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흔셋의 안미래에게 남편 박성웅은 더 이상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침대 위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런 미래 앞에 서른일곱의 피부과 전문의 유진희가 나타났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설렘이 되살아난 순간, 미래는 깨닫는다. 자신이 잃어버린 건 사랑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내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남편. 이제 와서, 박성웅은 아내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View More박성웅은 아이들에게만은 항상 다정한 아빠였다.
피부과 행사가 있던 날 아침에도 그랬다.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이리 와봐.”
성웅이 초등학교 6학년인 진원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다시 채웠다. 어긋난 단추를 바로잡는 손길은 크고 능숙했으며 놀랍도록 다정했다.
“아빠, 이번 주말에 농구 가요. 친구들이랑 시합하는데 아빠도 같이 뛰어요.”
“이 아빠가 너희 같은 애송이들한테 지겠냐?”
성웅이 낮게 웃자 진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뒤늦게 식탁으로 온 딸 서윤에게는 피곤하면 오늘은 일찍 들어오라며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아침 식탁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온기가 번졌다.
안미래는 말없이 커피잔을 감싸 쥐었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은 철저히 다른 사람이었다. 눈빛도, 목소리도, 손끝의 온도도 달랐다.
진원의 단추를 채워주고 서윤의 머리를 쓰다듬던 저 손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다정하게
닿았던 게 언제였을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피부과 행사 가는 날이지?”
성웅은 아내를 보지 않은 채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네.”
“화환은 내가 보내놨어. 얼굴만 비추고 와.”
“알겠어요.”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쉰하나의 박성웅은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자수성가한 사업가다운 자신감, 흐트러짐 없는 태도, 운동으로 다져진 큰 체격까지. 남들이 보기에는 남편도, 아내도, 아이들도 흠잡을 데 없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마흔셋의 미래는 그 완벽한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오래전부터 혼자였다.
오후 여섯 시, 양재천 위로 겨울 해가 내려앉았다.
펜트하우스 통창 너머로 핑크빛 노을이 부서졌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사람들은 뉴욕 센트럴파크 뷰가 부럽지 않다며 감탄했었다.
이제 미래에게는 마음처럼 쓸쓸한 그림일 뿐이었다.
그녀는 진주 빛깔의 셀린느 실크 블라우스와 샤넬 라인 스커트를 골랐다. 거울 속 얼굴은 마흔셋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사랑스러웠다. 작고 동그란 얼굴 아래로는
가느다란 허리와 부드러운 곡선이 이어졌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남편은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모님, 오늘 정말 예쁘세요.”
정례가 코트를 미래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박 대표님 심부름하러 가는 건데 뭘요.”
“그래도요. 밖이 추우니 꼭 여미고 가세요.”
미래는 미소 지었다. 이 집에서 자신의 얼굴과 마음을 찬찬히 살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곁을 지킨 정례뿐이었다.
강남 한복판, 확장 이전한 월드베스트스킨 피부과의 VVIP 파티장은 생화와 크리스탈 조명, 샴페인으로 눈부셨다. 그러나 대치동 사모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새로 온 유진희 부원장님 보셨어요?”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들어가서 수석으로 졸업했대요.”
“키도 모델처럼 크고 얼굴은 연예인이라던데.”
여자들의 웃음이 화려하게 터졌다.
그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미래가 서 있었다. 과하게 꾸미지도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있는 곳만 유난히 환해 보였다.
마흔셋, 두 아이의 엄마.
하지만 얼굴은 서른 초반처럼 싱그러웠고, 가녀린 인상과 성숙한 몸의 곡선이 한 사람 안에서 묘하게 공존했다.
주변 여자들은 미래를 보지 않는 척했다. 이 동네에는 보이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진짜 범접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 앞에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패배하는 것처럼 여겼다.
“민서맘, 오늘 너무 예쁘다.”
“유진 언니야말로 얼마나 우아한데요.”
칭찬은 미래를 비껴가며 오갔다. 단둘이 있을 때면 화장품과 옷 브랜드를 캐묻던 여자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녀를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미래는 샴페인잔을 내려놓았다. 남편 대신 참석한 파티에서도 그녀는 혼자였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어 조용한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타고 있던 남자도 벽을 향한 채 서 있었다.
스르륵, 문이 닫혔다.
단둘뿐인 남녀.
정적이 흐른 지 불과 7초.
툭―.
작은 충격음과 함께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거칠게 멈춰 섰다.
완벽한 암흑 속에서 미래의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저리고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괜찮으세요?”
낮고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날아왔다.
미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이 속절없이 기울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십칠 년을 함께 산 남편의 손보다 빠르고 다정하게.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미래는 침대 한쪽 끝에 모로 누워 있었다. 욕실에서는 성웅이 샤워하는 물소리가 쏴아 하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이불 속에서 미래는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나 켰다 껐다. 메시지 창에는 진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진희 씨, 내일 오전 11시에 우리 엄마가]거기까지 쓰고, 미래의 손가락이 멈췄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엄마가 당신을 만나러 간다고. 당신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나도 모르겠다고.그때, 욕실의 물소리가 뚝 그쳤다.미래는 황급히 쓰던 글자를 하나하나 지웠다. 그리고 휴대폰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은 채 눈을 감았다.딸깍, 욕실 문이 열리고 축축한 수증기와 함께 성웅이 걸어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 낸 성웅은,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미래를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위스키 가져와."언제나처럼 명령조였다. 부탁도, 질문도 아닌.미래는 잠시 그대로 누워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안방 거실 홈바에서 위스키를
"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미래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왜 내 말을 안 믿어요. 수아랑 통화했어요. 수아가…… 서윤이 미국 들어갈 때 같이 햄튼 집에 가자고 전화한 거예요."성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래에게로 걸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성웅의 눈빛이 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리고 두 손으로 미래의 양어깨를 꽉 움켜쥐었다."햄튼?"성웅이 미래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꿰뚫을 듯한 눈빛이었다."햄튼 놀러 가자고 했는데, 눈물 짜내면서 얘기해?""…….""말해 봐. 내가 너한테 못 해 준 게 뭔데."어깨를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통증에 미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성웅 씨…&hellip
끊긴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도 못한 채, 미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내일 오전 열한 시. 유진희 원장님한테.엄마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 진희를 빤히 쳐다볼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자, 손끝부터 싸늘하게 식어 갔다.그때, 손 안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미래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또 엄마일까. 떨리는 눈으로 화면을 내려다본 미래는, 그제야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화면에 찍힌 이름은 제시카(수아)였다."미래야…… 너 진도가 어떻게 된 거야? 말 좀 해 봐, 궁금해 미치겠는데……. 내가 시차가 완전 꼬여서 정신 못 차리다가 이제야 좀 잡혔어. 중간에 파리 다녀왔었거든. 그래서, 지금은 대체 어떤 상태인 거야?"수아의 밝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래의 목울대가 뜨겁게 막혀 왔다.미래는 안방 문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문 너머 어딘가에 정례 이모가 있었다. 미래는 휴대폰을 든 채 안방 욕실로 걸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샤워 부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참아 왔던 눈물이 툭툭 터져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에서 정례 이모가 고개를 내밀었다."아이고, 사모님 오셨어요.""네, 이모. 다녀왔어요."평소 같으면 "점심은 드셨어요?" 하며 따라 나왔을 정례 이모가, 오늘따라 행주를 쥔 채 미래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미래는 그 어색함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안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침대 끝에 걸터앉은 미래는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보았다. 부재중 전화 세 통. 그리고 짧은 메시지 하나.[엄마: 전화 받아.]미래는 긴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채 두 번도 가기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야. 너 그놈, 월드베스트피부과 유진희 원장 맞지?"인사도 없었다. 다짜고짜 날아든 그 이름에, 미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엄마가 그걸,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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