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임신은 거짓말인데 남사친은 진심입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일주일짜리 여자친구

나는 도윤이 내민 손을 한참 보다가 잡았다.“딱 일주일.”“알아.”“허락 없이 키스 금지.”“허락하면 가능?”“문장 끝까지 들어.”도윤은 웃으며 내 손을 한 번 세게 쥐었다.다음 날 아침, 휴대전화 진동에 눈을 떴다.[남자친구: 일어나, 여자친구.][남자친구: 첫 데이트 10시.][남자친구: 10시 5분까지 안 나오면 방문 개방 청구함.]연락처 이름까지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그의 방에 쳐들어갔다. 도윤은 셔츠 단추를 채우다 말고 돌아봤다.“노크.”“내 휴대전화 건드렸어?”“연애 개시 기념 조치.”“불법 접근이야.”“비밀번호가 내 생일인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지.”그는 침대 위의 작은 수첩을 던졌다. 표지에는 ‘7일 연애 약관’이라고 적혀 있었다.1. 하루 한 번 데이트.2. 싫으면 싫다고 말하기.3. ‘남사친’ 호칭 금지.4. 설레도 은폐하지 않기.“4항은 누가 합의했어?”“십오 년 기다린 채권자.”“연애를 빚처럼 말하지 마.”“상환 방식은 협의 가능.”나는 수첩을 그의 가슴에 던졌다. 도윤은 받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증거 보관.”“연락처나 돌려놔.”그가 화면을 몇 번 누르고 건넸다. 이름은 ‘십오 년째 짝사랑 중’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내가 직접 ‘강도윤’으로 되돌렸다.현관을 나서기 전 도윤은 커플 셀카도 한 장 필요하다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나는 정면을 봤고 그는 나를 봤다. 결과물을 확인하니 내 얼굴보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옆얼굴이 더 선명했다.“카메라를 봐야지.”“보고 싶은 걸 봤어.”나는 사진을 지우려다 손가락을 멈췄다. 결국 삭제 대신 비공개 폴더에 넣었다.첫 데이트 장소는 근사한 레스토랑도 호텔 라운지도 아니었다. 우리가 다닌 고등학교 앞 분식집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우리를 한 번 보더니 단번에 알아봤다.“맨날 떡볶이 하나로 두 시간 버티던 커플 아니야?”“그때는 커플 아니었어요.”내가 정정하자 아저씨가 도윤을 봤다.“한쪽만 커플이었나 보네.”도윤은 반박하지 않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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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임신설

기사에는 우리가 할머니와 산부인과에 들어가는 사진이 선명하게 실려 있었다.[세 사람은 진료 없이 병원을 나왔으며, 재계에서는 결혼 일정이 3주 뒤로 당겨진 배경에 임신이 있다고 보고 있다.]댓글은 축하보다 ‘속도위반’, ‘후계자 확보’, ‘재벌가 며느리 프로젝트’ 같은 단어로 가득했다.“내려야 해.”도윤이 내 휴대전화를 덮었다.“법무팀에 연락할게.”“내용이 전부 틀린 것도 아니잖아.”“가장 중요한 게 틀렸지.”임신.그 한 단어가 목에 걸렸다.회사로 돌아가자 비상회의가 열려 있었다. 내가 담당하는 디저트 브랜드의 다음 캠페인은 미혼모 지원 단체와 연계돼 있었다. 거짓 임신이 알려지면 개인 망신으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마케팅 본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이사회에서는 사실관계가 정리될 때까지 윤 팀장님을 신제품 프로젝트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가장 무서워하던 말이었다.“제가 임신을 홍보에 이용한 적은 없습니다.”“알지만 여론은 의도보다 그림을 먼저 봅니다. 임신 여부를 명확히 밝혀 주시면…….”“개인의 의료 정보를 회사가 요구할 권한은 없습니다.”회의실 문이 열리며 도윤이 들어왔다.“강 변호사님, 회사 이미지가 걸린 사안입니다.”“직원에게 임신 증명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외부에 알려지는 편이 이미지에 도움이 되겠습니까?”말투는 정중했지만 내용은 칼날이었다.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소매를 잡았다.“그만해. 사실대로 말할게.”도윤이 고개를 낮췄다.“지금 말하면 모든 비난이 너한테만 가.”“내가 시작했잖아.”“그래서 나도 들어왔어.”그는 내 손가락 사이로 손을 끼웠다.“끝낼 때도 같이 끝내.”홍보팀은 다정한 커플 사진을 추가 배포하자는 의견까지 냈다. 도윤은 의료 정보 논란을 연애 사진으로 덮는 건 더 나쁜 선택이라며 잘랐다. 내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회사에는 정확히 선을 긋는 모습이 고마웠다.결국 회사는 사생활 침해성 보도에 대응하되 임신 여부에는 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냈다. 하지만 기자들은 정문을 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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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임신한 척하는 거지?

강도윤의 어머니 강혜진 여사는 공항에서 곧장 별채로 들이닥쳤다.한 손에는 명품 캐리어, 다른 손에는 아기 옷이 가득한 쇼핑백. 프랑스에서 전시를 보다가 기사를 읽고 첫 비행기로 돌아왔단다.“우리 세아!”혜진 이모가 나를 와락 안았다. 어릴 때부터 수백 번 안겨 봤지만 오늘은 포옹에 ‘예비 며느리’라는 추가 옵션이 붙었다.“왜 이렇게 말랐어? 도윤이가 제대로 안 먹였지?”“원래 이 정도예요.”“입덧은? 신 게 당겨, 매운 게 당겨?”“아직은…….”질문이 기관총처럼 쏟아졌다. 도윤이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엄마, 세아 피곤해.”“애 아빠가 유난 떠는 것 좀 봐.”혜진 이모가 평평한 내 배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는 괜히 배에 힘을 줬다가 더 찔려서 바로 풀었다.“몇 주래?”“아직 병원은…….”“검진도 안 했어?”도윤이 끼어들었다.“다음 주에 갈 거예요.”“그럼 테스트기만 했고?”“네.”“두 줄은 선명했어?”갤러리 관장인 줄 알았는데 질문법은 국세청 조사관이었다.혜진 이모가 손바닥만 한 노란 양말을 꺼냈다.“성별 상관없이 신길 수 있는 색. 태명은?”“없어요.”“그럼 ‘기적이’. 스무 해 동안 친구 타령만 하던 애들이 갑자기 아이까지 만들었다니 기적 맞지.”그녀는 휴대전화 메모장을 켰다.“기적이, 찰떡이, 도담이. 산후조리원은 세 군데 예약해 뒀어.”“왜 세 군데나 예약하세요?”“며느리에게 선택권은 줘야지.”나는 생기지도 않은 아이 때문에 조리원 세 곳에 사과 전화할 미래를 봤다.혜진 이모는 거실에 아기 옷을 펼쳐 놓고 색상별로 사진까지 찍었다. 도윤이 노란 배냇저고리를 접으려다 소매를 뒤집어 놓자 혀를 찼다.“아빠가 될 사람이 이것도 못 접어?”“아직 크기가 너무 작아서요.”“애가 네 양복만 하게 태어나면 세아가 널 먼저 죽일걸.”나는 웃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 가족의 농담에 자연스럽게 섞일수록 죄책감이 더 무거워졌다.늦은 점심에는 양가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혜진 이모는 와인을 마시면서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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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시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정원 한가운데서 두 손을 들었다.“맞아요. 임신은 거짓말이에요.”혜진 이모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도윤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네. 제가 맞선을 피하려고 순간적으로 도윤이 아이라고 했는데, 얘가 갑자기 책임진다고…….”“그 녀석답네.”“안 화나세요?”“화나지. 비행기에서 아기 이름을 스물세 개 지었거든. 기내식 뒷면까지 썼어.”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죄송해요. 내일 가족들께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그러면 도윤이와도 끝내게?”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혜진 이모는 내 얼굴을 잠시 감상하듯 봤다.“우리 아들이 널 좋아하는 건 알지?”“며칠 전에 들었어요.”“중학생 때 네가 감기로 결석하자 걔도 배가 아프다고 조퇴했어. 집에는 안 오고 네 집 창문 아래서 죽을 끓였지.”“그 밍밍한 죽이 도윤이 거였어요?”“소금을 안 넣었더라. 첫사랑이 사람 미각도 빼앗나 봐.”기억 속 도윤은 저녁에야 나타나 체온계만 건네고 게임을 했다. 죽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네 생일 전날이면 선물 때문에 잠을 못 잤고, 네가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자기가 차인 얼굴로 집에 왔어.”“왜 저한테는 말 안 했을까요?”“네가 늘 도윤이를 제일 안전한 자리에 앉혔으니까. 친구는 잃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아픈 지적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돌아와도 도윤은 같은 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다.혜진 이모는 한동안 노란 양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한 짝을 내 손에 쥐여 줬다.“이건 네가 보관해. 언젠가 진짜 쓸 일이 생기면 그때 돌려줘.”“이모…….”“지금 감동하지 마. 거짓말한 벌은 따로 남아 있어.”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크게 혼나는 것보다 더 미안했다.“거짓말은 당장 밝히지 않으마.”고개를 번쩍 들었다.“정말로 그러실 거예요?”“조건이 있어.”혜진 이모의 눈매가 도윤과 똑같이 날카로워졌다.“내 아들 마음을 비상시에만 꺼내 쓰지는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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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질투도 계약 위반인가요

이소현은 도윤의 목을 안은 채 반가워했다.“한국 들어왔으면 연락을 해야지.”도윤은 내 손을 놓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났다.“소개할게.”그가 나를 자기 옆으로 당겼다.“내 약혼녀 윤세아.”소현의 눈이 커졌다.“설마 그 세아?”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제 얘기 들으셨어요?”“엄청요. 도윤이 입에서 여자 이름은 윤세아밖에 안 나왔거든요.”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쓸데없는 말 하지 마.”“왜? 고등학교 때 세아 줄 목걸이 고른다고 나를 세 시간 끌고 다닌 얘기도?”나는 둘을 번갈아 봤다.“둘이 사귄 거 아니야?”“내가 얘랑요?”소현이 진심으로 황당한 듯 웃었다.“소문만 났어요. 그때 나 좋아하던 선배 따로 있었거든요.”그녀는 휴대전화 배경화면을 보여 줬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두 여자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그 선배랑 결국 결혼했어요.”“아…… 축하드려요.”“고마워요. 그런데 세아 씨, 질투했죠?”“아니요.”너무 빨리 대답했다.도윤이 낮게 웃었다.“맞네.”“아니라니까.”“내 손가락 골절 직전이야.”내려다보니 그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급히 힘을 풀자 소현이 박수를 쳤다.“도윤아, 드디어 사람답게 사네.”“아직 일주일 심사 중이야.”“십오 년 기다리고 또 심사받아? 참고로 얘 졸업앨범 장래희망에 ‘윤세아 옆집 사람’이라고 썼다가 담임한테 지우라고 혼났어요.”“진짜?”“이소현.”도윤이 경고했지만 귀가 붉어졌다.“결국 변호사라고 고쳤죠. 세아가 억울한 일 생기면 대신 싸워 주려고.”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내 브랜드와 기사를 막느라 자기 일보다 바빴다.소현은 내게 명함을 건넸다.“답답하게 굴면 연락해요. 첫사랑 흑역사 자료 많아요.”소현은 떠나기 전 우리 사진을 한 장 찍어 줬다. 확인해 보니 나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도윤은 내 손을 꽉 잡고 있었다.“너 사진 찍을 때마다 왜 나만 봐?”“사진은 나중에 봐도 되지만 너는 지금 지나가니까.”소현은 멀어지면서 닭살이 돋는다며 양팔을 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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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진짜로 만들지는 말고

관람차가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우리는 세 번 더 입을 맞췄다.내리기 직전, 도윤이 엄지로 번진 립스틱을 닦아 줬다.“후회해?”“조금.”그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키스가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잘해서.”“그게 왜 후회할 일이야?”“남사친 주제에 이런 걸 숨기고 있었잖아.”도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십오 년 동안 이론만 공부했거든.”“뭘로?”“상상.”내가 먼저 얼굴을 붉히자 그는 승소한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별채에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현관 불을 켜자 벽의 결혼 일정표가 눈에 들어왔다.D-18.아까까지는 웃기던 숫자가 갑자기 목에 걸렸다.도윤도 같은 곳을 봤다.“내일 말하자.”“뭘?”“임신이 거짓말이라는 거.”언젠가 눌러야 할 버튼이었는데, 방금 시작된 무언가까지 함께 꺼질 것 같았다.나는 관람차에서 받은 병아리 인형을 손가락으로 괜히 눌렀다. 도윤은 그런 내 손을 보고도 재촉하지 않았다.“일주일은 아직 사흘 남았잖아.”“네 마음은?”그가 정면으로 물었다.“사흘 더 있어야 알겠어?”좋아진 건 분명했다. 하지만 스무 해 우정이 며칠 만에 사랑이라고 이름을 바꿔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겁나.”솔직히 말하자 도윤의 눈매가 풀렸다.“나도.”“너는 하나도 안 그래 보여.”“키스하고 나서도 네가 ‘좋은 경험이었다, 친구야’라고 할까 봐 무서워 죽겠어.”“내가 그렇게 잔인해?”“무자각일 때는.”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손끝이 내 볼을 쓸다 입술 근처에서 멈췄다.“그래도 거짓말 위에서 연애를 시작하고 싶진 않아.”나는 그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오늘까지만 아무 생각 안 하면 안 돼?”도윤의 눈이 짙어졌다.내가 먼저 입을 맞추자 도윤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허리를 감아 들어 올리는 힘에 등이 현관 벽에 닿았다. 숨이 엉키고,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도윤이 겨우 입술을 떼었다.“윤세아.”“응.”“방으로 가면 못 멈춰.”귀까지 뜨거워졌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더 가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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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계약서

차우진이 지정한 곳은 호텔 최상층 바였다.도윤에게 말하면 함께 오겠다고 할 게 뻔했다. 하지만 내가 시작한 거짓말을 끝내는 자리만큼은 내 발로 가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께 먼저 말씀드리고 갈게’라는 메시지만 남겼다.차우진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계약서처럼 두꺼운 서류가 놓여 있었다.“혼자 오셨군요.”“파일부터 지우세요. 옥상에서 누가 녹음했죠?”“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제삼자가 사적인 대화를 몰래 녹음한 건 중요해요.”“강 변호사처럼 말씀하시는군요.”“요즘 과외를 좀 받아서.”차우진이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태성그룹이 ‘오후 네 시’에 투자하고 독립 법인을 세워 준다는 내용이었다. 경영권 보장, 해외 진출, 신제품 라인. 내가 지난 사 년 동안 노트에 적어 둔 목표가 계약 조항으로 정리돼 있었다.“제 내부 자료를 어떻게 봤죠?”“윤 회장님과 혼담을 논의하며 검토했습니다. 양가는 이미 꽤 멀리 갔습니다.”내 결혼이 사람 사이 약속이 아니라 사업 계획서 부록이었다는 뜻이었다.“조건은요?”“강도윤과 결혼하지 마십시오.”“그다음은 차 전무님과?”“우선 약혼부터. 양가가 원하던 그림으로 돌아가는 겁니다.”나는 계약서를 덮었다.“제가 왜요?”“브랜드를 지키고 거짓말도 묻을 수 있으니까요. 강 변호사와는 성격 차이로 파혼, 임신설은 사실무근으로 정리하면 됩니다.”깨끗한 해결책이었다. 거짓말쟁이라는 낙인도, 회사에서 쫓겨날 위험도 사라진다.대신 도윤을 지우고 차우진의 옆자리에 들어가야 했다.“싫어요.”차우진의 눈썹이 움직였다.“끝까지 읽어 보시죠.”“돈으로 제 인생을 표준 계약서처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랑은 한 줄도 더 읽기 싫어요.”“윤 회장님이 당신을 회사에 남겨 둘 것 같습니까?”“쫓겨나면 나가죠.”입 밖에 내자 오히려 숨이 편해졌다. 며칠 전의 나라면 브랜드를 잃는 상상만으로도 무너졌을 것이다.차우진이 잔을 천천히 돌렸다.“강도윤 때문에 모든 걸 버리겠다는 겁니까?”“아니요.”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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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거짓말의 청구서

본채 식당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내가 임신을 선언했던 바로 그 자리. 그날 식탁에는 미역국이 있었고, 오늘은 휴대전화 한 대만 놓여 있었다.우리가 들어서자 할머니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임신은 거짓말이지만 도윤이랑은 진짜로 만나고 싶다고.]내 목소리가 식당을 채웠다.엄마는 창백했고, 오빠는 턱을 굳힌 채 나를 봤다. 혜진 이모만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어젯밤에 알았습니다. 바로 말씀드리지 않은 건 제 잘못이에요.”엄마가 놀라 그녀를 봤다.“알고도 가만히 있었어요?”“두 아이가 제 입이 아니라 자기 입으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사돈까지 더 기다리게 했으니 그 부분은 제가 사과드릴게요.”혜진 이모가 고개를 숙이자 식탁의 분노가 잠시 방향을 잃었다. 나는 이모까지 내 거짓말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더 고개를 들 수 없었다.“사실이냐?”할머니가 물었다.나는 도윤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네. 임신은 거짓말이에요.”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테스트기는?”“지수한테 부탁했어요.”“병원에서 안 받겠다고 버틴 것도?”“들킬까 봐요.”엄마 옆에는 노란 아기 양말과 태명 후보 노트가 놓여 있었다. 첫 장에는 엄마 글씨로 ‘건강하기만 하면 됨’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이름이 마흔 개나 이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아이에게 이미 가족의 시간이 붙어 있었다.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밤마다 조리원을 검색했을 사람들. 차라리 욕을 듣는 편이 나았다.“죄송해요.”나는 고개를 숙였다.“맞선이 너무 싫어서 순간적으로 말했어요. 도윤이 이름도 허락 없이 댔고요.”오빠가 낮게 물었다.“그날 도윤이가 아니라고 했으면?”“제가 미쳤다고 하고 끝내려고 했어.”“그런데 얘가 무릎을 꿇으니까 계속 간 거네.”“응.”오빠가 허탈하게 웃었다.“한 명은 불을 질렀고, 한 명은 소화기 대신 휘발유를 들었구나.”아무도 웃지 않았다.“제가 먼저 동참했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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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가짜 약혼도 해지합니다

“오늘부터 ‘오후 네 시’에서 손 떼.”할머니의 통보에 식당이 얼어붙었다.도윤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즉시 직무 배제는 가능하더라도 인사위원회에서 충분한 소명 기회를 보장해야 합니다. 브랜드 관련 권한까지 영구 박탈하는 건 별도 문제고요.”“내 회사 일이야.”“회사일수록 절차가 필요합니다.”오빠도 끼어들었다.“할머니, 세아가 사고 친 건 맞지만 매출 손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벌주려고 브랜드까지 흔들면 주주들이 더 싫어할 텐데요.”“네가 지금 검색량 세 배를 성과라고 말하려는 거니?”“아뇨. 다만 감정과 경영을 구분하자는 겁니다. 할머니가 늘 하시던 말이잖아요.”할머니의 눈썹이 움직였다. 오빠는 즉시 물컵을 들고 시선을 피했다.나는 도윤 손에서 서류를 가져왔다.“괜찮아.”“안 괜찮아.”“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책임과 부당한 처분은 다른 문제야.”그는 당장 법무팀에 전화를 걸 기세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빼앗아 내 주머니에 넣었다.“강 변호사님.”애써 웃었다.“지금은 변호인 말고 남자친구로 있어 주세요.”도윤의 턱이 굳었다.할머니가 차갑게 말했다.“남자친구도 오늘까지다.”“그건 회장님이 정할 일이 아닙니다.”“우리 가족을 속인 남자에게 손녀를 줄 것 같아?”“세아는 누가 주고받는 사람이 아닙니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평소 할머니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하던 나는 도윤이 대신 싸우는 모습이 부끄러웠다.내가 선택할 차례였다.“결혼 발표도 취소할게요.”도윤이 나를 돌아봤다.“세아야.”“가짜 임신 때문에 시작한 결혼이잖아. 이대로 하면 끝까지 다 속이는 거야.”“사실을 밝히고 다시 하면 돼.”“지금은 아니야.”나는 반지를 빼 식탁 위에 놓았다. 손가락보다 가슴 쪽이 먼저 허전해졌다.엄마가 울먹였다.“정말 결혼 안 할 거니?”“이 상태로는요.”할머니가 비서에게 예식과 촬영, 상견례 예약을 전부 취소하라고 했다. 웨딩플래너에게서 곧바로 확인 전화가 왔다.- 예식만 취소인가요, 태교 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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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우리 계약, 오늘 해지하자

나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말했다.“우리 계약, 오늘 해지하자.”도윤의 손바닥 위 반지가 차갑게 빛났다.그는 화도 내지 않고 붙잡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내가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버티기 힘들었다.“나 안 좋아해?”결국 그가 물었다.“좋아해.”“그런데 왜 끝내?”“좋아하는 마음으로 덮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같이 해결하면 돼.”“봐. 또 네가 해결하려고 하잖아.”나는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떨렸다.“할머니가 맞선을 강요하니까 네 이름을 팔았고, 들킬 것 같으니까 네 뒤로 숨었어. 회사에서 쫓겨나니까 네 집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고.”“내가 오라고 했어.”“넌 늘 오라고 하잖아.”목소리가 갈라졌다.“그래서 내가 혼자 서는 법을 잊었어.”도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가 널 약하게 만들었다는 거야?”“아니.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핑계로 약해진 거야.”“말장난하지 마.”그가 반지를 쥔 손에 힘을 줬다.“나 없이 해 보고 싶으면 기다릴게. 그런데 헤어지자는 말로 도망치지는 마.”“내일 기자회견에서 직접 밝힐 거야. 회사가 써 준 원고도 안 읽고, 내가 한 말로 사과할 거고.”“같이 가.”“혼자 갈래.”“기자들이 몰아붙일 텐데.”“그것도 내가 받아야 해. 네가 옆에 서면 사람들은 또 네가 시킨 답이라고 생각할 거야.”도윤은 반박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혼자 책임지겠다는 결심을 처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도망치는 건 아니야.”“그럼 눈 보고 말해.”그가 내 앞에 섰다.“키스할 때 아무 감정 없었고, 차우진 앞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었다고.”그렇게 말하면 놓아줄 것 같았다.“키스는…… 그냥 궁금해서 한 거야.”입안이 썼다.“오래 친구였으니까 착각했나 봐. 사랑은 아니야.”도윤의 턱이 굳었다.“계속해.”“차우진에게 한 말도 그 자리를 피하려고…….”“윤세아.”그가 내 말을 끊었다.“넌 거짓말할 때 왼손 엄지를 접어.”내려다보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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