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맞선을 피하려 던진 한마디가 인생을 뒤집었다. “저, 임신했어요. 아빠는… 강도윤이고요.” 오랜 남사친의 이름을 팔아 위기를 넘기려던 윤세아. 그런데 거짓말을 알게 된 도윤은 화내기는커녕 가족들 앞에서 태연히 무릎을 꿇는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가짜 임신으로 시작된 가짜 약혼. 그런데 세아가 거짓말을 수습하려 할수록, 15년 동안 마음을 숨겨온 도윤의 직진은 점점 진심이 되어간다. 임신은 거짓말인데, 이 남사친은 왜 이렇게 진심인 걸까?
view more“이번 주 토요일, 차우진 전무와 저녁 먹어.”
할머니가 수저를 놓는 소리는 작았지만 효력은 이사회 의사봉보다 셌다.
나는 미역국 속 미역을 젓가락으로 돌돌 감았다. 생일도 아닌데 미역국이 나온 순간부터 불길했다. 우리 집에서 미역국은 탄생 축하보다 중대 발표 전 입막음용으로 더 자주 쓰였다.
“싫어요.”
“이유.”
“그 사람한테 마음이 없어요.”
“결혼하고 붙이면 된다.”
“마음이 포스트잇이에요?”
맞은편의 오빠가 물컵 뒤로 웃음을 숨겼다. 엄마는 식탁 아래에서 내 발목을 툭 찼다. 경고였다. 한 번 더 까불면 정강이로 올라온다는.
윤정숙 회장은 손녀의 연애사도 계열사 인사처럼 처리했다. 통보하고, 반발하면 인사 조치.
“토요일 식사에 안 나가면 ‘오후 네 시’에서 빠져.”
젓가락 끝에서 미역이 툭 떨어졌다.
‘오후 네 시’는 내가 사 년 동안 키운 호텔 디저트 브랜드였다. 이름부터 메뉴, 포장 리본 폭까지 내 손을 안 탄 곳이 없었다.
우리 집 식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국은 식기 전에 나오지만 내 의견은 늘 식은 뒤에야 접수됐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똑바로 봤다.
“공과 사를 구분하셔야죠.”
“승계 받을 사람의 혼인은 공적인 일이다.”
“저 승계 안 받겠다고 했는데요.”
“그 말도 네가 카드값 낼 때마다 바뀌더구나.”
오빠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나는 발로 그의 정강이를 찼다.
차우진은 조건만 보면 반박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태성그룹 후계자, 미국 명문대, 잡지 표지에 실릴 정도의 외모. 단점은 사람을 볼 때도 인수 후보 기업 실사하듯 본다는 것.
지난 식사에서 그는 내게 물었다.
‘결혼 후에도 일은 취미로 계속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포크로 그의 손등을 찍지 않은 것만으로도 훌륭한 사회인이었다.
“맞선은 안 봐요.”
“그럼 만나는 남자를 데려와.”
“……남자요?”
“없니?”
없었다. 지난달 소개팅 상대는 내 시그니처 케이크를 세 입 먹고 탄수화물의 위험성을 강의했다. 그 전 남자는 자기 어머니가 정한 며느리 기상 시간이 오전 다섯 시 반이라고 했다. 나는 여섯 시에 헤어졌다.
내 인생에 남자라곤 스무 해째 붙어 다니는 강도윤뿐이었다. 어젯밤에도 새벽 두 시에 전화해 자기 집 현관 비밀번호를 물었다. 지난달 술 취한 그 대신 내가 바꿔 줬으니, 본인보다 내가 더 정확히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없다면 토요일 일정은 확정이다.”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평소라면 고르지 않을 재료를 반죽에 넣는다. 문제는 내가 고른 재료가 베이킹소다가 아니라 폭약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저, 임신했어요.”
정적.
오빠가 물을 뿜었다. 엄마는 입을 벌렸고, 할머니도 정확히 한 번 눈을 깜빡였다.
말한 나조차 뒤늦게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폭탄은 이미 식탁 한가운데 떨어진 뒤였다.
“뭐라고?”
엄마가 겨우 물었다.
“임신했다고요. 그래서 맞선 못 봐요.”
할머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버지가 누구야?”
이름 하나만 대면 됐다. 다시 볼 일 없는 외국 배우, 지구 반대편에 사는 가상의 남자. 그런데 패닉에 빠진 머릿속은 가장 익숙한 얼굴 하나만 내밀었다.
내가 사고를 칠 때마다 한숨부터 쉬고, 결국 끝까지 수습해 주던 남자.
“강도윤이요.”
그때 오빠가 사레에 걸렸다.
“그 도윤이? 너희 남매 같다며!”
엄마가 외쳤다.
할머니가 차갑게 말했다.
“요즘 남매는 아이도 만드니?”
“그런 뜻이 아니라…….”
변명할 틈도 없이 할머니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좋다. 당장 불러.”
“지금요?”
“내 손녀를 임신시킨 놈이 이 시간에 바쁠 이유가 있니?”
심장이 발목까지 떨어졌다.
나는 식탁 아래로 휴대전화를 숨기고 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긴급. 우리 집에서 너 부를 거야.]
[내가 네 아이 임신했다고 거짓말했어.] [오면 무조건 부정해. 내가 미쳤다고 해. 나만 버리고 살아.]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십 분 동안 엄마는 예정일을 계산하려 했고, 오빠는 언제부터 도윤을 남자로 봤느냐며 취조했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의 태명 후보가 셋이나 나왔다. 내 거짓말은 태어나기도 전에 가족관계등록부부터 만들 기세였다.
마침내 초인종이 울렸다.
“회장님, 강도윤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식당 문이 열렸다.
도윤은 퇴근길 그대로인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느슨했고, 한 손에는 내가 보낸 메시지가 열린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살려 줘.
도윤은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식탁의 가족들을 한 번 훑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할머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랑이 사라졌어.”오빠의 말에 신부 대기실이 얼어붙었다.엄마는 경찰부터 부르자고 했고, 혜진 이모는 아들이 도망갈 리 없다며 오빠 멱살부터 잡았다.“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너라며!”“제가 왜 용의자예요?”나는 도윤에게 다시 전화했다.[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맥박이 빨라졌다. 그래도 그가 결혼식에서 도망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십오 년을 기다린 남자였다. 사라졌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유가 왜 결혼식 열 분 전에 생겼느냐였다.그때 ‘다섯 시부터’ 수빈에게 전화가 왔다.- 대표님, 정원 입구에서 웨딩 케이크 배송 차량이 접촉 사고가 났어요. 기사님이 머리를 부딪쳐서…….“사람은 괜찮아?”- 케이크가 늦어서 강 변호사님이 확인하러 나오셨다가 사고를 보자마자 119 불러 주셨어요. 기사님은 의식 있고요. 그런데 변호사님 휴대전화가 차 밑으로 떨어져서 완전히 깨졌대요.모두가 창가로 몰려갔다. 정원 입구에 검은 턱시도 차림의 도윤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사고 차량에서 건져 낸 케이크 상자, 흰 셔츠 소매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그가 대기실 문을 열자 나는 부케로 가슴을 한 번 때렸다.“사람부터 도운 건 잘했어. 그래도 말은 남겨야지!”“민혁이 형한테 전달해 달라고 했는데.”모두의 시선이 오빠에게 향했다. 오빠는 한쪽 귀의 영상팀 이어폰을 빼며 굳었다.“나한테 말했어?”“케이크 차 사고 났고, 기사님 확인하고 바로 오겠다고.”“나는 ‘케이크 잘 나왔고 기사님 확인하고 온다’로 들었는데…….”“원흉 찾았네.”도윤은 숨을 고르며 상자를 열었다. 별 모양 설탕 장식이 올라간 흰 케이크는 한쪽이 조금 기울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예비 케이크도 있다며. 이건 왜 들고 왔어?”“네가 직접 만든 첫 웨딩 케이크잖아. 살릴 수 있으면 살려야지.”그 말에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도윤은 케이크보다 내 얼굴부터 살폈다.“많이 놀랐어?”“신랑 실종 신고서 쓸 뻔했어.”“변호인 선임부터 할게.
“이번에는 또 뭘 피하려는 거니?”할머니의 질문에 나는 병원에서 받아 온 검사 결과지를 꺼냈다.“아무것도 안 피해요. 저 정말로 임신했어요.”엄마는 서류를 받아 빛에 비춰 봤다.“이거 진짜니?”“병원에서 받았어요.”오빠는 휴대전화로 병원 직인을 검색했다.“직인은 같은데.”“왜 위조 감정까지 해!”도윤이 밀폐 봉투에 넣은 테스트기 네 개를 식탁 위에 나란히 놓았다.“오늘 세아가 직접 검사한 겁니다.”혜진 이모가 두 줄을 확인하고도 쉽게 기뻐하지 못했다.“지난번 것도 두 줄이었잖아.”“그건 지수 거였어요.”“이번엔 지수가 소변까지 빌려준 건 아니지?”“이모!”억울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신뢰를 한 번 잃으면 진실 하나에 증거가 네 개씩 필요했다.엄마가 시험하듯 물었다.“태명은?”“아직 없어요.”“지난번에도 없다고 했잖아.”“진짜 임신이라고 자동으로 태명이 내려오는 건 아니에요!”오빠가 턱을 만졌다.“이번 반응이 더 억울하긴 하네.”“그게 과학적 기준이야?”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병원 가자.”“지금 밤 아홉 시예요.”“응급실은 열려 있지.”“임신 확인하러 응급실 가면 병원에서 우리 가족 출입 금지해요.”결국 도윤이 담당 의사에게 전화했다. 의사는 내 동의를 확인한 뒤 검사 결과가 양성이라고 설명했다.그래도 할머니는 직접 듣겠다며 다음 날 온 가족을 병원에 끌고 갔다. 진료실 앞에 할머니, 엄마, 오빠, 혜진 이모, 비서까지 줄지어 앉자 다른 환자들이 우리를 구경했다.“가족분이 많으시네요.”의사가 말했다.“거짓 임신 전과가 있어서요.”내 대답에 의사는 이해하지 못한 채 웃었다.혈액 검사 결과까지 확인한 뒤에야 가족들의 표정이 바뀌었다.“임신 초기 수치가 맞습니다.”엄마는 세 번이나 다시 물었고, 오빠는 결과지 이름과 주민번호를 대조했다. 할머니가 병원 원장에게 전화하려 하자 내가 휴대전화를 빼앗았다.“이 정도면 믿어 주세요.”“네 전적이 화려해서 그렇지.”“한 번이에요!”엄마가 나를 끌
두 줄짜리 테스트기를 들고 나오자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진짜야?”“불량일 수도 있잖아.”“내가 방금 약국에서 산 거야.”“증발선일 수도 있고.”“저렇게 진한 증발선이면 제조사가 상 줘야 해.”나는 테스트기를 조명 아래로 들어 올렸다. 첫 거짓말 때 빌렸던 것과 똑같은 두 줄. 그런데 그때는 들킬까 손이 떨렸고, 지금은 믿어도 되는지 몰라 떨렸다.“도윤이한테 전화해.”“안 돼.”“왜?”“또 안 믿으면 어떡해?”지수가 어이없다는 듯 봤다.“그 인간은 네가 외계인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우주법부터 찾을걸.”“가족들이 안 믿을 거야.”“맞선도 없는데 뭘 피하려고?”“습관성 거짓 임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말하면서도 황당했다. 신뢰를 잃은 사람은 진실 앞에서도 증거부터 떠올린다.지수는 테스트기 세 개를 더 사 왔다. 나는 물을 마시고 기다렸다가 하나씩 확인했다.네 개 모두 두 줄이었다.사진을 찍었다가 지웠다. 지난번처럼 증거부터 만들기보다 도윤과 먼저 기뻐하고 싶었다.“나 엄마 되는 건가?”입 밖에 내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지수가 나를 안고 등을 두드렸다.“응. 진짜.”“아직 병원 전이잖아.”“그럼 지금 가.”“도윤이 없이?”“아까는 말 안 한다며.”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화장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세아야?”도윤이었다.“재판 끝났어. 케이크 골랐어?”나는 테스트기들을 휴지로 덮었다. 지수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말해?고개를 세차게 저었다.문을 열자 도윤이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내 창백한 얼굴을 보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어디 아파?”“아니.”“토했다며.”“버터를 너무 먹어서.”그의 시선이 내 뒤 세면대로 갔다. 몸으로 가렸지만 휴지 아래에서 테스트기 손잡이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저건 뭐야?”“아무것도 아니야.”“지난번에도 그 말하고 지수 테스트기를 들고 있었지.”도윤이 다가오자 나는 네 개를 등 뒤로 숨겼다.“이번에도 지수 거야?”“아니.”“그럼?”더
“윤세아, 나랑 진짜로 결혼해 줄래?”나는 무릎을 꿇은 도윤을 내려다봤다.“싫어.”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왜?”“너 혼자 프러포즈하는 거.”“무슨 뜻이야?”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맞은편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탄 달걀 냄새가 가득한 주방 바닥이었다. 나는 도윤 셔츠를 걸치고 있었고, 그는 아까 겨우 주워 입은 셔츠 차림이었다. 프러포즈치고는 낭만보다 탄 달걀 냄새가 더 진했다.“처음에는 네가 혼자 책임진다고 했잖아. 이번에는 같이 하자.”도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확실해?”“가족도 회사도 거짓말도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거 맞아.”어젯밤 그가 한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자 눈가가 붉어졌다.“녹음해 둘걸.”“평생 반복 재생해 줄 테니까 외워.”그제야 굳었던 입꼬리가 올라갔다.“사람 놀라게 하는 재능은 여전하네.”“거짓말 재능도 있었고.”“그건 없었어. 전 국민에게 들켰잖아.”도윤은 내 대답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방금 싫다고 한 부분은 철회?”“너 혼자 하는 프러포즈만.”“결혼 의사는 확정?”“네.”“번복 불가?”“강도윤, 입 다물어.”그제야 아주 길게 숨을 내쉬며 나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고 주방 바닥에 함께 주저앉았다.“내 프러포즈 선물은?”“너면 돼.”“그 말 후회하지 마. 유지비 많이 들어.”“십오 년치 선납했어.”그가 내 손가락의 반지에 입을 맞췄다.그날 저녁 우리는 양가 가족을 다시 불렀다. 같은 식탁에서 첫 약혼을 취소한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았다.할머니는 소식을 듣고도 한동안 무표정했다.“임신 때문은 아니지?”“아니에요.”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테스트기 같은 건 없고?”“없다니까요!”오빠가 휴대전화를 들었다.“프러포즈 증거 영상은?”“없어.”“거짓 임신 전과자의 단독 증언만으로 결혼을 승인해도 됩니까?”엄마가 오빠의 등을 세게 때렸다.“네 동생 좋은 날에 꼭 그렇게 말해야겠니?”“신뢰 회복 절차를 제안한 것뿐인데.”도윤이 탄 달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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