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Bab 11 - Bab 20

210 Bab

11. 아까워라

남자는 미래의 상처를 확인하자 표정이 굳었다. 자전거 주인의 연락처를 받아 저장한 뒤 필요한 말만 남겼다.“일단 가보세요. 추후 조치가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복잡했던 상황이 단 몇 초 만에 정리됐다.“이대로 두면 덧납니다. 약국부터 가시죠.”거절할 틈도 없이 커다란 손이 미래의 팔을 감싸 지탱했다. 남자는 미래의 불편한 걸음에 맞춰 보폭을 늦췄다.두 사람 모두 맞닿은 팔을 모른 척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기대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약국에 들어선 순간 남자는 뒤늦게 미래의 살결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슬그머니 떨어졌다.미래는 단단한 악력이 사라진 자리에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멸균 식염수와 소독약, 하이드로콜로이드 밴드 주세요.”남자는 미래를 의자에 앉힌 뒤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식염수가 상처의 모래를 씻어냈다. 소독약이 닿자 미래가 숨을 들이켰다.“많이 아프세요?”“조금요.”“잠깐만 참으세요.”손길은 빠르고 정확했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처를 다루었다.새 밴드를 붙이려던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췄다.찢어진 레깅스 사이로 드러난 미래의 무릎은 지나치게 하얗고 고왔다. 붉은 상처가 잔인한 훼손처럼 보였다.아까워라.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남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많은 상처를 보며 단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사적인 감상이었다.그는 충동을 감추듯 밴드를 꾹 눌러 붙였다.“다 됐습니다.”미래가 그를 올려다봤다.“오늘도 망고 보러 오신 건가요?”그제야 딱딱하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저도 하이팰리스에 삽니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 조깅하러 나왔어요.”“저 때문에 운동을 다 망치셨네요.”“아닙니다. 피를 보면 원래 제 일 같아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말을 뱉은 뒤 스스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왜 이 여자에게 굳이 제 사정을 설명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약국 밖으로 나오자 주황빛 바람이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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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로의 이름

남자가 데스크로 다가가 차트를 확인했다.“이분 접수해 주세요. 제 진료실로 차트 올려주시고요.”직원이 차트를 건넸다.“원장님, 안미래 님은 개원 때부터 다니신 VVIP 환자세요.”남자의 시선이 맨 앞의 세 글자에 머물렀다.안미래.처음으로 얻은 여자의 이름이었다. 지독하리만큼 그녀와 잘 어울렸다.미래도 그의 흰 가운에 달린 명찰을 바라봤다.[피부과 전문의 유진희]유진희.두 사람은 같은 순간 서로의 이름을 알았다.미래는 명찰의 세 글자를 마음속으로 천천히 읽었다.어제 약국에서 망설임 없이 약품을 골랐던 이유, 상처를 씻어내던 손이 그토록 정확했던 이유가 모두 풀렸다. 그런데 이름과 직업을 알고나자 남자는 오히려 더 낯설고, 더 가까워졌다.진희도 차트를 한 장 넘기다 미래의 나이를 보고 손을 멈췄다.마흔셋.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맑았고, 웃을 때는 소녀처럼 사랑스러웠다.그러나 그 눈에는 오래 견딘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깊은 쓸쓸함이 있었다.진료실에서 미래가 침대에 걸터앉자 진희가 무릎을 살폈다. 간호사가 소독 준비를 위해 커튼을 휙 닫고 나갔다.커튼 속에 갇힌 두 사람.좁아진 공간에 서로의 숨소리만 남았다.서로의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어둠. 멈춘 엘리베이터. 가쁜 숨. 자신을 부서지지 않게 붙들었던 단단한 팔.그날의 향이었다.진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래도 그를 내려다봤다.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충돌했다.묻지 않아도 같은 질문이 눈동자에 떠올라 있었다.설마, 당신이었나요?커튼을 걷던 간호사가 두 사람의 눈맞춤에 흠칫 멈췄다.“소독 준비됐습니다.”두 사람은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차가운 소독약이 닿자 미래가 짧게 신음했다.“아…….”진희의 손길이 멈췄다.“많이 따가워요?”“조금요.”“힘 빼세요. 긴장하면 더 아픕니다.”그가 다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았다.“잘하고 있어요.”미래의 호흡이 멎었다.잘하고 있어요.그 말이 귀가 아니라 가슴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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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모범 환자

“그날 많이 놀라셨겠다 싶어서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정작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네요.”“그날 정말 감사했어요.”“당연히 도와드려야 했던걸요.”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떨리던 숨과 맞닿았던 체온, 자신을 받쳐주던 팔의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진희는 새 밴드를 꺼내며 분위기를 가볍게 바꿨다.“오늘 나오시길 잘했어요. 말 잘 듣는 착한 환자시네요.”미래가 웃었다.“제가 좀 모범 환자죠?”“제가 본 환자 중 제일 모범적입니다.”“별로 못 참았는데요.”“그래도 도망은 안 가셨잖아요.”미래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진희는 그 얼굴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봤다.“다음에도 잘 참으면 사탕 드릴게요.”말을 뱉은 진희가 스스로 멈칫했다.“사탕이요?”“아이들 달랠 때 많이 쓰는 방법이라서요.”다급한 수습이었다.“기대할게요.”미래가 웃자 진희도 결국 웃었다.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건네며 그가 말했다.“앞으로 양재천에서는 자전거 꼭 조심하세요.”“네.”“제가 없으면 어떡하려고요.”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얽혔다. 진희가 뒤늦게 덧붙였다.“다음에 또 다치면 응급처치해 줄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비겁하고 귀여운 수습이었다.“그러게요.”미래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챈 사람처럼 웃었다.진료실을 나온 미래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이었다.“안미래 님!”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콩―.처방전을 들고 뛰어나오던 진희가 닫힌 유리문에 이마를 부딪쳤다.미래는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웃음이 터졌다. 진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유리문을 밀고 나와 처방전을 내밀었다.“이걸 두고 가셔서요.”“이마는 괜찮으세요?”“괜찮습니다.”“모범 환자는 제가 아니라 원장님이셔야겠는데요?”진희도 결국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처음으로 함께 소리 내 웃었다.“오늘 환자가…… 너무 신경 쓰였나 봅니다.”말해놓고 진희가 다시 굳었다. 또 진심을 흘리고 말았다.미래의 웃음이 서서히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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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

청담동의 오마카세에서 만난 조민희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몸의 선이 드러나는 검은 원피스와 높은 구두, 자신감 넘치는 태도.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여자였다.“어때요?”“좋네요.”“레스토랑 말고 저요.”진희가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옷이 잘 어울리십니다.”민희가 웃었다.“빈말은 정말 못 하시는구나.”“그럼 솔직한 대답은 어떤 건데요?”민희가 잔을 기울이며 물었다.진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해지는 순간, 눈앞의 여자에게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았다.민희는 잠시 그를 살폈지만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그 배려가 오히려 진희를 불편하게 했다.민희가 웃을 때마다 진희는 예의 바르게 마주 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끝나면 기억 속에서 전혀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소독약이 따갑다며 눈을 찡그리다가도 금세 환하게 웃던미래였다.눈앞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완벽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음은 자꾸 가질 수도, 가져서도 안 되는 여자에게 달려갔다.대화는 막힘없이 흘렀다. 병원과 학회, 논문과 운동. 민희는 영리하고 세련된 완벽한 상대였다.그런데 진희의 마음은 자꾸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양재천의 작은 약국. 하얀 무릎. 모범 환자라는 말에 눈부시게 웃던 얼굴.“진희 씨?”“네.”“오늘 조금 피곤해 보여요.”“아닙니다.”거짓말이었다.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여자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식사가 끝나자 민희가 한 잔 더 하자고 제안했다. 진희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죄송합니다. 오늘 검토할 논문이 있습니다.”그날 밤, 진희는 불 꺼진 헬스장에서 몸을 혹사했다.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리고 웨이트를 반복했다.생각을 지우려 할수록 미래의 얼굴은 더 선명해졌다.모범 환자.그 단어만 떠올려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러닝머신 전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진희는 속도를 낮췄다. 땀에 젖고 숨이 가쁜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조민희와 근사한 식사를 할 때는 한 번도 나오지 않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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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 환자세요

“어머, 수연 원장님.”“언니! 편의점 가요? 저도 맥주 사러 가는데 같이 가요.”수연이 진희를 가리켰다.“우리 도련님이에요. 우리 병원에 새로 오신 부원장님이세요.”미래와 진희의 눈이 마주쳤다. 불과 몇 시간 전 병원에서 함께 웃었던 사이였다.그런데 진희의 눈빛은 차갑고 멀었다.미래의 심장이 가볍게 가라앉았다.“알아요. 오늘 제가 진료받았어요.”수연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정말요? 언니가 오늘 도련님한테 진료받은 거예요?”진희가 낮고 단호하게 끼어들었다.“제 환자세요.”딱 거기까지였다.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목소리.수연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웃었다.“세상 참 좁다. 언니, 우리 도련님 실력 좋죠?”“네. 아주 친절하게 잘해주셨어요.”미래가 웃으며 대답하자 진희의 턱이 더욱 굳었다. ‘친절하게’라는 말이 낮에 둘만 나눈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렸다.진희는 더 다정해지기 전에, 형수의 눈앞에서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기 전에 서둘러 문을 닫아야 했다.미래는 그 한마디에 그어진 선을 읽었다. 낮에는 모범 환자라고 부르고 사탕을 주겠다며 웃었다. 자신이 없으면 어떡하느냐는 말로 심장을 뛰게 했다.그런데 지금은 오직 환자라고 했다.미래는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며 미소 지었다. 대치동에서 배운 생존 방식이었다. 마음이 아플수록 더 완벽하게 웃는 것.1층에 도착하자 진희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A동 방향으로 걸어갔다.미래는 멀어지는 넓고 굳은 등을 바라봤다.왜 갑자기 저렇게 서먹해진 걸까.그날 밤 미래는 드레스룸에서 처방전을 꺼냈다.유진희.진료실 커튼 속에 갇혀 있던 몇 초 동안의 향과 눈빛이 아른거렸다.이름을 손끝으로 쓸었다가 서랍 깊숙이 넣었다. 미련처럼 다시 꺼냈다가 결국 서랍을 닫았다.같은 시각, 진희도 침대에서 자신이 뱉은 말을 되씹고 있었다.제 환자세요.선을 그어야 했다. 미래는 가정이 있는 여자였고 두 아이의 엄마였다.하지만 눈을 감으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미래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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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자가 되는 순간

며칠 전 차갑게 선을 그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진희의 얼굴은 따뜻했다.“제 방으로 가시죠.”진희는 미래보다 반걸음 앞서 걸었다. 복도 끝 유리벽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나란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토록 차갑게 돌아섰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가 따라오는지 몇 번이나 속도를 늦췄다.미래는 그 작은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말은 차갑게 할 수 있어도, 몸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진료실에 들어서자 미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갑자기 촬영이 잡혀서요.”촬영이라는 말에 진희의 손길이 아주 잠깐 멈췄다.무슨 촬영일까.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빛을 받으며, 누구의 옆에 서게 될지. 평소라면 쉽게 떠올리지 않았을 사적인 호기심이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차올랐다.하지만 진희는 묻지 않았다.의사라는 이름은 때로 가장 편리한 방어막이었다. 환자의 사적인 세계에 호기심을 품지 않는 척할 수 있게 해주는.“시간이 촉박하시겠네요.”진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트를 내려놓고 미래의 무릎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그 전에 상처부터 볼까요? 얼마나 예쁘게 아물었는지.”“아직 볼 게 남았나요?”“당연하죠. 확인해야 합니다.”하얀 장갑을 낀 손이 미래의 무릎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손끝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유난히 조심스러웠다.“흔적도 없이 잘 아물었네요.”진희가 고개를 들었다.“역시 모범 환자답습니다.”며칠 전의 서늘함은 어디에도 없었다.진희는 차트를 다시 넘기며, 이번에는 의사로서 가장 안전한 말들을 골랐다.“촬영 전이시면 오늘은 피부 장벽을 채워주는 수분 관리 위주로 진행할게요. 시술 끝나면 물 많이 드시고요. 내일은 다른 생각 하지 마시고 꼭 푹 주무셔야 합니다.”“원장님 지시는 늘 많네요.”미래가 장난스럽게 웃자 진희의 눈매도 부드럽게 휘었다.“모범 환자니까 잘 지키실 거잖아요.”“네.”짧고 담담한 대답이었다.진희가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미래를 바라봤다.시술 베드에 누운 미래가 눈을 감자, 진희는 정갈한 얼굴을 오래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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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녀가 사는 세계로

잘하고 있어요.또 다치면 안 됩니다.모범 환자니까요.성웅의 손길 아래에서 진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미래는 그 사실이 두려워 눈을 더 세게 감았다.행위가 끝난 뒤 성웅은 남은 와인을 마시며 물었다.“요즘 운동 열심히 하니?”그것이 끝이었다.성웅은 욕실을 나갔다. 미래는 식어가는 물속에 혼자 남았다.진짜 여자이고 싶다.남편에게 자신은 필요할 때 찾는 섹스 파트너였다. 그런데 진희 앞에서는 아무 조건 없이 한 사람의 여자처럼 느껴졌다.미래는 휴대폰을 들었다. 낮에 병원에서 자동으로 보낸 안내 문자가 떠 있었다.[시술 후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음주와 사우나는 피해 주세요. 담당 원장: 유진희]남편이 떠난 차가운 욕조에서 마주한 이름은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다.“미쳤어, 안미래.”그녀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유진희’라는 세 글자는 감긴 눈꺼풀 뒤에 타투처럼 남았다.같은 날 저녁, 퇴근 후에도 진희는 진료실에 남아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그때 조민희에게서 전화가 왔다.“연락 준다더니 소식이 없어서 제가 먼저 했어요. 오늘 저녁 괜찮아요?”오늘만큼은 안미래라는 파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네, 괜찮습니다.”민희는 오늘도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진희의 안에서는 어떤 파동도 일지 않았다.“지금 내 앞에서 다른 사람 생각하고 있죠?”진희는 부정했지만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민희는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씁쓸하게 웃었다.“그 사람, 많이 좋아하나 봐요.”“그런 사람 없습니다.”대답은 빨랐지만 시선은 흔들렸다.“없는데 그렇게 힘든 얼굴을 해요?”민희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진희에게는 어떤 추궁보다 아팠다.도망치듯 와인을 마셨다.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민희의 차가 진희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진희는 잠이 들었다가 어깨를 흔드는 감각에 눈을 떴다.“진희 씨, 다 왔어요.”흐릿한 시야 속 가까운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안미래인 줄 알았다.단 1초 뒤 현실이 돌아왔다. 조민희였다.진희는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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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초등학교 1학년의 녹취

형의 집 문이 열렸다.“몰골이 그게 뭐냐.”유진수가 혀를 차며 와인잔을 내밀었다. 진희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이 건물 스무 층 위 어딘가에 그녀가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 술기운이 다시 올라왔다.“엄마…….”규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작았다.김수연이 돌아보자 아이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휴대폰을 내밀었다.“왜 그래, 규리야?”“이거…… 한번 들어봐.”화면에는 녹음 파일 하나가 떠 있었다. 수연이 별생각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잠깐의 잡음 뒤로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근데 있잖아. 너도 솔직히 규리 테니스 안 나오면 좋겠지 않아?”수연의 눈동자가 굳었다. 소파에 기대 있던 진희도 와인잔을 내려놓았다.“왜? 난 아닌데…….”“진짜? 하나도 안 싫어?”순진한 대답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질문이었다. 목소리는 어린데 그 안에 숨은 의도는 선명했다.녹음이 끝나자 수연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이거 누가 녹음했어?”“김율…….”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율이네 엄마는 변호사, 아빠는 현직 판사, 할아버지는 전직 검사장이었다. 대치동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집안이었다.“도련님도 들었죠? 초등학교 1학년이 이런다니까요.”진희는 대답 대신 굳은 얼굴로 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취기가 한순간에 가셨다.수연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코치에게 말할까. 테니스에서 규리를 빼야 할까. 다른 엄마들에게 먼저 설명해야 할까.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다음 날, 빵을 사 들고 나오던 수연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미래를 발견했다.“수연 원장님, 안녕하세요.”미래는 웃다가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무슨 일 있어요?”그 다정한 한마디에 수연은 밤새 삼킨 이야기를 전부 쏟아냈다. 미래는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규리가 지금 1학년이죠?”“네.”“생일은 언제예요?”뜬금없는 질문에 수연이 눈을 깜빡였다.“다음 달인데…… 왜요?”“생일파티를 크게 해주세요. 바운스 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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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화보 속의 아픈 미소

정례가 두툼한 잡지와 사진 원본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사모님, 이것 좀 보세요. 사진이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화보 속에는 성웅과 미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이들까지 함께였다. 고급스러운 거실과 푸른 양재천을 배경으로 한, 흠잡을 곳 없는 가족사진.미래는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처럼 웃고 있었다.하지만 촬영하던 날의 차가운 공기를 미래는 기억했다. 플래시가 터질 때만 남편에게 기대어 웃었던 순간. 평생 연습해 온 ‘완벽해 보이는 일’이 한 장의 사진 안에 아름답게 박제되어 있었다.“우리 사모님은 실제로 보는 게 백 배는 더 예쁘신데…….”정례가 작게 중얼거렸다.미래는 씁쓸함을 감추며 잡지를 덮었다.“이모, 또 시작이시네.”다음 날, 병원 휴게실.잡지를 넘기던 수연이 갑자기 소리쳤다.“유 원장! 이것 좀 봐봐.”커피잔을 든 진희가 다가왔다.“왜요?”“우리 동 펜트하우스에 사는 안미래 님이랑 남편분이 이번 하이라이프 메인 화보에 나왔어.”잡지가 진희 앞에 펼쳐졌다.화려한 프레임 한가운데 안미래가 있었다.수려한 남편, 두 아이, 웅장한 펜트하우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가진 여자가 완벽하게 웃고 있었다.“남편분도 진짜 멋있지? 지난번 엘리베이터에서 뵀는데 아우라가 장난 아니더라. 완벽한 부부 같아.”진희는 대답하지 못했다.사진 속 성웅의 손은 미래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남편의 자리였다. 그 손 하나가 현실의 경계선처럼 선명했다.그런데 진희의 시선은 결국 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사람들은 아름다운 미소를 보았다. 진희에게는 그 미소 뒤에 감춘 외로움이 먼저 보였다.불과 얼마 전, 유리문에 부딪힌 자신을 보고 아이처럼 웃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의 미래는 살아 있었다. 화보 속 미래는 완벽한 대신 숨을 쉬지 않았다.진희의 손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잡지 위에 인쇄된 미래의 입술 가까이에서 멈췄다가, 슬픈 눈동자를 천천히 따라갔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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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병원 밖에서 만난 남자

인터뷰 화보가 공개된 다음 날, 안미래는 다시 월드베스트스킨 피부과를 찾았다.이번 예약은 대표원장에게 잡혀 있었다.“안미래 님, 화보 봤습니다. 직원들이 아침부터 난리였어요.”“사진이 잘 나온 거예요.”“사진이 아무나 그렇게 나오나요.”대표원장은 차트를 넘기다 문득 웃었다.“지난번에는 유진희 원장에게 받으셨네요. 만족하셨죠?”“네.”고작 한 글자였는데 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유 원장이 손끝이 섬세하고 눈이 높아요. 박 대표님과 안미래 님 줄기세포 관리는 앞으로 유 원장 전담으로 잡아드리겠습니다.”박 대표님과 안미래 님.남편과 자신이 한 문장 안에서 유진희에게 맡겨졌다. 미래는 눈을 감았지만, 얼굴 위를 스치는 대표원장의 손보다 다른 목소리가 먼저 되살아났다.말 잘 들어야 합니다. 모범 환자니까.“언니!”관리를 마치고 나오자 김수연이 가방을 든 채 뛰어왔다. 어렵게 예약했다는 조선팰리스 중식당에 함께 가기로 한 날이었다.“서윤이랑 진원이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 사고력 수학 어디 보냈어요?”엘리베이터 앞까지 오는 동안 수연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미래가 웃으며 대답하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엘리베이터 안에는 단 한 사람이 서 있었다.하얀 가운을 벗어 팔에 걸친 유진희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반가움이 먼저였고, 당혹감은 그다음이었다.“어? 유 원장, 점심 먹으러 가?”“네. 오전 진료만 있는 날이라서요.”수연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잘됐다. 우리랑 같이 가요. 언니, 괜찮죠?”미래는 대답하기 전에 진희를 보았다.“네. 같이 가세요.”입술이 마음보다 빨랐다.진희의 손가락이 가운 자락을 움켜쥐었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그럼…… 저도 가도 될까요?”호텔 최고층의 룸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수연이 아이들 이야기를 쏟아냈고, 미래는 다정하게 받아주었다. 진희는 대화에 끼면서도 자꾸만 미래의 표정을 살폈다.그때 수연의 전화가 울렸다.“학교네. 잠시만요.”문이 닫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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