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원수의 딸과 바람난 남친: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21화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고 마당에 쓰레기들이 수북이 던져졌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물쇠를 따고 침입하려다 이웃에게 발각되자 다급히 도망치기도 했다.이 모습들이 촬영되어 ‘사회적 해악의 거처를 청소한다’라는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인터넷에 2차로 유포되었고 네티즌들의 뜨거운 환호를 이끌어냈다.차도현의 부하가 옛 저택이 파손된 사진과 인터넷상의 여론을 정리해 서재에서 국제 화상 회의를 진행 중이던 차도현에게 즉시 보고했다.보고를 들은 후 차도현은 재무제표 데이터에서 눈길조차 떼지 않은 채 그저 손을 올려 문 쪽을 향해 검지를 두 번 까딱거렸다.“가서 처리해.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은 삭제할 건 삭제하고 차단할 건 차단해. 옛날 집은 사람을 보내 원상복구시키고 누구의 짓인지 알아봐.”“알겠습니다.”“잠깐.”부하가 허리를 숙이고 나가려던 그때 차도현이 뭔가 생각났는지 매끈한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며 덧붙였다.“조용히 처리해. 그 사람이 놀라지 않게.”여기서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말하지 않아도 명확했다. 부하가 지시를 받고 물러갔다.그런데 10분도 채 되지 않아 부하가 다시 돌아와 서재 문 앞에서 보고했다.“대표님, 사모님은... 우리가 손댈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키보드를 두드리던 차도현이 멈칫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부하가 태블릿 PC를 그의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화면에 현재 SNS에서 가장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검색어들이 떠 있었다.[#경미란 상간녀 과거 파헤치기.][#송지연 상간녀 행각 빼박 증거.][#민해준, 송지연 양다리 타임라인 분석.]밑에는 상세한 글과 사진, 심지어 오랫동안 묻혀 있던 흐릿한 옛날 사진과 메신저 대화 기록 캡처본까지 첨부되어 있었다.증거가 완벽했고 가리키는 사람도 명확했으며 폭로의 리듬이 단호하고 빈틈이 없었다.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안유경을 향해 빗발치던 비난이 순식간에 경미란과 송지연 모녀를 향한 ‘상간녀’ 비판의 폭풍 속에 집어 삼켜졌다.여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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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역시 저렇게 겉보기에 멀쩡한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까지 행사해 놓고 불쌍한 척을 해?][그 나물에 그 밥이라더니, 집안 꼴 잘 돌아간다!]이로써 송씨 가문은 완벽하게 ‘정리’되었다.여론의 거센 폭풍이 세 식구 모두를 휩쓸어 버렸다. 그들은 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하느라 서로를 챙길 여력조차 없었다.차도현이 화면에 뜬 완벽한 ‘확인 사살’을 지켜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의 아내는 단순히 반격할 줄 아는 수준을 넘어 상대에게 단 한 줌의 동정표조차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뿌리뽑기를 보여줬다.그런데 안유경의 깔끔하고 완벽한 반격이 민해준을 폭발하게 만들었다.송지연이 쏟아지는 비난에 겁에 질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종일 눈물만 흘렸고 전화기 너머로 미쳐버릴 것 같다며 울부짖었다.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송지연을 향한 모욕적인 글들을 보던 민해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결국 민해준이 길모퉁이에 자리한 낡은 카페 입구에서 안유경을 가로막아 섰다.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딸랑이는 풍경 소리가 울려 퍼졌다.민해준이 이곳에 있을 줄 몰랐던 안유경이 잠시 발걸음을 멈칫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그를 비껴가려 했다.“얘기 좀 해.”민해준이 그녀의 앞길을 막자 안유경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우리 사이에 더 할 말이 남았어?”“5분만.”안유경의 창백한 얼굴을 본 민해준이 저도 모르게 반쯤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5분이면 돼.”그녀가 말없이 몇 초간 그를 응시하다가 결국 카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민해준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가녀린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입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는 3년 전 유행하던 스타일이었다. 그는 이 옷을 기억하고 있었다.두 사람이 예전에 자주 앉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카페에 흐르는 나른한 재즈 선율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민해준이 메뉴판을 받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말했다.“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요. 연하게요.”주문하고 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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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안유경이 민해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처음에 같이 판을 짜서 송지연한테 복수하자고 한 거 너 아니었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맛보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게 대체 누구였냐고!”“민해준, 도중에 차에서 먼저 내린 건 너야. 그것도 모자라 핸들을 꺾어서 날 치어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적반하장으로 굴어? 아주 갈수록 노련해지네.”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안유경의 표정을 보던 민해준은 눈앞의 그녀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처음? 안유경, 감히 그때 얘기를 꺼내?”민해준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눈동자 속에 아픔이 스쳐 지나갔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매정하기 그지없었다.“너나 네 아비나 전부 자업자득이야.”자업자득이라는 단어가 안유경의 귓전을 날카롭게 찔렀다.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고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민해준을 쳐다봤다.몇 초 동안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한참 뒤에야 정말로 민해준이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거칠게 움켜쥔 듯 숨이 턱 막히는 통증이 밀려왔다. 이내 그 지독한 통증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분노로 변해 눈가에 남아있던 마지막 습기마저 싹 말려버렸다.“자업자득이라...”안유경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이를 악물고 말했다.“민해준, 네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니까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말을 마친 안유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귀청을 때리는 마찰음을 냈다.테이블이 흔들리면서 커피 잔이 덜컹거린 바람에 진한 액체가 몇 방울 튀어 새하얀 테이블보 위에 눈에 띄는 얼룩을 남겼다.안유경은 더 이상 민해준을 거들떠보지 않고 테이블 위의 트렌치코트를 챙겨 나가려 했다.“안유경!”민해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그 역시 덩달아 일어섰지만 쫓아가진 않았다.안유경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지금 나가면 나 바로 남산 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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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민해준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안유경의 결연한 뒷모습이 문밖의 거리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다음 날 아침, 안유경의 어머니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터져 나왔다.안유경이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그 글을 읽어내려갔다.그녀의 어머니가 남편의 살인 사건 이후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남편이 누명을 쓴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했다.그리고 길거리에서 울부짖으며 소란을 피워 이웃들의 원성을 사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이 모든 사정을 상세히 아는 사람은 민해준뿐이었다.‘참 빨리도 움직였네. 그렇게 날 매장시키고 싶어?’민해준의 의도대로 인터넷에 안유경을 향한 비난의 물결이 넘쳐났다. 주요 커뮤니티의 실시간 검색어와 댓글 창이 그녀의 가족을 공격하는 글로 도배되었다.[살인범이랑 정신병자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라니, 뿌리부터가 썩었네.][어쩐지 미친개처럼 송씨 가문을 물고 늘어진다 했어. 집착이 유전이었구나. 병이 있으면 치료를 받지 왜 기어 나와서 사람들을 괴롭혀?][매일 누명이라고 소리치더니 병 때문에 생긴 환각이었어? 저 여자 정신 상태 좀 조사해서 더 이상 헛소문 못 퍼뜨리게 가둬야 할 것 같은데?][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집안 전체가 정상이 아니네. 엄마가 멀쩡했으면 저렇게 독사 같은 딸이 나왔겠어?][동정심 유발하려는 건가? 자기 엄마 아픈 걸 방패 삼다니. 정말 대단한 효녀 나셨네.]이런 글들은 안유경만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부모님까지 반복해서 짓밟았다.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이었다.그 이름, 상처뿐인 그 과거가 다시 양지바른 곳으로 끌려 나와 사람들의 구설에 올랐고 멋대로 난도질당하고 있었다.안유경이 창가로 걸어갔다. 우중충한 하늘이 도심을 짓누르고 있었다.문득 어머니의 병세가 가장 심했던 몇 년 전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하늘이 흐렸다. 어머니가 요양원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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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다른 한편 안유경도 경미란의 심리 검사 진단서를 조사 중이었지만 아직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그러던 차에 차도현의 비서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안유경이 멈칫했다가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을 클릭했다.내용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아주 상세한 조사 보고서와 함께 여러 장의 비교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보고서는 경미란의 중증 우울증 진단서에 문제가 있음을 명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서류에 찍힌 도장과 의사의 서명 등 여러 군데가 해당 심리 클리닉에서 사용하는 실제 양식과 달랐다.결론은 자명했다. 위조된 진단서였고 이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거짓말이 일상인 경미란과 송지연 모녀라면 증거를 위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터.안유경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톡톡 눌렀다.차도현의 일 처리 속도에 안유경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제 막 귀국해서 회사 일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사건이 터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런 결과물을 내놓았다.누가 차도현 아니랄까 봐 일 처리가 지극히 효율적이었다.안유경이 보고서를 저장한 뒤 컴퓨터를 껐다.창밖이 어느새 어두워졌고 도심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안유경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밤 9시가 다 되어갈 무렵 차도현이 퍼스트 강남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켜진 스탠드 조명 하나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안유경이 무릎 위에 얇은 담요를 덮고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듯 보였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유경이 고개를 들었다.차도현이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두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가 그녀를 보며 평소처럼 덤덤하게 물었다.“밥 먹었어?”“아직.”안유경이 책을 덮었다.“같이 먹자, 그럼.”차도현은 짧게 말하고는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가사 도우미가 금세 정갈한 4첩 반상과 국을 차려냈다.다이닝 룸에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두 사람 모두 이 갑작스러운 식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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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청기와와 하얀 담장, 날아갈 듯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처마 끝, 대문 앞을 지키는 두 개의 조각상이 모진 비바람을 견뎌온 듯 고요하면서도 위엄이 넘쳤다.도심의 소음에서 완전히 격리된 곳이라 대나무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맑은 새소리만 감돌았다.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단아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이 마중을 나왔다. 그녀가 차도현에게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오셨습니까, 큰 도련님.”이어 그녀의 시선이 안유경에게 머물렀다. 역시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작은 사모님도 오셨군요.”잠시 멍해진 안유경의 얼굴에 살짝 민망한 기색이 스쳤다.슬쩍 곁눈질로 차도현을 봤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여성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주머니.”도우미 임해숙이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안내했다.“오전에 장 회장님과 사모님이 다녀가셨어요. 햇차를 가져오셨는데 얼마 안 있으시고 바로 가셨어요.”“네.”차도현이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덤덤하게 답했다.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차씨 가문은 여전히 A시 명문가의 수장이었기에 매년 줄을 대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회랑을 지나는 동안 안유경은 자신도 모르게 양옆으로 펼쳐진 조경에 시선을 빼앗겼다.조경 디자인을 공부했던 그녀의 눈에 비친 정원은 모든 배치가 지극히 정교했다.특히 아시아 기후에서는 자라기 힘든 희귀 식물들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어떤 기술을 동원해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길에서 마주치는 도우미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한결같이 나직한 목소리에 절도 있는 걸음걸이를 유지했다.그들은 차도현을 볼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고 안유경에게도 역시 ‘작은 사모님’이라 칭하며 흠잡을 데 없는 예우를 갖췄다.저택 전체에 오랜 시간 겹겹이 쌓인 고요와 질서가 흐르고 있었다.공기 중에 은은한 백단향과 풀 내음이 감돌았고 화려함은 나무의 결 하나하나와 정원의 배치 속에 숨어 있었다. 굳이 과시하지 않아도 그 존재감은 어디에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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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차지환.”차도현이 경고의 뉘앙스를 담아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꺼져. 네 사람 데리고 꺼지라고!”차지환이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두 눈에 오랜 투병과 불안정한 정서에 시달린 흔적인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차도현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하지 않고 곧장 안유경을 향해 몸을 돌렸다.“이쪽은 안유경이야. 이 사람 신장이 너한테 적합해.”그 말이 폭탄이 되어 차지환을 완전히 폭발시켰다.“적합하다고?”그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옆에 있던 장식장의 꽃병을 덥석 잡고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누가 신장 달래? 누가 그따위 가식적인 동정을 바란대? 꺼져. 다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지라고!”이성을 잃은 차지환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선물 상자까지 집어 들어 두 사람 쪽으로 던졌다.상자가 매끄러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내용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격렬한 움직임이 본래 허약했던 그의 체력을 순식간에 앗아갔다.물건을 던진 후 차지환이 몸을 숙여 한 손으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짚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팍을 꽉 움켜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입술은 금세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작은 도련님!”곁에 있던 도우미들과 뒤에서 대기하던 간병인들이 황급히 달려들었다.차도현도 다가갔으나 차지환이 그를 거부한다는 것을 알기에 직접 부축하지는 못하고 대신 도우미들에게 지시했다.“방으로 데려가서 쉬게 해요. 의료진 말대로 조치하고.”숙련된 간병인들이 비틀거리는 차지환을 부축해 방으로 데려갔다.차지환이 여전히 발버둥 쳤지만 힘이 빠진 탓에 거친 숨소리와 욕설만 간간이 들려왔다.잠시 후 그 소리마저 복도 너머로 흩어졌다.거실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안유경이 제자리에 서서 바닥에 널브러진 파편들과 차도현의 뒷모습을 번갈아 봤다.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외부인이라 이 상황에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한참의 정적 끝에 안유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예전부터 저렇게 예민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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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안유경.”차도현이 안유경의 이름을 불렀다.“우리의 계약이 어떤 건지, 그리고 너한테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지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한테 지환이가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어떤 대가든, 어떤 수단이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그가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그러니 지환이가 아무리 거부하고 나를 증오하고 밀어낸다 해도 살아있기만 하면 돼.”안유경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늘 냉철하고 자제력을 잃지 않던 이 남자의 단단한 껍데기 아래에 숨겨진 균열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젊은 도우미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차도현의 앞에 멈춰 섰다.“큰 도련님, 작은 도련님이 방에서 또 난동을 부리고 계세요. 그러면서...”“뭐라고 하던가요?”차도현이 돌아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남쪽 끝에 있는 연심재의 꽈배기가 드시고 싶다고 하십니다. 갓 튀겨서 겉면이 바삭한 상태여야 한다고...”도우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고 고개도 푹 숙였다.“당장 사람을 보내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사 오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배달해 오면 식어버려서 그 맛이 안 난다고 하셨어요.”차도현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연심재에 연락해서 돈을 세 배, 아니 열 배로 줄 테니까 그 집에서 제일 잘하는 장인더러 재료와 도구까지 챙겨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와 이 집에서 직접 만들라고 하세요.”“모든 비용은 차씨 가문에서 부담할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환이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고요.”“알겠습니다, 큰 도련님.”도우미는 대답한 뒤에도 바로 물러나지 않고 머뭇거렸다.“그리고... 방금 주 박사님이 그러시는데 작은 도련님이 요즘 정서적으로 몹시 불안정하고 신장 수치도 요동치고 있다고 합니다. 가급적 비위를 맞춰주시고 충돌은 피해달라고 하셨어요.”차도현이 이를 악물었다. 손을 휘저어 물러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도우미가 큰 짐이라도 덜어낸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안유경은 옆에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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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악의적인 추측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안유경의 과거 정보를 캐내어 제멋대로 왜곡하고 해석하기 시작했다.송지연 측에서 고용한 댓글 부대와 선동된 네티즌들은 진실을 밝혀냈다는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드디어 때가 왔다.안유경이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해 차도현의 비서가 보내준 경미란의 심리 검사 진단서 위조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이미지 비교 증거들을 조목조목 정리해 장문의 글을 작성했다.작성을 마친 후 가짜 진단서를 처음 퍼뜨린 익명 계정과 가장 열심히 퍼뜨리던 계정 몇 개를 태그한 다음 게시 버튼을 눌렀다.그러고는 노트북을 덮고 욕실로 향했다.따스한 물줄기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렸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지만 그래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안유경이 넓고 폭신한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이불에서 햇살에 잘 말린 듯한 포근한 향기와 은은한 향 내음이 났다. 예상외로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다.눈을 감기 전 낮에 보았던 차지환의 히스테릭한 모습과 차도현의 지친 뒷모습, 그리고 인터넷의 비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안유경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멘탈이 좋아야 여자의 인생도 잘 풀리는 법이지.”비웃음이 섞인 말투였지만 한편으론 후련함도 담겨 있었다.안유경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작은 사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문밖에서 도우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안유경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개운함이 몸을 감쌌다.협탁 위에 두었던 무음 모드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쏟아지는 알림 메시지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좋아요, 댓글, 공유, 다이렉트 메시지... 붉은 숫자들이 쉴 새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도 두 통 와 있었다. 한 통은 민해준, 다른 한 통은 류설아였다.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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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통쾌한가? 아주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보다는 소동이 잦아든 뒤의 정적, 그리고 옅은 피로감이 더 컸다.복수가 주는 쾌감은 늘 찰나에 불과했고 그 뒤에는 더 깊은 공허함이 남기 마련이었다.“그럭저럭.”안유경은 결국 그렇게만 대답했다.“일이 해결됐으면 된 거지.”“뭐야. 왜 이렇게 덤덤해?”안유경의 차분한 태도에 류설아가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지금 어디야? 주변이 되게 조용하네.”“그냥... 아는 사람 집.”안유경은 차씨 가문의 복잡한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마음이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며칠 더 머물 것 같아.”류설아는 더 캐묻지 않고 인터넷상의 재미있는 댓글들을 몇 개 더 읊어준 뒤 몸을 잘 챙기라는 당부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안유경이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화면이 다시 켜졌다. 민해준에게서 온 새로운 메시지였다.화면 위에 손가락을 몇 초간 멈추고 있다가 끝내 읽지 않고 그대로 화면을 꺼버렸다.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으려고 먼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화장대를 지나칠 때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맑았다. 금방 잠에서 깨어난 나른함 외에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안유경이 거울을 보며 긴 머리를 천천히 빗어 넘겼다.창밖으로 본가의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지는 풍경이 꽤 근사했다.저녁 식사는 예상외로 평온했다.긴 식탁에 차도현과 안유경 두 사람뿐이었다. 정갈한 요리들이 차례로 올라왔고 분위기는 여유로웠다.안유경은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침묵해도 되었고 차도현 역시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식사 내내 차지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에서 죽을 먹었다는 소리에 안유경은 내심 안도했다.하지만 그 안도가 너무 성급했다.밤이 깊어지자 본가 저택이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씻고 나온 안유경이 침대 머리에 기대 책을 읽다가 불을 끄려던 그때 저택 반대편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쿵 하는 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타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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