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구여울은 3년 동안 엄해준의 곁을 지켰다. 낮에는 회사에서 빈틈없는 비서실장으로, 밤에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 연인으로. 하지만 3년의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행되고 있던 해준의 약혼이었다. 여울은 미련 없이 이별을 고했다. 적어도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해준의 곁을 떠나자, 오히려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일은 승승장구했고, 새로운 인연도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뒤늦게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엄해준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여울의 집 앞에 나타나 그녀를 가로막았다. “네 말대로 이제 결혼 생각할 나이잖아. 내일 나랑 혼인신고 하러 갈래?” 여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남자 만나는 것보다 돈 버는 게 훨씬 재밌어요. 결혼엔 관심 없어요.” 그러자 해준은 기다렸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하나만 고르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이지. 둘 다 가지면 되잖아.”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덧붙였다. “넌 혼인신고만 해. 나도, 내 돈도 전부 네 거 할 테니까.”
Ver más르베르그룹의 방문 일정은 원래 목요일이었는데 내부 사정이 생겼다며 갑자기 다음 날로 일정을 앞당겼다.여울과 아림은 갑작스러운 준비 때문에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일을 마쳤다.사무실을 나선 여울은 무심코 맞은편 대표실 쪽을 바라봤다.아림이 바로 말했다. “대표님은 오후에 먼저 나가셨어요. 가실 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해준이 비서실 문제를 강하게 정리한 뒤 아림도 두 사람 사이가 단순한 상사와 부하직원보다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래서 평소보다 해준의 움직임을 조금 더 눈여겨봤다.물론 아림 나름대로는 여울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려는 마음이었다.아림은 여울과 해준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둘이 정말 사귀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여울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가요. 오늘은 일찍 자야 해요. 내일 오전에 공항 픽업도 가야 하니까.”“실장님, 저는 대표님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아요.”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아림은 옆에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 저 YL그룹 지원한 것도 처음엔 대표님 때문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대표님이 학교에 특강하러 오신 적이 있거든요.”“그날 학생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첫 지원서를 여기 냈는데 이렇게 진짜 붙을 줄은 몰랐죠.”여울은 그 이야기에 작게 웃었다. 아마 대부분의 대학생은 저런 기억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반면 여울의 대학 시절은 수업과 공부, 아르바이트 공고를 확인하는 일로만 채워져 있었다. 누가 잘생겼는지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여울이 웃자 아림은 혹시 말을 잘못했나 싶어 급히 덧붙였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대표님이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만약 대표님이 실장님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여울은 아림을 돌아봤다. 목소리는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러웠다.“어떤 부분에서 대표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어요?”아림은 비서실을 강하게 정리한 일과 오세화를 두고 화냈던 일을
이선영은 계속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결혼할 때부터 잘못 선택했지. 누구는 시댁에서 결혼 준비도 해 주고 살면서 도움도 받는데 나는 늘 내가 다 알아서 했잖아.”“이제 큰돈 들어가는 병까지 걸렸네. 치료가 잘될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집안 돈 다 병원으로 들어가게 생겼어. 예성이는 아직 결혼도 안 했고.”진씨 집안 어른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진대호는 형제 중 막내였다. 진대호가 결혼할 당시 예식 준비며 살림 장만까지 큰누나인 진미숙이 대부분 챙겼고,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게 해 줬다.이선영이 지금 여울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며 푸념하는 이유는 뻔했다. 여울에게 치료비를 보태 달라는 요구였다.여울의 생각이 맞다면 이선영은 이미 진미숙에게도 같은 하소연을 했을 것이다.그래서 진미숙이 아까 그렇게 울면서 전화했을 것이다. 다만 치료비를 도와 달라는 말까지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병원에 입원했으면 큰일인데 외숙모, 태희 언니랑 예성이한테는 말씀하셨어요?”진대호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딸 태희는 해안시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아들 진예성은 현장직이라서 일을 따라 지역을 자주 옮겨 다녔다.진대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선영이 먼저 대답했다. “아직 말 안 했어. 애들 놀랄 텐데 적당한 때에 이야기해야지.”여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진대호에게 말했다. “외삼촌, 푹 쉬세요.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시면 돼요. 저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그래. 얼른 가서 일 봐라.”여울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이선영은 크게 눈을 흘겼다.“친외삼촌 보러 온 사람이 저렇게 정 없기도 힘들겠다. 걱정하는 척만 하고.”원래 목소리가 큰 사람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들으라고 더 크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여울은 복도까지 따라 나온 말을 전부 들었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한진도 마찬가지였다.여울은 한진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한진도 가볍게 웃었다. “집안마다 한두 분씩은 꼭 계시잖아요. 상대하기 어려운
진미숙의 서러운 울음을 듣자 오히려 여울의 마음에는 씁쓸한 슬픔이 차올랐다.예전에 진미숙의 언니가 아이를 낳다가 큰 출혈이 있었고 합병증까지 겹쳐 위험했을 때도 진미숙이 이렇게 울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진미숙은 언니의 치료비를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를 두고 언니의 시댁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여울은 펜을 내려놓고 미간을 눌렀다.“알았어요. 엄마는 너무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여울은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고 병원에 다녀올 준비를 했다.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 때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도운이었다.“여보세요, 주 선생님.” 도운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친구라고 해도 되지 않아요? 이름으로 불러요. ‘주 선생님’이라고 들으면 괜히 지금 진료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뒤의 말이 농담이라는 걸 알아들은 여울도 호칭을 바꿨다.“도운 씨, 저희 외삼촌이랑 외숙모는 괜찮아요?”[지금은 많이 진정하셨어요. 입원 절차도 잡아 뒀고요.]“제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요. 자세한 건 가서 들을게요.”[알겠습니다.]통화를 끝낸 여울은 해준의 대표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렸는데 한참 답이 없어 외출한 줄 알고 돌아서려는 때 문이 열렸다.“대표님, 저 병원에 잠깐 다녀와야 해서 말씀드리려고 왔어요.”해준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같이 가.”여울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잠깐 보고 올 거예요. 큰일도 아니고요.”해준은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으로 여울 얼굴을 바라봤다.몇 초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진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말이 끝나자마자 해준은 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울이 거절할 틈은 없었다.해준이 직접 따라오는 것보다는 한진이 데려다주는 편이 눈에 덜 띄었다.여울은 비서실에 돌아가 몇 가지 업무를 맡겨 놓고 나왔다. 한진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울이 차 키를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한진이 말했다. “대표님 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여울은 잠깐 멈칫했다. 무슨 차
여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준을 가볍게 밀어내며 일부러 사무적으로 말했다. “대표님, 회사입니다. 체면 좀 지키세요.”해준은 붉어진 귀를 보자 최근 여울이 제 품에서 그만하라고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생각이 떠오르자 재빠르게 행동했다.해준은 여울의 귀에 짧게 입을 맞췄다.여울은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바로 두 걸음 물러났다. 놀란 눈으로 천장 쪽을 올려다봤다.“걱정 마. 전용 엘리베이터 카메라는 평소엔 꺼져 있어. 켜져 있어도 밖에 말할 사람 없어.”마침 관제실에서 장비 점검을 하던 보안 직원은 화면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마시던 차를 삼키는 것도 잊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영상은 상시 모니터링하지 않았지만 장비 이상 여부를 확인하려고 정해진 시간마다 점검 화면을 띄웠다.하필 그날 화면을 켜자마자 방금 장면이 잡힌 것이다.‘설마 대표님이 구 실장님을 좋아하는데 구 실장님이 선을 긋는 건가?’같은 시각, 옆 직원용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조금 전 로비에서 해준과 현수가 나눈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해준과 여울 두 사람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여울이 당한 일 때문에 비서실 전체를 문책하고, 약혼 상대의 어머니를 두고 난동을 부린 외부인이라고까지 했다.규리가 정말 해준의 아내가 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울이 해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비서실에는 전에는 없던 정적이 흘렀다.모두 제자리에서 조용히 일했고 물을 마실 때조차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유일하게 아림만 평소와 같은 자세로 여울을 대했다.여울이 들어오자 아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님,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여울은 다른 직원들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림에게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아림은 곧장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서실 일 들으셨죠? 대표님 진짜 멋있었어요. 저 오늘부터 대표님 팬 할래요.”여울은 웃으며 자기 사무실로 걸었다. “내가 준 자료는 다 봤어요?”“일부만 봤어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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