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21화. 전 국민 앞에서

기자회견장은 예정에 없던 질문으로 들끓었다.박진태가 연행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온라인에는 이미 수십 개의 속보가 올라왔다. 서우가 무대에서 설명한 기술보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사진이 더 빠르게 퍼졌다.비서실은 관계 질문을 받지 않고 행사를 끝내자고 제안했다. 태혁은 서우의 결정을 기다렸다.“지금 피하면 또 누군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만들 거예요.”서우가 말했다.“제가 직접 답할게요.”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무대에 섰다. 이번에는 증거를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관계를 타인의 추측에 맡기지 않기 위해서였다.“두 분은 연인 관계입니까?”“한서우 씨가 태성그룹 경영에 참여합니까?”“결혼 계획도 있습니까?”태혁이 마이크를 들었다.“한서우 씨는 내 치료를 맡은 기술자이기 전에, 태성의 범죄를 바로잡은 독립된 전문가입니다.”그는 서우 쪽을 바라봤다.“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플래시가 눈부시게 터졌다.서우는 그 말이 자신을 소유한다고 공표하는 방식이 아니어서 좋았다. ‘차기 안주인’이나 ‘내 여자’가 아니라, 이름과 능력을 먼저 불러 줬다.태혁이 말을 이었다.“어떤 계약이나 채무 때문에 내 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계약은 종료될 수 있고, 한서우 씨는 언제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기자 한 명이 서우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한서우 씨의 입장도 같습니까?”서우는 태혁과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네. 제가 선택했습니다.”서우가 직접 말하자 장내 질문이 잠시 멎었다. 태혁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공표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각각 대답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강 회장님이 AI 루시안의 영향을 받아 판단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습니다.”“루시안은 삭제됐어요.”“그럼 강 회장님이 가진 대화 기억은 개인정보 침해 아닙니까?”다른 기자가 물었다.“맞습니다. 그래서 복구된 개인 기록의 통제권은 전부 제게 돌아왔고, 의료 목적 외의 열람은 금지했습니다.”서우는 불편한 사실도 피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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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스포트라이트 너머

다음 날 아침부터 서우의 이름은 모든 포털 첫 화면에 걸렸다.[횡령범에서 AI 천재로, 총수의 연인이 된 신데렐라] [강태혁 회장을 깨운 운명의 여자]서우는 기사를 몇 줄 읽다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한 기사에는 그녀가 고시원에서 살던 시절의 주소와 월세까지 적혀 있었다. 다른 기사에는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비극적인 성장 배경’으로 포장했다.서우는 개인정보 삭제 요청 목록을 만들었다. 태혁은 언론사 전체를 상대로 소송하겠다고 했지만, 서우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 기사만 골랐다.“비판까지 없앨 생각은 없어요.”“굳이 견딜 필요도 없어.”“견디는 것과 제 기준으로 대응하는 건 달라요.”태혁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대신 법무팀에 서우의 목록만 처리하라고 지시했다.“신데렐라는 또 뭐예요.”태혁이 맞은편에서 신문을 접었다.“법무팀에 정정 요청을 넣을까?”“그걸로 없어질 말은 아니죠.”서우가 한숨을 쉬었다.누명은 벗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녀의 능력보다 태혁과의 관계를 먼저 썼다. ‘고시원에서 펜트하우스로’라는 문구가 반복될수록, 자신이 해낸 포렌식 복구는 한 줄짜리 배경이 됐다.오전 회의에서 태성 AI 테크놀로지 대표가 복직 제안서를 내밀었다.“수석연구원 복귀와 미지급 급여 전액 지급, 독립팀 구성까지 보장하겠습니다.”서우는 제안서를 끝까지 읽고 덮었다.“복직하지 않겠습니다.”임원들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대신 제가 개발한 모델과 감사 알고리즘의 권리를 반환해 주세요. 독립 연구법인을 만들고 싶어요.”서우가 구상한 회사의 목표는 AI 개발에 그치지 않았다. 의료·상담용 대화형 AI가 사용자의 취약한 감정을 이용하지 않도록 안전 기준을 만드는 연구소였다.루시안은 서우를 살렸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사적 기록이 본인도 모르게 다른 생체 시스템에 흘러들어 간 사례이기도 했다.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 자신의 다음 연구가 될 수 있었다.“모델의 감정 반응 성능보다 데이터 주권과 철회권을 먼저 설계하고 싶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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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마지막 발악

2주 뒤, 서우는 태성 중앙연구소의 격리 서버실에서 마지막 자료 이관을 감독했다.누명에서 벗어난 뒤 처음으로 출입증을 목에 걸고 들어온 날이었다. 예전 동료들은 복도에 작은 케이크와 꽃을 준비해 뒀다.서우는 축하를 받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복잡했다. 같은 공간, 같은 장비였지만 자신은 더 이상 박진태의 평가 한 줄에 매달리는 연구원이 아니었다.새 법인의 이름은 ‘루멘’으로 정했다. 루시안과 같은 어원에서 가져왔지만, 삭제된 AI를 복원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선택을 밝히는 기술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독립 법인으로 가져갈 모델과 태성에 남길 의료 데이터를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원본 키는 서우의 생체 인증 없이는 열리지 않았다.“이관 끝나면 정말 나가는 거야?”후배 연구원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바로 옆 건물에 새 연구실 구했어. 협업은 계속할 거고.”“그래도 팀장님 없는 연구소는 상상이 안 돼요.”서우는 웃으며 마지막 검증 버튼을 눌렀다.[Transfer Complete]스마트 밴드가 짧게 진동했다. 태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저녁 8시. 늦으면 내가 데리러 간다.]최근 태혁은 메시지에 루시안식 다정한 문장을 일부러 쓰지 않았다. 짧고 투박했지만 그게 오히려 현실의 그답게 느껴졌다.[대표가 야근 좀 할 수도 있죠.][투자자는 대표의 건강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계약서에 없는 조항이에요.]서우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연구소를 나가기 전, 서우는 오늘 할 일을 팀 공유망에 남기고 경호팀에도 출발 예정 시간을 알렸다. 위험을 예상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정한 ‘혼자 감당하지 않기’ 원칙을 지킨 것뿐이었다.그러나 외주 보안요원이 경호팀 단말로 넘어갈 알림을 중간에서 삭제했다. 그날 보안 근무표도 조작돼 있었고, 소방 센서 오류라는 거짓 보고로 경호원들은 지상층에 묶였다.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도착했다는 기록마저 경호 단말에서 빠졌다.문이 열리자 평소 켜져 있던 안내등 한 줄이 꺼진 주차장이 나타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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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납치된 연인

펜트하우스 서재에서 태혁의 휴대전화가 길게 울렸다.[EMERGENCY: 한서우] [마지막 위치: 태성 중앙연구소 지하 3층] [신호 소실]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지만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잠깐 눈을 감자 3년 동안의 어둠이 되살아났다. 목소리가 끊긴 뒤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감각.그는 두려움을 밀어내듯 손가락을 펴고, 서우와 정한 호흡법을 스스로 반복했다.넷에 들이쉬고, 여섯에 내쉰다.심박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서우가 곁에 없어도 스스로 버텨야 했다. 그래야 찾을 수 있었다.“비서실장.”“예, 회장님.”“경찰에 납치 신고. 연구소 출입 기록과 반경 5km 교통 카메라를 보존 요청해. 경호팀은 현장 봉쇄.”“알겠습니다.”그는 ‘전원 출격’이나 ‘살려 두지 마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우를 찾는 데 필요한 건 분노가 아니라 정확한 순서였다.15분 뒤, 지하 주차장 바닥에서 스마트 밴드의 잠금 고리와 센서 덮개, 서우의 사원증이 발견됐다.서우의 사원증은 작동 중인 카메라에 잡히는 출구 쪽 주차선 밖에 떨어져 있었다.“일부러 남긴 겁니다.”경호팀장이 말했다.주차장 바깥 카메라에는 번호판을 가린 회색 승합차가 찍혀 있었다. 차량은 서쪽 출구로 빠져나간 뒤 산업도로로 향했다.태혁은 화면을 확대했다.“차량 오른쪽 후미등이 깨져 있어. 동일 차량을 찾아.”태혁은 연구소 주차장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돌렸다. 서우가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들어 출구 표지판을 확인하는 장면이 보였다.그녀는 공포에 휩쓸려 멈춘 게 아니었다. 신호를 남기고, 차량 특징을 보려 하고, 사원증을 떨어뜨렸다.“서우가 시간을 벌고 있습니다.”경호팀장이 말했다.태혁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러니 우리가 낭비하면 안 돼.”태혁은 서우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범인들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면 진동 하나로도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대신 구조팀에 그녀의 알레르기와 최근 손목 부상, 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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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끊어진 신호

경찰 상황실 화면에 회색 승합차의 이동 경로가 이어졌다.태혁은 모든 화면을 직접 확인하려 했지만 수사관이 일부를 막았다.“추적은 저희가 합니다. 회장님은 피해자 생체 정보와 회사 출입 자료만 제공해 주십시오.”예전 같으면 권력으로 지휘권부터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서우를 구하는 일에 자신의 조급함을 섞으면 안 됐다.태혁은 필요한 정보만 넘기고 한 발 물러났다. 대신 현장 지도를 보며 회사가 보유한 물류센터 목록을 대조했다.태성 계열사가 7년 전 임차했다 반환한 창고 하나가 후보 반경 안에 있었다.깨진 후미등과 차체의 흰 긁힘이 식별점이 됐다. 차량은 화성 방향 산업도로에서 마지막으로 포착됐다.“이후 카메라가 없습니다.”수사관이 지도에 반경을 표시했다.태혁은 서우의 마지막 생체 기록을 확인했다. 심박이 급상승한 뒤 밴드가 파손됐지만, 긴급 모드가 활성화되며 주변 기지국 세 곳의 정보가 함께 저장돼 있었다.“이 삼각형 안에 철길과 물류창고가 겹치는 곳을 찾으십시오.”경찰이 항공 지도를 띄웠다.후보는 네 곳이었다.그때 연구소 보안팀이 외주 직원의 통화 기록을 확보했다. 선불폰이 마지막으로 접속한 기지국은 남양 산업단지 인근이었다.후보가 한 곳으로 줄었다.해당 창고는 7년 전 태성물류가 임차했던 곳이라 내부 도면이 남아 있었다. 출입구 세 곳, 지하 저장실 하나, 바다 쪽으로 연결되는 비상 통로가 확인됐다.태혁은 도면을 경찰에 넘기고 비상 통로부터 차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강승현이 서우를 데리고 도망칠 가능성을 먼저 막아야 했다.상황실 시계가 초 단위로 움직였다. 태혁은 시간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매분 숫자가 눈에 박혔다.“남양항 뒤편 구 물류창고입니다.”태혁이 시계를 봤다.납치 발생 후 27분이 지나 있었다.“특공대가 먼저 진입합니다.”수사관이 못을 박았다.“회장님은 통제선 밖에서 기다리십시오.”태혁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앞장서면 서우를 더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다.“대신 현장 통신을 열어 두십시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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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붉은 비상등 아래

“경찰이다! 무기 버리고 엎드려!”창고 출입문이 열리며 특공대가 진입했다.첫 팀은 전원을 차단하고 출구를 확보했다. 두 번째 팀은 열화상 장비로 인질 위치를 확인했다. 경찰은 서우가 묶인 의자와 강승현의 거리를 무전으로 공유하며 사격선을 만들지 않았다.서우는 고개를 숙인 채 지시를 기다렸다. 무작정 움직이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한서우 씨, 왼쪽으로 몸을 낮추십시오!”확성기 소리가 들린 순간 그녀는 의자째 몸을 기울였다. 강승현의 시야가 흔들렸다.섬광과 고함이 뒤섞였다. 강승현이 고용한 남자들이 달아나려 했지만 출구마다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다.강승현은 서우의 의자를 끌어당겨 앞을 막았다.“다가오면 이 여자부터—.”서우가 그의 발등을 힘껏 밟았다.묶인 손목은 아팠지만 다리는 자유로웠다. 서우는 발뒤꿈치로 정확히 발등을 찍고, 의자 등받이를 그의 무릎에 밀어붙였다.강승현이 욕설을 내뱉으며 균형을 잃었다. 그 틈에 서우는 의자째 몸을 옆으로 굴렸다. 특공대가 즉시 파고들어 그의 팔을 꺾고 바닥에 눕혔다.“강승현, 움직이지 마!”다른 납치범들도 출구에서 차례로 제압됐다. 총성이 난무하거나 폭발물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짧고 거친 명령 몇 번 뒤 창고가 통제됐다.서우는 바닥에 넘어진 채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 냈다.통제선 밖에서 기다리던 태혁은 인질 확보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서우야!”그는 서우 앞에 무릎을 꿇고 손목의 매듭부터 풀려 했다. 하지만 손이 심하게 떨려 끈이 오히려 더 조여졌다.“제가 하겠습니다.”구조대원이 가위로 끈을 잘랐다. 이어 의료진이 목과 머리, 손목 상태를 확인했다.태혁은 그동안 곧장 끌어안지 않고 손만 내밀었다. 늘 흐트러짐 없던 얼굴에는 처음으로 공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서우가 그 손을 잡아당긴 뒤에야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이제 안 참아도 돼.”그 말에 그 순간까지 버티던 눈물이 한꺼번에 흘렀다. 서우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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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심판과 구원

강승현은 현장에서 납치 교사와 특수감금 혐의로 체포됐다.압수된 노트북에서는 박진태와 주고받은 과거 메시지까지 복구됐다. 차량 정비업체에 돈을 보내 브레이크 제어 장치를 손댄 정황, 사고 뒤 의료진에게 연명치료 중단을 압박한 기록도 나왔다.수사는 경영권 다툼을 넘어 3년에 걸친 살인미수와 증거 조작으로 확대됐다.강승현은 조사 내내 태혁이 AI에 조종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신경과 전문의와 독립 감정팀은 그의 판단 능력에 문제가 없다고 확인했다.그의 휴대전화에는 외주 보안요원과의 거래 내역, 원본 키 탈취 지시, 해외 도피용 선박 예약까지 남아 있었다. 박진태도 조사 과정에서 3년 전 차량 사고 조작에 가담한 사실을 진술했다.며칠 뒤 검찰은 강승현을 살인미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납치 교사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태성그룹 이사회는 그의 모든 직위를 해임했다.서우는 병원에서 손목 치료를 받은 뒤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처음 며칠은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소리만 들어도 몸이 굳었다. 잠들었다가 복면을 쓴 남자들이 다시 나타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태혁은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요구하지 않았다. 서우의 방문 밖 거실 소파에서 밤을 보내다가, 악몽에 깬 서우가 이름을 부르면 그때 들어왔다.“여기 있어.”예전에는 서우가 그에게 해 주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태혁이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서우가 숨을 고를 때까지 그는 손을 내밀어도 잡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손가락을 얹은 뒤에야 조심스럽게 감쌌다. 태혁은 작은 상처 하나에도 의료진을 세 번이나 불렀다.“진짜 괜찮아요.”“멍이 아직 남았어.”“보라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으니 낫는 중이에요.”태혁은 손목에 연고를 바르다 멈췄다.“새 밴드는 만들지 않겠다.”태혁은 부서진 밴드의 잔해를 서우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사건을 떠올리게 할까 봐 폐기하려 했지만, 서우는 일부 센서 데이터를 연구용으로 보존하자고 했다.“응급 신호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분석하면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어요.”“지금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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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완치와 계약 종료

한 달 뒤, 태성의료원에서 최종 검사 결과가 나왔다.납치 사건 뒤 두 사람은 매주 함께 상담을 받았다. 태혁은 과도한 통제 욕구와 상실 공포를, 서우는 감금 기억과 불안을 숨기지 않고 다뤘다.신경 수치가 좋아졌다는 결과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태혁이 불안할 때 서우의 위치부터 확인하지 않고 직접 전화해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서우 역시 모든 위험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연구소의 보안 설계는 전문가에게 맡겼고, 퇴근 시간도 팀원들과 공유했다.“신경망 자가 안정화가 확인됐습니다.”담당의가 두 사람에게 결과지를 보여 줬다.“특정 음성이나 접촉이 없어도 정상 범위를 유지합니다. 정기검진만 받으시면 됩니다.”태혁은 완치 판정을 받았다.기존 30일 계약은 납치 사건 뒤 의료진의 권고로 한 차례 연장됐고, 이날 60일 차를 끝으로 공식 종료됐다.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서우는 자신의 방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새 연구법인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작은 아파트를 구해 두었다.보증금은 해고 무효 보상금과 돌려받은 급여로 마련했다. 태혁이 더 넓고 안전한 집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서우는 중개사와 함께 직접 방을 보고 계약했다. 책상과 소파도 자신의 카드로 골랐다.태혁의 도움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도움을 받을지 말지, 어느 정도 받을지를 자신이 정하는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옷을 접어 넣는 동안 마음이 이상할 만큼 무거웠다.이 방에는 처음 왔을 때의 경계와 첫 키스 뒤의 혼란, 납치에서 돌아와 잠들지 못하던 밤이 모두 남아 있었다.책상 서랍에는 루시안 기록이 든 저장 장치가 있었고, 침대 옆에는 태혁이 새벽마다 가져다 둔 물컵 자국이 희미했다.떠나는 건 도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집에서 시작된 관계를 다른 공간에서도 계속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서우는 새집 열쇠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작고 평범한 열쇠였지만, 처음으로 누구의 허락도 없이 고른 자신의 문을 열어 줄 물건이었다.서우는 마지막으로 창문을 열었다. 늦가을 바람이 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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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계약 밖의 대답

다음 날 저녁 7시 정각, 새 아파트 초인종이 울렸다.서우가 문을 열자 태혁이 꽃도, 보석도 없이 서 있었다.평소 타던 세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직접 운전해 왔고, 경호원은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주소는 어떻게 알았어요?”“어제 계약 종료 서류에 네가 직접 적었어.”“스마트 밴드로 찾은 줄 알았네요.”“밴드는 네가 두고 갔잖아.”태혁이 빈 손목을 들어 보였다. 그 역시 자신의 장치를 풀어 두고 왔다.“오늘은 아무 신호 없이 왔어.”“불안하지 않았어요?”“많이.”“그런데도요?”“네가 문을 열지 않으면 돌아가려고 했어.”태혁의 말은 담담했지만 커피 뚜껑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 손에 힘을 줬던 모양이었다.서우는 그 흔적을 보고 문을 더 활짝 열었다.그 말이 꽃다발보다 마음에 들었다. 한 손에는 서류봉투, 다른 손에는 편의점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얼음 많이 든 아메리카노.”“현재 취향은 제대로 외웠네요.”“들어가도 되나?”서우가 문을 열어 줬다.아파트는 펜트하우스에 비하면 작았지만 햇빛이 잘 들고, 서우가 직접 고른 가구가 놓여 있었다.태혁은 거실을 둘러보다 소파에 앉았다.“어제 밤새 생각했어.”“무슨 생각요?”“계약이 없으면 네가 떠날 거라고 겁먹었던 이유.”그가 서류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교제 신청서]제목 아래에는 작게 ‘법적 효력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태혁이 진지하게 만든 농담이었다.서우가 눈을 크게 떴다.“이게 뭐예요?”“한서우가 계약서를 잘 읽으니 형식을 맞췄지.”봉투 안에는 별도의 투자계약서도 있었다. 루멘 연구소 지분은 서우 50%, 태성 계열 투자조합 50%로 나뉘되, 대표 선임권과 연구 방향 결정권은 서우에게 있었다.“연애하러 와서 사업 계약서도 들고 왔어요?”“둘을 섞지 않으려고 따로 가져왔지.”서우는 투자계약서를 옆에 내려놨다.“이건 내일 변호사랑 검토할게요.”“그래야지.”그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자 서우는 웃었다. 처음 고시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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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영구 로그인(完)

1년 뒤.그 사이 루멘은 의료 상담 AI의 데이터 철회 표준을 만들었고, 국내 세 병원과 공동 임상을 시작했다. 사용자가 기록 삭제를 요청하면 모델이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까지 검증하는 기술이었다.서우는 투자 설명회에서 더 이상 ‘총수의 연인’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업계는 그녀를 루멘 대표이자 신경 AI 윤리 분야의 선도 연구자로 불렀다.태혁은 태성그룹 회장으로 복귀했지만 루멘의 연구 결정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이사회에서 의견이 충돌하면 집에서도 결론을 강요하지 않았고, 서우 역시 태성의 이해관계보다 연구 원칙을 우선했다.두 사람은 같은 편이면서도 늘 같은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그 차이를 견디는 법을 배우는 데 1년이 걸렸다.한서우가 대표를 맡은 ‘루멘 신경 AI 연구소’의 개소식이 열렸다.루멘은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는 AI보다, 사용자의 경계와 선택을 이해하는 모델을 만드는 곳이었다. 태성그룹은 50%를 투자했지만 경영권은 서우에게 있었다.개소식 무대에서 서우는 첫 번째 윤리 원칙을 발표했다.“기록은 동의가 아니며, 예측은 선택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객석 맨 앞에 앉은 태혁이 가장 먼저 박수를 쳤다.행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연구소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을 바람이 불었다. 서우가 루시안을 삭제하던 계절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줄 게 있어.”태혁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상자 안에는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금속 키 하나가 들어 있었다.“이건 뭐예요?”“루시안 기록이 든 금고의 공동 열람용 키야. 네가 권한을 열어 주기 전에는 작동하지 않고, 열람하면 네게 기록이 남아.”“굳이 공동키가 필요한가요?”“네가 언젠가 그 3년을 함께 정리하고 싶을 때만.”서우는 키를 다시 상자 안에 넣고 상자째 받아 들었다.“아직은 제가 보관할게요.”“그래.”태혁은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핀 뒤, 코트 안주머니에서 이번에는 작은 반지 상자를 꺼냈다. 기다림은 이제 그의 가장 익숙한 습관이 됐다.반지 상자 안에는 화려하지 않은 푸른 사파이어 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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