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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과 조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2 00:43:10

“누가 들어온 거지.”

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

USER : HAN.YURI

18:42:16

BORDERLINE_MASTER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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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다시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좋은 것들로만 가득한 하루였다. 처음으로 회사 밖에서 재헌과 손을 잡았고, 별다른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걸었고, 카페에 앉아 파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숫자는 18시 42분이었다.

재헌이 휴대전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세아 씨는 아직 회사에 있습니까?”

“네. 아카이브 확인하다가 발견한 것 같아요.”

“혼자고요?”

“아마도요.”

재헌의 손이 곧바로 기어 쪽으로 향했다.

유리가 그를 바라봤다.

“회사로 가려고요?”

“가야 합니다.”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유리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데이트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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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멀어지는 연습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출국까지 스물한 날이 남은 아침, 유리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 빈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시트는 아직 따뜻했지만 재헌은 없었다. 욕실에서도 물소리가 들리지 않아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주방 쪽에서 작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유리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파리에서 가져갈 짐을 정리하다 둘 다 소파에서 잠들 뻔했고, 결국 침대로 들어온 게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다. 그런데 재헌은 벌써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잠시 뒤 방문이 열렸다. 재헌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소매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일어났습니까?”유리는 이불 밖으로 눈만 내놓았다.“몇 시예요?”“일곱 시 십이 분.”“왜 벌써 옷 입었어요.”“오늘 여덟 시 반 회의입니다.”“알아요.”“한유리 씨는 아홉 시 출근이고요.”“그것도 알아요.”재헌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유리는 그가 가까워지자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셔츠 자락을 잡았다.“그럼 조금만 있다 가요.”재헌의 움직임이 멈췄다.유리도 자기가 한 말을 뒤늦게 의식했다. 예전 같으면 ‘아니, 그냥 가요’ 하고 바로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며칠 전 어머니 앞에서 약속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하고, 아쉬우면 아쉽다고 하기로.그래서 이번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몇 분이면 됩니까?”재헌이 물었다.“그걸 꼭 정해야 해요?”“안 정하면 회의에 늦을 것 같아서.”“……오 분.”재헌이 손목시계를 봤다.“좋습니다.”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그의 등에 이마를 기대었다. 재헌은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협탁에 내려놓고 유리의 손을 잡았다. 아침 햇빛이 커튼 사이로 가늘게 들어왔고, 어제 정리하다 만 여행용 캐리어가 방 한쪽에 벌어진 채 놓여 있었다.그 캐리어가.요즘 자꾸 눈에 들어왔다.처음 꺼냈을 때는 설렜다. 파리에서 입을 옷을 고르고,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고,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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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헌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던 저녁은 정말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갔다. 유리는 퇴근길에 장을 봤고, 재헌은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해 현관 앞에서 장바구니부터 받아 들었다. 둘이 만든 건 거창한 요리도 아니었다. 냉장고에 남아 있던 채소를 썰어 파스타를 만들고, 재헌이 사 온 빵을 데우고, 유리가 아껴두었던 와인을 한 병 열었다. 출국까지 스물아홉 날이 남았다는 사실도, 파리에서 살 집도, 장거리 연애도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재헌이 양파를 지나치게 일정한 크기로 써는 걸 보고 유리가 “이런 것도 본부장처럼 하네요”라고 놀렸고, 재헌은 “크기가 달라지면 익는 시간이 달라집니다”라고 진지하게 대답해서 결국 유리가 한참 웃었다.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정말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리는 재헌의 어깨에 기대 태블릿으로 별 의미 없는 예능을 봤고, 재헌은 처음에는 화면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유리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향수도 뿌리지 않은 날이었다. 유리에게서 나는 건 샴푸와 세제, 조금 전 요리하면서 밴 버터 냄새 정도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예전에는 재헌에게서 설명하기 어려운 향이 느껴질 때마다 그 정체부터 알아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굳이 모든 냄새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재헌 씨.”“네.”“나중에 내가 파리에 있고 당신이 서울에 있을 때 오늘 같은 날 생각날 것 같아요.”재헌의 손이 유리의 머리카락 위에서 잠깐 멈췄다. 유리는 화면을 끄고 그의 어깨에 조금 더 깊게 기대었다. 슬픈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가슴 안쪽이 묘하게 저렸다.“특별한 데 갔던 날보다 이런 날이 더 생각날 것 같아. 퇴근하고 만나서 밥 먹고, 별것도 아닌 거 보다가, 졸리면 자고. 파리 가면 이런 건 바로 못 하잖아요.”“그렇겠죠.”“되게 담담하게 말하네.”“안 담담합니다.”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재헌은 잠시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내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기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떠나기 전에 남겨야 할 것

    파리 출국까지 정확히 한 달이 남은 월요일, 유리는 자기 자리에서 이름표를 떼어내려다 손을 멈췄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짐을 싸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연구실 자리 배치를 조금 바꾸기로 했고, 그동안 유리 바로 옆에서 보조하던 세아가 BORDERLINE 후속 생산을 정식으로 맡게 되면서 두 사람의 책상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처음에는 단순한 자리 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HAN YURI / SENIOR PERFUMER라고 적힌 작은 명패를 손에 들자 이상하게 출국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그거 왜 들고 있어요?”뒤에서 세아가 묻자 유리는 명패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자리 바꾼다며.”“그래도 선배 자리 없애는 건 아니잖아요. 파리 가도 서울 소속 프로젝트 계속 보는데.”“그러니까 작은 자리 하나만 있으면 되지. 창가 쪽 빈 책상 있잖아.”세아의 표정이 금세 이상해졌다. “싫어요.”“뭐가.”“선배 자리 제가 먹은 것 같잖아요.”유리는 한동안 세아를 보다가 결국 웃었다. “먹으라고 주는 거야.”“그래도.”“윤세아.”유리는 의자를 돌려 세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BORDERLINE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세아는 유리가 정한 포뮬러를 따라가며 데이터를 정리하는 역할이 더 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후속 생산 배치에서 미세한 편차를 먼저 찾아내고, 품질팀과 직접 기준을 조율하고, 유리가 맡아보기도 전에 자기 판단으로 승인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정작 사람의 마음은 업무 권한처럼 버튼 하나로 넘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내가 이 책상 계속 차지하고 있으면 네가 매번 여기 와서 물어볼 거잖아.”“그럴 수도 있죠.”“그러면 내가 파리에 가는 의미가 없지.”“그건 너무한데.”“내가 없다고 네가 갑자기 조향을 못 해?”“아니요.”“BORDERLINE 기준 몰라?”“알아요.”“문제 생기면 누구랑 확인해야 하는지도 알고?”“품질팀이랑 생산팀이요. 기준 밖이면 선배한테 샘플 보내고.”“그럼 됐잖아.”유리는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이

    BORDERLINE 론칭 다음 날, 유리는 평소보다 십 분 늦게 회사 로비에 들어섰다. 전날 행사가 끝난 뒤 재헌과 집에서 늦게까지 샴페인을 마신 탓도 있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워 있던 재헌을 두고 먼저 일어나기가 싫었던 탓이었다. 출근해야 한다며 이불을 걷어낸 사람은 유리였는데, 정작 욕실에 다녀와서는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재헌의 흐트러진 머리를 구경했고, 그러다 눈을 뜬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침부터 키스를 한 번 더 했다. 결국 재헌이 “이러다 둘 다 지각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떨어졌으니, 지금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기 얼굴이 평소보다 묘하게 풀려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닐 것이다.문제는 오늘부터 굳이 그 얼굴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 BORDERLINE이 정식 론칭됐고, 둘이 정한 비밀 연애의 종료 시점도 지났다. 그렇다고 전 직원에게 사내 메신저로 ‘한유리와 권재헌이 연애합니다’라고 공지할 생각은 없었지만, 누군가 눈치채고 물으면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말로는 별것 아닌 결정처럼 들렸는데, 막상 회사에 들어오니 유리는 평소보다 주변을 더 의식했다. 자신이 재헌과 같은 차에서 내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곧바로 ‘왜 다행이지?’ 싶어 혼자 미간을 찌푸렸다.“선배.”뒤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돌아보자 커피 두 잔을 든 세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 잔을 자연스럽게 건네받자 세아는 유리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왜.”“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표정으로 했잖아.”“그럼 질문 하나만.”세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유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제 본부장님이랑 같이 갔죠?”유리는 예전처럼 주변부터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진짜 이제 안 숨기네요?”“숨기지 않는 거랑 떠벌리고 다니는 건 다르거든.”“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선을 넘은 뒤에도 우리는 우리였습니다

    BORDERLINE 론칭 당일, 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오전 다섯 시 사십칠 분이었다. 평소라면 다시 눈을 감았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출시 행사 시작은 오후 두 시였고, 첫 판매는 오전 열 시부터였다. 생산과 물류, 온라인 스토어 준비까지 전날 모두 확인했으니 지금 유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지만, 몇 달 동안 손끝에서만 존재하던 향이 오늘부터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자 잠이 다시 올 리 없었다.주방으로 나온 유리는 물을 끓이다가 식탁 위에 놓아둔 작은 상자를 봤다. 정식 완제품과 똑같은 아이보리빛 패키지였지만 옆면에는 일반 판매품과 다른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PERFUMER ARCHIVE / 017. 조향사 보관분으로 별도 배정받은 병이었다. Sample 17에서 시작된 번호를 굳이 선택한 이유를 세아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재헌에게는 더더욱 말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 자기가 너무 안전하다고 평가했던 향, 그 향을 확인하겠다고 처음 보는 남자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던 순간, 그리고 그 남자가 이제는 자기 연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건 둘뿐이면 충분했다.휴대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은 뻔해서 유리는 화면을 보기도 전에 웃었다.재헌 씨: 깼습니까?유리는 바로 답했다.유리: 어떻게 알았어요?재헌 씨: 저도 깼으니까요.유리: 본부장님이 긴장도 해요?잠시 뒤 답이 왔다.재헌 씨: 제 향수도 아닌데 제가 왜 긴장하겠습니까.유리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내렸다.유리: 그럼 다시 자요.재헌 씨: 한유리 씨는요?유리는 식탁 위의 017번 상자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유리: 나는 내 향수라서 못 자요.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재헌 씨: 그럼 오늘 끝나고 축하합시다. 제대로.유리는 그 문장을 읽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늘 끝나고’라는 말 뒤에는 조사 회의나 보안 보고서가 붙었다. 누가 어떤 계정에 접근했고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맡길 차례입니다

    BORDERLINE 캠페인 촬영은 출시를 열흘 앞둔 월요일 아침부터 시작됐다. 메종 르비에 본사 1층 쇼룸은 평소의 진열대를 모두 걷어내고 촬영 세트로 바뀌어 있었다. 중앙에는 유리가 최종 승인한 완제품 병이 놓였고, 그 뒤로 반투명 유리판 두 장이 서로 닿지 않을 만큼 미세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사이에 분명한 틈이 보이는 구조였다. 캠페인 문구인 ‘가까워질지는, 당신이 정합니다.’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세트였고, 유리는 촬영팀이 조명을 맞추는 동안 향이 놓일 위치와 분사량부터 다시 확인했다.“향수 광고 촬영장에서 모델보다 향수병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처음 보네.”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유리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향수 광고니까 당연하지.”“나는?”“병 다음.”“너무하네.”차선우가 유리 옆으로 다가와 세트 중앙을 들여다봤다. 검은 셔츠 위에 회색 재킷을 걸친 그는 아직 헤어와 메이크업을 완전히 끝내기 전인데도 이미 촬영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보였다. 유리는 그런 선우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본 뒤 재킷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 손목과 손등이 보이는 컷이 있어서 향을 실제로 분사할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오늘 손목에 다른 향 뿌렸어?”“안 뿌렸어. 바디워시도 네가 보내준 무향으로 썼고.”“로션은?”“그것도 무향.”“좋아. 촬영 들어가기 10분 전에 한 번만 뿌릴 거야. 중간에 향 죽었다고 덧뿌리지 말고. 클로즈업 컷 때문에 피부 광택제 쓰면 분사 위치 피하고.”선우가 피식 웃었다. “역시 나한테는 일 얘기밖에 안 하지.”“일하러 왔잖아.”“예전에는 그래도 밥 먹었냐 정도는 물어봤는데.”유리가 그제야 선우를 쳐다봤다. “밥 먹었어?”“먹었지.”“그럼 됐네.”선우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촬영 스태프 몇 명이 두 사람 쪽을 힐끗 봤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건 이미 알려져 있어서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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