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축하해, 여보. 그런데 그 아이 당신 아이 아니잖아: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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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 의료정보를 훔친 드레스

“저 숫자는 제 보조기 일련번호예요.”서진이 한주 영상을 멈췄다.검은 마커로 가렸지만 마지막 네 자리가 남아 있었다. 가족과 병원 직원이라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서진의 직장 동료가 이미 메시지를 보냈다.‘혹시 영상 속 신부 선생님이에요?’그 한 줄로 익명은 끝났다. 서진은 다음 주 환자 교육 강의를 취소했다. 몸의 기록이 알려진 것보다 동료들이 말하지 못한 채 자신을 확인하는 시선이 더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삭제돼도 저 사람 머리에서는 안 지워지겠죠.”이경은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유출 사실과 남은 복제본 수를 그대로 기록했다.세라의 ‘유니버설 드레스’ 안쪽 도면에는 오른쪽 무릎의 가동 각도와 통증 발생 시간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누구에게나 맞는 옷이라면서 한 사람의 몸을 통째로 훔쳤다.이경은 한주에 삭제와 공개 중단을 요구했다. 개인정보 담당자는 위험성을 인정했지만 최종 결재가 보류됐다고 했다.“누가 보류했습니까?”잠시 침묵 뒤 답이 왔다.“강태준 대표님입니다.”한주 본사에 도착했을 때 태준은 세라의 출시 행사를 검토하고 있었다.행사 기획서에는 보조기 사용자 모델 열 명을 세워 ‘한계를 넘어 걷는 신부’로 연출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모델에게 실제 설계가 맞는지 확인한 기록은 없었다.“이 패턴은 한 사람에게 맞춘 겁니다. 양산하면 다른 몸을 비틉니다.”“공장 패턴사가 조정할 거야.”“원리를 모르는 채 사이즈만 키우면 더 위험해.”세라는 손톱으로 기획서 표지를 두드렸다.“사람들은 원리보다 이야기를 사요. 월백은 한 명 붙들고 두 달 쓰지만 한주는 천 명에게 기회를 줄 수 있고요.”세라에게 고객은 또 하나의 화면 배경이었다.이경은 서진의 요청서를 세라 앞에 놓았다.“고객이 삭제하라고 했어.”“소송 중인 디자인의 선행 자료라 보존해야 해.”“보존과 공개는 달라. 모델 번호와 의료 치수까지 영상에 나갔어.”법무팀장이 경고 의견을 냈다.“민감정보 무단 이용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큽니다. 영상을 내리고 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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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바뀐 7밀리미터

서진이 첫걸음을 떼자 치맛자락이 보조기에 걸렸다.“멈춰요!”이경이 달렸지만 한발 늦었다.서진의 오른쪽 무릎이 안으로 꺾였고 몸이 버진로드 바닥에 부딪혔다. 예식장에 둔 유리 촛대가 옆으로 넘어졌다.선우가 전원을 내리고 하객석 출입문을 닫았다. 이경은 드레스를 억지로 당기지 않고 가위로 옆선을 잘랐다.“서진 씨, 어디가 제일 아파요?”“무릎 안쪽이요.”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서진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보조기 아래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났다.병원 검사에서 골절은 없었지만 인대에 충격이 갔다. 의사는 최소 일주일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결혼식은 연기됐다.예식 연기로 항공권을 바꿔야 하는 가족이 열두 명, 숙박 취소가 여덟 방이었다. 꽃과 음식 일부는 환불되지 않았다.이경은 치료비만 적은 사과문을 내지 않았다. 실제 손실을 항목별로 받아 월백 책임 범위와 범죄 피해 배상 범위를 나눴다. 먼저 지급할 돈은 월백이 부담하기로 했다.운영계좌 잔액이 크게 줄었다. 직원 한 명은 급여가 밀릴까 봐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다.“그렇게 하세요. 이번 주 안에 남은 급여를 먼저 확정하겠습니다.”사고의 비용은 기사 속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다음 일정으로 번졌다.서진의 어머니가 병원 복도에서 이경에게 소리쳤다.“유명하다더니 사람을 실험했어요? 그냥 한주 드레스 입었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요!”이경은 변명하지 않았다.“최종 치수를 확인하지 못한 제 책임이 있습니다. 치료비와 연기 비용은 월백이 먼저 부담하겠습니다.”“세라가 바꿨다는 증거가 있잖아요.”정 실장이 낮게 말했다.“그전에 우리 관리 구멍도 있었습니다.”이경은 직원들을 모아 시스템 기록을 열었다. 예은 계정으로 7밀리미터가 줄었고, 최종 출력본에는 이경의 전자 확인 도장이 자동 삽입돼 있었다.“제가 확인하지 않은 도장입니다.”“자동 승인 기능을 켜 두셨잖아요.”정 실장의 말이 아팠다.납기를 줄이려고 이경이 직접 설정한 기능이었다. 누군가 악용했지만 문을 열어 둔 사람도 자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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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그녀가 고른 걸음

“처음부터 의자에 앉아 들어갈래요.”서진이 퇴원하자마자 자기 입장 방식을 정했다.어머니는 걸어야 한다고 다시 설득했지만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다친 걸 숨기려고 걷는 척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극복 영상도 안 찍어요.”이경은 예식 계약서에서 촬영 허용 칸을 전부 비웠다.“입장 장면은 하객 개인 촬영도 막아 달라고 장소에 요청하겠습니다.”“친구들까지 휴대전화 뺏을 순 없잖아요.”“뺏지는 않고 안내하죠. 지킬 사람과 아닌 사람이 보이게.”이경은 초대장에 촬영 제한을 넣어도 되는지 물었다. 서진은 입장 장면만 금지하고 피로연은 허용하기로 했다.“모두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에요. 제가 고르는 장면만 남기고 싶어요.”촬영 금지와 공개는 반대말이 아니었다. 둘 다 당사자가 범위를 정할 때 같은 권리가 됐다.서진은 한주가 아닌 작은 미술관 예식장을 골랐다. 경사로는 완만했지만 문턱 두 곳이 높았다. 이경은 장소를 바꾸라고 하지 않고 이동판 설치 비용을 견적에 넣었다.미술관 측은 이동판이 사진에 보기 좋지 않다며 꽃으로 가리자고 했다.“가리면 가장자리가 안 보여 더 위험합니다.”이경은 장식 없는 대비색 테이프를 붙였다. 예식 사진보다 발과 바퀴가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색이었다.서진은 통로 폭을 직접 재고 하객 의자 두 줄을 줄이기로 했다. 초대 인원이 열 명 줄었지만 그 선택도 가족에게 미루지 않았다.새 드레스는 처음 옷과 전혀 같지 않았다. 앉았을 때 앞이 뭉치지 않도록 치맛자락을 나눴고, 손잡이는 손목 힘이 빠져도 잡히게 넓혔다.첫 재가봉에서 오른쪽 자석이 보조기 금속에 달라붙었다. 이경이 재료를 잘못 골랐다.“아이디어는 좋았는데 실패네요.”서진이 말했다.“네. 자석은 전부 빼겠습니다.”이경은 넓은 천 고리와 낮은 마찰 단추로 바꿨다. 이중 확인 제도가 생겨도 설계 자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서진은 새 부품을 직접 열고 닫아 본 뒤에야 승인했다.측정은 반드시 두 명이 했다. 숫자를 바꾸면 이경과 접근성 자문가가 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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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 나를 지우는 천억짜리 결혼식

이경은 그 질문에 곧장 답하지 않았다.한지원은 천억 원대 혼인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빈손이었다.수행원과 변호사, 약혼자 측 비서는 모두 월백 문밖에 세워 두었다. 테이블에는 세라가 만든 드레스 사진 한 장만 놓였다.어깨에는 지원 집안 문장, 치맛자락에는 신랑 집안 문장, 가슴에는 두 회사의 합병을 뜻하는 금속 장식이 붙어 있었다.신부 이름은 설명 어디에도 없었다.“드레스는 없앨 수 있습니다.”이경이 답했다.“결혼식을 할지는 지원 씨가 정해야 해요.”“다들 제가 이미 정했다고 해요. 양가가 발표했고 계약서도 제가 서명했으니까.”“직접 서명하셨나요?”“아버지가 쓰러진 날이었어요. 제가 거절하면 우리 회사 대출이 회수된다고 했어요.”지원은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손가락을 맞물렸다.“일단 옷 얘기부터 해도 될까요?”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을 고백으로 몰아가지 않았다.지원은 처음 삼십 분 동안 치맛자락 무게와 보석 개수만 말했다. 약혼자 이야기가 나오면 문장을 바꿨다.이경은 침묵을 채우려고 질문을 쏟지 않았다. 차를 새로 따르고, 지원이 직접 고른 순서대로 원단을 펼쳤다.“제가 아무 말도 안 하면 답답하지 않아요?”“몸을 재러 온 날에 인생을 다 설명할 의무는 없습니다.”지원은 그제야 어깨를 조금 내렸다.“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지원은 그 질문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눈을 들었다.“누구 집 딸도, 누구 아내도 아닌 저로요.”“본인을 떠올리게 하는 게 있나요?”지원은 가방 안에서 작은 압화 책갈피를 꺼냈다. 산과 들을 다니며 직접 모은 들꽃이었다.“식물 연구를 하고 싶었어요. 경영학 대신요.”지원은 식물 이름을 말할 때만 빨라졌다. 책갈피 속 꽃은 야생 구절초였고, 회사 옥상에서 직접 키운 씨앗도 있다고 했다.“결혼 발표 기사에는 취미가 명품 수집이라고 나갔어요. 인터뷰한 적도 없는데.”“드레스 설명에는 지원 씨가 직접 확인한 문장만 넣겠습니다.”이경은 상담 기록의 제목을 ‘한씨 가문 혼례복’에서 ‘한지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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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 전남편에게 보내는 견적서

“정상 가격, 착수금, 취소 수수료. 다른 고객과 같습니다.”이경은 완성한 견적서를 태준에게 내밀었다.긴급 제작 인력과 보안 비용까지 포함됐지만 보복성 금액은 없었다. 마지막 줄만 굵었다.‘모든 홍보물과 보도자료에 월백 대표 디자이너 서이경 표기.’태준은 그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한주 최고 등급 예식에 외부 업체 이름을 앞세울 수는 없어.”“외부 업체에 살려 달라고 하면서 이름은 숨기겠다는 거야?”“예전처럼 공동 제작으로 처리하면 돼.”“예전엔 공동이 아니었어. 내가 만들고 당신이 상을 받았지.”유리벽 밖 직원들의 손이 잠깐 멈췄다. 이번에는 지하 작업실도 닫힌 회의실도 아니었다.태준이 목소리를 낮췄다.“지원의 예식은 정재계 인사 천 명이 오는 행사야. 네 이름 하나 때문에 모두 망칠 셈이야?”“내 이름 하나를 쓰면 안 망쳐.”“그건 한주의 체면 문제야.”“그러면 한주가 감당하세요.”이경은 견적서 아래에 ‘의뢰 거절’ 도장을 찍었다.“상담 끝났습니다.”“네가 거절한 사실을 공개할 거야.”“견적서도 같이 공개하세요. 금액과 조건 전부.”태준은 종이를 구기지 못했다. 정상 조건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법무팀장이 한주 표준 외주계약을 내밀었다. 창작자 표기를 호텔 재량으로 한다는 조항과, 결과물의 영구 사용권을 한주가 갖는다는 문장이 있었다.“이 계약이면 비용을 이십 퍼센트 올리겠습니다.”이경이 말했다.“이름과 권리를 사려면 그 가격을 따로 내야 하니까요. 그래도 월백 상표는 팔지 않습니다.”태준은 계약을 거둬 갔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조건을 처음 만난 얼굴이었다.그가 로비로 나가자 기자들이 결과를 물었다. 한주 홍보팀은 ‘전처가 통상가의 세 배를 요구했다’는 익명 제보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이경은 즉시 견적서 공개 여부를 지원에게 물었다. 자신의 예식과 연결된 자료였기 때문이다.‘금액까지 공개해도 됩니다.’지원의 동의가 온 뒤에야 화면에 띄웠다.월백 직원 중 한 사람은 최고가 예식을 거절한 선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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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 취소하고 싶은 신부

“결혼하기 싫어요.”지원이 잠긴 피팅룸 안에서 처음으로 분명히 말했다.이경은 문을 열라고 하지 않았다. 바닥에 앉아 문밖을 지켰다.“지금 위험한 사람이 밖에 있습니까?”“아니요. 약혼자는 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휴대전화 위치도 공유돼 있고요.”“위치 공유를 끄고 싶으세요?”“끄면 바로 전화할 거예요.”지원은 약혼자가 매일 밤 카드 사용 내역과 이동 경로를 확인한다고 했다. 결혼 뒤에는 연구재단 이사직을 주겠다며 현재 회사 의결권을 위임하라는 서류도 보냈다.“폭행당한 적은 없어요.”지원은 누군가의 기준을 먼저 변호했다.“그래도 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경은 관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위험도를 판단하는 전문 상담기관 연락처를 변호사에게 전달하고, 지원이 원할 때만 연결하기로 했다.이경은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말을 삼켰다.“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을 말씀드려도 될까요?”안에서 작은 대답이 왔다.“네.”“지원 씨가 고른 변호사를 부를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끄거나 새 기기를 쓰는 것도 본인이 정할 수 있어요. 지금 나가지 않고 상담실에서 쉬어도 됩니다. 어느 것도 제가 대신 결정하지 않겠습니다.”“대표님은 제가 취소하면 손해잖아요.”“맞아요. 큰 계약금을 돌려줘야 하고 직원 일정도 바뀝니다.”이경은 좋은 사람처럼 손실을 부정하지 않았다.“그래도 그 돈 때문에 지원 씨가 싫은 결혼을 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계약금의 절반은 이미 보안 인력과 원단 선금으로 나갔다. 전액을 돌려주면 월백 급여일도 흔들릴 수 있었다.이경은 정 실장에게 상황을 숨기지 않고 제작 중단 가능성을 알렸다. 직원들은 고객의 사정을 듣지 않은 채 일정과 임금 영향만 설명받았다.“취소되면 원단은 다른 주문에 쓸 수 있습니까?”“지원 씨가 소유권을 포기할 때만요.”이경은 손실을 줄인다는 이유로 고객 천을 먼저 계산하지 않았다.십 분 뒤 문이 열렸다. 지원은 드레스를 벗고 자기 옷으로 갈아입었다.독립 변호사가 도착해 양가 계약과 회사 대출을 분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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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 미친 신부를 만드는 기사

“제가 울었다는 사진, 눈물도 합성이에요.”지원이 자기 얼굴을 확대했다.가봉 중 피곤해 눈을 감은 장면에 젖은 자국이 덧씌워져 있었다. 기사에는 상담실 대화 일부도 따옴표로 실렸다.‘도망칠 옷.’‘결혼식을 없애고 싶다.’문장 사이에 있던 질문과 망설임은 전부 잘려 나갔다.이경은 봉인함부터 확인했다. 물리 저장장치와 월백의 분리 서버에는 무단 열람 흔적이 없었다. 피팅 카메라도 외부 전송 차단 상태였다.대신 장비 점검 때 반입된 테스트 카드가 원래 카드와 바뀌어 있었다. 파일을 임시 중계기로 동시에 보내는 위조 카드였고, 봉인 스티커 번호까지 복제돼 있었다.점검을 맡은 곳은 한주와 공동 행사를 정리하던 외주 시스템 업체였다. 백세라의 개인 방송 송출도 맡은 업체였다.접속 기록에는 새벽 두 시 십삼 분, 지원 폴더 전체를 내려받은 흔적이 있었다. 파일명은 세라 방송팀이 쓰는 편집 규칙으로 바뀌어 있었다.‘불안 표정 확대.’‘울음 합성.’‘도망 발언 앞뒤 삭제.’실수나 과잉 편집이 아니었다. 지원을 판단 능력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장면을 골라 놓은 작업 지시였다.이경은 해당 목록을 지원과 변호사에게 먼저 보냈다. 언론 공개는 하지 않았다.선우는 즉시 계약을 중단하고 접속 기록을 보존했다. 그러나 이미 퍼진 사진은 돌아오지 않았다.지원의 회사 이사회는 긴급 회의를 열었다. 약혼자 측은 정신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원의 직무 정지를 요구했다.주가는 장중 칠 퍼센트 떨어졌다. 직원 게시판에는 결혼 하나 때문에 회사를 위험에 빠뜨린 상속녀라는 글이 쌓였다.지원은 손실 화면을 오래 보고 있었다.“제가 취소하면 저 사람들 말이 사실이 될까요?”“주가가 움직였다는 사실과 지원 씨 판단이 틀렸다는 건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그래도 누군가는 일자리를 걱정하겠죠.”“그 책임을 모두 신부 한 사람에게 넘긴 구조부터 이사회가 설명해야 합니다.”이경은 취소가 쉽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가가 실제라는 걸 함께 보되, 그 대가 때문에 선택권까지 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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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 결혼식이 없던 날

결혼식이 시작될 오전 열 시, 한지원은 로안호텔 신부대기실이 아니라 한주호텔 주주총회장 문을 열었다.하얀 베일도, 가문 문장이 박힌 다이아몬드도 없었다. 월백이 드레스용으로 재단했던 흰 울 실크가 단정한 정장이 되어 지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오늘 결혼은 취소합니다.”웅성임이 천장까지 치솟았다. 지원의 아버지가 맨 앞줄에서 일어섰다.“마이크 내려놔.”“제 결혼이었으니 취소도 제가 말하겠습니다.”지원은 떨리는 손을 연단에 얹었다. 이경은 객석 뒤 비상문 곁에 서 있었다. 대신 말하지도, 손짓으로 문장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지원이 원하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열린 문만 지켰다.지원은 준비한 종이를 보지 않았다.“상대 회사와의 합병 조건에 제 혼인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결혼 뒤 맡기로 한 재단도, 제 이름으로 발표된 기부도 실제 결정권은 양가 회장에게 있었습니다.”화면에 혼인 부속 합의서가 떴다. 임신 계획과 공개 행사 횟수까지 숫자로 적혀 있었다.기자들이 한꺼번에 셔터를 눌렀다.“한지원 씨,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사실입니까?”세라가 흘린 기사가 질문으로 되살아났다. 지원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이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지원이 정한 규칙이었다.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에는 스스로 종료를 선언하기.지원이 숨을 한 번 고른 뒤 말했다.“상담받았습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거부하려고요. 상담받은 사람은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진료기록을 훔쳐 본 쪽이 설명하십시오.”앞줄의 한주 법무팀이 서로를 돌아봤다.지원의 아버지가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이 연단으로 다가오자 지원이 손바닥을 들었다.“접근하면 퇴장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제 회사 지분 의결권은 독립 신탁으로 옮기고, 합병안에도 반대표를 행사합니다.”대형 화면의 위임 철회 접수 시각은 오전 아홉 시였다. 결혼식 한 시간 전, 지원이 직접 전자서명한 기록이었다.“누가 시켰어?”아버지의 고함이 회의장을 갈랐다.지원은 처음으로 객석 뒤를 보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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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 예약금보다 중요한 조항

“제 급여부터 미루세요.”이경의 말에 작업실이 조용해졌다. 계산기 화면에는 이천팔백만 원이라는 부족액이 그대로 떠 있었다.정 실장이 장부를 덮었다.“대표 급여 하나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대표가 먼저 무급이 되면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뜻처럼 들려요.”밤샘과 헐값 견적으로 직원을 쓰러뜨릴 뻔했던 수아의 작업이 떠올랐다. 이경은 습관처럼 ‘내가 메우겠다’고 말한 입을 다물었다.“미안해요. 대표 혼자 희생하는 방식으로 또 덮을 뻔했네요.”그녀는 직원 여섯 명에게 장부를 돌렸다. 남은 현금, 확정 주문, 원단 대금과 급여일을 모두 가리지 않았다.“사흘 안에 가능한 일을 같이 정해 주세요. 급여 삭감과 무급 야근은 선택지에서 뺍니다.”막내 재단사가 먼저 손을 들었다.“새 드레스만 받아야 해요? 한주에서 못 가져온 수선 고객들이 계속 전화해요.”“복원은 손이 많이 가.”“그래서 가격부터 제대로 받자는 거예요.”벽 한쪽에는 어머니 때부터 맡겨진 낡은 면사포와 찢어진 예복이 쌓여 있었다. 이경은 새 작품이 브랜드의 얼굴이라고 믿어 복원을 뒤로 미뤘다. 하지만 고객에게는 한 벌의 기억이 새 컬렉션보다 중요할 수 있었다.아침 여섯 시, 월백 계정에 공지가 올라갔다.‘신규 맞춤 8건, 수선 20건, 복원 6건만 받습니다. 작업 시간과 예상 비용을 먼저 공개합니다. 급행은 받지 않습니다.’십 분 만에 문의가 백 건을 넘었다.선우는 오전 회의가 시작되기 전 대출 약정서를 가져왔다. 담보도 개인 보증도 없는 로안의 긴급 운영 자금이었다.“이자는 시중 금리와 같습니다. 받지 않아도 됩니다.”이경은 첫 장만 읽고 덮지 않았다. 상환 기한, 조기 상환 수수료와 지분 전환 조항이 없는지 끝까지 확인했다.“좋은 조건이네요.”“그렇다고 꼭 받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비상선으로만 열어 둘게요. 오늘 자정까지 예약 현황을 본 뒤 제가 결정하겠습니다.”선우는 서명을 재촉하지 않고 서류를 봉투에 넣었다.첫 손님은 결혼 십 년째인 부부였다. 남편의 체중이 달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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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 죽은 남편의 웨딩드레스

“천을 조금만 쓰고 싶어요.”오미라가 낡은 웨딩드레스 치맛단을 쓰다듬었다. 딸 채은은 반대편을 놓지 않았다.“조금 자르는 것도 자르는 거잖아.”작업실 상담대 위에서 흰 천은 두 사람 사이의 줄처럼 팽팽해졌다.이경은 먼저 손을 뗐다.“오늘은 가위를 대지 않겠습니다. 누가 이겨야 시작되는 옷이면 월백에서 만들 수 없어요.”미라는 사별한 지 열한 해 만에 재혼을 앞두고 있었다. 첫 남편은 채은이 두 살 때 공사 현장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드레스는 장례 뒤에도 버리지 못해 상자 속에 보관했다.“새 사람과 새 옷을 입으면 될 텐데, 이걸 가져온 건 제 욕심일지도 몰라요.”미라가 말했다.“그 사람을 지우는 결혼이 아니라는 걸 채은이한테 보여 주고 싶었어요.”채은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아빠 옷을 잘라서 다른 아저씨 결혼식에 쓰는 게 어떻게 안 지우는 거야?”미라의 얼굴이 굳었다. 당장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이경은 두 사람에게 각자 종이 한 장씩을 내밀었다.“드레스에서 절대 없어지면 안 되는 것을 따로 표시해 주세요. 서로 것은 보지 말고요.”미라는 치맛단 안쪽의 푸른 실을 적었다. 결혼식 전날 남편이 서툴게 꿰맨 자리였다.채은은 목 뒤 작은 얼룩을 그렸다.“이건 왜?”“사진에서 봤어. 아빠가 엄마 화장 묻혔다고 닦다가 더 번진 거.”미라가 입을 막았다. 잊었다고 생각한 장면을 딸이 사진 한 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이경은 드레스를 마네킹에 걸었다. 햇빛이 닿자 치맛단 일부가 종이처럼 얇아진 것이 보였다.그녀는 흰 장갑을 낀 뒤 옷의 앞뒤를 촬영했다. 사진은 공개용이 아니라 반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기록이었다. 미라와 채은이 각각 저장 위치와 보관 기간을 골랐고, 정호에게는 열람 권한을 주지 않았다.“가족이면 같이 봐도 되는 거 아닌가요?”정호가 아니라 미라가 물었다.“가족이어도 물건 주인이 정합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그때 추가할 수 있어요.”채은은 그 말을 듣고서야 옷에서 반걸음 떨어졌다.“보존 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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