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선왕의 남총을 처분하소서.” 선왕이 죽자, 여울은 유서를 고쳐 썼다. 그의 생사를 정할 새 왕은 여덟 해 전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소꿉동무, 강진이었다. 강진에게 여울은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남자가 된 배신자였다. 벌을 내리고 멀리 내치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만난 여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남에게는 쉽게 내어 주는 웃음을 제 앞에서만 거두는 것도, 다른 사내들이 그 곁을 탐내는 것도 견딜 수 없이 거슬린다. 여울은 그를 떠났던 이유를 끝내 밝히지 않는다. 강진은 대답 대신 여울의 곁에 드는 사람부터 막기 시작한다. “네 목숨은 내 것이다.” 죽이라는 상소가 쌓이는 동안, 왕은 밤마다 여울의 방문을 열었다.
View More빈전에서 번져 온 곡소리가 영수전 처마 밑까지 밀려와 잦아들 줄 몰랐고, 그 소리 사이로 곁방 안에서는 붓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가늘게 이어졌다.
“또 쓰십니까.”
문을 연 늙은 내관 봉수가 여울 앞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여울은 붓을 든 채 대답했다.
“세 번째 고칩니다.”
“어제 석 장이나 쓰셨잖습니까.”
“쓰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처분이 먼저 오면 끝까지 못 쓰지 않습니까.”
봉수가 낮게 웃으며 죽과 물그릇을 얹은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여울이 종이를 옆으로 밀자 봉수는 그 자리에 소반을 내려놓았다.
짧은 상복 소매 아래로 늙은 손목이 한 뼘이나 드러나 있었다.
“소매가 왜 그렇습니까.”
“내시부에서 주는 대로 받아 왔습니다. 늙은 것들은 짧고 어린것들은 길어서, 곡하다 서로 소매를 밟게 생겼습니다.”
“바꿔 달라 하시지요.”
“에구, 국상에 옷 투정한다고 눈이나 찍힙니다.”
봉수는 죽 그릇 오른쪽에 숟가락을, 왼쪽에 물그릇을 놓고는 종이에 고개를 기울였다. 하여울 석 자만 적혀 있었다. 마지막 획에 먹이 번져 ‘울’ 자가 조금 뭉개져 있었다.
“이름밖에 안 쓰셨잖습니까.”
“다음이 안 나옵니다.”
여울은 뭉개진 제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붓을 내려놓았다.
물목마을 앞 여울목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고을 서리였던 아버지가 밤마다 낙수 소리를 들으며 지었다고 했다. 얕게, 사람 해치지 말고, 소리나 내며 살라고.
그 이름 뒤에 무엇을 이어 써야 할지 여울은 알 수 없었다.
숟가락을 집어 죽을 젓던 여울이 소반 건너에 선 봉수에게 물었다.
“어른은 드셨습니까.”
“먹었습니다.”
“거짓말.”
“……줄이 빈전까지 늘어서서 못 먹었습니다. 저는 됐으니 드십시오.”
여울은 아직 입에 대지 않은 숟가락을 그릇 곁에 놓고 죽을 봉수 쪽으로 밀었다. 봉수가 허리를 굽혀 도로 밀어 주는 바람에 죽이 가장자리까지 출렁였다.
“입맛 없습니다.”
“한 술도 안 뜨셨잖습니까.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이제 와서 말입니까.”
봉수의 손이 그릇을 붙든 채 멎었다.
“드십시오. 그래야 저도 갑니다.”
여울이 죽을 한 술 떠 입에 넣자 봉수는 그제야 그릇에서 손을 뗐다. 앉으라는 말에도 소반 곁에 선 채였다.
여울이 이 곁방에 들어온 날부터 봉수는 늘 그릇이 빌 때까지 기다렸다.
“어른.”
“예.”
“저 죽고 나면 이 방은 어떻게 됩니까.”
봉수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 아래에는 얇은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고, 그 옆에 불 꺼진 화로가 놓여 있었다.
“치울 겁니다.”
“치울 짐도 없습니다.”
“이불도 걷고, 쓰시던 종이도 거둬야지요.”
“그럼 천천히 하라고 하십시오. 급할 것도 없잖습니까.”
여울은 죽을 삼키며 안채 쪽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 너머는 선왕이 잠들던 방이었다. 축시마다 마른기침이 두 번 들리고, 한숨 뒤에 한 번 더 이어졌다. 여울은 그 소리에 물을 끓여 두었다가 선왕이 이름을 부르면 그릇을 들고 안채로 건너갔다.
사흘 전 선왕이 승하한 뒤로는 물을 끓여도 부르는 이가 없었다.
그 조용함이 아직 낯설었다. 삼킨 죽이 목에 걸린 듯 뻑뻑하게 내려갔다.
왕이 죽으면 그 남총의 처분은 다음 왕이 정했다. 죽일지, 궁 밖으로 내칠지, 절로 보낼지.
여울의 처분을 정할 사람은 곧 왕이 될 세자였다.
여울은 그와 여섯 살부터 열두 해를 함께 자랐다. 선왕이 여울을 이 곁방으로 데려가던 날, 세자는 회랑 끝에서 먼저 등을 돌렸다. 같은 궁에서 여덟 해가 지나는 동안 세자가 이 문을 두드린 적은 없었다.
그 사람이 이제 여울의 목숨을 쥐게 되었다.
여울은 남은 죽을 마저 먹고 빈 그릇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봉수가 소반을 들고 문턱을 넘으려다 돌아섰다.
“참. 사간원에서 상소가 올라갔답니다.”
“무슨 상소입니까.”
“선왕의 남총을 처분하소서, 라고.”
저녁 연기가 걷히고 담 밖에서 개 한 마리가 짖다 그쳤을 때, 여울은 그 물음을 품은 채 등잔에 불을 붙였다.켜 두는 것이 이제는 이상하지 않았다. 단이도 더는 묻지 않았다.강진은 해시 순찰보다 먼저 왔다. 문을 닫고 들어와 이부자리 곁에 앉았다. 등잔 맞은편이 아니었다.“묻겠다고 했다.”여울은 대답 대신 낮에 휘정전에서 들은 것을 꺼냈다.“……예조에서 고을 이름을 고쳤습니다.”“내가 그리하라 했다.”“그런 함자를…….”“그래서 너만 부르라는 것이다.”여울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강진은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이 오지 않자 손이 여울의 턱으로 왔다. 들어 올리기 전에 그 손이 한 번 멎었다.여울이 그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그제야 입술이 내려왔다. 등잔불 아래서 여울은 눈을 감았다. 저고리 고름은 이번에도 여울의 손이 풀었다.강진이 여울을 이부자리에 뉘었다. 접어 둔 이불 한 자락을 끌어다 무릎 밑에 괴었다. 베를 감은 무릎이 굽지 않고 그 위에 얹혔다.허리춤의 끈은 강진이 끌렀다. 여울이 허리를 들어 거들었다.저고리가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강진은 팔꿈치로 제 몸을 받쳐 얼굴을 여울의 얼굴 가까이 두었다. 갈색 눈이 바로 위에 있었다.강진이 천천히 몸을 낮췄다. 여울의 손이 강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강진은 그대로 멎어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여울이었다.이불이 흔들리고, 벽에 비친 그림자가 따라 흔들렸다.여울이 얼굴을 가리려고 손을 들자, 강진이 그 두 손목을 한 손에 모아 쥐어 제 가슴 위로 내렸다. 가릴 데가 없어진 얼굴이 강진의 눈 아래 있었다.“불러라.”쉰 목소리였다.여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 대신 숨이 새어 나왔다. 모아 잡힌 손목은 빼지 않았다.강진은 더 시키지 않았다. 허리를 붙든 다른 손이 여울을 느리게 이끌었다. 강진의 가슴 위에서 여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목 안에서 무엇이 차오르다 터졌다.“……저하…….”강진이 멎었다.손목을 쥔 손가락에 한 번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갈색 눈이 여울을
묻겠다던 사람은 창호가 희어질 때까지 여울의 허리에서 팔을 거두지 않았다.도홍이 조회 채비를 받쳐 들고 와 문턱 안쪽에 꿇었고, 강진은 등잔이 아직 타는 방에서 곤룡포를 입었다. 여울은 이번에는 이불을 끌어 올리지 않았다. 일어나 앉아, 바닥에 놓인 옥대 고리 하나를 집어 도홍에게 건넸다.도홍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옥대에 끼웠다. 강진은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문을 나설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담 셋을 지나는 동안 해가 처마 끝에 걸렸고, 회랑의 궁인들은 도홍이 닿기도 전에 먼저 엎드려 있었고, 휘정전 문턱의 돌은 아침 이슬에 아직 젖어 있었다.여울은 제자리에 섰다. 돌아오는 고개는 이제 몇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벌써 익숙해져 있었다.예조판서 민해가 홀을 들었다.“즉위하신 뒤 고칠 이름들을 올리옵니다. 전하의 함자와 같은 글자를 쓰는 고을 둘과 나루 하나가 있사옵니다.”민해는 그 글자를 끝내 말하지 않았다. 옛 이름과 새 이름을 차례로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도 그 한 글자만은 소리 내지 않고 비켜 갔다. 읽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리하라.”강진의 목소리는 다른 날과 같았다. 한겸의 붓이 움직였고, 고을 둘과 나루 하나의 이름이 그 붓끝에서 바뀌었다.여울은 문턱 안쪽 돌바닥을 내려다보았다.고을 둘이 오늘 이름을 버렸다. 그 고을 사람들은 이제 제 사는 곳을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었다. 온 나라가 그 한 글자를 비켜 갔다.그 글자를 어젯밤 강진은 제 입으로 부르라 했다.덜컥 겁이 났다. 이 전각에 선 사람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소리였다. 무릎이 한 번 시큰거렸다. 여울은 숨을 고르며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윤척은 오늘 아무것도 아뢰지 않았다. 홀을 가슴에 붙인 채 끝까지 서 있기만 했다.“죄인을 데려가라.”담 모퉁이를 돌 때 도홍이 걸음을 늦췄다.“무릎은 괜찮으십니까.”“예.”도홍은 더 묻지 않았다. 남은 담 둘을 지나는 동안 여울의 걸음에 제 걸음을 맞추었다.—서별당 마루에
심지 앞에서 멈춘 손이 강진의 무릎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등잔불은 낮아지지 않았고, 담 밖은 순찰이 지나간 뒤라 고요했고, 그 밝은 방 한가운데서 여울은 얼굴을 둘 데가 없었다.밤에 이렇게 밝은 데서 마주 앉은 적은 없었다. 등잔 하나가 얼굴 반을 비추면 나머지 반은 늘 어둠이 가려 주었다.강진은 말이 없었다. 도포 자락에 묻어 온 찬 기운이 등잔불 곁에서 조금씩 풀렸다.밝은 불 아래서 보는 강진의 얼굴은 어좌에서보다 젊었다. 망건 아래 이마가 희었고, 다문 입술 끝에 하루치 피로가 걸려 있었다.그 침묵을 먼저 견디지 못한 것은 여울이었다.“……자리를 펴겠습니다, 전하.”“그 말은 밤에는 하지 마라.”일어서려던 여울이 멈췄다. 마루를 짚은 손이 그대로 굳었다.“……예?”“전하라는 말.”강진의 눈은 등잔에 있었다. 목소리가 낮아서, 불에 하는 말인지 여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정도였다.“그러면 무어라 여쭙니까.”“이름을 불러라.”여울은 처음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고 나서는 숨이 목에서 멎었다.임금의 이름은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글로 쓰는 것도 아니었다. 선왕의 이름도 여울은 봉서의 붉은 인장으로만 보았다. 살아 계신 동안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은 사람을 여울은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재회한 뒤로 여울은 강진의 입에서 제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너, 아니면 아무 부름도 없었다. 그런 강진이 자기 이름을 부르라 했다.“……못 합니다.”“왜.”“임금의 함자는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들으면 불경입니다.”“이 방에서 누가 듣느냐.”여울의 눈이 저도 모르게 뒷벽으로 갔다. 벽 너머에서 봉수와 단이가 자고 있었다.강진이 그 눈길을 따라 벽을 보았다가 돌아왔다.“들으면 내가 시킨 것이다.”여울은 대답하지 못했다.못 하는 까닭이 불경만은 아니었다. 그 이름을 한 번 부르고 나면 다음 밤에도 부르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분이 내리는 날까지, 어쩌면 그날에도.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손바닥에
창호가 다 희어지도록 쪽문은 열리지 않았다.도홍의 발소리도 오지 않았다. 올 사람이 여기서 자지 않았으니 올 까닭이 없었다.여울은 일어나 이부자리를 갰다. 이불 하나였다. 둘이 덮던 이불을 혼자 개니 가벼웠다.—낮에는 봉수가 일어섰다.허운이 나흘은 더 누우라 한 사람이 성한 손으로 문설주를 잡고 섰다. 무릎의 베가 당겨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울이 마루를 건너가 그 팔을 받쳤다.“누우십시오.”“마루까지만 나가겠습니다.”“허운 나리가.”“여울님 말만 듣는다고 하셨지요.”봉수가 웃었다. 웃고 나서 다시 앉았다. 여울이 받친 팔을 놓지 않아서였다.단이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가 그 둘을 보고 저도 웃었다. 세 사람 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저녁 죽이 식어 가고 마당에 그늘이 다 번졌을 때, 여울은 등잔 앞에 앉았다.심지를 돋우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붙였다.해시 순찰은 아직이었다. 오는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아직이었다. 여울은 불을 켜 놓고 그 앞에 앉았다.단이가 상을 내가다가 멈췄다.“……오라버니, 오늘은 켜셨네요.”“어두워서.”“어제도 어두웠는데요.”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이는 더 묻지 않고 나갔다. 나가면서 쪽문을 잠그지 않았다. 잠그지 말라는 분부를 단이도 알았다.뒷방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갔을 것이었다. 봉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쪽문 밖에 선 강진은 창호에 비친 불빛을 보았다.걸음이 멈췄다. 담 밖으로 해시 순찰이 멀어진 뒤였다.창호에 불이 비친 밤은 전에도 있었다. 바느질을 하던 밤, 죽을 먹던 밤. 할 일이 있는 불이었다. 지금은 할 일이 없는 시각이었다.요 며칠은 늘 어두운 방이었다. 들어가서 제가 켜던 등잔이었다.강진은 한참을 문밖에 서 있었다. 도홍이 뒤에서 기다리다가 물러갔다.문을 열었다.여울은 등잔 앞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려다 무릎 때문에 손으로 마루를 짚었고, 짚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불을 켜 두었군.”“……기름이 남아서요.”강진은 문을 닫고 들어왔다. 도포 자락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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