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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os los capítulos de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Capítulo 1 - Capítulo 10

30 Capítulos

제1화

캐릭터가 그려진 잠옷 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온 구여울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엄해준을 발견했다.해준은 깃이 느슨하게 벌어진 검은색 실크 로브를 입고 있었다. 여울이 토하는 바람에 엉망이 된 값비싼 정장은 아직 세탁 바구니 안에 그대로 있었다.여울은 늘 해준이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 두곤 했다. 해준이 이 집에서 밤을 보내는 일은 드물었지만, 가끔 둘이 격하게 얽힌 날이면 입고 온 옷을 다시 입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여울이 나오는 걸 본 해준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담배의 끝이 마지막으로 붉게 타오른 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베란다 유리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왔다.해준의 표정에는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기색이 남아 있었다.“그렇게 결혼하고 싶어? 남자면 아무나 상관없을 정도로?”여울이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제가 자란 동네에선 25살쯤 되면 슬슬 결혼 얘기가 나오거든요. 26살을 넘기면 늦는다고 주변에서 성화고요.”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여울의 태도에 해준의 화는 더 치밀었다.눈을 가늘게 뜬 해준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 손으로 허리를 감아쥐고, 다른 손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지금 나한테 뭐라도 암시하는 거야?”여울의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선이 또렷한 해준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자, 잠시 외면했던 기대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엄해준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뜻?”그 말에 여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흐려졌던 정신도 금세 또렷해졌다.윤명희 회장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말끝에 묻어 있던 가벼운 비웃음까지 해준과 닮았다.어쩌면 이렇게 묻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호우시에서 해준의 아내 자리를 마다할 여자가 몇이나 될까?하지만 여울은 그럴 수 없었다.두 사람은 태어난 환경부터 달랐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거리였다.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 선을 넘어서 더 많은 걸 원한 건 여울이었다.다행이라면, 얼마 전 들은 해준의 소식이 여울의 욕심을 단번에 깨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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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지난 몇 년 동안 해준을 따라 각종 모임과 접대를 다니다 보니 여울도 웬만한 술에는 끄떡없는 편이 됐다.평소에는 어젯밤 바에서 마신 양 정도로 취할 리 없었다. 해준이 여울을 거꾸로 둘러업지만 않았어도 해준의 정장 위에 토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여울은 쇼핑백을 든 채 검은 정장 원피스에 7센티미터 힐을 신고 YL그룹 본사 최상층 비서실로 들어섰다.여울이 들어오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 몇 명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갔다.여울의 자리는 비서실 안쪽 독립 사무실에 있었다. 장아림이 인사를 건네며 캐모마일 티 한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실장님, 로즈데이 잘 보내세요!”여울은 잠깐 멈칫하고 오늘이 ‘로즈데이’라는 걸 떠올렸다.옅게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아림 씨도 좋은 하루 보내요.”“저기... 실장님...”머뭇거리는 아림을 본 여울이 웃으며 물었다. “이번엔 또 뭘 빌리고 싶은데요?”아림은 퇴근 후 패션 콘텐츠를 올리는 크리에이터였다. 코디 영상을 찍을 때 필요하다며 여울에게 가방과 스카프를 빌린 적도 두어 번 있었다.그때마다 고맙다며 작은 선물을 챙겨 오기도 했다.아림이 여울의 팔을 붙들고 웃었다. “지난번에 차셨던 시계요. 그것도 한 번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여울은 평소 시계를 잘 차지 않았다.지난 화이트데이에 해준이 선물한 시계를 딱 한 번 착용했을 뿐이었다.“그래요. 언제 필요해요?”선뜻 허락할 줄 몰랐던 아림의 표정이 환해졌다. “오늘 저녁이요. 실장님 진짜 최고예요. 감사합니다!”여울은 제 팔에 기대 온 아림의 머리를 살짝 밀어내며 웃었다. “오후에 줄 테니까 얼른 가서 일해요. 농땡이 피우지 말고.”“넵!”아림이 나가며 문을 닫자 바깥소리가 차단됐다.여울은 노트북을 켜고 해외 르베르그룹에서 보내온 자료를 확인하려 했다. 그때 화면 한쪽에 지역 경제 뉴스 알림이 떴다.[YL그룹 엄해준 대표이사, SU그룹 소갑성 회장 딸 소규리 양과 약혼 임박]여울은 기사를 몇 초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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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구 실장님도 점심 드시러 가세요? 저희랑 본가에서 같이 드실래요? 오늘은 제가 요리하거든요.”규리는 친근한 동생처럼 환하게 웃으며 해준의 팔을 자연스럽게 끌어안고 두어 번 흔들었다.마치 부부가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는 모습처럼 자연스러웠다.여울도 웃으며 답했다. “두 분을 방해하고 싶진 않네요. 저는 선배랑 따로 먹겠습니다.”상호와 여울은 같은 대학 출신이었고, 상호가 세 학번 위 선배였다.회사에서는 성과 직책을 붙여 불렀지만 근무시간 외에는 예전처럼 선후배로 지냈다.규리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구 실장님이 요리도 잘하신다고 들어서 이것저것 배우고 싶었는데...”여울은 해준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조상호와 자리를 떠났다.“해준 오빠, 구 실장님 회사에서 인기 많죠?”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규리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규리의 낮은 굽 구두를 한 번 내려다본 뒤 차갑게 말했다. “잔꾀 부리지 마. 할머니 곁을 지켜 주는 걸 생각해서 이번 한 번은 넘어가. 딱 한 번이야.”규리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굳어 입술만 깨물었다.해준은 상호와 여울이 대학 선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울이 YL그룹에 입사할 때 추천한 사람도 조상호였다.그런데 방금 여울이 ‘선배’라고 부르는 걸 듣자 이유 없이 속이 뒤틀렸다.사적으로 함께 있을 때도 자신에게는 늘 ‘대표님’이라고 부르면서, 상호에게는 너무 쉽게 호칭을 바꾸는 것도 거슬렸다....윤명희는 규리와 해준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보고 환하게 웃었다.“둘이 같이 오네? 얼른 손 씻고 와. 밥 먹자.”해준은 밤만주 한 상자를 윤명희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회사 근처 밤만주 드시고 싶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오는 길에 사 오면 되는데 왜 다른 사람까지 번거롭게 하세요.”윤명희의 웃음이 잠깐 굳었다. “규리가 어디 남이니? 곧 네 아내가 되고 내 손주며느리가 될 아이인데 무슨 번거로움이야.”해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무심하게 말했다. “결국 줄 서서 계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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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상호가 여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설마 모르고 있었어? 우리 회사 미혼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너 인기 엄청 많아.”여울은 조금 놀랐다.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전에는 다들 대표님이 너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감히 들이대질 못했지. 오늘 지나면 꽃이며 선물이 쏟아질걸?”여울은 손에 든 가방끈을 살짝 쥐며 웃었다. “말도 안 돼요. 저랑 대표님은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인데.”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저런 집안 결혼은 결국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 처음엔 다른 사람을 좋아했어도 마지막에 배우자로 고르는 건 집안이 맞는 사람일 테고.”누구나 아는 뻔한 이치를 여울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괜한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집에 돌아온 여울은 커피를 한 잔 내려놓고 노트북을 켜 사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사직서를 다 쓴 뒤 개인 메일함에 저장해 두고 침실로 들어가 그 시계를 찾았다.옷장 맨 안쪽에는 주얼리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전부 해준에게 받은 것들이었고, 여울은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그중에서 시계가 든 상자를 꺼낸 뒤 오늘 해준에게 받은 상자도 함께 안쪽에 넣었다.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열어보지도 않았다.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윤명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에 엄씨 본가로 오라는 연락이었다.여울은 아림에게 시계를 건네고 오후 업무를 정리해 둔 뒤 택시를 타고 엄씨 집안 본가로 향했다.엄씨 집안 본가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오래된 저택이지만 내부는 낡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절제된 고급스러움 곳곳에 오랜 집안의 세월이 배어 있었다.“앉으렴. 차는 우릴 줄 아니?”윤명희는 눈도 제대로 들지 않은 채 물었다.여울은 솔직하게 답했다. “잘 모릅니다.”윤명희는 찻잎과 다구를 집어 들고 차를 우리는 과정을 처음부터 천천히 보여 주었다.손놀림은 매끄럽고 단정했다. 웬만한 다도 전문가 못지않았다.“나이를 먹으니 예전만큼 손이 곱게 움직이진 않는구나. 젊었을 땐 상류층 사모님들 사이에서도 차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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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여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길을 천천히 걸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여울은 우산도 없이 그대로 비를 맞았다. 마치 아무도 챙겨 주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쓸쓸해 보였다.얼마나 걸었는지 발바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여울은 하이힐을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빗속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여울은 팔로 몸을 감싸안은 채 길가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팔 사이에 묻었다.언제부터였는지 머리 위로 우산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다.울음이 조금 잦아든 뒤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낯설지만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괜찮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는 낯선 사람의 다정한 한마디에도 마음의 경계가 쉽게 풀리곤 한다.여울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본 남자에게 단팥죽을 사 주겠다고 말해 버렸다.주도운은 담요를 두른 여울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집이 어디예요? 일단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 데려다드릴게요.”“루미엘 레지던스요.”여울은 도운의 우산을 빌려 집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도운은 차 안에서 기다렸다.잔잔한 벨 소리가 울리자 도운이 전화를 받았다.[도운아, 오늘 돌아왔다며. 저녁에 한잔할래?]도운은 루미엘 레지던스 정문을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오늘은 안 돼.”[왜, 길에서 예쁜 여자애라도 만났어?]도운이 시선을 들었을 때 마침 캐주얼한 롱원피스와 플랫슈즈로 갈아입은 여울이 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었다.“끊는다.”도운은 그대로 전화를 종료했다.여울은 집에서 간단히 샤워한 뒤 머리를 하나로 묶고 옷만 갈아입어 서둘러 나왔다. 화장기 없는 피부는 맑고 희었고 눈화장까지 지우자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여대생처럼 어려 보였다.앞좌석에 앉아야 할지 뒷좌석에 앉아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도운이 먼저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여울은 우산을 접고 차에 올라 목적지를 말했다. 도운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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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해준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여울과 사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전날 밤 서로 뜨겁게 얽혔든 냉랭하게 등을 돌렸든, 다음 날 회사에서는 언제나 손발이 잘 맞는 엄 대표와 구 실장으로 돌아갔다.아침에 여울이 출근하자 아림이 커피 한 잔과 간단한 아침 식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제 시계를 빌려준 데 대한 감사 표시라고 했다.“실장님, 그 시계 엄청 비싼 거죠?”여울은 김밥 한 조각을 먹으며 말했다. “레플리카예요.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에요.”해준이 준 선물이 가짜일 리 없었다. 한정판이 아니더라도 상당한 가격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남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아 가볍게 거짓말했다.아림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레플리카였어요? 전 진짜인 줄 알았어요.”조금 뒤 아림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시계 며칠만 더 빌려도 돼요? 콘텐츠 몇 개 더 찍고 싶어서요.”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실장님, 대표님이 찾으세요.”여울은 문 쪽을 바라봤다.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대답한 뒤 아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먼저 갈 테니까 천천히 먹어요.”“실장님...” 아림의 표정이 조금 묘했다.여울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그래요?”아림은 여울의 목을 바라보다가 망설이며 말했다. “목에 자국이 있어요.”차마 키스마크라고 직접 말하진 못했다.여울은 어젯밤 해준에게 깨물렸던 곳을 떠올렸다. 목을 손으로 만지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 여기요? 어제 모기 물린 데를 좀 긁었더니 이렇게 됐네요.”아림도 굳이 들춰내지 않았다. 책상 위 아침 식사 용기를 치운 뒤 밖으로 나갔다.여울은 가방에서 예전에 아림이 돌려준 스카프를 꺼냈다. 이것 역시 해준이 선물한 것이었다.스카프를 목에 간단히 리본처럼 묶고 립스틱을 덧바른 뒤 해준의 사무실로 향했다.“대표님, 부르셨어요?”해준이 서류에서 눈을 들어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여울을 바라봤다.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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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해안시에 가서 프로젝트 하나 맡는 것도 선배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잖아요. 잘하고 돌아오면 승진할 수도 있고요.”“아까 말씀하신 부탁은 저도 지금 확답은 못 드려요. 이번 주말에 한 번 만나 보고 말씀드릴게요.”여울은 다시 과외를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상호가 갑자기 해안시로 가게 된 게 마음에 걸렸다.이번 부탁을 들어주는 걸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잠시 어두워졌던 상호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네 말이 맞아. 새로운 분야를 맡는 것도 경험이지. 법무팀에만 너무 오래 있었더니 나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았어. 한 번쯤 밖에 나가 부딪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점심을 마친 여울이 사무실로 돌아와 잠깐 쉬려던 때 해준이 들어왔다.“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여울은 의자에서 일어나 해준을 공손하게 바라봤다.조금 전 상호와 식당에서 있을 때는 환하게 웃더니 자신 앞에서는 표정부터 사무적으로 바뀌었다. 해준은 여울에게 자신이 그렇게 보기 싫은 사람인가 싶었다.속에 쌓인 화를 누르지 못한 해준은 사무실 문을 닫고 여울 쪽으로 걸어왔다.여울은 그 행동을 보며 조용히 경고했다. “중요한 업무를 말씀하실 거면 저를 대표실로 부르시면 됩니다. 대표실 쪽이 여기보다 방음도 잘되고요.”해준은 그 말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여기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방음도 좋지 않고 언제 누가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해준이 여울 바로 앞에 멈춰 섰다.“점심시간에 비서실이 비는 건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뭐가 그렇게 겁나? 아니면 누가 들어오는 게 싫은 건가?”두 사람 사이에는 두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만 남았다. 여울은 해준의 눈을 보며 화를 꾹 참고 있음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보통은 비어 있죠. 그런데 요즘은 일이 많아서 다른 직원들에게도 점심 당직을 부탁했어요.”여울은 물러서지 않았다. 말하는 속도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래?” 해준이 갑자기 다가와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여울의 몸이 그대로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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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어색하게 굳은 공기 속에서 룸 문이 열렸다.민재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들어왔다.“야, 엄해준. 둘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나만 쏙 빼기냐? 너무하네.” 민재는 거리낌없이 의자를 끌어서 해준 옆에 앉더니 공용 젓가락으로 새우 하나를 집었다.“구 실장, 오랜만이에요.”여울과 민재는 완전히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볼 때마다 업무 모임이나 회사에서 스친 정도였다.해준의 가까운 친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따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여울은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지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민재가 웃었다. “앞으로는 그냥 내 이름을 불러도 돼요. 우리도 본 지 꽤 됐는데 계속해서 성까지 붙이면 너무 거리감 있잖아요. 나도 ‘구 실장’ 말고 여울 씨라고 불러도 되죠?”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같이 놀러 가요. 상호한테 들었는데 운동도 잘한다면서요?”상호 이야기가 나오자 해준은 기분이 더 나빠졌다.“며칠 굶었냐? 왜 그렇게 많이 먹어.” 해준이 민재의 젓가락을 빼앗았다.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데 민재가 하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이름까지 꺼냈다.제대로 긁힌 셈이었다.민재는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여울과 조금 친해지면서 친구를 도와주려 했는데 젓가락만 빼앗겼다.‘은혜를 원수로 갚네. 저러니까 구 실장이 떠나려고 하지.’여울이 민재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 저녁은 어려울 것 같아요. 요즘 처리할 일이 많아서 오늘은 야근할 수도 있어요.”이미 퇴사를 마음먹은 만큼 맡은 업무를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하고 차근차근 정리해야 했다.속으로 해준을 욕하면서도 민재는 친구를 돕는 데에는 아낌이 없었다.“YL그룹이 여울 씨 하나 빠진다고 멈추는 회사도 아니잖아요. 쉴 때는 쉬어야죠. 제대로 쉬어야 일도 잘하는 거고. 안 그래, 해준아?”해준은 민재가 보내는 눈빛의 의미를 알아챘다.여울을 한 번 바라본 해준이 민재의 말을 받았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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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여울은 비서실장이었다. 모든 회의에 직접 들어갈 필요는 없었고, 일부 업무는 아래 직원들에게 맡겨도 됐다.오후 회의도 중요하긴 했다. 하지만 이미 회사를 떠날 준비를 시작한 이상 조금씩 손을 떼야 했다.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다.해준은 여울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여울이 정리한 업무에서 문제가 생긴 적은 거의 없었다. 해준은 그 점만큼은 여울의 실력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믿었다.차에서 자는 동안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는지 귀 뒤로 넘겼던 잔머리 한 가닥이 빠져나와 있었다.해준은 손을 들어 정리해 주려 했다.여울은 다른 행동을 하려는 줄 알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여기 밖이에요.”남들에게 들킬까 봐 지나치게 경계하는 모습을 본 해준이 가볍게 코웃음 쳤다. “나랑 무슨 사이인지 남들이 아는 게 그렇게 싫어?”여울이 담담하게 답했다. “대표님도 마찬가지시잖아요.”겉보기에는 순해 보이지만 말을 꺼내면 제법 날카롭게 받아치는 사람이었다.해준은 손을 거뒀다. “역으로 가는 길 복잡할 거야. 운전 조심해.”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해준은 어이없다는 듯 여울을 한 번 보고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정말 분위기라고는 모르는 여자였다.몇 걸음 가다가 해준은 차 키를 주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자신의 차를 타고 역으로 가라고 할 생각이었다.뒤를 돌아보니 여울은 이미 큰길 쪽으로 나가 택시를 잡고 있었다. 해준은 결국 그냥 두었다.사실 말했더라도 여울은 거절했을 가능성이 컸다.여울은 자기 명의로 된 중형 세단을 집에 두고 잘 타지 않았다. 해준의 고급 세단을 몰고 갈 리는 없었다.친척들에게 고급차를 타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돈 많은 남자에게 기대서 산다는 소문만 더 확실해질 것이다.여울은 집에 들러 흑백 배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하이힐 대신 플랫슈즈를 신은 뒤 다시 나섰다.여울에게는 외삼촌이 두 명 있었다. 큰외삼촌 진대용은 여울이 어릴 때 암으로 세상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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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여울을 돌아볼 때는 다시 웃는 얼굴이 되었다.“여울아, 외숙모랑 외삼촌은 호우시가 처음이잖아. 길도 모르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어.”“점심은 기차에서 컵라면 하나 먹은 게 전부라 저녁은 어디서 먹어야 할지도 막막하네. 네 외삼촌 몸도 안 좋은데.”여울은 침대 옆 협탁을 눈으로 가리켰다. “원래 오늘은 제가 저녁까지 모시려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협력 프로젝트 자료를 준비해야 하거든요.”“오늘 저녁은 호텔 룸서비스로 드시면 어떨까요? 메뉴가 저기 있으니까 골라서 주문하시면 방으로 가져다줄 거예요.”이선영은 협탁으로 가 메뉴판을 펼쳐 보더니 다시 웃었다.“그래, 그래. 넌 바쁘면 일 보러 가. 우리는 대충 먹으면 되지.”여울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호텔을 나왔다.점심때 해준에게 저녁에 만두를 빚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울은 호텔에서 나와 곧장 택시를 타고 집 근처 마트로 가 재료를 샀다.해준은 새우를 좋아했고 새우만두도 잘 먹었다.필요한 재료를 다 고른 여울은 카트를 밀며 계산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또 만나네요. 우연이네요.”여울이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안녕하세요.”여울은 도운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걷던 날 우산을 씌워 준 덕분일 수도 있었고, 사람들이 다들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에 자신과 단팥죽 한 그릇을 함께 먹어 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이 근처에 사세요?”도운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가깝진 않아요. 여기가 식재료가 신선해서 시간 나면 차 타고 자주 옵니다.”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계산대에 도착하자 도운이 직원에게 말했다. “이분 것까지 같이 계산해 주세요.”여울이 거절하려던 때 도운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단팥죽 사 주셨잖아요. 그 답례라고 생각하세요.”“단팥죽이 얼마 한다고요.”여울이 산 식재료는 10만 원 가까이 나올 것 같았다.“인연을 돈으로 따질 수 있나요?” 도운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핸드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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