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보다 십오 분 먼저.한유리는 시계를 세 번째 봤다.17시 45분.별것도 아닌 숫자였다.평소라면 마무리해야 할 시향 기록이 남아 있으면 여섯 시가 넘든 일곱 시가 넘든 신경 쓰지 않았을 시간.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오늘은.데이트가 있었다.그 단어 하나 때문에 평범한 퇴근 시간이 이상하게 특별해졌다.유리는 작업대 위에 놓인 마지막 시향지를 들었다.B-9.이제는 더 이상 B-9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다.오늘 오후 회의에서 최종 확정된 〈BORDERLINE〉 마스터 포뮬러.첫 향에서는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의 차가운 초록빛이 열리고, 바이올렛 리프가 경계를 세운 뒤 아이리스가 그 선을 부드럽게 흐렸다. 마지막에는 시더우드와 아주 얇은 앰버, 피부 가까이에서만 살아나는 머스크가 남았다.멀리서는 차갑고.가까이 갈수록 따뜻한 향.유리는 시향지를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이 향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몰랐다.결국 자신과 권재헌의 관계를 닮게 될 줄은.“선배.”옆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유리는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왜.”“지금 웃었죠?”“안 웃었어.”세아는 노트북 화면 너머로 유리를 빤히 바라봤다.“요즘 선배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뭐.”“안 웃었다. 안 피했다. 안 빨갛다.”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윤세아.”“네.”“퇴근 안 해?”“해야죠.”세아가 일부러 시계를 봤다.“근데 오늘은 선배가 더 급해 보여서.”“안 급해.”“오늘 데이트죠?”유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세아가 바로 웃었다.“맞네.”“목소리 낮춰.”“아무도 없어요.”“그래도.”세아가 의자에서 몸을 조금 당겨 앉았다.“어디 가는데요?”“몰라.”“네?”“그냥 저녁 먹고 걷고 커피 마시기로 했어.”세아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아니.”“말해.”“생각보다.”세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엄청 평범해서.”유리의 눈썹이 올라갔다.“데이트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이사
Last Updated : 2026-09-1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