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은 거짓말인데 남사친은 진심입니다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1 - チャプター 10

30 チャプター

제1화. 임신했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차우진 전무와 저녁 먹어.”할머니가 수저를 놓는 소리는 작았지만 효력은 이사회 의사봉보다 셌다.나는 미역국 속 미역을 젓가락으로 돌돌 감았다. 생일도 아닌데 미역국이 나온 순간부터 불길했다. 우리 집에서 미역국은 탄생 축하보다 중대 발표 전 입막음용으로 더 자주 쓰였다.“싫어요.”“이유.”“그 사람한테 마음이 없어요.”“결혼하고 붙이면 된다.”“마음이 포스트잇이에요?”맞은편의 오빠가 물컵 뒤로 웃음을 숨겼다. 엄마는 식탁 아래에서 내 발목을 툭 찼다. 경고였다. 한 번 더 까불면 정강이로 올라온다는.윤정숙 회장은 손녀의 연애사도 계열사 인사처럼 처리했다. 통보하고, 반발하면 인사 조치.“토요일 식사에 안 나가면 ‘오후 네 시’에서 빠져.”젓가락 끝에서 미역이 툭 떨어졌다.‘오후 네 시’는 내가 사 년 동안 키운 호텔 디저트 브랜드였다. 이름부터 메뉴, 포장 리본 폭까지 내 손을 안 탄 곳이 없었다.우리 집 식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국은 식기 전에 나오지만 내 의견은 늘 식은 뒤에야 접수됐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똑바로 봤다.“공과 사를 구분하셔야죠.”“승계 받을 사람의 혼인은 공적인 일이다.”“저 승계 안 받겠다고 했는데요.”“그 말도 네가 카드값 낼 때마다 바뀌더구나.”오빠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나는 발로 그의 정강이를 찼다.차우진은 조건만 보면 반박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태성그룹 후계자, 미국 명문대, 잡지 표지에 실릴 정도의 외모. 단점은 사람을 볼 때도 인수 후보 기업 실사하듯 본다는 것.지난 식사에서 그는 내게 물었다.‘결혼 후에도 일은 취미로 계속하실 생각입니까?’나는 그 자리에서 포크로 그의 손등을 찍지 않은 것만으로도 훌륭한 사회인이었다.“맞선은 안 봐요.”“그럼 만나는 남자를 데려와.”“……남자요?”“없니?”없었다. 지난달 소개팅 상대는 내 시그니처 케이크를 세 입 먹고 탄수화물의 위험성을 강의했다. 그 전 남자는 자기 어머니가 정한 며느리 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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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도윤이 할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식당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꽂혔다.나는 눈으로 필사적인 변론을 시작했다.부정해.내가 미쳤다고 해.피고인은 무죄니까 혼자 살아남아.강도윤은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도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강도윤.”할머니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네가 우리 세아를 임신시켰니?”보통 사람이라면 물이라도 찾았을 것이다. 최소한 ‘제가요?’라고 되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은 법정에서 증인이 말을 바꿔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인간이었다.그가 대답했다.“네.”내 턱이 떨어졌다.“뭐?”도윤은 나를 보지도 않았다.“제가 책임지겠습니다.”엄마가 숨을 들이켰다. 오빠는 입을 틀어막았다. 웃음을 참는지 비명을 참는지 알 수 없었다.나는 도윤의 재킷 소매를 잡아당겼다.“잠깐 나 좀 봐.”“나중에.”“너한테 나중이 있을 것 같아?”할머니가 물었다.“책임진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세아와 결혼하겠습니다.”나는 결국 식탁을 짚었다.“강도윤!”그제야 그가 나를 돌아봤다. 눈빛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 차분함이 더 미쳤다.나는 웃는 척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너 미쳤어? 거짓말인 거 알잖아!”도윤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가 내 귓가로 얼굴을 숙였다. 낮은 목소리가 귓불을 스쳤다.“거짓말이면 진짜로 만들면 되지.”나는 그대로 굳었다. 귓불부터 목까지 열이 확 올랐다. 스무 해 동안 무표정으로 살던 인간이 왜 하필 오늘 이런 대사를 치는 건데.진짜로 뭘 만든다는 건데.아이? 결혼? 아니면 지금 내 머릿속에서 폭발한 이 이상한 상상?“너…….”도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바로 세웠다.“결혼 허락해 주십시오.”나는 뜨거워진 귀를 손으로 감쌌다. 오빠가 수상하다는 듯 우리를 봤지만, 다행히 속삭임까지 들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할머니의 심문은 곧장 시작됐다.“언제부터 만났어?”“정식 교제는 석 달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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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남사친과 동거합니다

“같이 살라고요?”내가 되묻자 할머니가 안경 너머로 나를 봤다.“싫니?”“당연히…….”도윤이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좋습니다.”“뭐가 좋아?”“세아는 제가 돌보겠습니다.”그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내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블라우스 너머로 번졌다. 나는 웃는 얼굴로 그의 구두를 힘껏 밟았다.도윤은 미동도 없었다. 법정용 구두에 철판이라도 깔았나.“별채에는 방이 둘이다.”할머니가 말했다.“아침과 저녁은 본채에서 같이 먹어. 이번 주 안에 병원도 다녀오고.”병원이라는 두 글자에 입안이 말랐다.“아직 너무 이른데요.”“몇 주인데?”내 머리가 하얗게 비자 도윤이 바로 받았다.“오 주 전후입니다. 안정되면 검진받겠습니다.”말투가 너무 확신에 차서 나도 잠깐 내 배를 내려다봤다.별채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도윤의 가슴을 밀쳤다.“너 대체 왜 이러는 거야?”“질문이 포괄적이네.”“무릎 꿇은 거, 결혼한다고 한 거, 같이 살겠다고 한 거 전부!”도윤은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네가 내 아이라고 했잖아.”“살려고 한 거짓말이었어. 네가 부정하면 내가 미쳤다고 하고 끝낼 생각이었다고.”“끝나긴 했겠지.”그가 재킷을 벗었다.“넌 토요일에 차우진을 만나고, 다음 달에는 약혼하고, ‘오후 네 시’는 결혼 선물처럼 회사에 남겨 두고.”“그건 내가 해결할 일이야.”“그래서 해결책으로 임신을 골랐어?”정곡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소파 맞은편에 섰다.“내일 아침 사실대로 말할 거야.”“그러면 네 할머니는 점심 전에 태성과 약혼 기사부터 낼걸.”“……그렇겠지.”“한 달만 버텨.”“한 달?”“그동안 네 브랜드를 가족 지분과 분리할 방법을 찾을게. 넌 맞선을 피하고, 나는 네 거짓말이 무너지지 않게 막고.”“왜 그렇게까지 해?”도윤이 나를 올려다봤다.“네가 나를 골랐으니까.”“패닉 상태에서 떠오른 이름이었어.”“더 영광이네. 비상시에 제일 먼저 생각났다는 거잖아.”“법정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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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첫 키스는 보류

“지금 하나 만들자고?”내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도윤은 대답 대신 소파 팔걸이에 손을 짚었다.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향이 선명해졌다. 비누와 옅은 나무 향. 스무 해 동안 수도 없이 맡았는데 오늘은 왜 남의 남자 냄새처럼 느껴지는지 억울했다.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입술이 닿기 직전, 현관 벨이 미친 듯이 울렸다.“세아야, 문 열어!”엄마였다.나는 도윤의 가슴을 밀고 벌떡 일어났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증거 생성 방해.”“누가 증거를 만들재?”“눈 감은 사람이.”“눈에 먼지가 들어갔어.”“양쪽에 동시에?”엄마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바람에 대꾸할 틈이 없었다. 양손에는 보온병, 과일 바구니, 임신백과사전이 들려 있었다. 가족이 아니라 임산부 용품 방문판매원 같았다.“벌써 짐 풀었니?”엄마의 시선이 우리 사이를 훑었다. 나는 급히 바디필로를 끌어안았다.“그냥 이야기 중이었어요.”“왜 그렇게 멀리 앉아?”도윤이 즉시 내 옆으로 붙었다. 팔까지 어깨에 올렸다.“세아가 아직 쑥스러워해서요.”“누가 쑥스러워!”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더니 오히려 나를 더 당겼다. 엄마 앞에서 싸우면 수상해 보일 테니 웃어야 했다. 내 웃음은 이를 드러낸 협박에 가까웠다.“입덧에 생강차가 좋대.”엄마가 보온병을 내려놓았다.“내일부터 아침 일곱 시 반에 본채로 와. 할머니가 둘이 밥 먹는 걸 꼭 보시겠대.”“감시잖아요.”“관찰이야. 너희가 스무 해를 친구로만 지냈으니 우리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지.”엄마는 돌아가기 전 우리 커플 잠옷을 발견하고 오늘 밤 착용 인증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도윤이 대답하기 전에 나는 상자를 소파 뒤로 걷어찼다.“사진은 합성해서 보내면 안 될까요?”“도윤아, 네가 옆에서 감시해.”엄마는 내 편이 아니었다. 도윤에게 감시 권한까지 위임한 뒤에야 만족스럽게 돌아갔다.문이 닫히자 나는 도윤의 팔을 떼어 냈다.“이제 떨어져.”“현관 앞 화분에 카메라 있어.”“뭐?”놀라 돌아보자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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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두 줄을 빌렸습니다

산부인과 예약은 다음 날인데 나는 밤새 유언장을 세 번 고쳤다.첫 번째 유언에는 ‘강도윤을 믿지 마라’고 썼고, 두 번째에는 ‘내 브랜드만은 지켜 달라’고 썼다. 세 번째에는 그냥 전 재산으로 해외 도피 항공권을 사 달라고 적었다.아침 여덟 시, 도윤이 방문을 두드렸다.“살아 있어?”“법적으로만.”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밀자 그가 커튼을 열었다. 햇빛이 쏟아져 나는 베개를 뒤집어썼다.“병원 가기 전에 방법부터 정해.”“사실대로 말한다.”“차우진과 결혼하고?”“해외로 튈래.”“네 카드 긁는 순간 비서실이 항공편부터 알아챌걸.”“왜 남의 할머니 수법을 그렇게 잘 알아?”“스무 해 봤으니까.”도윤은 물 한 잔을 건넸다.“진료는 네 동의 없이는 못 해. 오늘은 내가 막을게.”“그다음은?”“시간 벌어서 빠져나갈 길을 찾자.”“승률 높은 변호사치고 답이 흐리네.”“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의뢰인이 자꾸 자백하려 하잖아.”“난 네 의뢰인 아니거든.”“수임료는 아직 안 받았지.”그 말투가 수상했지만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병원에는 할머니와 엄마, 비서까지 따라왔다. 대기실에는 둥근 배를 쓰다듬는 부부들이 앉아 있었다. 나만 배 속이 아니라 양심이 묵직했다.간호사가 이름을 부르자 도윤이 먼저 일어났다.“오늘 진료는 받지 않겠습니다.”할머니의 얼굴이 굳었다.“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세아가 원하지 않습니다. 초기에는 심리적 안정도 중요하고요.”“전문의가 판단할 일이다.”“진료 여부는 환자가 판단할 일입니다.”낮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할머니 앞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집에도 드물었다.주변 시선이 모이자 엄마가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어머니, 오늘은 돌아가요. 세아 얼굴이 하얘요.”얼굴이 하얀 건 죄책감 탓이었지만 나는 즉시 도윤의 팔에 기댔다.“조금 어지러워요.”그가 허리를 받쳤다. 연기인 걸 아는데도 몸에서 먼저 힘이 빠졌다.할머니는 못마땅하게 물러났다.“일주일 주마. 대신 집에서 확인한 테스트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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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질투

“너, 정말 임신했어?”도윤의 질문에 카페의 배경음악까지 한 박자 늦어진 것 같았다.나는 가방을 닫았다.“아니야. 지수 거야.”“내 거 맞아.”지수가 배를 쓰다듬으며 증언했다.“화장실에서 방금 생산한 따끈한 증거물. 내 인권과 맞바꿨지.”도윤의 굳었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안도한 사람치고 표정은 묘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고소할 조항을 찾는 것 같기도 했다.“왜 그런 얼굴이야?”“계산 중이었어.”“뭘?”“네가 진짜 임신했다면 상대가 누군지.”“네 아이라고 했잖아.”“나랑 잔 적이 없는데 내 아이일 리가 없지.”지수가 빨대를 씹으며 우리를 번갈아 봤다.“둘이 아직도 안 잤어?”“김지수.”“스무 해 친구에 동거까지 하는데 진도가 주민센터 민원보다 느리네.”도윤은 대꾸하지 않고 내 손목을 잡았다.“집에 가자.”“나 지수랑 할 말 남았어.”“두 줄 빌리는 것보다 중요한 말이면 차에서 해.”그는 지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협조 감사합니다. 봉투는 폐기하겠습니다.”“수임료는 세아 대신 비싸게 받아요.”“그럴 생각입니다.”둘이 내 인생을 담보로 합의하는 동안 나는 주차장까지 끌려갔다.“다음엔 말은 하고 나가.”“왜?”“네 가족이 나한테 먼저 전화하잖아.”“너 내 보호자 아니야.”“알아. 그런데 양가가 그렇게 오해 중이잖아.”“가짜로.”“그러니까 적어도 서로 연락은 되게 하자.”말은 법률 자문처럼 했지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나는 팔짱을 꼈다.“너 혹시 질투했어?”도윤이 운전석 문을 열다 멈췄다.“무슨 질투?”“내가 정말 다른 남자 아이를 가졌을까 봐.”“그랬으면 그 남자부터 찾았겠지.”“찾아서?”“위법 사항이 있는지 검토하고.”“없으면?”도윤이 한동안 나를 봤다.“없어도 네 옆에는 있었어.”농담으로 시작한 질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든 떠나지 않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나는 괜히 조수석 문을 세게 닫았다.별채에 돌아오자 우리는 지수가 찍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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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술 깨면 하자

오빠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형사처럼 노트북을 식탁에 올렸다.“그날 도윤이 집 현관 도어벨 영상이 남아 있더라. 자동 보관 기간 안 지나서 다행이지.”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네가 보여 주라고 했어?”“같이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잖아.”“영상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나오면 어쩌려고?”도윤이 눈썹을 들었다.“무슨 짓 했는데?”오빠의 눈이 번쩍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화면 속 시간은 새벽 1시 47분. 복도 끝에서 도윤이 나를 안고 나타났다. 내 구두는 그의 한 손에 들려 있었고, 맨발은 허공에서 달랑거렸다.“자세가 거의 신혼인데?”오빠가 감탄했다.“취객 운반이거든.”영상 속 내가 꿈틀거리더니 도윤의 목을 끌어안았다. 뺨까지 비비며 뭔가 말했다. 소리는 없었지만 입 모양은 명확했다.나 예뻐?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나?그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카메라 각도에 가렸다. 다만 내가 활짝 웃으며 그의 목에 더 매달린 건 확실했다.나는 노트북을 덮었다.“증거 충분해. 피고인 퇴정.”“결정적 장면은 아직인데.”“윤민혁, 나가.”오빠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잠갔다. 돌아서자 도윤이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그날 나한테 뭐라고 했어?”“뭘?”“내가 얼마나 예쁘냐고 물었을 때.”“기억 안 나.”“거짓말.”“입증 책임은 주장하는 사람한테 있어.”“진짜 얄미워.”나는 그의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그리고 내가 키스하려고 했어?”도윤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했어.”“그래서 했어?”“안 했어.”안도해야 하는데 자존심이 먼저 상했다.“왜?”“술 취했으니까.”“내가 그렇게 별로였어?”도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평소 무표정하던 귀 끝이 아주 옅게 붉어져 있었다.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더니 가볍게 당겼다. 나는 그의 무릎 사이로 한 걸음 들어갔다.“반대야.”그가 올려다봤다.“너무 오래 기다린 거라 술 취한 너한테 받고 싶지 않았어.”손목 안쪽을 누르는 엄지가 뜨거웠다.“뭘 오래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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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사친이 내 연애를 망쳤다

“아이 아버지, 정말 강도윤 맞습니까?”차우진의 질문이 정확히 허점을 찔렀다.나는 보도자료를 그의 손에서 빼앗았다.“제 아이 아버지를 차 전무님께 입증할 의무는 없어요.”“거짓이라면 다르죠. 우리 집안과의 혼담을 피하려고 태성그룹을 웃음거리로 만든 셈이니까.”“혼담은 양쪽이 동의해야 성립해요.”“윤 회장님은 동의하셨습니다.”“결혼할 사람은 저예요.”차우진은 내 반박을 예상했다는 듯 소파에 앉았다.“강 변호사는 흥미롭더군요. 지난주엔 내 평판을 조사하더니, 이번 주엔 아이 아버지가 됐으니.”“정확히는 당신을 알아본 겁니다.”문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도윤이 종이 가방을 든 채 들어왔다. 내 점심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그는 내 옆에 서서 허리에 팔을 둘렀다.“세아와 맞선 볼 남자가 차우진 전무라는 말을 들어서 확인했습니다.”“친구의 맞선 상대를 그렇게까지 조사합니까?”“좋아하는 여자의 남편 후보였으니까요.”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나는 도윤의 옆얼굴을 올려다봤다. 이 남자는 진실과 거짓을 너무 태연하게 섞었다. 문제는 이제 내가 어느 쪽에 더 흔들리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차우진이 장미를 가리켰다.“결혼 전에는 선택이 바뀔 수도 있겠죠.”도윤은 꽃다발을 집었다. 그리고 내 사무실 쓰레기통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안 바뀝니다.”“윤 팀장 생각도 같습니까?”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향했다.“물론이죠.”나는 도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웃었다. 손바닥 아래 박동이 생각보다 빨랐다. 저 인간도 긴장한다는 사실이 뜻밖의 위로가 됐다.차우진이 돌아가자마자 나는 떨어졌다.“꽃을 왜 버려?”“받기 싫다며.”“꽃이 무슨 죄야. 비싸 보이던데.”“아깝게 느껴져?”“장미한테 연대 의식 느낀 거야. 둘 다 원치 않는 자리에 끌려왔잖아.”도윤은 종이 가방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꺼냈다. 포장에는 ‘엽산 풍부’ 스티커까지 붙어 있었다.“이건 또 뭐야?”“네 어머니 지시.”“우리 둘뿐인데 임산부 연기까지 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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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키스의 부작용

도윤의 손가락이 내 턱을 받쳤다.“세아야.”그가 아주 가까이에서 멈췄다. 묻는 눈이었다. 나는 차우진도, 카메라도 보지 않고 도윤만 봤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내가 그의 재킷 깃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입술이 닿았다.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카메라 앞이니 짧게 끝날 줄 알았다.그런데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는 순간 도윤의 손이 허리를 더 끌어당겼다. 몸이 그의 가슴에 밀착됐다. 놀라 숨을 들이켜자 입술 사이로 온기가 섞였다.주변 소리가 한꺼번에 멀어졌다.스무 해를 본 얼굴인데 입술이 닿는 순간 전혀 모르는 남자 같았다. 그게 억울할 만큼 좋았다.정신 차리자고 생각했는데 손은 그의 재킷 깃을 붙잡았다.도윤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한 박자.그리고 또 한 박자.증명에 필요 없는 시간이 늘어났다.“와.”어딘가에서 오빠의 감탄사가 들렸다.그제야 도윤이 입술을 뗐다. 허리는 놓지 않은 채 차우진을 바라봤다.“이 정도면 의심이 해소됐습니까?”차우진이 굳은 얼굴로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공개 장소에서 과감하시군요.”“제 약혼녀를 공개적으로 의심하셨으니까요.”도윤이 내 입술 끝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세아가 낯을 가려서 재연은 어렵습니다.”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숨을 못 쉬는 중이었다.기자들이 질문을 쏟아 냈다.“두 분은 언제부터 교제하셨습니까?”“강 변호사님이 먼저 고백하셨나요?”“윤 팀장님의 어떤 점에 반하셨습니까?”도윤은 내 손을 잡고 태연하게 답했다.“제가 먼저 좋아했고, 먼저 고백했습니다.”“어떤 점이 가장 좋으십니까?”그가 나를 내려다봤다.“하나만 고르면 나중에 소송당할 것 같아서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웃는 척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너무 길었잖아.”“누가 키스라도 해야 믿겠다고 했잖아.”“입술만 대면 됐지, 왜 그렇게…….”“왜?”“오래 했냐고.”도윤의 시선이 다시 내 입술로 내려왔다.“네가 안 놔줘서.”그제야 내 손이 아직 재킷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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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고백

“15 년째 너 좋아해.”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닫혔다. 센서가 몇 번이나 경고음을 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열다섯 살 때부터라면 고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나는 그동안 몇 번이나 연애하고 헤어졌고, 그때마다 도윤에게 전화해 상대 욕을 했다.“거짓말이지?”겨우 꺼낸 말에 도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내가 왜 이걸로 거짓말해?”“지금은 우리가 거짓말로 먹고사는 상황이니까.”“임신은 거짓. 약혼은 보류.”그가 손목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좋아하는 건 사실.”“왜 한 번도 말 안 했어?”“기회가 없었어.”“내가 언제 막았는데?”“고백하려고 놀이공원 표를 샀더니 다른 학교 선배 농구 보러 간다고 취소했고, 대학 입학식 날에는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자랑했지.”기억이 하나씩 돌아왔다. 도윤이 유난히 말이 없던 날들이었다.“군대 가기 전날에는?”“네가 울면서 평생 변하지 말고 남사친으로 남아 달라고 했어.”“편지는 왜 그렇게 자주 보냈어?”“고백 대신 쓴 거야. 검열에서 걸릴 만한 문장은 다 빼고 날씨랑 밥 얘기만 남겼지만.”나는 군 복무 내내 매주 도착하던 편지를 떠올렸다. 끝마다 적힌 ‘아프지 마’가 그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편지들을 아직도 서랍 깊숙이 보관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나는 입을 다물었다. 출구를 막은 사람이 나였다.“그래도 십오 년은 너무 길잖아.”“그러게.”도윤이 씁쓸하게 웃었다.“변호사 시험보다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별채로 돌아오자 거실은 가족과 업체 직원들로 가득했다. 엄마, 오빠, 웨딩플래너 셋, 주얼리 디자이너, 호텔 홍보팀까지. 벽에는 ‘D-21’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상견례, 드레스 피팅, 신혼집, 청첩장 촬영이 군사 작전처럼 분 단위로 정리돼 있었다. 맨 아래에는 엄마 글씨로 ‘태교 여행’까지 적혀 있었다.오빠가 과일 접시를 내 배 앞에 내밀었다.“조카, 사과 먹을래?”“내 배에 말 걸지 마.”“다 들을걸.”“아직 귀도 없어.”말하고 나서 가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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