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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유연아, 이혼 협의서 좀 작성해 줘.”한소원의 말에 전화기 너머 이유연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소원아, 민혁 씨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도 잘 알잖아. 그렇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왜 이혼하려고 그러는 거야? 혹시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게다가 너희가 같이 있은 지 벌써 11년이야. 진우도 벌써 일곱 살이고. 아이까지 안 보고 살 수 있겠어?”한소원은 차 창문 밖에서 나란히 쇼핑하는 세 사람을 응시하며 비꼬듯 입꼬리를 올렸다.“배민혁이 바람을 피웠어. 몸매가 아주 좋은 모델하고. 그것도 3년이나.”한소원과 닮은 그 여자는 예전에 배민혁이 막아서 한소원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배민혁이 그 여자를 집 바로 건너편에서 살게 한 지도 벌써 3년째였다.하지만 한소원은 어제야 알았다.전화기 너머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한소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차창 밖, 배민혁이 만나는 모델 김지연이 한진우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배민혁은 내내 그들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따라 걷고 있었다.호응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가도 물건을 사면 바로 앞으로 나와서 계산을 해줬다. 쇼핑백을 받아 경호원에게 건네는 동작을 보니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표정에는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너그러움과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한소원은 가슴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무심코 눈물을 닦은 한소원은 울먹임이 조금 진정된 후 다시 밖에 나와 전화를 걸었다.“보육원 새 책임자는 더 이상 뽑지 마.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직접 할게.”“다음 달, 그쪽으로 발령 내줘.”말을 마친 한소원은 차 창문을 천천히 올렸다. 전화를 끊은 후 한 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도착한 뒤에도 온몸은 끊임없이 떨렸다. 집 안의 히터까지 빵빵하게 틀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추위에 몸이 여전히 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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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소원은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전에 없던 피로감이 온몸을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에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밤새도록 멍하니 침대 옆에 앉아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지 되짚었다.두 사람의 사랑은 배민혁의 대시로 시작되었다.한소원에게 첫눈에 반한 배민혁은 오직 한소원에게만 일편단심이었다.학교 다닐 때 일부러 선생님께 찾아가 한소원 옆자리로 바꿔 달라고 할 때도 많았고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 때면 항상 한소원 곁에 붙어 다니며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한소원이 친구와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계속 같은 반이 되기 위해 자신이 잘하는 과목을 포기하고 한소원이 듣는 수업을 따라서 신청했다.처음에 한소원은 배민혁의 고백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들이 있는 도시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떨어진 물건에 발목이 삔 한소원은 걸을 수 없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운동장에 도착한 배민혁은 한소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선생님의 만류도 무시한 채 미친 듯이 교실로 다시 뛰어가 그녀를 업고 내려왔다.계단을 내려갈 때 여진으로 낡은 벽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배민혁은 주저하지 않고 한소원을 품에 안아 보호했다. 반면 배민혁은 머리가 벽화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다.병원으로 이송된 후 배민혁은 이가 떨릴 정도로 아팠지만 한소원을 달래는 데만 집중했다. 구해준 것에 보답하고 싶으면 사귀어 달라고 고백했다.그 모습에 한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예상하지 못했던 한소원의 반응에 한참을 멍하니 있던 배민혁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상처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팔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웃다가 울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평생 잘해주겠다고, 영원히 그녀를 아끼며 사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드라마 같은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한소원은 고아라는 신분 때문에 늘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배민혁은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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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배민혁은 그날 집에서 나간 후, 며칠 동안 회사에 머물렀다.매일 밤 열 시가 되면 한소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내용은 고작 몇 글자뿐이었다.[요즘 좀 바빠.][진우 잘 챙겨, 네 몸도.]한소원은 예전처럼 일일이 캐묻지 않았다. 잔소리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요즘 뭘 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배민혁이 돌아오지 않으면 한소원은 더욱 일에 집중했다.며칠 후 한진우의 생일이 되었다. 예년 같으면 이맘때쯤 세 가족이 모여 한소원이 직접 만든 케이크를 먹으며 심플하면서도 화기애애하게 한진우가 한 살 더 먹은 것을 축하했을 것이다.그러나 이번 생일은 예전과 달랐다. 한소원과 한진우는 밤 열 시까지 배민혁을 기다렸지만 배민혁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한진우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한소원을 바라보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빠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전화 한 번 더 해 봐, 케이크 크림이 다 녹겠어.”한소원은 오늘 밤만 배민혁에게 벌써 다섯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촉에 다시 전화를 집어 들었다.통화연결음이 한참 울린 후에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한소원이 묻기도 전에 배민혁이 먼저 한마디 했다.“소원아, 오늘 밤에는 못 갈 것 같아. 너는... 음...”“진우랑 생일 잘 보내. 돌아가면 제대로 보상해 줄게. 일단은 이만... 나 기다리지 마...”배민혁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말을 마치자마자 한소원에게 말할 시간을 단 1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 한진우가 한소원 앞으로 다가왔다.“아빠 언제 온대?”“오늘 못 온대.”한소원의 대답에 한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난폭한 표정을 짓더니 한소원이 선물한 선물을 내리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다 필요 없어! 재수 없어! 엄마가 아빠를 제대로 붙잡지 못하니까, 아빠가 집에 안 오는 거잖아!”“엄마도 부모 사랑 못 받았잖아. 집도 없이 고아로 컸잖아. 그런데 왜 나까지 아빠 사랑 못 받게 하는 거야? 엄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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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음 날 아침, 배민혁은 만취한 채 김지연의 부축을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배민혁을 한소원 곁에 놓아줄 때 김지연은 일부러 옷깃을 벌려 키스 마크 흔적들을 애매하게 드러냈다. 그러고는 한소원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어제 민혁 오빠랑 좀 과하게 달렸더니, 오빠가 너무 많이 취했네요. 수고하세요.”앙탈 섞인 숨을 내쉰 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가벼운 걸음걸이에는 오만하면서도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기쁨을 감추는 게 아주 어려운 듯 보였다.복잡한 시선으로 김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소원은 시선을 돌려 배민혁을 바라봤다. 눈시울이 시큰거렸지만 꾹 참으며 문을 닫고 배민혁을 끌어 침대 위에 내팽개쳤다.배민혁은 사실 완전히 취하지는 않았지만 한소원이 거침없이 침대 위에 내던져 버리자 엄청난 충격에 머릿속이 띵해졌다.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그러다가 어딘가 불편한지 눈썹을 찌푸리더니 진정하려는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한소원이 다시 돌아왔다. 평소와 같이 꿀물을 줄 거라고 생각한 배민혁은 손을 내밀었지만 손에 닿은 건 컵이 아닌 펜이었다.“배민혁, 아직 자면 안 돼.”한소원이 이혼 협의서의 제일 뒷장으로 넘긴 뒤 배민혁 앞으로 내밀었다.“이혼하자, 계약서에 서명해.”배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난 티를 팍팍 냈다. 속도 울렁거리는 상황에 한소원이 이상한 말만 하자 매우 불만스러운 듯했다. 짜증스럽게 혀를 차더니 반쯤 눈을 감은 채 한소원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썼다.“또 보육원 후원이야?”“필요한 게 있으면 내 카드 직접 찾아서 써, 왜 이렇게 음흉하게 계약서 같은 걸 만드는 거야? 내가 그 정도 돈도 없어 보여?”보아하니 한소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한소원도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배민혁이 끝까지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서명을 마친 배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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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저녁에 배민혁과 한진우가 나간 후, 한소원도 외출했다.이유연과 집 아래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한소원은 이혼 협의서를 건네며 최대한 빨리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이혼 협의서 제일 마지막에 적힌 두 사람의 서명을 확인한 이유연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급하게 몇 입 먹더니 일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고민하던 일을 드디어 처리한 한소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래 머물지 않고 가방을 집어 들고 함께 나가려 했다.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이유연이 화장실에 가겠다며 들고 있던 가방을 한소원에게 맡기면서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한소원이 룸에서 나와 모퉁이를 지나칠 때 웨이터가 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옆쪽 룸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아빠, 다음에도 우리 같이 밥 먹으러 나오자. 나는 아빠랑 지연 이모랑 같이 밥 먹는 게 제일 좋아.”“이모도 진우랑 같이 밥 먹는 게 너무 좋아. 다음에 이모 집에 또 놀러 와. 이모가 진우랑 아빠한테 케이크 해 줄게.”“아이고, 한 가족 아니에요? 너무 닮으셔서 한 가족인 줄 알았어요.”웨이터의 말에 한진우와 김지연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을 가리며 웃었다.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던 배민혁은 그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들의 말을 끊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문틈 사이로 밖에 있는 한소원과 시선이 마주쳤다.“소원아!”배민혁은 바로 쫓아 나와 해명하려 했다. 그러더니 뭐라고 하기도 전에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룸 문을 닫아 김지연의 얼굴을 가려버렸다.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숨겨져 있었다. 입을 여러 번 뻥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아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엄마! 우리 미행한 거야?!”“엄마가 직접 가도 된다고 했잖아! 다 허락해 놓고 왜 변태처럼 따라오는 거야? 할 일이 없어? 그렇게 한가해?”한진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더니 배민혁과 한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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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한소원이 떠난 후, 밥 먹을 기분이 사라진 배민혁은 옆에서 아부하는 김지연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그녀가 돌려준 외투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러운 쓰레기를 보듯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흘겨보았다.“내가 했던 말 잊었어?”“김지연, 내 앞에서 머리 굴리지 마. 수작 같은 거 부릴 생각 하지 말라고!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말을 마친 뒤 김지연의 애원과 사과를 무시한 채 내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한진우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한마디도 없이 차에 올라탄 뒤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배민혁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한소원은 이미 와 있었다.한소원이 떠나는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배민혁은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는 내내 계속 심란했다.집에 도착한 후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있는 한소원의 모습을 보자 붕 떠 있던 마음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하지만 불안함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뭔가 보상해 주고 싶었다.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 보다가 마침 선물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망설임 없이 포장지를 뜯고 안에 든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소원아, 새해 선물이야.”천천히 다가가 몸을 한소원에게 기대며 다정하게 한소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손에 든 목걸이를 그녀의 얼굴 앞에 내려놓았다.한소원이 갑작스러운 선물을 보며 기쁨의 감탄사를 내뱉기를 기다렸다.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예상했던 반응이 없자 배민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마음에 안 들어?”“이 목걸이, 지난달에 나한테 선물로 줬잖아. 결혼기념일 선물로.”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배민혁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하얀 목 아래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꺼낸 목걸이와 완전히 똑같은 디자인이었다.그제야 이 목걸이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소원이 이 목걸이를 한 것이 예쁘다며 김지연이 자신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리 과한 요구가 아니라 생각해 배민혁은 김지연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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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그 후 며칠 동안, 평소 그렇게나 바쁘던 배민혁은 온종일 한소원의 곁에만 머물렀다. 한소원이 그날의 대화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은근히 떠보기도 했다.하지만 평소처럼 행동하는 한소원의 얼굴에 그 어떤 이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한소원이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티끌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임을 배민혁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짜로 무언가를 들었다면 절대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점차 걱정을 내려놓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새해가 밝았다.고아인 한소원은 새해가 되어도 갈 친정이 없었다. 섣달그믐날, 배민혁은 그녀와 한진우를 데리고 본가로 가서 배민혁의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배민혁은 온몸이 굳었다. 그 모습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한소원은 그제야 김지연도 여기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거실에 앉아 있는 김지연은 배민혁의 엄마 박경희의 곁에서 아주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지연 이모!”김지연을 발견한 한진우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한소원의 손을 뿌리치고 곧바로 달려가 그녀에게 안겼다.“오늘은 가지 마, 나랑 아빠랑 같이 설날 보내자! 우리한테 이모가 필요해!”“아이고, 때맞춰 잘 왔구나. 이쪽은 김지연 선생이라고, 여진이 자세 교정 선생님인데 시간도 늦어서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어.”“명절인데 사람이 많아야 시끌벅적하고 재밌잖아. 젊은 사람들끼리 얘기할 거리도 있고.”박경희는 잔뜩 굳어진 배민혁의 안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한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확실한 박경희의 의도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박경희는 항상 한소원을 얕잡아 봤다. 한소원이 고아라는 것과, 그녀가 하는 일 모두.이제 배민혁 곁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럴듯한 핑계조차 찾을 생각 없이 김지연을 바로 집에 데려와 식구들과 어울리게 했다.저녁 식사 때 한진우는 한소원을 밀쳐낸 뒤 배민혁과 김지연 사이에 앉았다. 식사하는 내내 떠들썩한 분위기였다.박경희의 행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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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런데 방 문을 미처 닫기도 전에 여자의 요염한 비명 소리가 한소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소리 내지 마.”배민혁이 목소리를 낮추며 김지연의 입을 막았다.“뭐가 그렇게 무서운데요? 다들 자잖아요. 이게 더 자극적이지 않아요?”“게다가 민혁 씨도 내가 소리 내는 거 좋아하잖아요?”배민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지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고개를 든 한소원은 그제야 배민혁이 급한 나머지 김지연의 방 문조차 제대로 닫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한소원이 고개만 살짝 들어도 배민혁이 바로 보이는 각도였다.평소 그렇게나 냉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였지만 지금은 두 볼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김지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다정함과 격정이 담겨 있었다.과거 배민혁이 한소원을 바라보던 모습과 똑같았다.하지만 결혼 후, 한소원은 배민혁의 이토록 다정한 시선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소원을 사랑하는 배민혁의 눈빛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이 순간 거침없이 떨리며 쓰라린 통증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질식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더는 이 남자에게 감정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불륜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시선이 흐릿해진 채 고개를 돌린 한소원은 방 문을 닫은 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하지만 옆방의 소리가 너무 큰 탓인지, 아니면 한소원의 청력이 너무 좋은 것인지, 멀지 않은 곳의 사소한 소리 하나하나가 문틈 사이로 그녀의 귓속에 스며들었다.소리 하나하나에 뼛속까지 시리는 느낌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한소원은 잔뜩 어두운 안색으로 아래층에 내려왔다.배민혁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원아, 어젯밤에 잠을 잘못 잤어? 새해라 그런지 불꽃놀이 소리가 너무 시끄럽던데, 그렇지?”배민혁과 실랑이할 기력이 없었던 한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충 얼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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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지연 이모가 임신했어!”“지연 이모 배 속에 쌍둥이가 생겼다고! 그럼 나 이제 아빠의 유일한 자식이 아닌 거네? 나는 모든 걸 잃은 거네?”“엄마, 아빠랑 이혼해 주면 안 돼? 엄마가 떠나면 안 될까? 엄마가 떠나면 아빠가 집에 돌아올 거야. 지연 이모도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주겠다고 했어. 내가 그래도 큰아들이니까 여기 있는 것들은 여전히 내 거야!”“엄마! 왜 이렇게 이기적인 거야?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빠를 붙잡고 안 놓아주잖아? 제발 가 줘, 나를 위해서라도 가면 안 될까?”한진우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일곱 살 아이 치고는 표현이 너무나 완벽했다. 한소원도 곧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김지연이 배가 아팠던 이유는 사실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쌍둥이라니...“엄마, 나 정말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아빠도 엄마를 싫어할 거고 할머니도 엄마를 쫓아낼 거야, 내가 못 할 것 같아?”한소원이 멍하니 있는 몇 초 사이, 한진우는 장난감 망치를 내려놓고 베란다로 달려갔다. 한 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다른 한 발을 밖으로 내디뎠다. 증오심이 가득한 얼굴은 어느새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이 순간, 한소원은 말할 힘조차 없었다. 아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엄마를 협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기 몸이 다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엄마를 쫓아내려는 한진우를 바라보자 피곤함과 무기력함이 밀려왔다.한참 후, 한소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겠어, 내가 나갈게.”어차피 조만간 나가려던 참이었다. 여기를 떠날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요 며칠 배민혁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번져 있었다. 얼음장 같던 기세도 눈 녹듯 녹아내렸다. 보아하니 매우 행복해 보였다.하긴, 어느 남자가 자식이 더 생기는 것을 싫어하겠는가.배민혁이 집에 안 돌아오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다. 물론 올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보상하려는 듯 항상 많은 선물을 가져와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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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배민혁이 회의를 막 마쳤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또 김지연이었다.전화를 받자마자 김지연의 연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민혁 씨, 나 또 입덧 여러 번 했어요. 너무 힘들어요.”“시간 나면 나 좀 보러 와줄래요? 민혁 씨가 곁에 있으면 훨씬 좋아지는 것 같아요.”임신 후 김지연은 입덧이 아주 심해졌다. 그러면서 더더욱 배민혁에게 의지하며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이나 한소원을 보지 못한 배민혁은 대답을 망설였다.“제발요...”하지만 그 한마디에 마음이 다시 약해진 배민혁은 바로 대꾸했다.“알겠어.”...배민혁이 집에 막 들어서자마자 김지연은 맨발로 달려와 맞이했다.“민혁 씨, 드디어 왔네요!”“왜 신발 안 신었어?”배민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발장에서 슬리퍼 한 켤레를 꺼내 김지연 앞에 놓아주었다.김지연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신발을 신고 배민혁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으며 상냥하게 웃었다.“민혁 씨, 아이가 뭐 하는지 한번 만져볼래요?”“아직 배가 나오진 않았지만 우리 아기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정말 신기해요.”배민혁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어 김지연의 평평한 배를 만졌다. 몸을 굽혀 귀를 기울였지만 이제 임신한 지 한두 달밖에 안 됐기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김지연의 옷을 잘 정리해 준 뒤 조금만 머물다가 떠날 준비를 했다.“나 이만 갈게. 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지연이 갑자기 입을 가리더니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으... 우웩!”눈살을 찌푸리며 따라간 배민혁은 김지연이 변기 옆에 엎드려 토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굴은 창백한 채 몸은 끊임없이 떨고 있었으며 평소 부드럽던 인상도 심하게 찌푸려져 있었다.그 모습을 본 배민혁은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그녀 집에 남기로 했다.김지연을 재우고 나니 시간은 거의 자정에 가까웠다.며칠 동안 한소원을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더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 한가운데가 불안한 듯 계속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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