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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8번째 약속도 너는 없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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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남자는 심우열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던 경비원에게 몸을 돌렸다.“장례와 무관한 이 세 분을 밖으로 모셔주세요.”경비원이 심우열과 이현지 앞으로 다가가면서 손으로 나가 달라는 표시를 했다.심우열의 얼굴이 굳어졌다.심우열은 오랫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병원 원장으로 늘 존경을 받아온 사람이었다.이렇게 사람들에게 쫓겨나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현지는 더욱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현준을 안은 채 심우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선배...”심우열이 이현지를 등 뒤로 감쌌다.“이건 연서와 나 사이의 집안일이야. 당신 같은 외부인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남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우열 씨, 일을 크게 만들고 싶으시다면 지금 바로 경찰을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방연서도 차갑게 입을 열었다.“누가 너랑 가족이래. 꺼져.”방연서의 눈에 가득한 혐오를 본 심우열은,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서야, 일단 진정해. 나중에 다시 올게.”말을 마치고 심우열은 남자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본 뒤, 이현지와 현준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빈소 안은 그제야 다시 조용해졌다.방연서는 곁에 선 남자를 돌아보았다.“고마워요.”남자가 명함을 한 장 건넸다.“연서야, 나 기억 안 나?”방연서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명함에는 윤시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방연서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마침내 기억해 냈다.십여 년 전, 바로 옆집에 살면서 늘 방연서를 따라다니며 ‘누나’라고 부르던 여린 남자아이였다.“너... 윤시현이야?”윤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에 슬픔이 번졌다.“아줌마 소식 듣고 정말 마음이 아팠어. 예전부터 나한테 정말 잘해주셨잖아. 그래서 직접 와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방연서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윤시현의 눈에 걱정이 떠올랐다.“몸부터 잘 챙겨.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어머니를 잃은 뒤, 방연서는 처음으로 다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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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심우열은 휴대폰을 쥔 채, 구청 앞에 서 있었다.주변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진 듯했다.방연서가 했던 말은, 심우열이 예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투였다.심우열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감정을 억눌렀다.“그래.”다음 날, 심우열은 다시 방연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시간 돼? 가서 혼인신고 하자.”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방연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심우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1시간 일찍 구청에 도착했다.그러나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기다렸지만, 방연서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이번에도 구청이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야 방연서와 통화가 됐고, 그녀가 말했다.[일이 생겼어. 오늘은 시간이 없어.]셋째 날에는 이랬다.[오늘 날씨가 안 좋아서 나가기 싫어.]넷째 날도 마찬가지였다.[엄마 묘지에 가야 해. 다음에 하자.]다섯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친구가 밥 먹자고 했어.]...그렇게 방연서는 무려 7번이나 흔쾌히 약속을 잡아놓고, 매번 마지막 순간이 되면 온갖 핑계를 대며 약속을 어겼다.그리고 오늘은 8번째다.심우열은 또다시 구청 앞에서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마침내 방연서가 전화를 걸었지만, 심우열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담담하게 말했다.[오늘은 안 갈게.]이번에는 아예 핑계조차 대지 않았다.방연서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심우열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신호음을 들으며, 난생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에 온몸이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심우열은 몸을 돌려서 자리를 뜨려다가, 막 퇴근하는 두 직원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이상하네, 또 한 명이야. 그것도 하루 종일 기다리잖아. 벌써 8번째지?”“그러니까 말이야. 얼마 전 그 아가씨랑 똑같아. 그 아가씨도 그랬잖아.”“8번이나 연달아 매번 문 열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앉아 있었는데, 남자친구는 한 번도 안 왔잖아. 우리가 보기에도 안쓰러웠어.”“대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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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심우열은 ‘약혼해제’라는 글자를 응시하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어짜는 듯했다.방연서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통장에 내 돈 8,000만 원이 있었어. 신혼집은 네가 산 게 맞지만, 인테리어는 내가 했어. 크고 작은 것 다 합쳐 6,000만 원이 들었고.” “그 외의 것들은 합의서에 다 적어놨어.”말을 마친 방연서는 곧바로 가방을 들고 나갔다.심우열은 그 합의서를 보면서, 머릿속은 그저 터무니없다는 생각뿐이었다.두 사람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인신고를 앞두고 있었고, 심우열은 결혼 후의 모든 것을 계획해 두었는데.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걸까?...이틀 후, 심우열은 택배 하나를 받았다.그 안에는 변호사 선임 관련 서류가 들어 있었다.방연서가 심우열에게 소송을 걸었다.심우열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그렇게 자신을 사랑했던 방연서가 정말로 자신을 고소하다니.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심우열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방연서를 찾아 나섰다.심우열은 방연서가 예전에 아주 가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시간 낭비라며 귀찮아했던 태국식 코코넛 해산물 전골집으로 그녀를 불렀다.방연서가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볼일 있으면 빨리 말해.”메뉴판을 건네려던 심우열의 손이 멈칫했다.“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너 예전에 그렇게 먹고 싶어 했잖아...”“나 시간 없어.”방연서가 심우열의 말을 잘랐다.“먹을 거면 혼자 먹어. 다른 볼일이 없으면 더 이상 나 찾지 마.”말을 마치고 방연서가 일어나려고 했다.“연서야.”심우열이 급히 방연서를 막아섰다.“예전에 내가 많은 잘못을 한 거 알아. 네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로 다 할게. 네가 나를 용서할 때까지.”“우리 6년을 함께했잖아. 난 널 포기할 수 없어. 내가 말했잖아. 평생 내가 함께할 사람은 너라고. 그건 변하지 않아.”심우열은 방연서를 바라보았다.“나도 믿지 않아. 6년이나 이어온 감정을 네가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거라고는.”방연서의 눈빛은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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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전화기 너머에서 이현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현준이 아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심우열은 방연서와 윤시현이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심우열과 방연서의 지난 6년을 단숨에 갈라놓는 것 같았다.심우열은 결국 쫓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그리고 전화 너머의 이현지에게 말했다.“진정해, 지금 바로 갈게.”이현지와 함께 현준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뒤, 심우열은 이틀 동안 밀린 병원 업무를 처리했다.심우열이 다시 집에 도착한 것은 깊은 밤이었다.현관 센서등이 켜지고, 신발을 갈아 신으려던 심우열의 동작이 멈췄다.시선이 신발장을 훑었다.방연서의 신발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그리고 현관 수납장 위에는 곰돌이 열쇠고리가 달린 열쇠 한 개가 놓여 있었다.방연서의 열쇠였다.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불길한 예감이 심우열을 사로잡았다.심우열은 빠른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갔다.집은 텅 비어 있었다.소파에 놓여 있던 방연서가 사준 쿠션도 없었고, 책장에서 방연서의 책도 사라졌다.베란다에서 그녀가 정성껏 가꾸던 화초들도 보이지 않았다.심우열은 침실로 뛰어 들어가, 옷장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방연서의 옷이 전부 없어졌다.방연서는 정말로 떠난 것이었다.심우열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다가, 벽에 기댄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가슴이 격하게 요동쳤다.지금 심우열은 그토록 익숙했던 이 집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질식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시선이 침대 머리맡 협탁에 닿자, 심우열은 일어나 다가가 그 위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상자 안의 물건들을 본 순간, 심우열의 숨이 멎었다.그 안에는 심우열이 방연서에게 선물했던 만년필, 액세서리, 그리고 심우열이 아무 생각 없이 사줬지만 방연서가 몇 년 동안 소중히 간직해온 작은 선물들이 들어 있었다.물건들 하나하나가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심우열이 준 물건도, 방연서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그리고 그 자신도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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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방연서가 모든 짐을 옮긴 뒤로, 심우열은 집에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심우열은 오직 일에만 매달렸다.오직 머리를 비울 틈도 없이 바빠야만, 방연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심우열은 처음으로 그토록 오래 살아온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방연서가 사라진 집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까지 들릴 만큼 텅 비어 있었다.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방연서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밤늦게 수술을 마치고 돌아올 자신을 위해, 속을 따뜻하게 해줄 국을 끓여 기다리던 그 모습.심우열의 서재에는 항상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이 놓여 있었고, 매일 갈아입을 옷이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그리고 심우열이 좋아하던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고, 꽃병에는 언제나 활짝 핀 꽃이 꽂혀 있었다.심우열이 당연하게 여겼던 그 일상들이, 지금은 가슴을 찌르는 가시가 되어 돌아왔다.위가 쥐어짜듯 아파왔다.심우열은 무의식적으로 방연서의 이름을 부르려다, 입가까지 나온 말을 도로 삼켰다.직접 뭐라도 해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지만, 그 안에는 생수 몇 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심우열은 처음으로 주방에 서서 죽을 끓이려고 했다.결국 죽은 다 태워버렸고, 주방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화재경보기까지 울려댔다.귀를 찌르는 경보음 속에서 심우열은 겨우 불을 껐지만, 위의 통증은 더욱 심해져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비틀거리며 상비약 상자를 찾아서 위장약을 먹으려고 했지만, 약통이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집의 상비약은 언제나 방연서가 관리해 왔다.방연서는 항상 심우열의 위장약을 미리 준비해 두었고, 그가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곳에 두곤 했다.극심한 통증 속에서 심우열은 거의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그 번호를 눌렀다.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그제야 심우열은 자신이 방연서에게 차단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그 사실이 위의 통증보다 더 심우열을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휴대폰 화면이 켜지며 이현지에게서 온 연속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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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심우열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이현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사무실로 걸어갔다.심우열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을 흘긴 이현지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곧바로 그 뒤를 따라갔다....경기 후, 법률사무소에서 윤시현은 커피 한 잔을 방연서 앞으로 밀어주었다.“축하해.”방연서는 미소 지었다.“고마워.”“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윤시현이 서류봉투 하나를 방연서 앞으로 밀었다.“당신이 조사해달라고 한 것, 결과가 나왔어.”방연서가 서류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이현지의 배경 조사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보고서에 따르면 이현지는 해외에서 학업을 끝마치지 못했고, 학업 부정행위로 학교 측에서 자퇴를 권고받았다.그리고 이현지가 말하던 10억짜리 소위 연구 프로젝트라는 것은, 등록 자본금이 0원인 페이퍼 컴퍼니를 내세워서 투자금을 가로채는 사기에 불과했다.심지어 해외에서 이미 전과까지 있었다.방연서는 손끝으로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10억 원과 방연서와 심우열의 신혼집, 그리고 어머니의 목숨을 살릴 돈이 이현지에 의해 수십 차례로 나뉜 뒤 흔적도 없이 여러 해외 계좌로 송금되어 있었다.지금 방연서는 정말로 궁금했다.심우열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주던 그 착하고, 혼자 아이 키우느라 힘든 후배가 결국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됐을 때, 그의 얼굴에 어떤 볼만한 표정이 떠오를지.심우열이 예전에 방연서의 손을 뿌리치며 자신의 원칙이라고 말했을 때보다 훨씬 볼 만할 것이다.“원장님! 우리 아버지는 원장님이 자꾸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수술 일정이 계속 밀려서 지금 상태가 악화됐어요. 반드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세요!”한 중년 남자가 원장실 문 앞을 막아선 채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심우열은 이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방연서가 심우열을 고소했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로, 업무에서 잦은 실수를 저질렀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현지 때문에 병원을 자주 비우기까지 하면서, 모든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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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황지후의 말이 무거운 망치처럼 심우열의 가슴을 연달아 내리쳤다.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심우열에게 집중되었다.의심과 추궁, 경멸이 뒤섞인 시선이었다.심우열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전문성과 원칙은 이 순간 세상에 둘도 없는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심우열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이현지가 그냥 가슴이 아프다고 했고, 자신은 그저 걱정이 되어서 진 교수를 붙잡아 검사를 시켰다고?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심우열은 의료계 전체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었다.심우열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황지후는 냉소를 흘리며 집요하게 몰아붙였다.“왜요? 해명을 못 하시겠어요? 아니면 이현지 씨의 병은 애초에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는 겁니까?”“제안합니다. 상부에서 즉시 조사팀을 꾸리고, 조사팀이 주도해서 이현지 씨에게 다시 한번 종합 검사를 실시할 것을 요청합니다!” “귀중한 의료 자원이 정말 남용된 것인지 철저히 밝혀내야 합니다!”일단 재검진이 이루어지면 이현지에게는 의료 자원을 남용하고 인성이 나쁘다는 낙인이 찍힐 것이고, 심우열 역시 완전히 명예를 잃게 될 것이다.심우열은 일이 그 지경까지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모두가 경악하는 시선 속에서 심우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심우열은 사방을 둘러보고, 시선은 마침내 황지후의 득의에 찬 얼굴에 닿았다.“좋습니다. 황 부원장님께서 제가 규정 위반과 직권 남용을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계시다면, 얼마든지 저를 조사해달라고 신청하십시오.” “만약 제게 정말 문제가 있다면 모든 책임을 기꺼이 지겠습니다.”“하지만 이현지 씨는 환자로서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이현지 씨의 전면 재검진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황지후가 코웃음을 쳤다.“증거라면 이미 진혁수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진 교수님도 이번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심 원장님께서 정말 조사 결과를 감당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황지후가 진혁수까지 찾아갔다니!’심우열은 머릿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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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심우열은 이현지의 울음소리에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심우열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르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나도 몰라요...”이현지가 울음을 터뜨리며 거의 이성을 잃은 듯 말했다.“지금 자금줄이 끊겨서, 프로젝트가 완전히 멈췄어요. 게다가 배상까지 하래요!”“선배, 자산 동결을 풀려면 큰돈이 필요해요. 안 그러면 나 끝장이에요. 감옥에 가야 한단 말이에요! 선배, 도와줄 수 있죠?”심우열은 이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형언하기 힘든 피로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나 돈 없어.”“내 돈은 전부 너한테 줬고, 집도 차도 다 담보로 잡혔어. 이제 나는 한 푼도 없어.”‘방연서에게 갚아야 할 돈조차 친구에게 염치 불고하고 빌려야 할 판인데, 나한테 무슨 돈이 있겠어?’이현지의 울음이 멈칫했다.마치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듯,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심우열을 쳐다보았다.이내 이현지는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아, 맞다. 선배는 원장이잖아요!”“병원에 분명 비상금 같은 게 있을 거예요. 연구비도 있고, 선배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이현지가 다가와 심우열의 소매를 흔들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선배, 제일 좋은 선배님, 일단 조금만 빼서 나한테 쓰게 해주면 안 돼요? 내 계좌만 풀리면 바로 갚을게요. 아무도 모를 거예요.”“선배, 꼭 도와줘요. 나 감옥에 가기 싫어요... 현준이는 아직 너무 어리잖아요. 엄마를 잃으면 안 돼요...”‘연구비를 빼돌려? 공금을 횡령한다고?’심우열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굳어졌다.이것은 심우열이 의사로서, 원장으로서 가진 마지막 선이었다.더더욱 절대 넘어서는 안 될 레드라인이었다!심우열은 벌떡 일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줄곧 감싸고 보호해 왔던 이 후배를,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이건 불법이야.”심우열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단호함과 엄격함이 실려 있었다.“난 그런 짓 절대 못 해.”이현지는 얼어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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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심우열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처음에 이현지가 서류 뭉치를 가져와 서명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프로젝트의 보증 계약서라고 말했다.심우열은 착하고 순수하다고 믿었던 후배가 자신을 속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았다.하지만 그때부터 이현지는 이미 심우열을 끌어들일 함정을 파놓고, 나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심우열은 고개를 들었다.한때 침착하고 냉정했던 그 눈동자에는, 지금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서늘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심우열은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웃음거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이 여자를 위해서 심우열은 모든 원칙을 저버렸다. 방연서에게 몇 번이나 상처를 줬으며, 간접적으로 박수정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이현지를 위해서 심우열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었고, 그 대가로 받은 것은 이런 독하고 잔인한 결말뿐이었다.“꺼져.”이현지의 얼굴에 맺힌 웃음이 잠시 굳어졌지만, 곧바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선배, 잘 생각해 봐.”이현지는 머리를 매만지며, 심우열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사흘 시간을 줄게. 계속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심 원장으로 남을지, 아니면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지. 네가 선택해.”말을 마치고 이현지는 몸을 돌려, 하이힐 소리를 내며 의기양양하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쾅!사무실 문이 닫히면서 실내는 고요해졌다.심우열은 힘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어떻게 해야 하나?’‘연구비를 빼돌려 그 밑 빠진 독을 채워야 하나.’아니다.그것은 심우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선이었다.더욱이 그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였다!일단 발각되면,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하지만 동의하지 않으면, 심우열이 명예를 잃는 것은 물론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집에 돌아온 심우열은 서재에 앉아 꼬박 밤을 지새웠다.창밖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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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심우열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변명할 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결국 심우열은 펜을 들어 직무 정지 조사 통지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심우열이 직무 정지된 바로 그날 오후, 방연서는 피해자 유족으로서 언론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카메라 앞에서 방연서는 어머니가 발병하고 숨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또렷하게 진술했다.방연서는 사실을 대중 앞에 낱낱이 드러냈다.마치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처럼, 심우열이 두르고 있던 위선적인 원칙의 가면을 정확하게 벗겨냈다.[소위 후배라는 여자 하나를 위해 병원 규정을 무시하고 환자를 내팽개친 의사, 심지어 환자의 생명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던 의사는...]방연서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그 흰 가운을 입을 자격이 없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심우열은 TV 화면을 바라보았다.화면의 빛이 심우열의 얼굴에 비치면서,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화면 속의 방연서를 보면서, 심우열은 그것이 죄책감인지 후회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다만 심장 부위가 너무 아파서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이어서 은행의 대출 상환 독촉과 법원의 자산 압류 명령이 잇따라 도착했고, 담보로 잡혔던 집과 차도 전부 압류되었다.심우열은 두 사람이 6년 동안의 추억을 쌓아온 그 신혼집에서 쫓겨났다.이사를 가던 날, 심우열은 텅 빈 거실에 선 채 끊임없이 밀려드는 기억들을 떠올렸다.앞치마를 두른 방연서가 주방에서 심우열을 위해 국을 끓이고,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던 모습.방연서가 가장 좋아하는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웅크린 채 영화를 보다가 슬픈 장면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던 모습.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며, 그 식물들에 혼잣말을 하던 모습.이른 아침 햇살이 방연서에게 쏟아지던 그 모습은 그토록 아름다웠다.집 안 구석구석에 방연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운 추억마저도 심우열은 다 잃게 된 것이다.심우열은 값싼 월세방으로 이사했다.방은 좁고 습했으며, 곰팡내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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