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심우열은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시간을 철저히 지키고 규칙을 어기는 법도 없었으며, 한 번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혼인신고만큼은 방연서를 무려 8번이나 바람을 맞혔다. 첫 번째는 8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던 후배 이현지가 귀국하는 날이라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두 번째는 이현지가 요리를 하다 손가락을 살짝 데었다고 하자, 심우열은 혼인신고를 하러 가던 도중에 되돌아가서 그녀에게 약을 발라줬다. 세 번째는 이현지의 아들이 아파서, 급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 이번이 벌써 8번째였다. 이번에도 심우열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우열은 급하게 전화만 한 통 걸어왔다. [급한 일이 생겼어. 조금 늦을 것 같아.] 방연서는 눈앞에서 두 사람의 번호를 차례로 부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창구 직원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남자친구분은 또 안 오셨어요? 저희 곧 퇴근해야 하는데...” 방연서가 다시 전화를 걸려던 순간, 심우열의 문자가 먼저 도착했다. [오늘 혼인신고는 못 할 것 같아. 다음에 하자.] 그 문자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한 느낌이 차올랐다. 방연서가 휴대폰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이현지의 SNS 게시물에 시선이 멈췄다. 사진 속 이현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의 아들을 안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심우열이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현준이가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오늘 하루 함께해준 선배님, 감사해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목구멍에 납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결국 심우열이 말한 급한 일이란, 이현지의 아들을 놀이공원에 데려가는 일이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이 아팠고, 서러움과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심우열에게 당장 전화해서 따지려던 그때, 댓글에서 남자의 친구가 남긴 장난스러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이 지나도 우열이는 여전히 후배를 각별히 아끼네.]
View More3년 후, 방연서의 이름은 건축 디자인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방연서는 자수 기법을 현대 건축의 빛과 그림자 구조에 절묘하게 융합시켜, 모든 작품이 그야말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그리고 방연서는 마침내 자신이 번 돈으로 어머니가 남겨준 그 옛집을 다시 사들였다.등기권리증을 받아 든 그날, 방연서는 집 안에 혼자 앉아서 낮부터 밤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윤시현은 재촉하지 않은 채 문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집에 가자.”윤시현이 방연서의 손을 잡았다.그 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지난 3년 사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다.드라마틱한 사건도, 죽고 못 사는 격정도 없었다.윤시현은 방연서가 밤새 설계도를 그릴 때, 야식과 담요를 준비해 두었다.방연서도 윤시현이 법정에서 쓸 넥타이와 서류를 정리해 주었다.윤시현은 방연서의 어떤 결정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저 무조건 그녀를 지지하며, 그녀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이것은 방연서가 좋아하는 평등하고 건강한 관계였다.좋은 사랑은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지, 자신을 소진해 가며 다른 사람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그날, 방연서는 해외의 한 작은 마을에서 열린 비즈니스 포럼에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포럼이 끝난 후, 방연서는 주최측의 만찬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 그 마을의 돌로 포장된 길을 거닐었다.마을은 크지 않았고, 예스러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 전체에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걷다 보니, 근처의 한 지역 병원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방연서가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다가, 걸음이 멈췄다.병원 입구의 무료 진료대 앞에는 진료를 받으려는 노인들이 여럿 둘러서 있었다.흰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한 노인의 혈압을 재고 있었다.남자의 머리카락에는 은발이 조금 섞여 있었다. 등은 더 이상 꼿꼿하지 않았고,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피로가 서려 있었다.하지만 환자에게 주의 사항을 설명할 때의 그 표정
시간은 흘러, 마침내 법정 공판 날이 되었다.지금 심우열은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눈두덩은 퀭한 데다가, 턱에는 거뭇거뭇 수염이 자라나 있었다.반면 이현지는 법정 경위의 감시 아래 두 손에 수갑을 찬 채, 더 이상 예전의 애처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판사의 목소리가 엄숙한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의료 사고 건에 관한 심리 결과, 피고 심우열은 진료 과정에서 중대한 과실을 저질렀고, 환자의 최적 치료 시기를 놓치게 해서 환자의 사망에 주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판결은 다음과 같다. 피고 심우열은 시 주요 언론에 원고 방연서에게 공개 사과하고, 원고 방연서에게 총 3억 6000만 원을 손해배상할 것.”“심우열의 의사 면허를 취소하며, 평생 의료 행위를 금지한다.”평생 의료 행위 금지.이 몇 글자가 떨어지자, 심우열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심우열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의사로서의 삶은 이 순간 산산이 무너졌다.판사는 계속해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다음으로 이현지의 사업 사기 건에 관하여...”“피고인 이현지는 불법 영득의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허위로 꾸며 타인의 거액을 편취하여 사기죄를 구성하며 그 정황이 특히 중대하다.” “여러 죄를 합쳐 징역 10년과 벌금형에 처한다.”“10년?”이현지는 판결을 듣자마자,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이현지는 미친 듯이 피고인석에서 일어나 방연서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채 소리쳤다.“너야! 다 너 때문이야! 저년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법정 경위가 재빨리 이현지를 강하게 제압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추악한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심우열! 이 쓰레기! 나를 사랑한다며! 왜 나를 안 구해! 내가 감옥에 가도 너도 편하게 살 수 없어! 이 살인자!”법정 전체에 이현지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욕설이 메아리쳤다.하지만 방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 하나 깜빡하지
심우열은 자신이 어떻게 월세방까지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심우열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방연서의 이름 위에서 손가락을 멈칫했다.한참 후, 심우열은 방연서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우리 이야기 좀 해야 해.]문자를 보내자, 빨간 느낌표가 떠올랐다.심우열은 화면을 응시하며,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고집스럽게 또 한 통을 보냈다.[우리 한 번만 보자.]여전히 빨간 느낌표였다.눈물이 휴대폰 위로 떨어졌지만, 심우열은 방연서가 절대 받을 수 없는 문자를 계속해서 보냈다.[내가 잘못했어. 나 용서해주면 안 될까?][제발...][연서야, 미안해.][그리고 사랑해...]...하지만 그 시각 방연서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그 디자인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덕분에, 방연서는 한 대기업으로부터 협업 제안을 받았다.이번 협업을 위해 방연서는 매일 밤늦게까지 일했다.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또 한 번 밤을 새운 방연서는 시계를 보다가, 문득 윤시현과 심우열의 소송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윤시현은 방연서를 도와서 이현지를 신고하고 계좌를 동결되게 만들었다. 심우열이 박수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과 관련해서 수집한 증거를 조사팀에 제출했고, 언론에도 제보해서 심우열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해버렸다.이제는 마지막 공판만 남아 있었다.방연서는 간단히 씻고 집을 나섰다.아파트 현관에 나서자마자, 방연서는 온몸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초라하게 서 있는 심우열을 발견했다.하지만 방연서는 멈추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마치 길 가는 낯선 사람을 본 것처럼 무심코 심우열을 지나쳐서 걸어갔다.“연서야!”심우열이 몸을 돌려 방연서의 앞을 가로막았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인지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우리 이야기 좀 해. 5분이면 돼.”지난밤, 방연서가 받을 수 없는 문자를 수없이 보낸 뒤, 심우열은 그래도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그래서 심우열은 곧바로 방연
심우열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변명할 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결국 심우열은 펜을 들어 직무 정지 조사 통지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심우열이 직무 정지된 바로 그날 오후, 방연서는 피해자 유족으로서 언론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카메라 앞에서 방연서는 어머니가 발병하고 숨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또렷하게 진술했다.방연서는 사실을 대중 앞에 낱낱이 드러냈다.마치 날카로운 수술용 메스처럼, 심우열이 두르고 있던 위선적인 원칙의 가면을 정확하게 벗겨냈다.[소위 후배라는 여자 하나를 위해 병원 규정을 무시하고 환자를 내팽개친 의사, 심지어 환자의 생명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던 의사는...]방연서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그 흰 가운을 입을 자격이 없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심우열은 TV 화면을 바라보았다.화면의 빛이 심우열의 얼굴에 비치면서,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화면 속의 방연서를 보면서, 심우열은 그것이 죄책감인지 후회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다만 심장 부위가 너무 아파서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이어서 은행의 대출 상환 독촉과 법원의 자산 압류 명령이 잇따라 도착했고, 담보로 잡혔던 집과 차도 전부 압류되었다.심우열은 두 사람이 6년 동안의 추억을 쌓아온 그 신혼집에서 쫓겨났다.이사를 가던 날, 심우열은 텅 빈 거실에 선 채 끊임없이 밀려드는 기억들을 떠올렸다.앞치마를 두른 방연서가 주방에서 심우열을 위해 국을 끓이고,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던 모습.방연서가 가장 좋아하는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웅크린 채 영화를 보다가 슬픈 장면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던 모습.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며, 그 식물들에 혼잣말을 하던 모습.이른 아침 햇살이 방연서에게 쏟아지던 그 모습은 그토록 아름다웠다.집 안 구석구석에 방연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운 추억마저도 심우열은 다 잃게 된 것이다.심우열은 값싼 월세방으로 이사했다.방은 좁고 습했으며, 곰팡내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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