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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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문

"그래."도홍은 더 묻지 않고 따라붙었다.뜰에서 물을 나르던 궁녀가 길을 비켰다. 마루를 닦던 내관도 걸레를 내려놓고 엎드렸다. 왕이 서쪽 회랑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들던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회랑 바닥에는 창살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었다. 왕은 그 위를 빠르게 지나다가 안채가 보이는 모퉁이에서 걸음을 늦췄다. 바싹 따르던 도홍도 멈춰 섰다.선왕이 쓰던 안채는 문이 닫혀 있었다. 그 옆 곁방에서는 낮은 말소리가 났다.—단이가 젖은 수건을 개다 말고 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누가 오나 봐요."여울도 들었다. 봉수라면 회랑을 돌기 전에 헛기침부터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기척이 없었다. 앞선 발소리가 느려지자 뒤따르던 걸음도 멎었다."전하. 봉수 내관을 부르오리까."도홍의 목소리였다.여울의 손에서 수건이 떨어졌다. 단이가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동안 그는 무릎을 꿇었다. 삐걱대던 마루가 잠잠했다. 도총부에서 고쳐 준 판자 위에 손을 짚고 앉았는데도 몸이 자꾸 기우는 듯했다."단이야, 수건을 치워라."아이는 서둘러 수건을 거두고 이부자리를 살폈다. 이불은 이미 개어 놓았고 화로의 재도 비워 두었다. 여울은 소매를 내려 손등을 덮었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왕이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어젯밤까지는 문이 열려 누군가 처분을 전할까 두려웠다. 막상 왕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얼굴을 보고 싶었다. 엎드린 채로 맞으면 신발만 보게 될 텐데, 그렇다고 문 앞에 서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너는 밖에 나가 있거라.""정말 혼자 계셔도 돼요?"여울은 대답 대신 문 쪽으로 턱을 조금 움직였다. 단이가 나가 문을 닫고 나서야 마루에 이마를 댔다. 안채 쪽에서 다시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이번에는 곁방 앞에서 멎었다.—왕은 마루에 올라섰다. 문 옆의 어린 궁녀가 치마를 모으며 엎드렸고, 도홍은 그보다 뒤에 섰다.이 회랑 끝에서 여울을 놓아 보냈을 때 둘은 열여덟이었다. 왕은 등을 돌린 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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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고개

왕은 문턱 앞에서 신을 벗었다. 도홍이 받으려 손을 내밀었으나 이미 마루에 내려놓은 뒤였다. 곤룡포 자락을 걷어 안으로 들어가자 창에서 비스듬히 들던 빛이 가려졌다.여울은 문 안쪽에 엎드려 있었다. 흰 옷깃 위로 가는 목덜미가 드러났고, 풀린 검은 머리칼이 뺨을 가리고 마루에 닿아 있었다.왕의 발이 그 앞에서 멎었다."고개를 들어라."여울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붉은 옷자락 아래 흰 버선발이 보였다. 옥대를 지나 금실로 용을 놓은 가슴까지 눈을 들었으나 얼굴은 그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목을 젖히자 갈색 눈이 마주 닿았다.여울은 입술을 벌렸다. 인사를 올릴 참이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익선관 아래 짙은 눈썹도, 미간을 좁히는 버릇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만 어깨가 훨씬 넓어졌고 턱선은 낯설 만큼 굵었다. 왕이 이를 악물자 턱 옆에 힘줄이 불거졌다.잘못한 것도 없는데 꾸중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손을 모으게 됐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눈 아래 그늘이 깊었다. 여울은 잠을 못 주무셨느냐고 물을 뻔하다가 입을 다물었다.왕이 바로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눈을 피할 새도 없이 거리가 가까워졌다. 여울의 뺨이 달아올랐다. 왕의 눈길이 제 입가에 머물자 황급히 고개를 낮췄다. 안부 한마디 여쭙지 못한 채, 옥대에 박힌 옥만 내려다보았다.—살이 빠져 있었다.왕은 여울의 헐거운 옷깃과 소매 아래 드러난 손을 살폈다. 여울이 눈을 들자 나무라려던 말이 멎었다. 얼굴이 다시 숙여진 뒤에도 왕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헤어질 때의 앳된 기색이 남은 얼굴이었다. 검은 눈은 맑고 입술은 붉었다. 다만 기억 속 모습보다 눈매가 길어졌고, 여윈 뺨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선은 부드러웠다. 가까이서 살피는 동안 여울이 귀까지 붉혔다.왕은 그 귀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치워 주고 싶어 손을 들었다가 옷자락을 쥐었다. 옅은 향이 났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더 가까이 몸을 숙이게 됐다.여울의 어깨가 굳는 것을 보고서야 허리를 폈다."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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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벽

강진은 여울에게서 눈을 거두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여울도 고개를 숙였다. 무릎 아래가 저렸으나 자세를 고치지는 못했다.갠 이불이 벽에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화로와 물을 끓이는 솥, 엎어 말리는 그릇이 놓였다. 강진은 이불 앞에 멈춰 섰다. 접힌 단면으로 솜이 얇게 들어간 것이 보였다. 국상이라 물건을 거둔 것인지, 전부터 이대로였는지 알 수 없었다."계속 이 방에서 지냈느냐.""예, 전하."여울은 강진의 발을 따라 고개를 조금 돌렸다. 강진은 화로를 지나 안채 쪽 벽으로 갔다. 손바닥을 대자 덥히지 않은 벽이 차가웠다. 아버지는 빈전에 누워 있었고 이 너머 방은 비어 있었다."부왕께서 기침하시면 여기까지 들렸느냐.""예. 밤에는 더 잘 들렸습니다.""잠을 못 잘 만큼이었나.""제가 못 잘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 번 시작하시면 오래 하셔서……."여울이 화로 쪽을 흘끗했다."축시가 되면 물을 올렸습니다. 기침이 잦아들 때 바로 드릴 수 있도록."강진은 벽에서 손을 뗐다. 지붕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오늘도 기침을 안 하신다던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여울은 그 시각에 깨어 있었다.아버지의 오랜 기침은 강진도 알았다. 허운이 약을 바꿔도 낫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여울이 밤마다 물을 끓여 기다렸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들은 적 없었다."누가 그렇게 하라 시켰느냐.""시키신 분은 없습니다."여울은 무릎 위에 손을 포개었다."기침을 오래 하신 날에는 물도 잘 못 넘기셨습니다. 조금 식혀서 드리면 나았습니다."대답을 마치자 방이 조용해졌다. 강진은 여울을 향해 돌아섰으나 가까이 오지 않았다. 벽을 짚었던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여울은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여겼다. 강진에게 아버지가 이 방에 남겨 놓은 사람은 달가울 리 없었다. 선왕을 돌본 일을 제 입으로 길게 늘어놓을 까닭도 없었다."송구합니다."강진의 미간이 좁아졌다."무엇이."여울은 입을 다물었다. 강진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싫어하신다고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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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죽지 마라

"일어서라."여울은 마루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저린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하자 강진의 손이 팔꿈치 쪽으로 움직였다. 닿지는 않았다. 여울이 먼저 발을 고쳐 디뎠고, 강진도 손을 내렸다.서고 보니 더 가까웠다. 고개를 낮추면 눈앞에 곤룡포가 있었다. 여울은 소매 속에 손을 모으고 강진의 말을 기다렸다."사간원도 좌상도 네 처분을 정하지 못한다. 대비전에서도 마찬가지다."여울이 고개를 들었다."내가 명할 때까지 네 목숨은 내 것이다. 함부로 버리지 마라.""제 목숨을…… 버릴 생각은 없었습니다.""유서는 왜 썼느냐."여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처분이 내리면 그때는 못 쓸까 하여.""곽명이 가져간 글을 좌상이 읽었다. 도승지가 그 글을 받아 내게 가져왔고."서책도 아니고 누구 보라고 내놓은 글도 아니었다. 마지막 장에는 이름 하나 쓰고 말았다. 고쳐 쓸 대목도 그대로인데 강진이 읽었다니, 여울은 귀까지 화끈거렸다.강진은 붉어진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고향 이야기는 길게도 썼더군.""……예.""물목마을이며 낙수며. 여기서 지낸 일은 한 줄도 없고."여울은 소매 안에서 손가락을 오므렸다. 이 궁에서 쓰고 싶은 일을 떠올리면 자꾸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갔다. 지금 앞에 선 사람을 글에 적어 남길 수는 없었다."여기는 쓸 것이 없었습니다."강진의 입가가 굳었다. 여울은 고개를 숙였다. 유서에 쓴 말보다 방금 하지 않은 말이 더 드러난 기분이었다."다시 쓰지 마라. 처분이 내리기도 전에 죽을 채비부터 하지 말라는 말이다."여울은 작게 대답했다. 살아 있으라는 명을 들었으나 내보내겠다는 것인지, 이 방에 계속 두겠다는 것인지는 묻지 못했다.문밖에서 숟가락이 굴렀다.봉수가 소반을 마루에 놓고 엎드리려다 그 위의 숟가락을 건드린 것이었다. 내민 손이 강진을 보고 도로 접혔다. 숟가락은 마루 끝에 걸려 멈췄다."네가 봉수냐.""예, 전하.""이 사람 식사를 네가 맡는다지.""그러하옵니다."여울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봉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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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문

한겸이 받아 적다가 붓을 멈췄다."서별당은 병든 후궁을 두던 곳입니다. 오래 비어 있어 지붕부터 손을 봐야 합니다.""고쳐라. 거처를 마련해 옮긴 뒤 안채와 곁방을 함께 봉해라. 산릉을 마칠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고."이송할 곳을 적은 아래 처분에 관한 말은 없었다. 한겸은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대신들이 처분을 언제까지 미루실 것이냐 물을 것입니다.""처분은 내가 정한다. 재촉하는 자가 있으면 이름을 적어 와라.""좌상이 거듭 물을 것입니다.""좌상도 적어라."강진이 손을 내밀자 한겸은 적던 문서를 올렸다. 강진은 내용을 읽고 돌려주었다. 한겸이 물러난 뒤에도 영수전으로 다시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다.저녁상은 몇 숟가락 들지 않고 물렸다. 도홍이 이부자리를 펴고 물그릇을 놓는 동안 강진은 들창 아래 앉아 있었다.낮에 마주한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자 드러나던 검은 눈과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칼. 유서 이야기에 귀까지 붉히던 모습은 물을 마시려고 잔을 들어도 지워지지 않았다.열여덟의 얼굴을 기억하고 갔다. 그 얼굴로 여전히 저를 볼 줄 알았다. 그런데 여울은 가까워진 강진을 피해 고개를 내렸고, 강진은 돌아온 뒤에도 그 표정을 거듭 떠올렸다. 무슨 향인지조차 묻지 못한 것이 뒤늦게 성가셨다.그 방에서 아버지에게는 어떤 얼굴을 했을까.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이부자리를 고르던 도홍이 고개를 들었다."물러가 자라."도홍은 구겨진 이불 끝을 펴 놓고 나갔다. 강진은 누울 때가 지나도록 앉아 있다가 검은 도포를 걸쳤다.—해시 순찰이 서쪽 담을 지나간 뒤, 강진은 선정당 뒷문을 나섰다. 낮에 걸었던 회랑은 어두웠다. 안채 앞을 지나 곁방 마루에 이르러서야 발에 힘을 주어 기척을 냈다.벽에 기대 졸던 봉수가 눈을 떴다. 급히 일어나려다 무릎이 꺾여 마루에 엎드렸다."전하.""안에 누가 있느냐.""단이가 남아 있사옵니다. 아이가 혼자 자는 것을 무서워하여, 방 안에 따로 이불을…….""데리고 나가라. 오늘은 내시부에 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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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내 것

여울은 이불에 이마를 댄 채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다.발소리는 이부자리 바로 앞에서 멎었다. 눈앞에 드리운 자락은 검고 무늬가 없었다. 곤룡포도 옥대도 없이, 검은 비단 도포 하나에 검은 띠. 등잔불이 넓은 어깨에서 꺾여 벽에 긴 그림자를 세웠다."일어나라."여울은 마루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눈앞에 검은 띠가 보였다. 고개를 젖혀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으나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앉았다.강진이 그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도포 자락이 여울의 무릎에 닿았다. 여울은 뒤로 물러나려던 손을 금침에 짚은 채 멈췄다.검은 망건 아래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낮의 익선관은 없었고, 상투에서 빠져나온 갈색 머리칼이 관자놀이에 흘렀다. 강진은 가까이 앉아서도 아무 표정 없이 여울을 마주했다."선왕의 것이었으니."아버지라 하지 않았다. 여울이 입술을 달싹이자 강진의 입가가 비뚤어졌다. 여울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고 그 얼굴을 마주했다."이제 내 것이다."강진은 말을 마친 뒤에도 자리를 좁혔다. 여울의 무릎 옆으로 검은 옷자락이 더 깊이 접혔다."선왕을 모시던 그 몸으로, 이제 내게도 총애를 빌어 보아라."여울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봉수는 나가고 없었다. 문살 사이로 마루의 어둠이 비쳤다."……전하."강진은 여울이 돌린 고개를 따라 눈길을 주었다가 입가의 웃음을 거뒀다. 문밖을 향해 벌어졌던 여울의 입이 닫혔다.옷깃 아래로 손이 스쳤을 때 여울은 숨을 멈췄다. 반년 전 안감에 꿰맨 봉서가 거기 있었다. 저고리가 금침 옆으로 밀려날 때까지, 여울은 종이가 드러날까 봐 옷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강진의 시선은 여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안감은 펼쳐지지 않았다.여울은 저고리 쪽으로 뻗으려던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낮에 확인한 실밥은 그대로였다. 지금 옷을 끌어당겼다가 안감에 강진의 눈길이 가는 것이 더 두려웠다.강진이 몸을 기울여 이불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 마루가 작게 울렸다. 여울이 움츠린 무릎 옆으로 이불이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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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봐라

숨을 멈춘 채로 왔다."하—……아!"낼 생각 없던 소리가 찢겨 나왔다. 젖지도 벌어지지도 않은 입구를 귀두가 밀고 들어왔고, 찢기는 통증이 등뼈까지 올라왔다. 무릎이 밀렸고 등이 벽에 부딪혔다.강진이 멎었다. 반도 들어가지 않은 데서 안이 그를 물고 놓지 않았다. 열린 적 없는 것처럼 좁았고, 귀두를 타고 미지근한 것이 흘렀다. 피였다.강진의 눈이 허벅지 안쪽으로 가늘게 내려가는 붉은 줄을 따라갔다가, 소리도 못 내고 입만 벌린 얼굴로 올라왔다. 여덟 해 동안 다른 사내 밑에 두고 그려 온 얼굴이었다. 손이 여울의 턱을 잡았다. 힘이 들어가 여울의 입이 더 벌어졌다.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이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 묻고 싶은 것이 목까지 올라왔고, 강진은 그것을 삼키는 대신 허리를 눌러 끝까지 박아 넣었다.지금은 아프다는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여울의 벌어진 입에서 소리가 아니라 숨이 다 빠져나갔다. 강진의 허리에는 박자가 없었다. 검을 쥘 때처럼 정확하지 않아서 더 거칠었다.귓불 밑에서 강진의 숨이 거칠어지고, 여울의 입에서 하, 하, 짧게 끊어지던 것이 어느 순간 응, 하고 길게 이어졌다.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강진이 그 손을 떼어 냈다. 다시 막자 이번엔 두 손목을 한 손에 모아 쥐고 머리 위로 눌러 버렸다. 막을 것이 없어진 입에서 소리가 그대로 나왔다."……그만, 흐, 잠깐만……."강진은 멈추지 않았다. 젖은 갈색 머리칼이 여울의 뺨에 들러붙었다.밀어내던 것이 아니었다. 강진이 물러날 때 따라가고 강진이 올 때 마중하듯 허리가 들렸고, 벌어진 무릎이 저도 모르게 강진의 옆구리를 조였다. 안이 저 혼자 강진의 것을 물었다 놓았다. 뭐야, 이게. 아픈 것 말고 다른 게 올라왔다. 아랫배에서 고였다가 등뼈로 번지는 낯선 열이었다. 여울의 앞도 어느새 서서 두 사람 배 사이에 눌려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아, 하아……응, 흐……."아파서 새던 소리가 아니라 밑에서 녹아서 올라오는 소리였고, 여울은 그것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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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자국

강진은 여울의 숨이 고르게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아직 안에 든 채였다. 여울의 안이 잠결에도 한 번씩 조여들었고, 강진은 그때마다 목덜미에 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선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수전에 가지 않았다. 서연을 마치면 정무를 익혔고, 밤에는 현과 검을 맞댔다. 여울의 소식이 나오면 말을 끊었다. 웃음이 줄고 꾸짖는 소리는 더 낮아졌다. 한겸은 세자의 서책을 늘렸다.잠결에 여울을 부른 뒤에는 날이 밝도록 다시 눕지 못했다. 술을 퍼마시다 그 이름을 부른 채 잠든 일도 두어 번 있었다. 그 모습을 아는 사람은 현과 도홍뿐이었다. 아침이면 세자는 옷을 갖춰 입고 전날 읽다 만 책을 펼쳤다.이제 여울이 바로 밑에 누워 있었다.들어가던 순간의 것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열린 적 없는 몸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머리가 하얘져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도 다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와서 헤아리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남총으로 여덟 해를 둔 사람을 아버지가 손대지 않았을 리가. 그런데 '저하'라 부르다 그친 목소리와, 낮에는 안부 한마디 못 하더니 밤에는 처분을 정했느냐고 묻던 얼굴이 그 몸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선왕 곁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강진이 직접 들은 것은 기침과 물 시중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면 그 방에서 여덟 해 동안 무엇을 했나.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은 아닌가. 묻고 싶은 것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잠든 사람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강진이 몸을 빼자 잠든 여울이 미간을 찌푸리며 흐, 하고 울었다. 잠이 덜 가신 눈이 반쯤 떠져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강진을 올려다보다가 도로 감겼다. 강진은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턱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눈매가 가늘어지고 입가에서 짧은 웃음이 샜다."여울아."이름을 부르고도 강진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울은 다시 잠들어 대답하지 않았다.—등잔불이 잦아들 무렵 강진은 여울 옆에 비스듬히 누워 팔꿈치로 상반신을 괴었다. 검은 머리칼이 이마를 덮고, 베개에 닿은 뺨 아래가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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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회랑

이불이 움직이자 여울이 눈을 떴다. 봉수가 물러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다 멈췄다. 허리와 어깨가 함께 아팠다. 팔꿈치를 짚고 일어나려던 손을 도로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머리맡에 저고리가 개어져 있었다. 잠들기 전에는 이불 옆에 밀려나 있던 옷이었다. 여울은 손이 닿는 데까지 천을 당겼다. 안감에 꿰맨 봉서가 손끝에 잡히자 그제야 옷을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종이는 그대로였다. 실밥도 끊어지지 않았다.죽거나 궁 밖으로 쫓겨날 줄 알고 유서까지 썼는데, 눈을 뜬 곳은 여전히 이 곁방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일부터 막막했다. 여울은 이불에 얼굴을 묻고 짧게 웃었다가 부은 입술이 아파 그만두었다.회랑에서 등을 돌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부터 저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이 쌓였다. 남총으로 들어간 사정을 해명할 수 없었고, 그대로 미움을 샀다. 여울은 어젯밤의 일을 그 원망과 떼어 놓고 받아들이지 못했다.문이 열렸다. 봉수가 소반을 들고 들어오자 여울은 이불을 당겨 덮었다. 죽 그릇 옆에 흰밥이 담긴 그릇이 있었다."어른, 밥도 가져오셨습니까.""드시라고 하셨습니다.""제가 밥을 못 넘기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압니다. 그래서 죽도 가져왔습니다."봉수는 소반을 내려놓고 여울의 등을 받쳤다. 앉은 뒤에도 여울이 허리를 펴지 못하자, 베개를 벽에 세워 기대게 했다. 저고리를 건네는 손이 목의 자국 앞에서 잠깐 멎었다.여울은 그 손을 기다리다 옷을 받아 입었다. 목을 덮으려 옷깃을 올렸으나 헐거운 깃이 도로 벌어졌다."어른."봉수가 숟가락을 들었다."저 살았습니다."숟가락 끝이 그릇에 부딪혔다. 봉수는 죽을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예. 그러니 드셔야지요."여울은 내민 숟가락을 받아 죽을 떴다. 봉수는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죽을 조금 넘기고서야 여울이 소반 너머로 입을 열었다."오늘도 여기 있으면 됩니까.""서별당으로 옮깁니다. 해가 있을 때 회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여울이 옷깃을 여몄다. 손끝에 봉서를 꿰맨 안감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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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마루 밑

봉수가 빗장을 들어 서별당 문을 열었다.담 셋을 지나오는 동안 궁인들의 말소리가 멀어졌다. 여기서는 문이 열리는 소리도 크게 났다. 마당에는 풀이 무릎까지 자랐고 지붕에는 새 기와가 섞여 있었다.여울은 마루에 올라 보자기를 놓았다. 먼저 옮겨 둔 이불과 화로가 그 옆에 있었다. 들어 올린 들창 너머로 자운산 자락이 보였고, 마루 끝에는 봉수가 쓸 작은 뒷방이 붙어 있었다.봉수가 방바닥의 먼지를 쓸며 말했다."볕이 드니 저기보다는 낫겠습니다."여울은 들창 아래 앉았다. 안채와 맞닿던 벽 대신 들창이 있었다. 바깥을 내다보자 단이가 치마를 걷고 풀을 잡아당기는 중이었다."단이야. 너도 여기에 있을 것이냐.""그럼요. 저만 두고 오시려고 했어요?"봉수가 빗자루를 세우고 문턱에서 덧붙였다."내시부에도 함께 간다 일렀습니다. 이 아이가 먼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단이는 대답 대신 풀을 더 세게 당겼다. 잎만 뜯겨 손에 남자 멋쩍게 뿌리 쪽을 다시 잡았다.여울이 마루 아래로 발을 내렸다. 일어나려는데 허리가 당겼다. 단이가 얼른 다가왔다."거기 앉아 계셔요. 제가 뽑으면 이쪽으로 모아 주세요."여울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단이가 건넨 풀에서 흙을 털었다. 봉수도 내려와 뿌리째 뽑은 풀을 옆에 쌓았다. 통로가 조금씩 드러났으나 마당 안쪽은 여전히 무성했다.봉수가 물을 뜨러 쪽문으로 나가자 단이가 목소리를 낮췄다."오라버니, 그렇게 살살 털어서 언제 다 해요. 풀도 아플까 봐 그러셔요?"여울이 손에 든 풀을 내려다보았다. 흙을 턴 자리에 가는 뿌리가 수북했다."버릴 것을 너무 곱게 다뤘구나.""그러니까요. 제 손보다 더 곱게 잡으시면서."여울이 웃음을 흘렸다. 단이는 모은 풀을 한 아름 안고 일어나 담 쪽으로 가져갔다. 여울도 손톱 밑의 흙을 털고 다음 풀더미를 제 앞으로 당겼다.—봉수가 가져온 저녁 죽은 담을 지나오는 동안 식어 있었다. 여울이 먹는 사이 단이는 제 이불을 안아 들었다. 오늘부터 봉수의 뒷방에서 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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