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는 법: Chapter 11 - Chapter 20

26 Chapters

11화. 곤룡포

도홍이 세자의 등 뒤에서 곤룡포를 끌어 올렸다. 무거운 옷이 어깨에 걸리자 세자가 허리를 폈다. 상의원에서 밤새 뜯어 고친 자리가 이제는 몸에 맞았다. 등판의 주름까지 펴 주자 세자가 팔을 들어 보았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었다."길지 않으냐.""전하 소매는 원래 그렇습니다.""아직 전하가 아니다.""반 각만 지나면 전하십니다."도홍은 익선관을 씌우고 양옆으로 뻗은 뿔을 바로잡았다. 두 걸음 물러나 옷매무새를 살피는데 눈가가 젖었다. 세자가 고개를 돌리자 미처 숨기지 못했다."울지 마라.""안 웁니다."세자는 코웃음을 쳤다."……아이고, 곤룡포가 너무 커서 그렇습니다."세자는 대꾸 없이 휘정전 뒷문을 나섰다. 앞뜰로 향하는 동안 큰 종이 울려, 돌바닥을 딛는 발밑까지 진동이 전해졌다.뜰 앞줄에는 종친이, 그 뒤로는 대신들이 엎드려 있었다. 문관과 무관의 행렬이 양쪽으로 갈라져 뜰 끝까지 이어졌다. 세자는 그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정면에 높이 세운 단 위로 어좌와 병풍이 드러났다.도홍이 긴 옷자락을 받쳐 들었다. 세자는 아홉 계단을 올라 어좌 앞에 섰다.예조판서 민해가 단 아래서 교서를 폈다. 선왕의 공덕과 뒤를 이을 세자의 덕을 기리는 목소리가 뜰 끝까지 뻗었다. 창 사신은 아직 서관을 넘지 않았다. 황제가 왕위를 인정하는 글, 고명도 오지 않았다. 휘가 세워진 뒤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민해는 그 대목을 언급하지 않았다.교서 낭독이 끝나자 세자는 어좌에 앉았다. 얇은 방석 아래로 단단한 나무가 받쳤다. 아버지가 스물일곱 해 동안 앉았던 자리였다. 그는 등을 세우고 두 손을 무릎에 얹었다.천세. 천세. 천천세.앞줄에서 시작된 환호를 뒤의 사람들이 받아 외쳤다. 담 너머에서도 궁녀와 내관들의 목소리가 합쳐졌다. 천세를 외치는 소리가 잦아들자 큰 종이 다시 울렸다.왕의 눈길이 서쪽 담으로 향했다. 담 너머 회랑 끝이 어젯밤의 어둠과 겹쳤다. 그는 무릎에 얹은 손을 편 채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대신들은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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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천세

휘정전에서 즉위식 채비가 한창일 때, 영수전 곁방에는 밖에서 빗장이 걸렸다. 문살 사이로는 아직 푸른 새벽빛이 들었다. 잠그고 간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단이가 문에 바싹 붙어 속삭였다."문을 잠갔습니다.""들었다.""저는 밖에 있겠습니다.""알았다.""……안에는 좀 따뜻하십니까. 밖은 춥습니다.""이불이라도 두르고 있어라."문 너머에서 천이 끌렸다. 여울도 제 이부자리를 개어 벽 쪽으로 밀었다. 화로의 숯불을 살린 뒤 작은 솥에 물을 부어 얹었다.큰 종이 울리자 곁방 벽이 잘게 떨렸다. 오늘은 벽에 손을 대지 말라던 봉수의 당부가 떠올랐다. 여울은 안채 쪽 벽을 등지고 문 옆에 앉았다.종소리가 멎은 뒤 휘정전 쪽에서 글 읽는 목소리가 흘러왔다. 말뜻은 들리지 않고 길게 뽑는 가락만 이어졌다. 여울은 화로 앞으로 옮겨 앉아 솥을 기울였다. 그릇에 따른 물을 서둘러 마시다 혀를 데고 입술을 뗐다.낭독이 끝나자 뜰에서 환호가 터졌다.천세. 천세. 천천세.벽을 울릴 만큼 큰 소리였다. 높은 목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뒤섞여 들어왔다. 여울의 손이 기울어 물이 엄지 위로 넘쳤다. 그는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젖은 손을 닦았다."……계십니까."문 너머에서 봉수 목소리가 났다."어른.""밖에 앉아 있습니다.""빈전에 안 가셨습니까.""오늘은 빈전 문도 잠갔습니다. 다들 휘정전 앞에 가 있습니다.""어른은 왜 안 가셨습니까.""에구, 이 다리로 오래 서 있기는 어렵습니다.""다리 펴십시오. 제가 비키겠습니다."단이의 말 뒤로 봉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이 문 바로 앞에 나란히 앉는 기척에 여울도 무릎으로 다가갔다. 문살에 손가락을 걸어 보았지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어른.""예.""저 소리 중에 제 몫은 없군요."봉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단이가 말했다."저도 천세는 안 불렀습니다.""너는 왜.""……에이, 여기서 부르면 문 잠근 일이 좋아서 그러는 줄 알겠습니다."봉수가 낮게 웃었다. 여울도 입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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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알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울은 종이 그친 뒤에도 한동안 벽을 짚고 있다가 손을 내렸다. 식은 물그릇을 들고 문 옆으로 돌아가 앉았다.저녁까지 빗장은 풀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봉수가 다리를 바꿔 뻗는 소리에 여울이 문 너머로 괜찮으시냐고 물었다.—왕이 어좌에 앉자 두툼한 방석이 눌렸다. 도홍이 밤사이 한 겹 더 깔아 둔 것이었다. 즉위식을 올린 지 이틀 만에 받는 첫 조회였다.대신들은 국상 절차와 산릉 자리, 창 사신의 숙소를 차례로 아뢰었다. 이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윤척이 대비의 뜻을 보탰다. 새로 도승지가 된 한겸은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음 문서를 펼쳤다.사간원 차례가 왔다.서른 안팎의 젊은 정언이 앞으로 나섰다. 상소를 받쳐 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떨렸으나, 왕이 말없이 듣자 점차 소리를 높였다."선왕의 남총이 아직 침전 곁방에 있습니다. 국상 중에 색적자가 침전에 머무는 것은 법도에 없는 일이며, 새 임금의 첫 조회가 열린 오늘까지 처분이 내리지 않은 것은 조정의 부끄러움입니다. 처분하소서."정언이 상소를 내밀고 엎드렸다. 한겸이 받아 왕 앞에 올렸다. 왕은 펼쳐진 글을 읽었다. 즉위 전에 미리 받아 둔 처분 요구와 같은 내용이었다."알았다."정언이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왕이 상소를 옆으로 밀자 한겸도 손을 뻗다 말았다."다음."한겸이 서둘러 다른 문서를 펼쳤다. 정언이 제자리로 물러가는 사이 이헌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뒤이어 예물 마련에 관한 보고가 시작됐다. 조회가 끝날 때까지 왕은 처분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선정당으로 돌아온 왕은 곤룡포 자락을 걷어 앉았다. 도홍이 문을 닫고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물그릇을 내려놓으려는데 왕이 불렀다."도홍.""예, 전하.""곁방의 그자는 무엇을 먹느냐."도홍의 손에서 물그릇이 기울었다. 얼른 바로 놓았으나 대답은 늦었다. 여울이 어떻게 지내는지 왕이 먼저 물은 적은 없었다."죽입니다.""국상이니 죽이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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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소문

단이가 물동이를 안고 들어오다 물을 쏟았다. 제 버선이 젖는데도 내려놓을 생각을 못 하기에 여울이 빈자리를 가리켰다."거기 두어라. 무겁겠다.""전하께서 알았다고 하셨답니다."여울은 숟가락을 든 채 멈췄다. 봉수가 물동이를 받아 문 옆에 놓고 걸레를 찾았다."뭘 알았다고.""처분 상소를 듣고 그러셨답니다. 세답방에서는 오늘 의금부가 올 거라 합니다."단이는 빨래를 받으러 갔다가 들었다고 했다. 왕이 알았다고 했으니 이제 처분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봉수가 젖은 마루를 닦는 동안 여울은 식어 가는 죽을 삼켰다."의금부에서 사람을 보냈다는 말도 들었느냐.""그건…… 못 들었습니다."여울은 더 묻지 않았다. 봉수가 빈 그릇을 가져가고 나서도 단이는 문 옆 물동이를 만지작거렸다.—창으로 볕이 깊이 들 무렵, 수건을 받아 온 단이가 여울 앞에 무릎을 모았다."의금부는 안 올 거랍니다."이번에는 침방에서 들은 말이었다. 왕이 좌상 얼굴을 향해 알았다고 했으니, 처분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누가 시킨 상소인지 안다는 뜻이라고 했다. 조회 뒤 좌상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며 단이는 목소리까지 낮췄다."좌상 대감 얼굴을 본 사람이 있느냐.""침방 언니의 사촌이 뜰에 있었답니다.""어디쯤에.""맨 뒤에……."여울이 문밖 회랑을 내다보았다."여기서 네 세답방 보이느냐."단이가 고개를 내밀려다 말았다. 회랑 모퉁이도 안 보이는 자리였다. 여울의 입가가 조금 풀리자 단이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그래도 아침 말보다는 낫지 않습니까."여울은 아이가 내민 수건을 받아 곁에 개어 놓았다.—저녁 죽을 거의 비웠을 때 단이가 또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선정당 마루를 닦던 내시부 아이에게 들은 말이었다."전하께서 도홍 내관에게 여기 계신 분은 뭘 드시느냐고 물으셨답니다."숟가락 끝이 그릇 바닥을 긁었다."그래서.""죽이라 하니 국상이니 그러겠지 하셨답니다. 도홍 내관이 국상 전에도 죽이었다고 답했고…… 거기까지 들었답니다."봉수가 물을 따라 놓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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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도승지

왕이 회랑 기둥을 짚고 처마에 올랐다. 도홍에게 곁방의 생활을 알아 오라 시켜 놓고 보고를 받기도 전에 나선 길이었다.영수전 곁방 위 지붕을 밟기는 처음이었다. 기와 하나가 발밑에서 밀리자 무게를 옆으로 옮겼다. 창으로 새는 불빛은 보였으나 방 안은 보이지 않았다."단이야. 안에서 자라."여울의 목소리였다. 왕은 처마 가까이 몸을 낮췄다."마루가 좋습니다.""추워서 발을 비비면서.""……방이 무섭습니다.""벽 때문이냐."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불을 끄는 소리가 나더니 단이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오라비."기와를 짚은 왕의 손가락이 벌어졌다."왜."여울은 조금도 이상해하지 않았다."저 벽에서는 멀리 자도 됩니까.""반대쪽에 네 이불을 펴라. 그만큼 떨어지면 괜찮겠느냐.""예."문턱에 걸린 이불을 당기느라 단이가 끙 소리를 냈다. 여울이 웃으며 끝을 들라고 일러 주었다. 곧 마루에 끌리던 소리가 방 안으로 옮겨 갔다.왕은 처마 끝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의 부름에 대답하던 여울의 목소리가 아직 가까웠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도 저렇게 부르면 되는 사람처럼 들렸다. 벌어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기와의 거친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창호지의 불빛이 꺼졌다. 왕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아래에서 여울의 말이 이어졌다."오늘도 기침을 안 하십니다."안채와 맞닿은 벽 쪽에서 난 소리였다. 왕은 굽혔던 무릎을 펴지 않았다."약이 이제야 들었나 봅니다."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이부자리가 바닥에 쓸리고도 한참 동안 고르지 못한 숨이 들렸다. 왕은 축시를 알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지붕에 머물렀다.회랑으로 내려서자 끝의 어둠에서 기척이 물러났다. 암위장 현이었다. 왕은 그를 부르지 않고 선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선정당에는 아직 등불이 켜져 있었다. 수결을 받지 못한 문서를 들고 한겸이 기다렸다가, 도홍이 문을 열자 뒤따라 들었다. 왕이 어디에 갔었는지는 묻지 않았다.왕은 앉자마자 문서를 받아 넘겼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수결을 마치자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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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수색

여울이 얼굴을 들자 곽명의 눈이 잠깐 머물렀다. 이내 방 안을 훑으며 물었다."선왕께서 남기신 문서가 있는가.""없습니다.""편지든 쪽지든, 받아 둔 것은.""선왕께서는 이 방에 글씨를 남기지 않으셨습니다."곽명이 손짓하자 군사들이 들어왔다. 한 명이 개어 둔 이불을 펼쳐 터는 동안 다른 한 명은 빈 솥을 내려놓고 화로를 기울였다. 식은 재가 마루에 쏟아졌다. 단이가 달려들려다 곽명에게 막혀 문 옆으로 물러났다.군사들은 그릇을 들춰 보고 벽과 문틀을 두드렸다. 벽 아래 조금 들뜬 마루판에는 칼끝을 밀어 넣었다. 나무가 삐걱거리며 벌어졌다. 군사가 마루판을 빼내 밑의 흙까지 헤집었으나 종이는 나오지 않았다.여울은 재가 묻은 이불 끝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곽명이 바로 앞에 멈춰 섰다."일어서라. 팔을 들고."곽명은 일어선 여울의 소매와 허리, 등을 차례로 눌러 살폈다. 옷깃에서 종이가 만져지자 손가락을 안으로 넣었다."이게 뭐냐.""유서입니다."접힌 종이 뭉치가 곽명의 손에 끌려 나왔다. 여울은 벌어진 옷깃을 그대로 둔 채 팔을 내렸다.곽명이 종이를 펼쳤다. 넉 장 가운데 석 장에는 글이 빼곡했다. 물목마을과 낙수, 서리였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빠르게 읽어 내리다가 마지막 장에서 손을 멈췄다."이름만 있군.""다음 말을 쓰지 못했습니다."곽명이 종이 위로 여울을 살폈다. 여울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곽명은 먼저 고개를 돌려 유서를 접었다."가져간다.""……뭐, 읽을 사람이 있어야 하니 그러십시오."종이는 곽명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는 군사에게 뜯은 마루를 도로 끼우라 이르고 문을 나섰다. 한쪽이 어긋난 마루판을 군사가 발로 눌러 보았으나 끝까지 맞물리지 않았다. 다시 손보지 않고 뒤따라 나갔다.발소리가 멀어지자 단이가 문을 닫았다. 여울에게 돌아서는데 눈물이 턱으로 떨어졌다.여울은 그제야 옷깃을 여몄다. 유서가 빠져나간 자리 아래로 얇은 모서리가 만져졌다. 봉서는 안감 사이에 꿰맨 채 남아 있었다. 곽명은 꺼낸 유서를 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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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턱

여울은 단이가 가져온 수건으로 손의 재를 닦았다. 옷깃까지 털다가 안감의 실밥에 손을 멈췄다. 봉서를 꿰맨 자리가 손끝에 닿았다. 선왕이 세상을 떠나기 반년 전, 그 종이를 받아 들던 밤에는 한동안 기침이 나지 않았다.축시에 눈을 뜬 여울은 벽에 귀를 기울였다. 물을 끓일까 하던 참에 안채로 통하는 문이 저쪽에서 열렸다."여울아."선왕이 문설주를 짚고 서 있었다. 여울이 다가가 팔을 받치자 말없이 몸을 맡겼다. 등불 하나 켜진 안채를 가로질러 이부자리까지 함께 걸었다.선왕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릎에 이불을 덮었다. 여울에게도 앞자리를 내주었다. 여울이 등을 대고 앉자 정수리에 턱이 얹혔다. 마른 턱뼈가 닿는 데가 아파 조금 비껴 앉으니 선왕도 고개를 고쳐 기댔다."오늘은 기침이 안 났다.""약이 들었나 봅니다.""허운이 바꿨다. 이번 것은 몹시 쓰더구나."여울은 상 위의 빈 약그릇을 확인했다. 옆에 둔 물그릇을 들어 드리려 했으나 선왕이 손을 저었다. 여울이 그릇을 도로 놓자 선왕은 그의 허리 앞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북려에서 철산을 내놓으라 했다.""전쟁이 나는 겁니까.""당장은 못 넘는다. 북방군의 백웅이 겨울까지 버티겠다고 했다. 그 뒤에는 세자가 맡을 테고."말을 마친 선왕의 숨이 머리칼을 흩뜨렸다. 여울이 아랫입술을 다물자 선왕이 말을 이었다."진이는 나보다 영리하다. 그런데 제게 필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여울은 제 앞에 놓인 선왕의 손에 눈을 내렸다. 손등의 검버섯이 전에 보았을 때보다 짙었다."내가 그렇게 키웠다. 그건 내 잘못이지."여울은 대답하지 못했다. 선왕도 더 묻지 않고 팔을 풀었다. 이부자리 곁에서 얇은 봉서 하나를 집어 여울에게 건넸다.봉한 자리에 인장이 둘 찍혀 있었다. 하나는 옥새 옆에 놓아두던 선왕의 사사로운 인장이었다. 다른 하나에는 둥근 테두리 안으로 글자가 작게 들어가 있었으나, 어두워서 읽히지 않았다."열지 마라. 때가 오면 진이한테 주어라."여울은 봉서를 받친 채 손을 움직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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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순찰

곽명이 쏟아 놓았던 재가 마루 틈에 남아 있었다. 단이가 걸레 끝으로 얼룩을 문지르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회랑에서 군사들이 발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다."또 의금부입니까."여울도 열린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앞서 오던 사내가 곁방 앞에서 멈추고, 나머지 군사들은 조금 떨어져 섰다. 여울이 엎드리려 하자 사내가 손을 내저었다."엎드리지 마시오."여울은 무릎만 꿇은 채 얼굴을 들었다. 검은 융복을 입은 젊은 무관이었다. 칼 찬 허리 위로 어깨가 넓었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아직 서른이 못 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도총관 서율이오. 어제 의금부가 여기 들어왔다고 들었소.""예. 방을 뒤지고 갔습니다."서율은 문밖에 선 채 마루의 재 얼룩과 뒤틀린 판자를 살폈다. 단이가 닦던 손을 멈추고 무릎 위에 걸레를 모았다."궁 안의 경비는 도총부가 맡소. 의금부도 들어오기 전에 우리에게 알려야 하는데, 어제는 그러지 않았소.""그 일로 오셨습니까.""무엇을 가져갔는지 확인하러 왔소.""제가 쓴 유서입니다."서율의 눈이 여울에게 돌아왔다."유서를 왜 쓰시오. 처분은 아직 내리지 않았소.""내리고 나면 쓸 시간이 없을지 몰라 미리 썼습니다."회랑 저쪽에서 군사 하나가 자세를 고치자 칼집이 기둥에 부딪혔다. 서율이 돌아보니 얼른 고개를 숙였다."다른 것은 가져가지 않았소.""예. 마루는 뜯었다가 도로 놓고 갔습니다."서율은 칼집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문턱 바깥에 쪼그려 앉았다. 마루판의 어긋난 끝을 손으로 눌러 보니 반대쪽이 들렸다."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총부에 말하시오. 우리 군사들이 이 앞을 하루 두 번 지나니 그때 전하면 되오."여울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서율은 판자를 누르던 손을 뗐다."내가 우스운 말을 했소.""아닙니다. 도총관께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여울은 웃음을 가라앉히고 답했다."죽은 내시부에서 오고 물은 단이가 길어 줍니다. 지낼 방도 있으니 괜찮습니다.""마루가 이래서야 발이 걸리겠소. 내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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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자경전

"예, 어마마마.""들었다는 뜻이냐, 처분하겠다는 뜻이냐.""상소를 받았습니다. 처분은 정하지 않았습니다."대비는 제 찻잔을 당겨 놓았다."그 조회 뒤로 이레가 지났다. 사간원 정언 세 명이 다시 상소를 올리려 한다더구나. 언제까지 답을 미룰 셈이냐."왕은 잔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마주했다."어마마마께서는 어찌하기를 바라십니까.""네 아버지의 것을 네가 왜 남겨 두느냐."대비가 소매를 걷어 찻주전자를 들었다. 왕의 잔에는 차가 남아 있어 따르지 않고 도로 놓았다."네 아버지가 그자를 곁에 두는 동안 내 처소는 비어 있었다. 궁 안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제 주인도 죽었는데, 쓰던 것을 치우는 게 뭐가 어렵느냐."왕이 잔을 상 안쪽으로 밀었다. 찻잔 바닥이 나무를 긁었다."제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최령이 문고리에 걸친 손을 떼지 못했다. 대비는 찻주전자에서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왕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는 처분을 재촉하지 말라 할 참이었다. 어머니가 맞은편에 앉아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무슨 뜻이냐.""그 사람의 처분은 제가 정합니다. 죽이든 내치든 절로 보내든, 어마마마의 뜻으로 정할 일은 아닙니다.""진아.""제 처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더는 치우라 하지 마십시오."대비는 아들을 오래 마주하다가 먼저 차로 눈을 돌렸다. 잔을 들어 마시는데 차가 식었는지 입가를 굳혔다. 내려놓을 때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가 보아라."왕이 일어서자 최령이 비켜서며 문을 열었다. 문턱을 넘기 직전, 뒤에서 어머니가 다시 불렀다."진아. 네 아버지도 내게 그자를 내치라 하지 말랬다."왕은 문설주에 손을 댄 채 멈췄다. 뜰에서 기다리던 도홍이 다가왔다. 왕은 어머니에게 더 묻지 않고 문턱을 넘었다.—선정당으로 향하는 걸음이 빨랐다. 도홍은 옷자락을 걷어 쥐고 따라붙었으나 왕의 뒤꿈치가 자꾸 멀어졌다.왕이 먼저 방에 들어갔다. 뒤따라 문을 열려던 도홍은 안에서 들려오는 말에 손을 멈췄다."들어오지 마라."문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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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빈칸

배원이 옻칠 함을 내려놓고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왕의 부름을 받고 내시부에서 가져온 함이었다. 뒤따른 내관 두 명이 선정당 문 옆에 물러서자 배원은 자물쇠를 열고 장부를 꺼내 상 위에 올렸다.손바닥을 나란히 편 정도의 작은 장부였다. 왕이 표지를 넘기자 이름과 연도, 처분을 적은 글자가 줄지어 나왔다.앞선 다섯 사람의 기록은 먹빛이 갈색으로 바래 있었다.사(死). 출(出). 사(死). 사(寺). 출(出).죽이거나 궁 밖으로 내치거나 절로 보내라는 뜻이었다. 맨 아래 하여울의 이름 옆에는 색적에 오른 해, 휘력 백칠십구년만 적혀 있었다."처분이 내리면 그 옆에 적습니다."배원이 빈자리를 가리켰다."한 번 적은 처분은 고치지 못합니다."왕은 장부를 제 앞으로 당겼다. 도홍이 벼루를 내려놓고 먹을 갈았다. 붓까지 받쳐 올리자 왕이 받아 들었다.여울의 이름은 앞선 다섯 사람과 같은 크기로 적혀 있었다. 그 뒤에 죽일 사 자를 넣으면 의금부에 명이 갈 것이었다. 궁 밖이나 절로 보내는 처분을 써넣어도 이 궁에서는 나가게 된다.왕은 먹을 적신 붓을 빈칸 위에 가져갔다. 배원은 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아직 얼굴도 보지 않았다. 지붕 아래서 아이를 부르고 웃던 목소리만 들었다. 그자를 어느 곳으로 보내든, 한겸이 권한 말만 듣고 내보낼 일은 아니었다.왕은 붓을 벼루 옆에 내려놓고 장부를 덮었다."돌려놓아라."배원이 장부를 받으려다가 왕의 얼굴을 살폈다."처분은…….""정해지면 부르겠다. 그때까지 함에 넣어 두어라. 열쇠는 네가 가지고."왕은 내민 장부를 배원이 두 손으로 받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내 말 없이 장부를 꺼내려는 자가 있으면 내 앞으로 데려와라. 좌상이라도, 대비전 사람이라도.""예, 전하."배원은 받아 든 장부를 함에 넣고 잠갔다. 열쇠를 품에 갈무리한 뒤에도 일어나지 않았다."전하. 곁방에 두라는 선왕의 명이 있었다고 봉수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처분이 내릴 때까지 그대로 두라 하셨답니다.""누가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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