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By:  세련을담다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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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셋의 안미래에게 남편 박성웅은 더 이상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침대 위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런 미래 앞에 서른일곱의 피부과 전문의 유진희가 나타났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설렘이 되살아난 순간, 미래는 깨닫는다. 자신이 잃어버린 건 사랑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내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남편. 이제 와서, 박성웅은 아내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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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 남편보다 낯선 남자

박성웅은 아이들에게만은 항상 다정한 아빠였다.

피부과 행사가 있던 날 아침에도 그랬다.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이리 와봐.”

성웅이 초등학교 6학년인 진원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다시 채웠다. 어긋난 단추를 바로잡는 손길은 크고 능숙했으며 놀랍도록 다정했다.

“아빠, 이번 주말에 농구 가요. 친구들이랑 시합하는데 아빠도 같이 뛰어요.”

“이 아빠가 너희 같은 애송이들한테 지겠냐?”

성웅이 낮게 웃자 진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뒤늦게 식탁으로 온 딸 서윤에게는 피곤하면 오늘은 일찍 들어오라며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아침 식탁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온기가 번졌다.

안미래는 말없이 커피잔을 감싸 쥐었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은 철저히 다른 사람이었다. 눈빛도, 목소리도, 손끝의 온도도 달랐다.

진원의 단추를 채워주고 서윤의 머리를 쓰다듬던 저 손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다정하게

닿았던 게 언제였을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피부과 행사 가는 날이지?”

성웅은 아내를 보지 않은 채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네.”

“화환은 내가 보내놨어. 얼굴만 비추고 와.”

“알겠어요.”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쉰하나의 박성웅은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자수성가한 사업가다운 자신감, 흐트러짐 없는 태도, 운동으로 다져진 큰 체격까지. 남들이 보기에는 남편도, 아내도, 아이들도 흠잡을 데 없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마흔셋의 미래는 그 완벽한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오래전부터 혼자였다.

오후 여섯 시, 양재천 위로 겨울 해가 내려앉았다.

펜트하우스 통창 너머로 핑크빛 노을이 부서졌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사람들은 뉴욕 센트럴파크 뷰가 부럽지 않다며 감탄했었다.

이제 미래에게는 마음처럼 쓸쓸한 그림일 뿐이었다.

그녀는 진주 빛깔의 셀린느 실크 블라우스와 샤넬 라인 스커트를 골랐다. 거울 속 얼굴은 마흔셋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사랑스러웠다. 작고 동그란 얼굴 아래로는

가느다란 허리와 부드러운 곡선이 이어졌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남편은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모님, 오늘 정말 예쁘세요.”

정례가 코트를 미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박 대표님 심부름하러 가는 건데 뭘요.”

“그래도요. 밖이 추우니 꼭 여미고 가세요.”

미래는 미소 지었다. 이 집에서 자신의 얼굴과 마음을 찬찬히 살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곁을 지킨 정례뿐이었다.

강남 한복판, 확장 이전한 월드베스트스킨 피부과의 VVIP 파티장은 생화와 크리스탈 조명, 샴페인으로 눈부셨다. 그러나 대치동 사모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새로 온 유진희 부원장님 보셨어요?”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들어가서 수석으로 졸업했대요.”

“키도 모델처럼 크고 얼굴은 연예인이라던데.”

여자들의 웃음이 화려하게 터졌다.

그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미래가 서 있었다. 과하게 꾸미지도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있는 곳만 유난히 환해 보였다.

마흔셋, 두 아이의 엄마.

하지만 얼굴은 서른 초반처럼 싱그러웠고, 가녀린 인상과 성숙한 몸의 곡선이 한 사람 안에서 묘하게 공존했다.

주변 여자들은 미래를 보지 않는 척했다. 이 동네에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진짜 범접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 앞에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패배하는 것처럼 여겼다.

“민서맘, 오늘 너무 예쁘다.”

“유진 언니야말로 얼마나 우아한데요.”

칭찬은 미래를 비껴가며 오갔다. 단둘이 있을 때면 화장품과 옷 브랜드를 캐묻던 여자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녀를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미래는 샴페인잔을 내려놓았다. 남편 대신 참석한 파티에서도 그녀는 혼자였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어 조용한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타고 있던 남자도 벽을 향한 채 서 있었다.

스르륵, 문이 닫혔다.

단둘뿐인 남녀.

정적이 흐른 지 불과 7초.

툭―.

작은 충격음과 함께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거칠게 멈춰 섰다.

완벽한 암흑 속에서 미래의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저리고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괜찮으세요?”

낮고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날아왔다.

미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이 속절없이 기울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십칠 년을 함께 산 남편의 손보다 빠르고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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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둠 속에서 가장 안전한 곳
코트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남자의 한 손은 미래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다른 손은 가녀린 팔을 붙들었다.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그의 허벅지와 가슴에 기대고 말았다.“천천히 숨 쉬세요. 시스템이 잠시 오작동한 겁니다.”“저…… 흑…….”실크 블라우스는 얇았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가느다란 허리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이 천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유진희의 숨이 짧게 멎었다.의사로서 수없이 사람의 몸을 접해온 남자였다. 그런데 제 품으로 무너진 이 여자의 몸은 이상할 만큼 낯설고 강렬했다. 작고 가녀린 줄만 알았던 몸에 성숙하고 아름다운 굴곡이 숨어 있었다.떨어져야 했다.그러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미래도 본능적으로 남자의 팔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단단한 근육이 잡혔다. 힘이 풀린 다리는 그의 허벅지에 닿았고, 얼굴 가까이에서는 넓은 가슴이 호흡을 따라 오르내렸다.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자였다.그런데 서로의 몸은 이미 상대를 기억하기 시작했다.어둠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눈 대신 손끝과 피부가 상대를 알아가고 있었으니까.“제가 꽉 잡고 있으니 안심하세요.”남자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사방이 막힌 공간, 멈춰버린 기계, 낯선 남자의 품. 분명 무서워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래는 자신이 어둠 때문에 떠는 것인지, 이 남자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떠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한 가지는 분명했다.그의 팔 안이 이상하리만큼 안전했다.“혹시 폐쇄공포증이 있으신가요?”“잘…… 모르겠어요.”“숨이 엉켜서 그래요. 제 호흡을 따라 하세요. 천천히 들이마시고.”미래는 낮은 목소리에 이끌리듯 숨을 들이마셨다. 깨끗한 섬유 향과 묵직하고 서늘한 남자의 체취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이제 내쉬고.”그가 시키는 대로 길게 숨을 뱉었다.“잘하고 계십니다.”그 짧은 칭찬이 가슴 한가운데 박혔다.십칠 년의 결혼생활 동안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호흡이 진정되자 다른 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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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편보다 뜨거웠다
집에 돌아온 미래는 뜨거운 물을 오래 맞았다.물줄기가 등을 타고 흐를 때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붙들었던 커다란 손이 떠올랐다.무심코 그 자리를 짚었다가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드레스룸에서 얇은 실크 슬립을 꺼내 입었다. 남편을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도 가장 아름다운 것을 고르는 일은 안미래가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었다.거울 속 여자는 여전히 눈부셨다.아주 오래전에는 성웅도 말했다. 오늘 참 예쁘다고. 그 옷이 잘 어울린다고. 향기가 좋다고.그 말들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서서히 마모된 것들은 마지막 순간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침실에 들어가자 성웅은 이미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오늘 병원 엘리베이터가 멈췄어요.”“그래?”“불도 꺼지고…… 조금 무서웠어요.”“이제 괜찮지?”그것이 끝이었다.남편은 돌아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묻지도 않았다.미래는 넓고 우직한 등을 바라보았다. 십칠 년을 함께 살아온 내 남자의 등. 그러나 한 번도 ‘힘들면 내게 기대’라는 안식을 내어준 적 없는 차가운 벽.“불 끌까?”“네.”딸깍.같은 침대, 같은 이불을 쓰면서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어둠이 내려앉자 미래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남편이 아니었다. 낮은 목소리, 단단한 팔, 힘이 풀린 다리를 받쳐주던 허벅지, 실크 너머로 전해지던 뜨거운 손바닥.눈으로 보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선명했다.오늘 처음 만난 낯선 남자의 품이 십칠 년을 함께한 남편의 곁보다 따뜻하고 안전했다.그 사실이 지독하게 달콤했고, 그만큼 죄스러웠다.다음 날 아침.아이들과 웃던 성웅이 이번에는 미래에게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어제 피부과 파티는 어땠어?”“병원 잘 꾸며놨더라고요.”“화환은 확인했고?”“네.”“그래.”그의 시선은 다시 태블릿으로 돌아갔다.미래는 커피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 이 집에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따스함은 그것뿐이었다.남편과 아이들이 나간 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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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완벽한 사모님의 하루
안미래의 오전은 기계처럼 정확했다.필라테스, 사우나, 아이들 일정 점검. 그녀는 집 앞 스튜디오를 두고 일부러 청담동까지 갔다. 대치동 학부모를 마주치는 순간, 운동도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노동이 되기때문이었다.아이의 성적이 엄마의 계급이 되고, 엄마가 아이의 외교관이 되는 동네. 그곳에서는 속내를 들켜도, 패를 보여도 안 됐다. 언제나 교양 있고 흠잡을 데 없는 사모님이어야 했다.“회원님, 오늘 몸 선이 정말 좋아요. 누가 마흔셋이라고 보겠어요?”십 년째 미래를 지도해온 강사가 감탄했다.“특히 가슴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선은 타고나신 거예요. 피부 탄력까지 그대로고…….”미래는 짧게 웃고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외모 칭찬을 오래 듣는 일은 늘 불편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아름답다고 해도, 정작 듣고 싶은 한 사람에게서는 오래전부터 아무 말도 듣지 못했으니까.운동을 마친 뒤 한적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누구도 그녀를 ‘진원 엄마’나 ‘서윤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곳. 오롯이 안미래로 존재하는 한 시간의 사치였다.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딸에게 전화가 왔다.“엄마, 나 진짜 망했어.”“무슨 일인데?”“화학 수행평가 조가 완전 죽음의 조야. 안 선생님한테 빨리 연락해줘.”서윤이 부르는 조원들의 이름을 듣자 미래의 표정이 굳었다. 대치동 엄마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무임승차와 질투의 조합이었다.미래는 곧바로 비밀 과외 선생에게 연락했다. 대형 학원 간판 뒤에 감춰진 족집게 강사, 검증된 엄마들만 공유하는 번호. 수년간 발로 뛰며 완벽하게 만들어둔 라인이었다.긴 통화가 끝났을 때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샌드위치는 손도 대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또다시 완벽한 엄마의 임무를 해냈다.하지만 인간 안미래의 한 시간은 사라졌다.그때 옆 테이블에서 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래로 보이는 평범한 주부였다. 명품 가방도, 관리받은 손톱도 없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통화하고 있었다.“여보, 오늘 저녁 뭐 먹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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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장 솔직한 관계
미래는 안방 거실 홈바에서 글렌피딕 병을 꺼냈다.성웅의 잔에는 얼음 없이 원액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는 동그란 얼음을 두 개 넣었다. 호박빛 술이 투명한 얼음을 타고 흘러내렸다.침실에서 성웅은 상의를 벗은 채 침대 헤드에 기대 있었다. 쉰하나라는 나이가 무색한 몸이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다져진 넓은 어깨와 단단한 근육.미래는 여전히 남편의 육체에 끌리는 자신이 서글펐다. 저토록 훌륭한 몸을 가진 남자가 왜 그 안에 있는 자신은 한 사람으로 바라봐주지 않는 걸까.성웅이 미래의 잔을 보고 물었다.“마시게?”“오늘은 저도 푹 자고 싶어서요.”미래가 잔을 기울이자 성웅은 아직 절반이나 남은 술을 빼앗아 협탁에 놓았다.십칠 년을 함께 산 미래는 그 신호를 알았다.내가 지금 원하니까, 이제 네가 맞추라는 뜻.성웅의 손이 로브 안으로 들어왔다. 매듭을 다정히 풀어주는 과정은 없었다. 그는 드러난 아내의 몸을 익숙하게 움켜쥐었다.어디를 만져야 숨이 달라지고, 어떤 자극에 힘이 풀리는지 너무 잘 아는 손이었다. 낮에는 마음을 외면하면서 밤에는 몸의 가장 은밀한 반응까지 기억하는 남자.미래의 호흡이 흐트러졌다.정서적 교류는 사라진 결혼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이 시작되면 답답함이 잠시 녹았다.성웅이 자신의 욕구를 아내에게 풀 듯, 미래도 남편의 능숙한 손을 빌려 제 욕망을 풀었다.깊은 대화도, 마음을 묻는 말도 없었다.아이러니하게도 침대 위에서만 두 사람은 가장 솔직했다.미래는 익숙하게 남편을 만족시켰고, 성웅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질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면 미래도 어느새 절정에 가까워졌다.처음 사랑했을 때는 달랐다. 작은 표정 하나를 놓칠까 서로를 바라봤다.지금 미래는 남편의 얼굴 대신 눈을 감고 제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에만 집중했다. 사랑을 확인하지도, 다정함을 기대하지도 않았다.절정이 가까워지자 성웅은 미래를 자신의 위로 끌어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십수 년 동안 수도 없이 맞춰온 몸이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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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읽음 31, 답장 0
같은 밤, 유진희는 거실 통창 앞에 서 있었다.강남의 불빛이 차갑게 펼쳐져 있었다. 새 병원으로 옮긴 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진료와회의, VIP 고객 관리가 끝없이 이어졌다.그런데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병원이 아니었다.멈춘 엘리베이터.제 품으로 무너진 여자.가느다란 허리와 떨리던 숨.진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사라졌어야 할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왜 잊히지 않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이름도 몰랐다. 다시 만날 가능성조차 희박했다.그럼에도 그는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리고 묻고 싶었다. 그날 어둠 속에서 떨고 있던 이유가 정말 엘리베이터 때문뿐이었는지.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그 여자 역시 같은 밤, 남편 곁에서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며칠 뒤.서윤을 학원 앞에 내려준 미래는 집 앞 파리크라상에 들렀다.오후의 베이커리는 한산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른한 온기와 함께 매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미래가 트레이를 들고 진열대 앞에 섰을 때 익숙한 호칭이 들렸다.“어머, 진원 어머니.”같은 동, 같은 반 학부모 두 사람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목례만 나누는 사이. 딱그만큼의 거리만 유지하는 관계였다.“이번에 6학년이 13반까지 늘었다면서요?”“우리 반에도 전학생이 둘이나 왔대요. 분당에서 온 쌍둥이라던데.”그때 미래의 휴대폰이 연달아 진동했다. 새로 만들어진 6학년 1반 학부모 단톡방이었다.회장 어머니의 긴 인사가 올라오자 답장이 순식간에 줄을 이었다.[△△ 엄마입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엄마입니다. 반갑습니다.^^][◇◇ 맘입니다.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았다. 짧게, 신속하게, 절대로 튀지 않게. 미래도 두 줄짜리 인사를 남겼다.[안미래: 안녕하세요. 진원 엄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바로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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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금지된 질문
며칠 뒤 공개수업 날, 교실 뒤편은 시작 전부터 학부모들로 가득 찼다.명품 가방과 세련된 옷차림, 관리된 외모까지. 아이의 성적을 보좌하는 엄마 역시 뒤처져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미래는 소란의 중심에서 한 발 비껴 서 있었다. 장식 없는 옷차림이었지만 단순할수록 고운골격과 기품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진원이가 교사의 질문에 막힘없이 손을 들자 미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수업이 끝난 뒤 엄마들은 브런치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민서맘과 유진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서로의 피부와옷차림을 칭찬했다.“역시 미스코리아 출신은 다르네요.”“유진 어머니가 더 관리 잘하시면서요.”칭찬은 테이블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미래에게 도착할 듯하면 화제는 기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래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이곳에서 칭찬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여자에게만 베푸는 여유였다. 미래처럼 압도적으로아름다운 여자를 향해 ‘예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일이었다.그 불문율을 알 리 없는 수진이 재현맘에게 몸을 기울였다.“재현 어머니, 재현이는 영어학원 어디로 보내세요?”테이블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재현맘은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우리 재현이는 5학년 2학기부터 영어학원 안 다녀요. 겨울에 글로리아에서 중등문법만가볍게 정리하려고요.”“아, 글로리아가 문법을 제일 잘 가르치는 곳인가 봐요?”“저명하죠.”대답은 그것뿐이었다.유진맘이 민서맘에게 낮게 속삭였다.“영어는 끝내고 왔어야지. 이미 ‘닥치고 수학’ 한 지가 언제인데.”수진만 자신이 금기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미래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모았다. 한 번이면 괜찮았다. 여기서 수진이 조용히넘어가기만 하면.잠시 후, 수진이 미래를 보며 환하게 입을 열었다.“그나저나 진원 어머니는 정말 미인이세요.”테이블 위의 손길들이 동시에 멈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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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이지 않는 계급표
“지난번에도 놀랐는데 고등학생 자녀가 있으시다는 말을 듣고 더 놀랐어요. 얼굴도 몸매도6학년 학부모라고는 믿기지 않아요.”수진은 누구도 말하지 않던 안미래의 우월함을 너무도 태연하게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민서맘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엄마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미래는 쇄도하는 시선을 견디며 수줍은 미소만 지었다.“진원 어머니, 오늘 계타셨네요.”재현맘의 말에 가식적인 웃음이 터졌다. 회장 어머니가 재빨리 농구 심화 레슨으로 화제를 돌렸다.집에 돌아오자 수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최수진: 진원 어머니ㅠㅠ 저희 애들 방금 영어학원 입학 테스트 보고 나와서 엉엉 울어요.]미래의 손가락이 멈췄다.[안미래: 어머나, 왜요? 문제가 많이 어려웠나 봐요.][최수진: 어려운 수준이 아니에요ㅠㅠ 시험지가 거의 고등학교 모의고사 같았대요. 겨우초등학교 6학년 애들한테요. 지호랑 지원이가 분당에서는 영어 잘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여기는 아예 다른 세상인가봐요.]미래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분당에서 나름대로 탄탄하게 공부해 온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치동의 입학 테스트는 차원이 달랐다. 처음 이 동네에 들어온아이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 열 명 중 아홉은 그 벽 앞에서 자신이 뒤처졌다고 믿고 울었다.[안미래: 혹시 입테 대비를 전문으로 봐주시는 선생님이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답장은 곧바로 왔다.[최수진: 네? 학원에 들어가려고도 따로 과외를 받아야 해요?]미래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답장을 쳤다.[안미래: 대치동은 그래요. 인기 학원은 입학 테스트가 워낙 어려워서, 시험 통과하려고 몇 주에서 몇 달씩 준비하는아이들도 많아요. 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과외가 따로 있는 셈이죠.]잠시 뒤, 수진의 메시지가 커다란 글씨로 쏟아졌다.[최수진: 어머어머…… 학원 다니려고 과외를 또 받는다는 소문이 진짜였군요. 저는 그냥 괴담인 줄 알았어요ㅠㅠ]미래는 작게 웃다가, 이내 쓴맛을 삼켰다.아무 연고 없이 이 동네로 들어온 엄마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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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0.5초
처음에는 이웃에게 보내는 무심한 눈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한 번 닿았다 거두어진 시선이 더 깊은 온기를 품고 돌아왔다. 미래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치동에서 오래 살아온사람은 보지 않고도 안다. 누가 자신을 바라보는지, 그 시선에 어떤 감정이 실려있는지.마침내 미래가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고작 0.5초.남자가 먼저 들킨 사람처럼 시선을 돌렸다. 미래도 정면을 바라봤지만 귓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우리 망고를 알고 계시나 봐요.”낮고 깊은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쳤거든요.”“그렇군요.”짧은 대화 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비어 있는 침묵은 아니었다. 서로 정면만 보면서도 피부 전체로 상대를의식하고 있었다.목적층에 도착했지만 망고는 미래의 발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망고야, 가야지.”리드줄을 당겨도 버텼다.남자의 입가에 난처한 미소가 스쳤다.“안 됩니다. 가야지.”그가 조금 단호하게 줄을 당기자 망고가 못내 아쉬운 듯 일어났다.“안녕, 망고.”문이 닫히기 직전, 남자는 다시 한번 미래를 바라봤다.혼자 남은 미래도 닫힌 문을 응시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심장이 묵직하게 뛰었다.문 너머로 사라진 남자 역시 엘리베이터 앞에서 곧장 움직이지 못했다. 망고가 리드줄을 당기며 보채고 나서야 정신을차렸다.평생 수많은 여성의 시선을 받아온 남자였다. 상대가 먼저 눈을 피하는 일은 익숙했지만, 자신이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돌린 것은 처음이었다.그는 뜨거워진 귓가를 손끝으로 눌렀다. 고작 0.5초였다. 그런데 그 짧은 눈맞춤이 수술실에서 보낸 몇 시간보다 더 긴 잔상을 남겼다.그 남자는 자신을 보았다. 한 번 피했다가 다시 보고,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눈에 담았다.남편의 눈은 오래전부터 미래의 영혼을 보지 않았다. 완벽하게 관리된 몸만 가끔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자신은 그 소외에 익숙해졌다고 믿었다.하지만 낯선 남자가 자신을 보고 멈춰 서는 순간 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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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결혼한 여자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길게 얽혔다.남자의 눈에는 분명 욕망이 있었지만 무례함은 없었다. 숨기지 못한 감정을 온전히 담은 채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 깨어났다.누군가 자신을 온전한 여자로 바라보는 느낌.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미래였다. 하얀 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미래는 도망치듯 내렸다.“여보, 성웅 씨. 제 말 들려요?”검은 세단 안에는 술에 취한 성웅이 쓰러져 있었다. 미래는 기사와 함께 남편의 큰 몸을 부축했다. 한 손에는 가방과 소지품을들고, 비틀거리는 남편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조금만 힘내요. 조심해서 걸어요.”자신의 차로 향하던 남자가 멈춰 섰다.결혼했구나.그의 눈이 미래의 왼손에 머물렀다. 그리고 기댈 곳 없이 남편을 부축하는 가냘픈 어깨로 옮겨갔다.기사를 대동한 검은 세단, 오십 대 초반의 웅장한 남자.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성공한 사내의 전형이었다.아무렇지 않은 얼굴과 달리 미래의 뒷모습은 한없이 외로워 보였다.알고 나면 끝이다.누군가의 아내라면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선을 긋는 일은 그 남자에게 어렵지 않았다.그런데 고개를 돌리려 해도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날 새벽, 미래는 술 냄새 속에서 눈을 떴다. 남편이 바로 곁에 누워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엘리베이터 속 남자의 눈빛이 떠올랐다.죄책감이 들어야 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죄책감은 없었다.오히려 죄책감조차 들지 않는 자신이 낯설었다.그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일 뿐이라고 되뇌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남자의 단정한 옆모습과 참았던호흡이 피어올랐다.나 때문에 그 좁은 공간에서 숨까지 참고 있었구나.그 생각이 스치자 미래는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편의 곁에서 다른 남자를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같은 밤, 진희도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유부녀다. 누군가의 아내다.그러나 아무리 되뇌어도 마음은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조금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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