 곳쯤 보고 돌아온 날, 재하는 서윤의 현관 앞에서 한참 신발을 신지 않았다.“왜 안 가?”“물어볼 게 있어.”“물어봐.”재하는 신발장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같이 살아 볼래?”서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싫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집 안의 물건들이 갑자기 두 사람 몫으로 보였다. 침실 서랍과 냉장고, 혼자 쓰는 작업실, 서윤만 알고 있는 현관 비밀번호까지.재하는 침묵을 채우지 않았다.“오늘 대답 안 해도 돼.”“네 계약 만료 때문에 묻는 거야?”“그것도 계기는 됐어. 그렇지만 살 집이 없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내 집으로 들어오겠다는 뜻이고?”“네가 괜찮으면. 새집을 같이 구해도 되고.”“생각해 볼게.”“응.”재하는 평소처럼 돌아갔다.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도, 괜찮은 척 웃지도 않았다.서윤은 사흘 동안 생각했다.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때 재하가 거실에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감 때문에 예민해진 날, 욕실에 그의 수건이 걸려 있는 것도 떠올렸다. 불편한 장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늦게 일을 끝내고 나왔을 때 불이 켜진 주방과, 각자 다른 책을 읽다가 같은 시간에 잠드는 밤도 있었다.넷째 날, 서윤은 재하를 집으로 불렀다.식탁 위에는 세 장짜리 문서가 놓여 있었다.“이게 뭐야?”“같이 살 때 지킬 것.”재하가 첫 줄을 읽었다.각자의 수입과 자산은 따로 관리한다. 공동생활비는 정해진 금액만 공동 계좌에 넣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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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다시 결혼할 이유

같이 산 지 여섯 달이 지나자 주변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회사 직원들이었다.“작가님, 이사님이랑 결혼하시면 청첩장은 꼭 주세요.”점심을 먹다 들은 말에 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질문한 직원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바꿨다.“아니, 꼭 하신다는 뜻은 아니고요. 혹시 언젠가…….”“아직 계획 없어요.”서윤은 그 말만 하고 다시 밥을 먹었다.두 번째는 독자 행사에서였다. 연애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었지만 사진이 몇 번 더 찍힌 뒤 둘의 관계는 공공연한 이야기가 됐다.한 진행자가 분위기를 띄우겠다며 물었다.“요즘 행복해 보이시는데 혹시 좋은 소식도 기대해 봐도 될까요?”서윤은 웃지 않았다.“제 신작 소식은 기대하셔도 됩니다.”객석에서 짧은 박수가 나왔고 진행자는 곧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재하는 그 일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넌 아무렇지도 않아?”서윤이 묻자 그가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어 기어 옆에 놓았다.“뭐가?”“사람들이 자꾸 결혼 얘기하는 거.”“불편하지.”“나 때문이야?”“우리가 할 말을 남이 먼저 하니까.”서윤은 창밖을 보았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앞차가 움직이지 않아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재하야.”“응.”“너는 다시 결혼하고 싶어?”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재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너랑은 하고 싶어.”서윤의 손끝이 가방 끈을 만졌다.“언제부터?”“같이 살기 전부터 생각은 했어.”“왜 말 안 했어?”“네가 결혼이라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됐는지 몰랐으니까.”“지금은?”“지금도 몰라.”재하는 잠시 앞을 보다가 덧붙였다.“그래서 묻지 않았어.”집에 도착한 뒤 서윤은 평소보다 오래 손을 씻었다. 재하는 옷을 갈아입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대답을 재촉하지 않겠다는 말을 행동으로 지켰다.서윤은 거실 불을 끄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도진과 결혼할 때는 고민할 것이 적었다. 오래 만났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준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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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이번에는 내가 먼저(完)

서윤이 결심하는 데는 두 달이 더 걸렸다. 그동안 재하는 약속한 대로 자신의 재산과 채무 자료를 정리했다. 예금과 연금, 남아 있는 자동차 할부금까지 빠짐없이 적었다. 서윤도 회사 지분과 저작권 수입, 부동산과 소송 뒤 남은 채권을 공개했다. 서윤은 미란에게, 재하는 별도로 선임한 변호사에게 각각 검토를 받았다. 같은 편이 될 사람일수록 각자의 조언을 따로 듣는 편이 좋다는 것이 미란의 의견이었다. 부부재산계약서는 열한 장이 됐다. 서윤의 기존 저작권과 회사 지분은 서윤의 재산으로 남겼다. 재하의 기존 자산과 채무도 그가 책임졌다. 공동생활비와 앞으로 함께 살 집에 관한 항목은 두 사람이 같은 금액을 부담하는 것으로 정했다. 어느 쪽도 상대의 업무상 결정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법적 효력이 크지 않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그대로 넣었다. “이 조항은 선언에 가깝습니다.” 재하 측 변호사가 말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적어 두고 싶어요.” 재하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계약서를 다 읽은 날에도 그는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윤은 처음에는 기다려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자 조금 이상했다. 반지는 서윤이 먼저 보러 갔다. 보석이 큰 것보다는 매일 끼고 타자를 칠 수 있는 얇은 반지가 좋았다. 재하의 손가락 둘레는 잠든 사이 실로 재지 않고 직접 물었다. “반지 치수 몇이야?” “왜?” “필요해서.” 재하는 이유를 더 캐묻지 않고 오래전에 맞춘 정장 영수증을 찾아 알려 줬다. 서윤은 같은 디자인의 반지 두 개를 주문해 작업실 서랍에 넣어 두었다. “너 이제 안 물어봐?” 저녁 설거지를 하던 재하가 수도를 잠갔다. “뭘?” “결혼.” “내가 물은 적 없는데.” “차에서 하고 싶다고 했잖아.” “하고 싶다고만 했지. 하자고는 안 했어.” 서윤은 행주를 든 채 그를 바라보았다. “왜?” “네가 먼저 결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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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화.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

작은 결혼식을 치른 다음 날, 식탁은 축하 선물의 보증서와 교환 영수증으로 가득했다.서윤은 같은 크기의 냄비가 세 개나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 개를 상자에 도로 넣었다. 재하는 옆에서 그릇에 붙은 가격표를 떼다가 손을 멈췄다.“이건 누가 보냈지?”“나리 씨. 카드 안 읽었어?”“네 앞으로 온 거라 안 열었어.”“이제 부부인데도?”“부부면 남의 편지 열어도 돼?”서윤은 대답 대신 카드 봉투를 뜯어 재하 앞에 펼쳤다. 축하 문장 아래에 ‘두 분 싸우실 때도 밥은 챙겨 드세요’라고 적혀 있었다.“우리가 회사에서 그렇게 자주 싸웠나?”“한 번.”“한 번인데 나리 씨가 어떻게 알아?”“네가 다음 날 회의에서 나만 빼고 커피 돌렸잖아.”서윤은 기억나지 않는 척 냄비 상자를 닫았다. 재하가 웃으며 테이프를 붙였다.출근하자마자 김나리가 태블릿을 들고 작업실로 들어왔다.“작가님, 생활 잡지에서 부부 인터뷰 요청이 왔어요.”“결혼한 지 며칠 됐다고요?”“혼인신고 기준이면 한 달 넘었죠.”“그걸 어떻게 알았대요?”“식사 사진이 올라왔어요. 얼굴은 거의 안 나왔는데 미란 변호사님이 축하한다고 올린 꽃 사진에 작가님 계정이 표시됐거든요.”서윤은 나리가 내민 기획서를 읽었다. 첫 장에는 큼직한 제목이 붙어 있었다.[배신을 딛고 찾은 진짜 사랑, 서해 작가의 두 번째 결혼]촬영 장소는 두 사람이 사는 집, 질문에는 전남편과 재하를 비교하는 항목까지 들어 있었다. ‘상처 입은 여자를 기다려 준 남자의 순애보’라는 문장도 보였다.“안 해요.”“조건은 꽤 좋아요.”“금액 때문에 안 하는 게 아니에요.”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기획서를 닫았다.“그럼 결혼 사실만 확인해 줄까요?”서윤은 잠깐 생각했다. 숨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설명할 의무도 없었다. 7년의 결혼이 처음부터 전부 거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했던 시간까지 가짜로 만들어야 지금의 사랑이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두 문장만 보내 주세요. 최근 혼인신고를 마쳤고, 사생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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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화. 싱가포르

재하가 싱가포르 법인 파견 제안을 받은 것은 결혼식에서 열흘이 지난 월요일이었다.저녁을 먹고 난 뒤 그는 식탁을 닦기 전에 얇은 서류철부터 올려놓았다. 표지에는 아시아권 원작 사업 통합 프로젝트라고 적혀 있었다.“회사 일인데 내가 봐도 돼?”“공개해도 되는 부분만 출력했어.”“문제가 생겼어?”“제안받았어. 다음 달부터 여섯 달.”서윤은 첫 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현지 법인에 흩어진 번역·영상화 계약 체계를 정리하고 새 팀을 만드는 일이었다. 재하가 몇 년 전 해외 사업을 맡았던 경력과 편집 실무를 모두 해 봤다는 점이 추천 사유로 적혀 있었다.“대답했어?”“아직.”“언제까지 해야 해?”“금요일.”월요일 저녁이었다. 재하는 제안서를 받은 날 곧장 가져왔다.서윤은 그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서류에 적힌 여섯 달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렵게 결혼한 뒤 함께 보낸 시간보다 길었다. 식탁 위에서 축하 선물의 흔적도 아직 다 치우지 못했다.“가.”말이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재하는 서류를 덮지 않았다.“내가 가면 좋겠어?”“좋은 기회잖아.”“그건 회사가 정한 이유고.”“너도 하고 싶어서 가져온 거 아니야?”“하고 싶어.”짧은 대답이 서윤의 가슴 한가운데 걸렸다.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포기하겠다는 말은 더 싫었다. 그런데 막상 가고 싶다는 말을 듣자 서운했다.“그럼 가면 되지.”“서윤아.”“왜 자꾸 물어? 허락받으려고 보여 준 거야?”“아니. 나한테만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니까 같이 얘기하려고.”“얘기해서 내가 싫다고 하면?”재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것도 결정할 때 생각해야지.”“그러다 안 가면 내가 막은 사람이 되잖아.”“내가 선택하면 내 선택이야.”“말은 쉽지.”서윤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목소리가 높아지기 전에 물이라도 마시려 했지만 재하가 따라오지 않는 것이 또 서운했다.냉장고 문을 열자 어제 먹고 남은 케이크가 보였다. ‘두 사람의 시작을 축하합니다’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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