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21화

뒤에서 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여울이 돌아보자 도운이 웃으며 서 있었다.“여기가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도운이 반쯤 농담하듯 말했다. “이 정도면 인연이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인터넷에서 아무 데나 골랐는데 제 가게를 찾으셨잖아요.”“그럼 오후에 로또라도 한 장 사야겠네요. 운 좋으면 당첨될지도 모르잖아요.”“그건 한번 해 보셔도 좋겠네요.”대화를 나누던 중 여울의 핸드폰에 알림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진대호 부부가 묵는 호텔에서 온 이용 내역이었다.숙박비에 룸서비스와 추가 이용 금액까지 합쳐 72만 원이 찍혀 있었다.하룻밤에 72만 원이었다.여울은 헛웃음을 흘렸다.“외삼촌이랑 외숙모는 어디 묵으세요?”여울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며 답했다. “제가 잡아 드린 호텔이요.”“오늘 금요일이라 몇몇 검사는 월요일에 해야 하니까 이틀은 더 계셔야 하잖아요. 병원 근처 숙박비도 비싸고. 제가 근처에 비어 있는 오피스텔 하나가 있는데, 괜찮으시면...”“괜찮아요. 그것까지 신세 질 수는 없죠. 비싸도 며칠뿐이고 월요일에 검사 끝나면 내려가실 수 있으니까요.”도운은 더 권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아마 오늘 저녁부터 외숙모님이 검사 결과 어떠냐고 물어보실 것 같네요.”맞는 말이었다. 오후에 검사하고 나면 이선영은 분명 도운에게 상태를 물어봐 달라고 할 것이다.여울은 핸드폰을 꺼내 도운과 번호를 교환한 뒤 진대호 부부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집에 돌아오니 이미 오후 2시가 넘었다.톡에는 해준이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오전에 병원은 잘 다녀왔어? 출장 출발 일정이 2시로 당겨졌어.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생기면 민재한테 부탁해.]30분쯤 전에 온 메시지였다.확인해 보니 지금쯤 해준은 비행기에 탔을 시간이었다. 여울은 굳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옷을 갈아입은 뒤 오후에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정리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물 한 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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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세상에 괜찮은 남자가 엄해준 대표님 한 사람뿐인 것도 아니고, 모든 여자가 엄해준 대표님 아내 자리를 노리는 것도 아닙니다. 저도 만나는 사람 따로 있고요.”말을 마친 여울은 손에 쥐고 있던 젖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기 사무실로 걸어갔다. 걸음과 자세는 평소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하지만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잠시 뒤 아림이 들어왔을 때 여울은 이미 책상 위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타격을 받은 사람 같지 않았다.“실장님, 그분 가셨어요.”여울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알았어요. 잘 왔어요. 여기 내가 정리해 둔 자료가 하나 있는데 가져가서 한번 봐요. 앞으로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아림은 파일을 펼쳐 보다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실장님, 이거 우리 회사 주요 협력사 자료잖아요?”원래 해준과 여울 정도만 전체 내용을 볼 수 있는 자료였다. 그런 걸 자신에게 건넨다는 게 이상했다.여울은 옅게 웃었다. “기본 자료만 추린 거라 기밀 내용은 없어요. 계속 실무 보조만 하고 싶지 않다면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어요.”아림은 잠깐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장님, 혹시 퇴사하실 생각이세요?”“왜 그렇게 생각해요?”“요즘 실장님 업무를 하나씩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계시잖아요. 이런 중요한 자료까지 주시는 걸 보면 퇴사 아니면 부서 이동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부서 이동일 수도 있잖아요.”“정말 비서실장 그만두실 거예요? 실장님 없으면 대표님도 엄청 불편해하실 것 같은데요.”여울은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대표님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에요? 내가 없어도 아림 씨가 잘하면 되죠.”여울은 아림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 얘기는 당분간 비밀로 해 줘요.”아림이 울상을 지었다. “실장님, 안 가시면 안 돼요?”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남아 있으면 또 누가 찾아와 이런 모욕을 견뎌야 하나?’회사 소문은 늘 빨랐다. 저녁에 구내식당에 갔을 때는 이미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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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해안시 프로젝트로 내려간 뒤 일이 많았는지 상호는 전날 밤이 되어서야 주소를 보내왔다. 아이의 상황은 예전에 몇 마디 들었지만 자세한 건 직접 만나 봐야 알 수 있었다.문을 열어 준 사람은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였다.과외 선생님이 왔다는 걸 확인한 가사도우미는 정중하게 2층까지 안내해 방 위치를 알려 준 뒤 내려갔다.여울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들어오세요.”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었다.넓은 방에는 침대와 책상보다 먼저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앞에는 키가 18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상호에게 들은 바로는 16살,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안녕하세요. 구여울입니다.”남학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알아요. 들어오세요.”여울은 책상 옆 의자에 앉았지만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자 남학생이 결국 고개를 돌렸다. 여울을 본 눈에 잠깐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지만 금세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프랑스어 가르치러 온 선생님 아니에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여울이 웃었다. “학생 기다리는 중인데요.”“저를 왜요?”여울은 피아노 쪽을 턱짓했다. “한 곡 안 들려줘요?”남학생은 입술을 다문 채 잠깐 앉아 있다가 피아노 덮개를 닫고 여울 옆 의자로 옮겨 앉았다.“이제 시작해요.”여울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저는 들어오자마자 이름부터 말했는데 학생은 아직 자기소개 안 했네요.”“사촌 형이 말 안 했어요?”여울은 그 사촌 형이 상호를 뜻하는 것 같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 사촌 형은 지방 프로젝트 내려가 있어요. 주소도 어젯밤에 보내 줬고 다른 얘기는 거의 안 했어요.”“배시우예요.”“상호 선배한테 듣기로는 프랑스 쪽으로 유학 갈 계획이라 언어를 배우려는 거라고 하던데, 맞아요?”시우가 입꼬리를 비틀듯 올렸다. 별로 즐거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비슷해요.”‘부모님이 진로를 정해 둔 타입인가 보네.’“그럼 오늘은 일단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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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여자친구... 남자친구...’이 두 단어가 이상할 만큼 크게 들렸다. 여울은 해준을 바라보며 잠깐 멍해졌다.‘이 사람... 정말 우리 사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바람이 불어 잔머리가 뺨 위로 흩어졌다.여울이 손을 들기 전에 해준이 먼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올라온 손까지 잡았다.“들어가자.”해준은 집 안에 들어갈 때까지 여울의 손을 놓지 않았다.현관에서 손을 놓기에 신발이나 외투를 정리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해준은 손을 놓자마자 여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입을 맞추려는 줄 알았는데 해준은 그저 여울을 품에 꼭 안기만 했다.“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여울은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 “큰일은 없었어요.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고요.”해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다시 물었다. “외삼촌 쪽은?”“월요일에 검사 몇 가지 더 해야 해요.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나 배고픈데. 냉장고에 먹을 거 있어?”여울은 머릿속으로 냉장고 안을 떠올렸다. 며칠 동안 집에서 제대로 요리한 적이 없어 별다른 재료는 없을 것 같았다.다행히 전에 빚어 얼려 둔 새우만두가 조금 남아 있었다.“새우만둣국 끓여 줄까요?”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그럼 이제 놔요. 제가 준비할 테니까 대표님은 먼저 씻고 오세요.”해준은 조금 더 안고 있다가 마지못해 팔을 풀었다. 여울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갔고 해준은 안방으로 들어갔다.안방에 들어온 해준은 바로 욕실로 가지 않고 먼저 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 약에 필요한 그 희귀 약재, 언제쯤 구할 수 있어?”한진이 답했다. [빠르면 일주일 안에 들어옵니다.]“더 당겨 봐. 비서실은 장아림 빼고 이번 달 성과급 전부 보류해.”해준은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정현수는 바로 인사 처리하고.”출장으로 호우시를 비웠어도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전부 보고받은 뒤였다.비서실 직원을 한꺼번에 정리해서 결국 여울의 업무가 늘어날 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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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여울이 뭘 묻고 싶은지 이미 안다는 듯 해준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너랑 같이 출근할 거야.”여울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얼마 전 비서실 사람들 앞에서 해준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선을 그어 놓고, 오늘 같은 차에서 내려 회사에 들어가면 스스로 했던 말을 뒤집는 꼴이었다.“그럼 제 차 타고 가세요. 저는 지하철로 갈게요.”해준이 여울을 돌아보며 손에 든 넥타이를 흔들었다. “그 전에 이것부터 매 줘.”예전에도 몇 번 해 준 일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사적인 행동처럼 느껴졌다.여울은 고개를 숙인 채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정리했다.“우리가 몇 년 동안 같이 드나들었는데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자꾸 피하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여. 어차피 우리 둘 실제로 만나는 사이잖아. 굳이 숨길 이유 없어.”여울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이게 무슨 뜻이지?’‘우리 관계를 공개하겠다는 건가?’해준이 낮게 말했다. “네가 공개하고 싶다면 나도 반대 안 해.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막 떠오르던 기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해준의 말이 맞았다.규리와 약혼한다는 기사가 이미 퍼진 상황에서 두 사람 관계가 알려지면 결국 욕을 먹는 쪽은 여울이 될 것이다.‘설마 규리와 약혼한 뒤에도 나랑 지금 같은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는 건 아니겠지.’가슴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겁고 답답해졌다.윤명희와 해준이 같은 생각이라면, 자신은 지난 몇 년 동안 사람을 완전히 잘못 본 셈이었다.“여울아.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다 정리할게. 너한테 손해 가는 일 없게 할 거야.”“그럼 지금 인터넷에 난 약혼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힐 수 있어요?”말이 나가자마자 여울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할 수 있었다면 이미 진작 해명했을 것이다.여울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해준의 셔츠 깃까지 정리해 주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가요. 늦겠어요.”해준은 여울의 눈을 오래 바라봤다. 기대가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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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안내데스크 직원 둘은 방금 대화를 들킨 줄 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두 사람이 어쩔 줄 모르며 변명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왼쪽 앞에서 다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앞으로는 정말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같은 실수 절대 안 하겠습니다.”막 로비로 들어오던 직원들도 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상황을 지켜봤다.YL그룹에서 대표이사 비서실 직원들은 경영진 바로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회사에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비서실에 들어가기가 본사 입사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해준과 함께 일하는 자리인 만큼 채용 기준도 까다롭고 처우도 일반 직원보다 좋았다.해준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는 현수였다. 여울과 비슷한 시기에 비서실에 들어온 직원이었다.해준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정 비서가 왜 잘렸는지는 알아?”현수는 해준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업무 시간에 딴짓한 거랑... 여자친구를 사무실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한진은 해고 통보를 하면서 진짜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그 정도면 승진에 불이익 주는 선에서 끝낼 수도 있었어. 정 비서가 잘린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어.”현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구여울은 비서실장이고 정 비서의 직속 상사야. 지난주 금요일 외부인이 비서실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는데, 정 비서는 옆에서 한 마디도 안 했지.”“상사가 모욕당하는 걸 보고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했어. 책임감도 없고 비겁한 데다 남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더군. 그런 사람을 내가 왜 내 비서실에 둬야 하지?”현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가 붉어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나오지 않았다.해준은 현수를 지나쳐 다시 걸었다.“대표님, 그래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현수가 뒤를 돌아 소리쳤다. “그날 말 안 한 사람이 저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왜 저만 해고입니까?”해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눈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담겼다. “정말 여기서 정 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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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여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준을 가볍게 밀어내며 일부러 사무적으로 말했다. “대표님, 회사입니다. 체면 좀 지키세요.”해준은 붉어진 귀를 보자 최근 여울이 제 품에서 그만하라고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생각이 떠오르자 재빠르게 행동했다.해준은 여울의 귀에 짧게 입을 맞췄다.여울은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바로 두 걸음 물러났다. 놀란 눈으로 천장 쪽을 올려다봤다.“걱정 마. 전용 엘리베이터 카메라는 평소엔 꺼져 있어. 켜져 있어도 밖에 말할 사람 없어.”마침 관제실에서 장비 점검을 하던 보안 직원은 화면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마시던 차를 삼키는 것도 잊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영상은 상시 모니터링하지 않았지만 장비 이상 여부를 확인하려고 정해진 시간마다 점검 화면을 띄웠다.하필 그날 화면을 켜자마자 방금 장면이 잡힌 것이다.‘설마 대표님이 구 실장님을 좋아하는데 구 실장님이 선을 긋는 건가?’같은 시각, 옆 직원용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조금 전 로비에서 해준과 현수가 나눈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해준과 여울 두 사람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여울이 당한 일 때문에 비서실 전체를 문책하고, 약혼 상대의 어머니를 두고 난동을 부린 외부인이라고까지 했다.규리가 정말 해준의 아내가 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울이 해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비서실에는 전에는 없던 정적이 흘렀다.모두 제자리에서 조용히 일했고 물을 마실 때조차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유일하게 아림만 평소와 같은 자세로 여울을 대했다.여울이 들어오자 아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님,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여울은 다른 직원들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림에게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아림은 곧장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서실 일 들으셨죠? 대표님 진짜 멋있었어요. 저 오늘부터 대표님 팬 할래요.”여울은 웃으며 자기 사무실로 걸었다. “내가 준 자료는 다 봤어요?”“일부만 봤어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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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진미숙의 서러운 울음을 듣자 오히려 여울의 마음에는 씁쓸한 슬픔이 차올랐다.예전에 진미숙의 언니가 아이를 낳다가 큰 출혈이 있었고 합병증까지 겹쳐 위험했을 때도 진미숙이 이렇게 울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진미숙은 언니의 치료비를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를 두고 언니의 시댁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여울은 펜을 내려놓고 미간을 눌렀다.“알았어요. 엄마는 너무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여울은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고 병원에 다녀올 준비를 했다.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 때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도운이었다.“여보세요, 주 선생님.” 도운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친구라고 해도 되지 않아요? 이름으로 불러요. ‘주 선생님’이라고 들으면 괜히 지금 진료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뒤의 말이 농담이라는 걸 알아들은 여울도 호칭을 바꿨다.“도운 씨, 저희 외삼촌이랑 외숙모는 괜찮아요?”[지금은 많이 진정하셨어요. 입원 절차도 잡아 뒀고요.]“제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요. 자세한 건 가서 들을게요.”[알겠습니다.]통화를 끝낸 여울은 해준의 대표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렸는데 한참 답이 없어 외출한 줄 알고 돌아서려는 때 문이 열렸다.“대표님, 저 병원에 잠깐 다녀와야 해서 말씀드리려고 왔어요.”해준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같이 가.”여울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잠깐 보고 올 거예요. 큰일도 아니고요.”해준은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으로 여울 얼굴을 바라봤다.몇 초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진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말이 끝나자마자 해준은 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울이 거절할 틈은 없었다.해준이 직접 따라오는 것보다는 한진이 데려다주는 편이 눈에 덜 띄었다.여울은 비서실에 돌아가 몇 가지 업무를 맡겨 놓고 나왔다. 한진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울이 차 키를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한진이 말했다. “대표님 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여울은 잠깐 멈칫했다. 무슨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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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이선영은 계속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결혼할 때부터 잘못 선택했지. 누구는 시댁에서 결혼 준비도 해 주고 살면서 도움도 받는데 나는 늘 내가 다 알아서 했잖아.”“이제 큰돈 들어가는 병까지 걸렸네. 치료가 잘될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집안 돈 다 병원으로 들어가게 생겼어. 예성이는 아직 결혼도 안 했고.”진씨 집안 어른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진대호는 형제 중 막내였다. 진대호가 결혼할 당시 예식 준비며 살림 장만까지 큰누나인 진미숙이 대부분 챙겼고,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게 해 줬다.이선영이 지금 여울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며 푸념하는 이유는 뻔했다. 여울에게 치료비를 보태 달라는 요구였다.여울의 생각이 맞다면 이선영은 이미 진미숙에게도 같은 하소연을 했을 것이다.그래서 진미숙이 아까 그렇게 울면서 전화했을 것이다. 다만 치료비를 도와 달라는 말까지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병원에 입원했으면 큰일인데 외숙모, 태희 언니랑 예성이한테는 말씀하셨어요?”진대호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딸 태희는 해안시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아들 진예성은 현장직이라서 일을 따라 지역을 자주 옮겨 다녔다.진대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선영이 먼저 대답했다. “아직 말 안 했어. 애들 놀랄 텐데 적당한 때에 이야기해야지.”여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진대호에게 말했다. “외삼촌, 푹 쉬세요.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시면 돼요. 저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그래. 얼른 가서 일 봐라.”여울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이선영은 크게 눈을 흘겼다.“친외삼촌 보러 온 사람이 저렇게 정 없기도 힘들겠다. 걱정하는 척만 하고.”원래 목소리가 큰 사람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들으라고 더 크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여울은 복도까지 따라 나온 말을 전부 들었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한진도 마찬가지였다.여울은 한진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한진도 가볍게 웃었다. “집안마다 한두 분씩은 꼭 계시잖아요. 상대하기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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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르베르그룹의 방문 일정은 원래 목요일이었는데 내부 사정이 생겼다며 갑자기 다음 날로 일정을 앞당겼다.여울과 아림은 갑작스러운 준비 때문에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일을 마쳤다.사무실을 나선 여울은 무심코 맞은편 대표실 쪽을 바라봤다.아림이 바로 말했다. “대표님은 오후에 먼저 나가셨어요. 가실 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해준이 비서실 문제를 강하게 정리한 뒤 아림도 두 사람 사이가 단순한 상사와 부하직원보다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래서 평소보다 해준의 움직임을 조금 더 눈여겨봤다.물론 아림 나름대로는 여울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려는 마음이었다.아림은 여울과 해준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둘이 정말 사귀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여울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가요. 오늘은 일찍 자야 해요. 내일 오전에 공항 픽업도 가야 하니까.”“실장님, 저는 대표님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아요.”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아림은 옆에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 저 YL그룹 지원한 것도 처음엔 대표님 때문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대표님이 학교에 특강하러 오신 적이 있거든요.”“그날 학생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첫 지원서를 여기 냈는데 이렇게 진짜 붙을 줄은 몰랐죠.”여울은 그 이야기에 작게 웃었다. 아마 대부분의 대학생은 저런 기억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반면 여울의 대학 시절은 수업과 공부, 아르바이트 공고를 확인하는 일로만 채워져 있었다. 누가 잘생겼는지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여울이 웃자 아림은 혹시 말을 잘못했나 싶어 급히 덧붙였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대표님이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만약 대표님이 실장님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여울은 아림을 돌아봤다. 목소리는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러웠다.“어떤 부분에서 대표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어요?”아림은 비서실을 강하게 정리한 일과 오세화를 두고 화냈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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